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5. 마 촌 작 전 >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5. 마 촌 작 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17 05:53 댓글0건

본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5. 마 촌 작 전

  

   


  

5. 마 촌 작 전  

 

 그해 가을 유격구에서는 열병이 돌았다. 오한과 고열이 겹치면서 피부에 불긋불긋한 반점이 생기는 이 급성전염병은 굉장한 전파력을 가지고 소왕청골안을 휩쓸었다. 나도 이 병에 걸려 십리평에서 옴짝 못하고 앓았다. 후에 알게 된데 의하면 발진티브스였다.

 

 

지금의 새 세대들은 발진티브스를 모르고 산다. 벌써 오래전에 전염병을 근절한 무균지대에서 생활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60년전까지만 하여도 유격근거지 인민들은 전염병때문에 모진 고통을 겪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골짜기에 수천명 주민이 오골오골 모여서 살다나니 병도 오만가지가 다 돌았다. 사흘이 멀다하게 《토벌대》가 달려들어 불질을 하고 이산저산 쫓아다니며 도륙질을 하는 때여서 위생조건이 불비해도 개선할 도리가 없었고 병을 예방하고싶어도 적합한 대책을 세울수 없었다. 전염병 같은것이 발생하면 삽짝문앞에 새끼줄을 치거나 바람벽에 《출입금지, 전염병》이라고 쓴 광고딱지를 붙여놓는것이 고작이였다.

 

 

적들이 수천명이나 쓸어들어 근거지를 없애보겠다고 날마다 사생결단의 싸움을 걸어오는 때에 전염병까지 겹치였으니 우리로서는 최악의 시련을 겪는셈이였다. 나까지 덜컥 열병에 걸리게 되자 지도부의 간부들은 다같이 사색이 되여 유격구의 운명을 두고 걱정하였다.

 

 

그들은 나의 호위 겸 간호를 위하여 김택근소대장과 그의 부인을 보내주고 1개 소대가량의 병력까지 붙여주었다. 다른 부대들이 다 전투하러 나갈 때에도 그 대원들만은 남아서 십리평을 지키였다. 김택근부부는 둘다 북만 액하라는 곳에서 살다가 동만땅에 와서 혁명투쟁에 참가해보겠다는 충동을 가지고 목릉을 거쳐 왕청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였다.

 

 

이 부부외에 또 최금숙이라고 부르는 왕청현 부위가 당적으로 나의 간호를 책임지고 십리평에 와있었다.

 

 

처음에 나는 춘자라는 녀자의 집 웃방에서 병치료를 하였다. 그 녀자의 남편 김권일은 구당서기로도 사업하고 후에는 현당서기로도 활동하였다.

 

 

적들이 유격구에 달려들기만 하면 김택근은 나를 업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피해다니군 하였다.

 

 

《토벌》이 심해지자 그들은 나를 업고 물곬을 따라 십리평골안에 깊숙이 들어가 적의 발길이 닿지 못할 어떤 바위츠렁밑에 막을 치고 바줄을 타고 오르내릴수 있는 자그마한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나는 여기서 세사람의 도움으로 병을 완치하였다.

 

 

그 세사람은 나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잊지 못할 생명의 은인들이였다. 그들의 지성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십리평골짜기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수도 있을것이다. 병이 어찌나 심했던지 나는 그때 여러번 정신을 잃기까지 하였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질 때마다 그들은 제발 정신을 차려주십시오, 이렇게 앓아누우면 우리는 어떻게 하랍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고 한다.

 

 

 

김택근이 식량공작을 나가고 없는 날이면 최금숙이 나를 부축해가지고 다니면서 숨을 곳을 찾아 헤매였다. 내가 이 녀자의 덕으로 살아났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원래 왕청에 온 초기부터 최금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남북만원정을 끝내고 마촌에 왔을 때 그는 대왕청에서 제2구 부위로 공작하고있었다. 그 당시의 현부녀회사업은 리신근이 맡아하였다. 최금숙이 사업토의를 하러 리신근을 찾아올 때마다 나는 리치백로인의 집에서 종종 그를 만나군 하였다. 그들은 서로 자매간처럼 가깝게 지냈다.

