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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반일의 기치높이 1. 리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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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12 21:0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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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반일의 기치높이 1. 리 광

  

   


  

제 8 장 반일의 기치높이

1. 리 광  

 

 나와 리광과의 우정은 길림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동만청총계통에서 온 김준이네 패거리들이 하루는 낯선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와서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 낯선 청년이 바로 리광이였다.

 

 

 

리광이 길림에 나타난것을 두고 그때 우리 동무들은 여러가지로 많은 추리를 하였다. 공부를 하고싶어 왔을것이라는 사람, 조직선을 찾으려고 왔을것이라는 사람, 길림일대의 청년학생운동실태를 알고싶어 왔을것이라는 사람 등으로 제나름의 해석들을 하였다. 김준은 리광이 길림에 온것은 성적으로 소집되는 교원들의 어떤 비밀회합에 참가하기 위해서인것 같다고 넌지시 귀띔해주었다.

 

 

총명하고 대범하고 과묵한 사람, 이것이 리광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였다. 그후 접촉이 거듭되는 과정에 나는 그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인정이 무르며 우애심이 지극한 청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떻게 되여서인지 그때 우리 동무들은 초면인물인 리광에게 홀딱 반해서 식견을 높이려면 문광중학교가 좋고 출세를 하려면 법정대학이 안성맞춤이고 혁명을 하려면 육문중학교가 제일이라는 말까지 해가며 그를 길림바닥에 잡아두지 못해 안달아하였다.

 

 

리광도 길림을 떠나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연길현 고성자라는 곳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독립군령감들의 심부름을 해주느라고 길림에 몇번 다녀간적이 있는데 그때보다는 청년학생들의 생활풍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전에는 이 도시에 청년들이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 못할 형편이였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사회운동이 활발해져서 도시가 부글부글 끓는 쇠가마같은 인상을 준다고 탄복하여마지 않았다. 이렇게 되여 리광은 길림제5중에서 얼마동안 학창생활을 하였다.

 

 

리광이 초기에 접촉한 인물들은 대부분이 홍범도, 김좌진, 황병길, 최명록과 같은 독립군거두들이였다. 고성자의 그의 처가에는 독립군의 한개 지휘부가 오래동안 있었는데 그것이 반연이 되여 그는 많은 민족운동지도자들과 접촉하였다. 눈썰미가 좋고 판단력이 빠르며 입이 무거운 리광의 기질은 인차 독립군령감들의 주의를 끌었다. 오동진이나 리웅이 나를 자기네 교대자로 만들려고 했던것처럼 그들도 아마 리광을 독립군의 후비인재로 키우려고 했던것 같았다.

 

 

리광은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하였는데 아버지가 신병으로 고생하는것을 보고서는 진학의 꿈을 버리고 14살의 연약한 몸으로 가계를 유지해나갔다. 16살때부터는 완전한 호주로 가사를 도맡아보았다. 그러다나니 학교공부도 늦어서야 하였다. 학창생활을 끝낸 그는 한동안 연길과 왕청의 소학교들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까지는 그를 본명대로 리명춘이라고 불렀다. 리명춘이 리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한것은 그가 춘화향 북하마탕에서 교원을 할 때부터였다. 그때 북하마탕에서는 주변 8개 학교가 모여 계몽활동의 한 고리로 웅변대회도 하고 운동회도 하였는데 당시 지하공작에 관여하고있던 그는 리광으로 변성명을 하고 하마탕팀 선수로 축구경기에 출전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리광으로 부르게 되였다.

 

 

《나에게 민족주의를 안내한것도 독립군들이고 공산주의를 안내한것도 독립운동이요.》

 

 

리광은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고성자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내 귀에는 그 말이 몹시 괴이하게 들리였다.

 

 

《그렇다면 그 독립군령감들이 리광동무에게 단꺼번에 두가지 사조를 내리먹였단 말이요?》

 

 

《아니, 내리먹였다는건 아니고 뭐라고 할가… 물을 먹였다고 하는 표현이 적중하겠는지, 하여튼 나는 그 령감들을 통해서 민족주의적인 영향도 받았고 동시에 맑스-레닌주의사조의 영향도 받았으니까.》

 

 

《그 령감들은 이중적인 사조의 소유자들이였던게로구만.》

 

 

《이중적인 사조의 소유자라기보다는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인물들이였다고 할수 있지. 그들은 독립군운동을 하면서도 슬금슬금 공산주의서적들을 탐독했댔소. 우리 처가집에 가면 방구석에 그 령감들이 보는 책이 디글디글했소. 그래서 나도 심심풀이삼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퍼그나 인이 배겼소.》

 

 

나는 리광의 손을 덥석 그러잡고 허물없이 말했다.

