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3. 동녕현성전투 >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3. 동녕현성전투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14 19:58 댓글0건

본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3. 동녕현성전투

  

   


  

3. 동녕현성전투  

 

 라자구담판후 반일부대련합판사처는 구국군과의 사업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판사처일군들은 린접의 산림대들에도 침투하여 그들을 반일련합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공작을 하였다.

 

 

이 기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1933년 9월초 라자구부근의 로모저하라는 곳에서 오의성, 사충항, 채세영, 리삼협을 비롯한 반일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동녕현성(삼차구)전투방안을 토의하기 위한 련합회의를 열고 작전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회의에서는 오의성사령의 제의에 따라 우리가 작성한 작전계획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

 

 

우리가 라자구담판후 동녕현성을 즉시에 공격하지 않고 두달이상의 준비기간을 설정한것은 이 전투의 의의를 특별히 중시한데 있었다. 우리는 이 전투를 항일유격대의 합법화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돌파구로 보았고 우리와 구국군부대사이에 맺어진 통일전선에 관한 협약도 이 전투의 승패에 따라 발효를 보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전투를 잘하면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이 반석같은 기초우에 서는것이요, 패전으로 끝나면 라자구담판의 성과는 허실로 돌아가고 축조과정에 있던 련합전선은 붕괴를 면치 못할것이였다. 동녕현성전투를 잘못하면 우리가 혈전을 통하여 힘들게 이루어놓은 항일유격대의 군사적권위에도 오점이 생길것이였다. 구국군이 통일전선을 하다가 녹아났다고 아우성을 치는 날이면 야단이였다.

 

 

우리로서는 사실 큰 시험을 치르는셈이였다. 우리의 정찰자료와 지방조직들이 보내온 통보에 의하더라도 동녕현성에는 이시다가 이끄는 500명정도의 일본관동군병력과 경탄장이 지휘하는 1개 련대정도의 위만군병력이 있고 그밖에도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다는것이 확인되였다. 게다가 적들은 대포를 비롯한 현대적무기들로 장비된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그때 반일부대의 어떤 지휘관들은 동녕현성을 점령할수 있는 가능성은 30%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련합회의석상에서도 공격자의 력량이 방어자의 력량보다 3배가 되여야 한다는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군사교범의 요구인데 적의 병력에 비해 우리측의 병력이 너무 약하다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오의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리청천이 다녔다는 일본의 륙군사관학교 같은데서나 통할수 있는 개나발이니 참고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소극적인 림전태도를 비난하였다.

 

 

구국군이 언제인가 동녕현성을 치다가 실패한적도 있었던것만큼 일부 지휘관들이 《무적황군》을 자칭하는 일본군의 신화에 겁을 집어먹고 적을 과대평가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련합회의에서 작전방안이 채택되자 반일부대련합판사처 성원들은 호진민과의 련계밑에 아무 부대에서는 몇명, 아무 부대에서는 얼마 하는 식으로 동녕현성전투에 참가시킬 병력수를 부대별로 할당하였다.

 

 

우리는 왕청, 훈춘, 연길에서 각각 1개 중대정도의 병력을 참가시키기로 하고 그들을 라자구로 불렀다.

 

 

왕청에서 내가 데리고간 1개 중대와 백일평대대 정치위원이 훈춘에서부터 인솔해가지고온 중대는 1933년 8월말에 라자구근처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러나 련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연길동무들은 아쉽게도 집결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그때 연길대대에서는 전투력이 제일 강한 최현중대가 선발되였었다. 출발에 앞서 최현은 매 전투원들에게 실탄 150발씩 나누어주고 새 신발도 한컬레씩 공급해주었다. 북동을 떠난 중대가 강행군으로 마촌까지 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동녕현성전투를 치르고 소왕청에 가있던 9월 중순이였다.