 

 

리신근은 최금숙이 글을 빨리 쓴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무심히 들었다. 녀자가 글을 쓰면 얼마나 빨리 쓰랴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가 정리한 회의록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회의에서 한 발언내용들이 하나도 생략되지 않고 빠짐없이 기록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현대속기수들이 글을 빨리 쓴다고 하지만 그와 비교할만 한 속기수를 나는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최금숙은 우리가 토론한것들을 하루밤사이에 다 정리해내군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회의를 할 때마다 그에게 기록을 위임하군 하였다.

 

 

최금숙은 남성들처럼 성미가 서글서글하고 인자하면서도 대가 있고 혁명적원칙성이 강하였다. 내 말이라면 모래불에서 배를 끌라고 해도 끌 그런 녀자였다. 내가 그에게 공작임무를 주어 적통치구역에도 여러번 파견하였는데 적구에 가서도 일을 아주 능란하게 하였다.

 

 

최금숙은 부모가 없는 나를 녀성으로서 무척 동정하였다. 그가 나를 친동생과 같이 사랑해주었기때문에 나도 그를 보면 누이라고 불렀다.

 

 

내가 싸움터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이 녀자가 제일먼저 나를 찾아왔고 요긴하게 쓸수 있는 물건들을 한가지씩 준비했다가 살그머니 쥐여주군 하였다. 어떤 때에는 옷도 기워주고 털실로 내의도 떠주었다.

 

 

최금숙이 리수구골안에 오래동안 나타나지 않을 때는 내가 그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남매간처럼 가깝게 지내다나니 만나기만 하면 서로 롱도 자주 하였다. 함경도지방사람들이 대체로 다 그런것처럼 그도 동네집 늙은이들을 만나면 《아배》나 《아매》라고 불렀다. 《온성집아배》니, 《무산집아매》니, 《회령집아재》니 하는 식의 말은 어휘도 별스러웠지만 억양부터가 재미나게 들리였다. 내가 자기의 말투를 흉내내거나 좀 지나친 롱을 하여도 그 녀자는 성을 내지 않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범한 최금숙이도 한가지 롱만은 잘 받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를 가리켜 미인이라고 하는것이였다.

 

 

내가 자기를 보고 미인이라고 하면 그는 놀려준다고 야단이였다. 나는 최금숙이 내 잔등에 주먹질을 해대며 야단을 하는것이 오히려 재미가 나서 그가 어색해하는것을 알면서도 그냥 미인이라고 롱을 하였다. 사실 그는 뛰여난 미녀는 아니였지만 아주 복성스럽게 생긴 녀자였다. 나의 눈에는 도회지의 아가씨나 숙녀들보다도 최금숙과 같은 유격구의 녀자들이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와보이였다. 나는 이 세상에 유격구의 녀성들처럼 아름다운 녀성들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얼굴에 화장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매연속에서 고생고생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원망하거나 타발하지 않고 오직 혁명에만 전심전력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최상의 미를 찾았다. 내가 최금숙을 가리켜 미인이라고 한것은 이런 심리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 근거지의 녀성들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 로획한 전리품들속에는 종종 분이나 크림과 같은 화장품들이 섞여있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 우리 대원들은 그런 화장품들이 보이기만 하면 일본계집년들의 상판대기를 곱게 해주는 물건딱지들이라고 하면서 개울속에 집어던지든가 발로 막 짓뭉개놓군 하였다. 얼마동안은 나도 향내나는 고급전리품이 그렇게 처분되는것을 방임해두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들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우리 유격구의 녀성들은 그 당시 화장을 하지 않았다. 분내나 향수내를 피우며 돌아다니는것을 죄라고 보는것이 그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간혹 명절 같은 때 어쩌다가 화장을 하는 녀자들도 있었지만 정작 대중집합장소에 나타나면 뒤구석에 서서 줄곧 남의 눈치를 살피였다.

 

 

나는 이것을 분하게 여기였다. 그들이 일년내내 분도 바르지 못하고 검댕이나 재가루가 묻은 얼굴로 포연내를 맡으며 고생스레 살아가는것이 가슴아프게 생각되였다. 그래서 대원들에게 말하였다.

 

 

《이제부터 누구든지 화장품을 버리지 말자. 우리의 곁에도 녀성들이 있지 않는가. 유격구의 녀성들은 녀성이 아니라던가. 우리의 녀대원들과 부녀회원들보다 더 훌륭한 녀자들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내 말에 호응하였다.