 

 

《공산주의신봉자를 알게 되여 기쁘오.》

 

 

그러자 리광은 웬일인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부정해버리였다.

 

 

《아니요. 나는 아직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요. 맑스나 레닌이 제창한 공산주의원리가운데는 내가 리해하지 못할 개념들이 적지 않았소. 나의 소박한 눈으로 보면 공산주의적인 리상이라는게 어쩐지 너무 허황하게만 생각되였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성주동무는 좀 섭섭해할수도 있겠는데 에두르기가 싫어서 한 말이니 널리 량해해주오.》

 

 

첫 대면이였지만 나는 리광의 그 솔직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 솔직성이 그의 첫째가는 매력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리광은 이처럼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방향전환도상에 있었던 인물이였다. 그는 길림에 와서 우리와 접촉하는 과정에 완전한 공산주의신봉자로 되였다. 그러나 우리가 조직한 공청이나 반제청년동맹조직에 망라되지는 않았다.

 

 

리광이 길림으로 올 때 학전 3만여평에 해당되는 토지문서가운데서 3장을 저당잡히고 400여원의 로자를 마련했다는 자료도 나왔다는데 그 사실여부는 잘 알수 없다. 학전이란 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위하여 국가가 특별히 떼여준 논과 밭을 말한다. 그 자료가 사실이라면 리광이 개인소유도 아닌 공유지를 저당잡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객지로 떠날 용단을 내린것으로 보아 포부가 대단히 컸던것 같다.

 

 

그가 집을 떠나면서 처남에게 남긴 편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비장한 결의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나는 만주벌판과 조선8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진정한 애국자를 찾고야 말겠다. 이 소망이 10년후에 이루어질지 20년후에 이루어질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일을 성사시키기 전에는 부모님의 슬하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것을 맹약하는바이다.》

 

 

이 결의를 보면 리광의 성미도 알수 있고 그가 집을 뛰쳐나와 만주의 주요도시들과 정치활동의 중심지들을 발이 닳아빠지게 돌아다닌 리유도 짐작할수 있다.

 

 

리광은 대바르고 깐깐하면서도 궁리를 잘하는 사람이였다. 중국말도 동북본토배기들 못지 않게 자유로이 구사하였다. 이런 장점은 후날 그를 십가장, 백호장, 향장의 직책에서도 일할수 있게 하였다.

 

 

서도출신인 나는 리광을 통하여 간도의 풍습, 함경도풍습도 배울수 있었다.

 

 

리광은 길림에 온 후 무슨 까닭에서인지 조직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그것은 길림을 잠간동안 들렸다 가는 정거장 같은 곳으로 보는데서 온 림시관념의 작용때문이 아니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대신 그가 나와의 거래는 많이 하였다. 나중에는 나를 통하여 우리 어머니와도 범연치 않은 인연을 맺었다.

 

 

리광이 우리 어머니를 만난것은 길림에서 공부하다가 간도로 돌아갈 때였다. 출발에 앞서 나를 찾아온 그는 작별인사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성주, 간도로 돌아갈 때 잠간 무송에 들려 성주어머니를 만나뵙고싶은데 그래도 일없을가?》

 

 

나는 리광이 그런 결심을 한것이 고마왔다.

 

 

《원, 리광답지 않게 일없을가는 또 무슨 일없을가요. 만나보고싶으면 만나보는게지. 그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럼 동의한단 말이지? 좋소! 내 그럼 결심대로 어머니를 만나겠소. 남들이 다 성주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라고 하면서 따르는데 난 아직 뵙지조차 못했으니 세상에 이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겠소. 왜 성주어머니가 김혁이나 계영춘이 같은 사람한테만 〈우리 어머니〉겠소. 나도 어머니로 모시고싶단 말이요.》

 

 

《고맙소. 리광! 그러니 우리 어머니한테 아들이 또 하나 늘어나게 됐구만. 나와 리광은 오늘부터 친형제요.》

 

 

《그렇다면 잔을 찧어야 하지 않을가. 하다못해 국수라도 나누든가.》

 

 

물론 우리는 잔도 찧고 국수도 나누었다.