 

 

우리가 훈춘동무들과 함께 라자구에 들어갔을 때 구국군장병들은 시내 인민들과 함께 우리를 열광적으로 맞이하여주었다. 환영군중들가운데는 주변부락들에서 온 농민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들의 열정적인 환영모습을 통하여 이 고장 반일조직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우리의 대오를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올리는 군중의 뒤에는 최정화와 같은 유능한 혁명가들이 서있었다. 그는 라자구반일회장이였지만 만주국의 심부름도 하면서 내막적으로는 반일병사위원회 성원의 자격으로 구국군과의 사업도 많이 해온 사람으로서 라자구에서 우리가 내놓은 반일공동전선로선의 정당성을 널리 선전하였다. 최정화는 인민들을 발동시켜 구국군부대들에 식량과 천도 많이 대주었다.

 

 

우리는 중국인거리에서 대렬을 정리하고 항일구국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다음 련이어 춤마당, 노래마당을 펼치였다. 거리 량옆의 중국인가게들에서도 영업을 중지하고 연도에 뛰쳐나와 오락회를 구경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와 구국군이 친형제와 같이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라자구시가는 마치 축전도시인양 흥성거리였다. 조선인거리, 중국인거리 할것없이 온 도시가 명절분위기에 휩싸이였다.

 

 

젊은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김대장을 보자고 야단들이였다. 김대장이 평안도사람이라느니, 함경도사람이라느니, 지어는 경상도태생이라고까지 하면서 저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옥신각신하였다.

 

 

아이들은 38식보총과 탄띠들을 만져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한 대원이 탄띠를 세개씩 띠였는데 하나는 허리에 혁띠처럼 두르고 나머지 두개는 량어깨에 각각 하나씩 가위다리모양으로 띠였다. 한 탄띠의 정량이 100발이니 각자가 300발씩의 총탄을 휴대한셈이였다.

 

 

《나라를 찾느라고 고생하시는분네들, 점심이나 같이 나눕시다.》

 

 

녀인들이 대렬에 새하얗게 달려들어 유격대원들의 팔을 승벽내기로 잡아끌었다. 라자구시내에서 10리, 20리 떨어진 고장들에서도 아낙네들이 점심을 지어가지고 유격대를 찾아와 음식을 권하였다.

 

 

라자구에 도착한 그날 나는 반일부대련합판사처동무들의 안내를 받아 오의성사령의 숙소를 찾았다.

 

 

우리는 구면으로서 화기애애한 담화를 하였다. 6월의 첫 담판때와 같이 서로 상대를 떠보는 담화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허심탄회한 담화였다.

 

 

내가 라자구로 갈 때 제일 우려했던것은 오사령이 그동안 동녕현성전투를 포기하지나 않았는가 하는것이였다. 리청천과 같이 우리와의 합작을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의성이 동녕현성전투를 단념하고 우리와 구국군과의 관계를 협상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세우도록 설유하지 않았겠는가?… 반일부대련합판사처 일군들은 리청천이 항일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합작이 류산되도록 채세영을 부단히 꼬드기고있는데 그의 리간질이 오사령한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지 모르겠다고 몇차례 통보해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걱정이였다. 오의성의 통일전선의지는 여전하였고 동녕현성전투를 잘하여 구국군이 왕년에 당한 패배를 만회하려는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오사령이 제일 수치스럽게 생각한것은 1932년말에 일본군이 라자구를 《토벌》할 때 받은 타격이였다. 일본군은 그 당시 10여대의 비행기와 수백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구국군을 사정없이 짓뭉개놓았다. 라자구는 재더미로 변하였고 구국군은 성남촌, 신툰자, 석두하자와 같은 고장으로 쫓겨났었다.

 

 

《수더구를 보면야 사실 우리가 일본놈들보다 더 많았지. 그런데도 우리는 라자구를 내주고 산골로 꽁무니를 뺐거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안 오우. 라자구를 타고앉은 왜놈들이 생사람의 머리를 베서는 남문에 달아매군 했지만 우린 복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산골에만 배겨있지 않았겠나. 일본군이 무섭다는 생각만 했으니까.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노릇이지. 이제 동녕에 가면 톡톡히 값을 받아내야지.》

 

 

우리에게 이 말을 할 때 오사령은 옆구리의 목갑싸창에 자주 손을 가져갔다. 오의성이 복수심으로 가슴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통일전선의 전도를 위해서 매우 좋은 징조였다.