 

 

《옳습니다. 우리 유격구의 녀자들보다 더 좋은 녀자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은 벌써 1년반째나 이 유격구에서 초근목피로 끼니를 에우고 〈토벌〉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애인들을 잃고 엄동설한에 홑옷을 입고 한지에서 떨면서도 적구로 내려가지 않고 유격대와 운명을 같이하고있습니다. 조선의 남아들로서 그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연지, 곤지를 찍어 세상에 보란듯이 내세우지 못하는것이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 우리가 못 입고 못 먹더라도 좋은것이 생기면 그들에게 다 보내줍시다. 화장품이 생기면 분도 바르라고 합시다.》

 

 

우리는 어느 날 부녀회원들에게 줄 화장품을 로획해가지고 최금숙을 찾아갔다. 최금숙은 그 화장품보따리를 보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날부터 소왕청유격구에서는 분내가 돌기 시작했다. 명절날 아동유희대의 공연이 진행되는 구락부에 갔더니 거기서도 분내와 크림내가 났다.

 

 

그런데 최금숙이만은 웬일인지 며칠이 지나가도 화장을 하지 않고 다니였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왜 화장을 하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는 대답대신 나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기만 하였는데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것 같았다. 리신근을 통해 그 곡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더니 최금숙이 자기 몫으로 남겨놓았던 화장품을 십리평의 부녀회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것이였다.

 

 

그후 우리는 적의 후방을 치고 다시금 많은 량의 화장품을 로획하였다. 나는 그중 일부를 최금숙에게 주면서 이번만은 자기 몫을 양보하지 말고 화장을 꼭 해보라고, 화장한 금숙누이의 모습을 보는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최금숙은 목숨을 걸고 구해온 화장품인데 대장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화장을 하겠노라고 하였다.

 

 

며칠후 나는 최춘국중대의 사업을 지도하려고 십리평으로 가다가 대왕청하기슭에서 최금숙을 만났다. 인적기가 없는 강가에서 행길쪽으로 등을 돌려대고앉아 물속을 들여다보는 그의 청초한 모습이 보이자 나는 리성림전령병을 시켜 대왕청부녀회장이 왜 물가에 앉아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리성림이 최금숙의 곁에 다가가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멀리서 바라보이였다. 무슨 일때문인지 어린 전령병은 갑자기 배를 그러쥐고 까르르 웃어댔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의 곁으로 바삐 걸어갔다.

 

 

《대장동지, 저 금숙누이의 얼굴을 좀 보십시오.》

 

 

내가 물가에 나타나기 바쁘게 리성림은 웃음을 그치고 최금숙의 얼굴을 손짓해보이였다.

 

 

그 순간 나도 부지중 웃음을 짓지 않을수 없었다. 그 복성스럽고 해맑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부녀회장의 얼굴은 온통 연지와 크림으로 얼럭덜럭 매닥질이 되여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최금숙자신은 영문을 모르고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부녀회장아지미, 얼굴이 만국지도가 됐어요.》

 

 

리성림이 이런 말을 해서야 최금숙은 《에그머니!》 하고 시내가에 펄썩 주저앉아 얼굴에 와락와락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화장을 서투르게 한것이 죄가 될수 없고 수치로 될수 없건만 그는 큰 창피라도 당한 사람처럼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물가의 빨래돌앞에는 며칠전에 내가 보내준 크림과 연지통이 놓여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최금숙의 화장솜씨가 대단히 서툴었던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어찌 놀림가마리로 삼을수 있겠는가. 최금숙은 화장을 처음해보는 녀자였다. 그에게는 거울조차 없었다. 그래서 시내물에 얼굴을 비쳐보며 조심조심 크림도 바르고 연지도 찍었다. 그가 얼굴에 만국지도를 그린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고 우습강스러운 일도 아니였다.

 

 

리성림이 아까처럼 또 최금숙의 곁에 다가가서 시까스르려는 눈치를 보이자 나는 손을 가로 저어 그를 제지시키였다. 아마 그때 리성림이 몇마디만 더 했더라면 최금숙은 그 시내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버렸을것이다.