 

 

리광은 결심대로 무송에 들려 며칠동안 우리 어머니를 동무해드리다가 왕청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의 가족은 연길현 의란구가 아니라 왕청현에 거주하고있었다.

 

 

리광이 무송을 떠나간 후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는 리광에 대한 소식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성주야, 리광이 오늘 간도로 떠나갔다. 내 그 사람을 송화강나루터까지 바래주었지. 너를 객지에 떠나보낸 날처럼 마음이 허전해서 일손을 잡을수 없구나.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싹싹할수 있을가. 남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냐. 그 사람도 나를 친어머니같다고 하더라만. 내 슬하에 끌끌한 아들들이 날마다 늘어나는게 얼마나 흐뭇한지 모르겠다. 세상에 락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락이 어디 있겠니. 네가 나한테 참 좋은 사내를 소개했다. 글쎄 그 리광이란 사람이 철주를 데리고 양지촌에 가서 아버지의 묘에 절을 하고 벌초까지 하고 오지 않았겠니. 우리 집에 드나드는 너의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고 내가 아는 청년들도 여럿이지만 리광이 그 사람처럼 정이 푹푹 들게 처신하는 사람은 처음이구나. 아무쪼록 너희들의 우정이 저 남산 송백처럼 변치 말고 청청하기를 바란다.》

 

 

이 편지를 받은 날은 나도 하루종일 들뜬 기분으로 송화강변을 거닐었다. 글줄마다에 차넘치는 어머니의 희열이 나까지도 감염시키였다. 어머니가 기쁘다면 나도 기쁘고 어머니가 만족하다면 나도 만족한것이다. 리광의 출현이 정녕 어머니를 그렇게도 만족스럽게 했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최대의 기쁨으로 되는것이다.

 

 

리광이 길림을 떠난 후 나는 우정국으로부터 한장의 송금통지서를 받았다.

 

 

내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는것은 이러저러한 기회를 통하여 여러번 말한바가 있다.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 량세봉, 장철호, 현묵관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 무송, 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길림시절의 나의 후원자들가운데는 공청원들과 류길학우회원들도 있었다. 문광중학교에 적을 두고 공청열성자로 활동하던 신영근도 부자는 아니였지만 나의 학비를 보태주었다.

 

 

이미 이야기한바지만 그 당시 어머니의 하루수입이란 삯바느질을 해서 벌어들이는 5~10전정도의 보잘것없는 돈이였다. 하루 10전씩 버는 때라야 월 3원의 돈을 쥐는데 그 3원이라는 금액은 육문중학교가 제정한 한달 학비와 맞먹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학비를 보낼 때에도 돈을 절약하느라고 우정국신세를 지지 않았다. 수공료를 받아서는 한달 월사금이 될만큼 푼푼이 모아두었다가 길림으로 가는 인편이 있으면 보내주군 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정국출입을 하지 않아도 되였다.

 

 

인편을 통해 돈을 받는 날이면 나는 두가지의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군 하였다. 하나는 학비가 왔으니 망신을 면하게 되였다는 다행스러운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월수입의 전부를 보내주고 집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갈가 하는 걱정스러운 감정이였다.

 

 

사실 3원이란 돈은 부자집도련님들의 한끼 식사비도 될가말가한 보잘것없는것이였다. 육문중학교의 학생구성을 보면 부자집자식들이 과반수였다. 우리가 돈깍지라고 부른 송금통지서들이 어떤 날은 수십장씩 학교에 날아올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처럼 송금통지서가 어떻게 생긴것인지 한번도 구경조차 하지 못한 평민집의 자식들은 공연히 어깨가 처져서 돌아갔다.

 

 

이런 때에 평민가의 자식들중에서도 그중 가난한 집의 자식인 나에게 10원의 뭉치돈이 단꺼번에 굴러들었다는것은 하나의 사변이였다.

 

 

나는 그 송금통지서를 들고 우정국으로 가면서 송금자가 누구이겠는가 하고 여러가지로 추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런 뭉치돈을 보내줄만 한 친지는 종시 찾아내지 못하였다. 길림시밖의 다른 지방에서 나에게 송금을 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우리 어머니인데 어머니한테 10원이나 되는 목돈이 생길리는 만무하였다. 혹시 우정국에서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삭갈려서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송금을 내앞으로 돌린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런 일은 있음직할것 같지 않았다.