 

 

그날 나는 반성위와 마주앉았을 때처럼 오의성에게 나의 지난날을 추려서 이야기해주었다. 오사령도 그 답례로 자기의 경력을 소개하였다. 그의 고향이 산동성 동창 어디라는것과 그에게 오기성이라는 별명이 있다는것도 그때의 격식없는 한담을 통해 알게 되였다. 우리가 담화를 하고있을 때 오사령의 숙소지붕꼭대기에서는 2명의 유격대원이 보초를 섰다. 구국군측에서도 그날은 지휘부주변의 경계를 물샐틈없이 하였다.

 

 

소문과 같이 오의성은 그날 정말로 범가죽우에 비스듬히 누워서 담화를 하였다. 몸이 비대해서인지 걸상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 틀을 차리고 담소하는것은 싫어하였다. 그러다나니 나도 자연히 목침우에 한팔을 고이고 비스듬히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의성은 귀한분이 오셨는데 점심준비를 잘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나는 식사준비를 해가지고 왔으니 따로 점심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우리의 식사를 준비해가지고 다닌 사람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중국인대원이였다. 오사령은 내가 중국말을 자유롭게 하는데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있었다. 아버지의 덕으로 터득한 나의 중국말밑천은 오의성과의 사업에서도 큰 은을 내였다.

 

 

왕청중대와 훈춘중대들은 라자구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군중정치사업방향을 토의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였다.

 

 

… 구국군이 장차 어떤 길로 나가는가 하는것은 이번 전투에 달려있다. 유격대가 선봉에서 잘 싸우면 구국군이 우리를 따라오는것이고 제 구실을 똑똑히 하지 못하면 구국군이 우리를 저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동무들은 일상생활과 전투행동에서 항상 모범이 되여야 한다. 이번 전투는 총 몇자루나 쌀 몇포대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통일전선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이 전투에 통일전선의 명줄을 걸고있다. 전리품은 구국군이 다 가지라고 하자. 그들이 약담배를 가지든 무엇을 가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말자. 그러나 정치도덕적측면에서의 양보란 있을수 없다는것을 모두다 명심하자. …

 

 

반일부대의 지휘관들중에서 동녕현성전투방침을 제일 적극 지지해나선 사람은 사충항려단장이였다. 항일유격대가 라자구에 체류하는 동안 나와 사려장사이에는 국적과 소속을 초월한 진실한 우애가 싹텄다. 유격대와 구국군의 대부대들이 라자구를 떠나 동녕현성으로 행군해갈 때에도 그는 줄창 우리하고만 같이 다니려고 하였다. 숙영지도 우리의 곁에 정하려고 하였고 전투시에도 우리 부대와 함께 행동하고싶어하였다. 라자구에서 동녕현성까지 수백리를 걸어가는 그 나날들에 나와 사려장은 서로 리해를 더욱 깊이하였다.

 

 

9월초에 라자구를 떠난 원정부대들은 며칠간의 시간을 로상에서 보냈다. 행군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니고있는 고결한 혁명정신과 참다운 인간적풍모를 증시하는 계기로 되였다.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의 정치도덕적차이는 실생활과 행군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는 어디 가서나 인민의 군대답게 행동하였다. 상공당이 있어도 마스지 않고 거기에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있어도 손을 대거나 곁눈을 팔지 않았다. 중국인부락에 들리면 오락회도 하고 선전화도 붙이고 구두선전공작도 하였다. 다른 부대들이 들면 페를 많이 끼쳤지만 우리는 도리여 주민들을 도와 물도 길어주고 망도 갈아주고 마당질도 해주고 울바자도 엮어주었다. 조선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는 전책도 읽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주민들은 백성들을 알아보는 좋은 군대가 왔다고 하면서 떡도 치고 돼지도 잡아주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다른 부대들은 다 성품이 곱지 못하고 행실이 거칠어서 글렀는데 김사령네 부대는 점잖고 싹싹하고 인정미가 넘쳐서 살이라도 떼주고싶다는것이였다.