 

 

아침마다 화려한 체경이나삼면경대앞에서 고급화장품으로 얼굴을 다듬는 녀성들이 이 대목을 읽게 되면 누구나 최금숙을 동정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처녀들이 시집을 갈 때 지참품으로 삼면경대를 가지고가는것이 하나의 풍조로 되고있다고 한다. 이것은 생활을 보다 유족하고 문명하게 꾸려나가려는 우리 녀성들의 욕구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물질적증거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땅에 배를 붙이고 풀죽을 먹으며 근거지를 지키느라고 악전고투할 때만 하여도 소왕청주민들속에는 삼면경대는커녕 손거울을 가진 녀자조차 몇명 없었다. 그래서 화장을 하고싶으면 모두 최금숙이처럼 강가로 나갔다.

 

 

나는 그날 최금숙의 화장솜씨를 흉보던 리성림을 나무란것이 아니라 유격구의 녀자들에게 거울을 마련해주지 못한 내자신에게 화를 내였다.

 

 

우리가 녀성들을 위해 바치는 정성은 그들이 우리에게 기울이는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나 인민이 우리를 섬겨주고 받들어주는 그 무한대한 은정을 릉가할수 없었다.

 

 

최금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 준 믿음보다 몇배나 큰 사랑과 정성으로 시종일관 나를 따뜻이 간호해주었다. 나의 병이 호전되였을 때 그가 제일먼저 뛰여간 곳이 100리나 떨어져있는 도문이였다. 도문은 조선에서 넘어오는 여러가지 물산의 집산지였다.

 

 

최금숙은 거기서 조선배와 조선사과를 한보따리 사가지고 십리평으로 돌아왔다.

 

 

그 배와 사과를 보니 눈물이 났다. 멀리 저세상에 계시는 어머니가 최금숙으로 소생하여 나에게 이런 사랑을 부어주는것이 아닌가 하는 환각도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어머니나 친누이만이 베풀수 있는 사랑이였다.

 

 

《금숙누이, 누이의 이 신세를 어떻게 하면 다 갚을가!》

 

 

나는 최금숙이 쥐여주는 조국의 과일향기를 가슴뭉클하게 들여마시며 감사의 정에 넘쳐 말했다.

 

 

《신세? 정 신세를 갚을 생각이라면 독립된 다음 평양구경이나 한번 시켜주우다. 평양이 천하제일강산이라는데…》

 

 

최금숙의 대답은 롱담 절반, 진담 절반이면서도 사뭇 절절하였다.

 

 

《그건 념려마시오. 아무렴 그런 소원이야 못 풀어주겠나요. 누이, 조국이 해방된 다음 평양땅을 밟아보기 위해서도 다같이 죽지 말고 싸웁시다!》

 

 

《나는 죽지 않는다우. 그런데 난 동생이 항상 걱정이라니까. 도무지 몸을 돌보지 않으니…》

 

 

최금숙은 내 입맛을 돋구느라고 절구에 찧은 깨를 얻어다가 찬에도 넣어주고 죽에도 넣어주었다. 그는 내가 중병에 걸리게 된것도 영양부족때문이라고 하면서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해주지 못해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정성은 지극하였으나 모든것이 귀하고 바른 때였다.

 

 

김택근이 개천에 나가서 버들치를 잡아다가 썩장에 넣고 끓여도 주고 구워도 주었다. 그는 하루에 70~80마리씩의 고기를 잡군 하였는데 열성도 열성이거니와 솜씨 또한 여간 아니였다.

 

 

최금숙은 내 밥상에 끼마다 버들치밖에 놓아주지 못하는것을 송구스럽게 여기던 나머지 마을에 가서 국수를 받아왔다. 그는 나의 안부를 묻는 유격대원들에게 대장의 몸을 빨리 추세워야겠는데 대접할것이 없어 야단이다, 택근소대장이 잡아오는 버들치만으로 매일같이 밥상을 차리자니 딱해서 못 견디겠다, 그런데도 대장은 맛있다고만 하더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부대의 고기잡이명수들이 하루는 후리질을 하여 한가마니나 되는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우리의 거처로 찾아왔다. 최금숙은 그 물고기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공하여 식사때마다 내 밥상에 놓아주군 하였다.