 

 

송금을 받는 사람이 송금자의 이름을 대지 못하면 우정국에서는 돈을 잘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나한테서 송금통지서를 접수한 우정국사무원은 송금자의 이름을 묻지도 않고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오히려 내쪽에서 취급원에게 돈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가고 물었다. 간막이너머에서는 뜻밖에도 《리광이요!》하는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의 나의 놀라움이란 실로 이루 형언할수 없는것이였다. 내 친구들가운데는 리광보다 더 가까운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리광이 길림에서 나와 가깝게 지내다가 헤여진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돈까지 부쳐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리광의 웅심깊은 성미에 몹시 감동되였다.

 

 

리광은 왕청에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 집과의 거래를 끊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안도에 계실 때 그는 많은 량의 첩약과 돈을 가지고 흥륭촌에 찾아왔다. 그 돈이란 그가 백호장을 하면서 다달이 모아두었던 생활비였다. 리광은 마음씨가 한정없이 고와서 남을 도와줄 때에는 뽕이 빠지는줄도 모르고 제것을 다 퍼주었다.

 

 

리광은 어머니의 곁에 며칠씩 머무르면서 우리 집 살림살이를 돌봐주다가는 왕청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우리 일가의 총애를 받는 단골손님으로 되였다.

 

 

남들이 나를 재정적으로 후원해줄 때마다 나는 그것을 갚아줄 힘이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돈을 돈으로 갚아주자면 우리 집 밑천이 너무도 딸리였다. 나는 조국의 훌륭한 아들이 되고 민중의 충실한 노복이 되는것으로써 나의 친지들과 동료들의 배려에 보답하려고 생각하였다.

 

 

리광은 1929년 겨울에 나를 만나려고 길돈선렬차에 몸을 실었다. 1929년 겨울이면 내가 감옥에 있을 때였다. 리광으로서는 때를 잘못 선택한셈이였다.

 

 

그 대신 그는 자기가 숙박하고있던 객주집 접대부 공숙자를 통하여 길림지방 청년학생운동실태와 그것을 주관해온 지도핵심들의 투쟁방법에 대하여 속속들이 파악하였다. 공숙자는 접대부의 간판을 가진 녀자였지만 공청조직의 위임을 받고 길림시로 찾아오는 청년들과 우리와의 련계를 지어주는 중간다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객주집에서의 해후가 계기로 되여 후날 그 녀자는 리광의 두번째 안해가 되였다. 리광의 첫번째 안해 김어린녀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리광은 상처를 하고난 후에도 두고두고 그 녀자를 잊지 못해하였다. 본처와의 금슬이 좋았던 그는 세상에 그보다 더 훌륭한 녀자는 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생을 홀아비로 살려고까지 결심하였다. 김어린녀가 세상을 떠난 후 한해가 지나가기도 전에 사방에서 많은 혼처들이 줄레줄레 나타났으나 마음이 결백하고 고정한 그는 뭇녀인들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리광을 만나기만 하면 동무들과 함께 어린 자식을 생각하고 병약한 부모들을 생각해서라도 장가를 들라고 설복하군 하였다. 그의 결심을 휘여놓기란 참으로 마른나무를 비틀어서 송진을 짜는것보다 더 힘에 부치였다. 리광은 김어린녀의 3년상을 물린 후에야 나의 권고를 받아들이였다. 그의 두번째 부인 공숙자는 마음씨가 무던하고 현숙한 녀성으로서 뭇사람들이 모두 탄복할 정도로 전처의 자식들을 잘 키우고 돌봐주었다. 전처의 자식들도 그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공숙자자신은 불행하게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리광은 나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공숙자의 소개로 길림육문중학교와 길림사범학교에 다니던 운동권청년들과 친교를 맺었다.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애국력량을 단합시켜야 한다는것, 애국력량을 단합시키자면 그 기치로 삼을수 있는 사상과 로선이 있어야 하며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것은 길림조직이 리광의 가슴에 심어준 진리였다. 리광은 이 진리를 받아안고 간도로 돌아갔다.

 

 

리광의 길림행은 그의 혁명활동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사변이였다. 그는 이 걸음으로 하여 일본령사관 밀정들과 만주경찰의 감시속에 들게 되였으나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항로를 따라 용감하게 돌진하였다.