 

 

우리가 인민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또 인민이 우리를 성심성의로 지지하고 환대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사충항려단장은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이며 김대장네 군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신사멋쟁이군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도 김대장이 령솔하는 공산당군대의 모범을 따르라고 여러번 훈계하였다.

 

 

《지금 어떤 작자들이 행군선봉에서 구국군의 망신을 다 시키고있는데 너희들은 그것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행실이 깨끗해야 하늘도 너희들을 굽어본다. 우리 부대에서 녀자들을 희롱하거나 남의 재물에 손을 대거나 백성들에게 호령질을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나타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는걸 미리 경고하는바이다.》

 

 

사충항의 이 말은 그의 부하들에게 효능높은 각성제가 되였다.

 

 

어떤 구국군대원들은 어두운 밤에 곡식낟가리만 보아도 일본놈군대라고 하면서 삼십륙계를 놓았다.

 

 

이런 일이 몇차례 되풀이되자 우리는 유격대대렬을 맨 앞장에 세우고 구국군부대를 후위로 돌려놓았다. 이 별치 않은 조치는 유격대원들을 분발시키였다. 그들은 동녕현성전투의 승패가 곡식낟가리와 일본군을 혼동하는 구국군에 있지 않고 자기들에게 있다는것, 따라서 통일전선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결정적힘도 자기자신들에게 있다는것을 통감하고 수걱수걱 행군을 다그치였다.

 

 

유격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학습을 하였다. 때로는 심각한 정치문제를 내걸고 론쟁도 하였다.

 

 

《강동무, 우리가 동녕현성을 왜 치는지 그 목적을 한번 좀 멋있게 말해주게나. 라자구에서 대장동지가 말씀해주실 때는 다 알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그게 알쑹달쑹하거든.》

 

 

원정군이 로흑산에 거의 다달았을 때 왕청중대의 뒤꼬리에서 한 대원이 능청스럽게 꺼낸 말이였다. 사실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고 상대방의 인식정도를 저울질해보자는것이였다.

 

 

질문을 받은 강동무도 능청스러운 사람이였다.

 

 

《허허, 이것 봐라. 이 동무가 남의 불에 게를 구울 작정이구만. 임자 기억이 그렇게두 알쑹달쑹하다면 내가 말해주지. 이왕이면 〈십진가〉곡조에 맞추어 노래로 냅다불러주지.》

 

 

그 대원은 상대가 말할 짬도 주지 않고 정말로 《십진가》를 뽑기 시작했다.

 

 

 

 

 

 

 

 

하나이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실현해야 할

 

 

실현해야 할

 

 

통일전선성공함이 첫째이로다

 

 

첫째이로다

 

 

 

 

 

 

 

 

둘이라면

 

 

둘도 없는 혁명성새 우리 유격구

 

 

우리 유격구

 

 

쏘만국경 멀리까지 확대함이다

 

 

확대함이다

 

 

 

 

 

 

 

 

서이라면

 

 

서리바람 칼칼해도 살기 좋은 곳

 

 

살기 좋은 곳

 

 

쏘련으로 다닐 통로 개척하는것

 

 

개척하는것

 

 

 

 

질문을 제기했던 박동무는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는 시늉을 하였다.

 

 

《동무 재간은 참 금 열닷말을 주구두 못 바꿀 재간이야. 나같은 석두한테두 동녕현성을 치는 목적이 청청하늘의 보름달처럼 제법 석연해지는걸.》

 

 

왕청중대의 재간둥이인 강동무는 그런 칭찬을 받을만도 하였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의 착잡한 경위도 《십진가》에 고스란히 퍼담을줄 알았고 9.18사변의 발발로부터 만주국의 성립에 이르는 소름끼치는 정치적재난과정도 《십진가》의 선률속에 재치있게 함축시킬줄 알았다.