 

 

병에 차도가 좀 보이자 최금숙은 내가 정신을 잃고 앓을 때 어떤 알지 못할 녀자의 이름을 줄창 부르더라고 하면서 우스개삼아 그 입내까지 내였다. 그 입내의 내용이라는것은 그가 김택근의 안해와 함께 사전에 꾸며낸것이였다. 아주 엉터리없는 내용이였지만 나는 발병후 처음으로 그들과 함께 손벽을 치며 웃어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눈물겨운 연극이였다. 나는 그들이 오래동안 병상에 매인 나를 즐겁게 해주고싶어 그런 연극을 꾸민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최금숙은 내가 병이 완치되기 전에 마촌으로 돌아갈것 같아서 날자까지 속여가며 나를 간호해주었다. 나는 실신상태에서 깨여날 때마다 며칠동안이나 의식을 잃고있었는가고 묻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 녀자는 날자를 줄여서 대답하군 하였다. 가령 내가 이틀동안 의식을 잃고있었으면 2시간이라고 대답하였고 닷새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으면 5시간밖에 안된다는 식으로 얼렁뚱땅해 넘기였다. 병이 완쾌된 다음 그가 말한대로 앓은 날자를 합쳐보니 열흘도 되나마나하였다.

 

 

나는 열흘이라는 말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가 대포를 불었다는것은 최춘국이 나의 초막으로 문병을 왔을 때에야 들장이 났다. 이 고지식한 정치지도원은 거짓말이라는것을 통 몰랐다. 그는 내가 앓은것이 한달동안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한달이라는 말을 듣고 최금숙은 눈치가 곰발바닥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애꿎은 최춘국을 나무랐지만 나는 정신을 펄쩍 차리고 마촌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지휘부에서는 산더미같이 쌓인 정보자료들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그 정보자료들에는 간도치안을 위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움직임이 다각적으로 반영되여있었다.

 

 

내가 앓고있는 한달사이에 적들은 동기《토벌》준비를 완료하였다. 일본내각에서 파견된 고위관리들이 간도땅에 기여들어 군대, 헌병, 경찰, 외사부문의 수뇌들과 함께 동만유격근거지들에 대한 동기《토벌》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도꾜에서는 이 문제가 내각회의에서까지 론의되였다.

 

 

일제가 만주문제를 놓고 벌린 회의들에서는 《만주의 치안은 간도로부터!》라는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들은 간도의 치안이 만주국건설의 대업에 지대한 관계를 가질뿐아니라 일본제국변경의 안녕에도 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으므로 만주국을 위하여서나 일본자체를 위하여서도 최대의 긴급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쏘련에 대한 침공을 제일사명으로 하는 관동군사령관자신이 만주의 경무기관을 통제하고 군대를 통제하게 되여있는 헌병장이 간도치안의 제1선에 서게 한것은 대만주국의 전도를 위하여 축복할만 한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국을 조작해낸 후 이 일대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각방으로 주요한 대책을 세웠다. 간도림시파견대를 대신하여 관동군사단을 새로운 《토벌》력량으로 들이밀었으며 현을 단위로 무장한 행정경찰대를 편성하고 고등사법경찰과 산업경찰을 설치하는 등 경찰조직을 립체화하고 경찰기관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반항분자의 근절소탕과 민심의 안정책을 도모하기 위한 일만합동자문기관으로서의 치안유지회가 중앙은 물론, 성과 현을 단위로 하여 만주전역에 조직되여 활동을 개시하였고 형형색색의 간첩주구단체들이 출현하여 공산주의진영에 검은 촉수를 뻗치였다. 옛날 중국에서 이미 실시되였고 일본이 대만과 관동주의 치안유지에서 좋은 실적을 올려온 보갑제도의 도입으로 일만경찰은 백성의 손발을 더욱 철저히 얽어매놓았다. 재향군인들로 이루어진 일본인무장이민의 대대적인 류입과 자위단력량의 확대도 동3성일대에 뿌리깊이 존재하고있는 반만항일세력을 제압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일제는 토비공작에 종사하는 현지의 고등경찰관들에게 즉석에서 상대를 처형할수 있는 《림진격살》의 권리를 주었다.

 

 

이 모든 조치들은 일제가 식민지 만주국의 지배와 유지를 위해 얼마나 고심참담한 노력을 해왔는가를 실증해준다. 특히 동북일각에서 제국의 면상과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갈기는 간도지방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투쟁과 그를 골격으로 하는 광폭적인 민족해방운동은 그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골치아픈 일로 되였다. 일본의 어느 헌병장이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진압하는데 따라 간도치안의 9할이 성공된다고 한것은 결코 허공에 뜬 엄살이 아니다.