 

 

추수, 춘황투쟁은 리광이 길림에서 얻은 진리를 확증하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그의 세계관은 이 투쟁을 통하여 새로운 높이에로 또다시 도약하였다.

 

 

거주지를 왕청으로 옮긴 다음부터 리광은 북하마탕이라는 곳에서 향장으로 일하였다. 혁명 그자체가 자기 리상의 전부라고 말해온 사람이 말단행정기관의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는 향장의 벼슬을 얻었다면 그것은 자못 흥미있는 현상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나와 리광과의 상봉은 1931년 12월 명월구에서 다시금 이루어졌다.

 

 

리광은 그때 겨울명월구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숙식조건을 보장하느라고 사방으로 바쁘게 뛰여다니였다. 그가 좁쌀배낭에 다섯마리나 되는 꿩을 얹어가지고 회의장소에 나타난것을 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역시 리광이답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꿩고기와 닭고기로 꾸미를 한 간도특유의 농마국수는 곱배기를 청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지경으로 기막히게 맛이 좋았다.

 

 

나와 리광은 그 국수를 두그릇씩 겸상을 하여 배불리 먹은 다음 리청산이네 집 웃방에서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먼저 리광이 우리 어머니의 살림살이를 극진히 돌봐주고 나의 학비를 보태준데 대하여 진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시하였다.

 

 

《난 오늘 저녁 국수를 먹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소. 그 꾸미에 깃들어있는 리광의 수고를 생각하면 사실 눈물이 날 지경이였지. 길림에서 공부할 때도 동문 날 데리고 식당으로 종종 가지 않았댔소. 이 신세를 언제 다 갚겠는지. …》

 

 

내가 이런 말을 꺼내자 리광은 나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였다.

 

 

《신세는 무슨 신세. 난 그저 의연금을 내는 심정으로 성주네 일가를 도와주었을뿐이요. 성주네 아버지야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신분이 아니요. 성주도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해왔소. 이런 애국자의 가정에 돈 몇푼을 보태줬다면 그거야말로 응당한 일이지.… 신세라니, 그런 말은 두번다시 입밖에 꺼내지도 마오.》

 

 

그는 짐짓 노하는체 하면서 손으로 위혁하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나는 여기에서 리광이 지니고있는 또 다른 한 측면의 성격미를 보는것 같았다.

 

 

《리광이, 너무 그러지 마오. 은혜에는 반드시 고맙다는 인사가 뒤따르는 법이요. 내 어머니의 몫까지 합쳐서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는바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리광이 우리에게 그처럼 진정이 넘치는 후원을 해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나도 그러리라고 짐작했소. 그런데 성주, 나의 그 선행은 우연이 아니요. 계기가 있단 말이요.》

 

 

《무슨 계기?》

 

 

《어느 날 성주어머니는 나에게 성주아버지와 혼사를 이루던 이야기를 옛말처럼 해주시지 않겠소. 어머니의 말씀이 그 혼사가 이만저만 힘들게 성사되지 않았다는거요.》

 

 

《그 혼담은 나도 알고있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를 앉혀놓고 그 고사를 이야기해주셨소. 그건 참말로 눈물겨운 혼담이였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할 때에 생긴 혼담이니 그것은 아마도 《한일합병》전야에 있은 고사일것이다.

 

 

어머니의 집이 있던 칠골과 어버지의 집이 있던 남리는 나지막한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7리쯤 떨어져있었다. 남리에서 평양성안으로 가자면 반드시 칠골을 지나야 했다. 칠골사람들도 남포방면으로 나갈 때는 남리부근을 지나다니였다. 친교가 깊고 래왕이 잦다나니 두 동네 사람들은 서로 사돈을 잘 맺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남리에서 사위감을 물색하였는데 그 첫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총각이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였다. 두집사이에 매파가 왔다 갔다 하게 되자 외할아버지는 남리의 아버지네 집에 먼저 와보았다. 그러나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칠골로 돌아갔다. 사위감은 마음에 들었으나 살림살이가 지나치게 궁색하였기때문이였다. 그처럼 가난한 집에 딸을 보내면 고생만 하게 될것이라는 위구와 불안이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외할아버지는 그후에도 다섯번이나 우리 아버지네 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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