 

 

동녕현성전투의 목적을 알기 쉽게 시화한 강동무의 《십진가》는 왕청중대에서 훈춘중대에로, 훈춘중대에서 사충항려단에로, 사충항려단에서 채세영부대에로 순식간에 전파되였다. 몇몇 구국군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그 《십진가》를 흥얼거리였다. 구국군은 우리 부대의 모범을 따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구국군장병들이 다 그렇게 한것은 아니였다. 그들중에는 미구에 차례지게 될 전리품의 몫을 그려보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활동지역을 쏘만국경까지 넓혀보겠다든가, 유격대와의 통일전선을 잘하여 만주땅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숭고한 항일리념을 가지고 그것을 화제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여보게, 동녕을 치면 약담배가 많이 생길가?》

 

 

우리 부대의 후위에서 사충항의 부하들중 한사람이 자기의 동료를 보고 하는 말이였다.

 

 

《글쎄, 위만군이 1개 련대나 배겨있다니까 약담배 같은거야 흔하겠지. 아편없이야 무슨 위만군이겠나. 그런데 아편을 빨지도 않는 사람이 약담배소리는 왜 갑작스레 꺼내나?》

 

 

질문을 받은 동료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짝패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사람두 원, 아편이자 돈이구 돈이자 아편이 아닌가. 허리에 만냥만 차면 황새타고 양주로 날아간다고 했네.》

 

 

《하긴 그래, 항주구경두 돈없이는 못 간다구 했으니까. 자넨 만냥짜리 아편을 차고 항주도 가구 서주도 가게. 난 그저 일본제 손전지를 하나 얻었으면 하는 소원뿐이야.》

 

 

《그까짓 손전지걱정 같은건 하지두 말게. 일본군이 득시글득시글한데 손전지 하나쯤이야.…》

 

 

《희떠운 소리 작작하라구. 아편두 손전지두 다 승전후에야 생기는 선물이야. 동녕현성이 그렇게 호락호락 떨어질줄 아나?》

 

 

우연히 얻어듣게 된 이 대화는 내 마음속에 무거운 연추를 달아놓는듯 하였다.

 

 

전리품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저 구국군병사들이 과연 《무적황군의 용사》들과 백병전을 벌릴수 있을가? 중화민국 만세를 부르며 몸이 그대로 육탄이 되여 포대앞으로 돌진할수 있을가?

 

 

그들의 언행이나 음침한 눈빛에는 어딘가 미덥지 못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우리는 로흑산에서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대의 련환모임을 조직하고 다시한번 동녕현성전투의 목적과 군사정치적의의를 인식시키기 위한 정치사업을 벌리였다.

 

 

그후에는 동녕현성부근의 고안촌, 오사구일대에 진출하여 적정을 재확인하고 전투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날 밤 우리는 동녕부근에서 지하당조직도 찾아내였다. 그것은 일찌기 반성위가 수녕중심현위 서기로 활동할 때 동녕, 고안촌, 신립촌, 로흑산 등지에 꾸리고 지도해온 조직이였다. 이 조직이 1932년 봄에 적들한테 로출되여 추적을 당하다가 그중 일부가 왕청지경으로 넘어오고 일부는 동녕에 남아 지하로 깊이 들어갔다. 반성위는 그때 당원들, 공청원들뿐아니라 유격대원들과 일반군중들도 왕청으로 많이 넘겨보냈다.

 

 

반성위는 훈춘으로 떠날 때 언제든지 동녕땅에 갈 기회가 생기면 지하에 들어간 당원들과 공청원들을 찾아내여 조직선을 이어주고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동영상]조선의 오늘 보도(2022.05.25)​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9일(목) ​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2일(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6일(목)
[동영상] [혁명활동소식]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5차전원회의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인민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새겨준 의의깊은 회의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0일(금)
최근게시물
그 품에서 누리는 인민의 행복
미국은 조선전쟁의 도발자, 침략자, 전범자이다
[론평]해외침략준비완성을 노린 무분별한 군사적망동
바라지 않는 결과만을 초래할뿐이다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6월 24일)
우리 인민의 행운-위대한어버이의식솔
세월이 흘러도 전쟁도발자로서의 죄악을 절대로 가리울수 없다
[동영상][혁명활동소식]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사진]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24일(금)
인민의 심장에 간직된 어머니의 모습
Copyright ⓒ 2000-2022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