 

 

이른바 대일본제국은 항일유격대와 그 전략적지탱점인 유격근거지들을 이처럼 무서워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어떤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동만의 항일유격구들을 지상에서 쓸어버리려고 발악하였다.

 

 

1933년 여름에 일본군부는 항일유격대의 공격에 만신창이 된 간도림시파견대의 일부를 조선으로 소환해가고 그 대신 히도미부대를 비롯한 수많은 관동군의 정예부대들을 동만각지에 투입하였다.

 

 

조선강점군의 기본력량은 유격구 《토벌》작전에 즉시적으로 응할수 있는 우리 나라 북부국경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였다. 도합 만수천명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이 간도의 유격구들을 포위하고 동기《토벌》행진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조선혁명의 참모부가 자리잡고있는 소왕청유격구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고 이 일대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 자위단으로 구성된 5,000여명의 무력을 들이밀었다. 방진대렬을 짓고 적과 승부를 겨루던 마누팍뚜라시기의 전쟁을 제외한다면 산병선이 출현한 이후부터의 전쟁에서 병력을 이런 정도로 조밀하게 배치한 실례는 로일전쟁당시의 려순공방전밖에 없을것이다.

 

 

비행대들도 출동준비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였다. 간도특무기관이 주관하는 특별수사반도 유격구일대에 파견되였다.

 

 

그리하여 동만의 모든 지역은 우리와 일본제국주의와의 가장 격렬한 혈전장으로 되였다. 몇개 지역의 유격구를 보위하는 방위전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대결전이였다.

 

 

그런데 소왕청에는 2개 중대의 유격대력량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격구에는 식량의 예비가 얼마 없었다.

 

 

동만의 유격근거지들은 그 존망을 가늠하기 어려운 위기에 놓여있었다. 대포와 비행기로 무장한 강적을 2개 중대의 력량으로 격파할수 있다고 믿는 락천가는 유격구에 단 한명도 없었다. 우리앞에는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죽느냐, 아니면 유격구를 포기하고 적에게 굴복하느냐 하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우리는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흰기를 들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유격전술상의 원칙을 놓고보면 이런 대결전은 사실 하지 않는것이 상책이였다. 그런데 대결전을 하지 않으면 적들이 일격에 두만강연안의 모든 유격구들을 삼켜버릴수 있었다. 우리가 유격구를 지켜내지 못하면 인민혁명정부의 혜택속에서 참다운 평등과 자유를 누리던 혁명군중이 엄동설한에 굶어죽고 얼어죽고 총에 맞아죽을수 있었다. 유격구를 잃는다면 인민이 다시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을것이였다.

 

 

왕청도 가을이면 절경이다. 그런데 이 가을은 동기《토벌》의 폭풍에 뒤죽박죽이 될 운명을 지니게 되였다.

 

 

온 유격구가 숨을 죽이고 우리를 쳐다보고있었다. 군대의 표정이 어떤가에 따라 인민들의 얼굴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였다.

 

 

나는 묘술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궁리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전술문제를 론의할만 한 인물들이 하나도 없었다. 황포군관학교출신인 박훈도 가까이에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6일(목)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9일(목) ​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2일(일)
[동영상] [혁명활동소식]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5차전원회의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0일(금)
인민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새겨준 의의깊은 회의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
최근게시물
[사설]도전과 시련이 겹쌓일수록 천백배로 강해지는 주체조선의 불가항력을 힘있게 과시하자
명당자리에 깃든 위대한사랑
외무성 국제기구국장 우리를 부당하게 걸고든 G7수뇌자회의를 규탄
모략재단조작놀음에 숨겨진 흉심을 발가본다
경애하는총비서동지의고귀한 가르치심 일군들은 혁명적군중관을 가져야 한다
군사적지원에 탕진되는 미국민들의 혈세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7월 2일, 7월 1일)
천추만대를 두고 결산해야 할 미제의 살륙만행(5)
미국은 서산락일의 운명에서 벗어날수 없다
칼물고 뜀뛰기를 해볼 심산인가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7월 2일(토)
민족어발전을 조국의 통일을 위한 중요한 문제로 보시고
Copyright ⓒ 2000-2022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