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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7 장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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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09 19:5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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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7 장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유격구에서 좌경바람이 제일 우심하게 나타난것은 정권건설분야였다. 정권건설에서의 좌경적편향은 교조주의, 사대주의, 모험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의 소부르죠아적조급성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는 쏘베트건설로선과 쏘베트의 명의로 실시된 일부 시책들에서 집중적으로 발로되였다.

 

 

정권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벌써 《ㅌ.ㄷ》시절부터 우리의 론의에 올라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중요한 화제거리가 되였다. 정권문제는 조선청년들에게 있어서 독립후에 상정해도 될 장래의것이고 또 국권수복이 이루어지는 조건에서만 그 건설에 착수할수 있는 리념상의 문제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권형태에 대한 견해는 곧 그것이 어떤 성격의 혁명을 추구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것이 우리의 립장이였다.

 

 

정권문제가 우리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격렬한 론의거리로 되였던것은 길림시절이였다. 길림의 정치무대에서 독립후의 국가형태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지 않은 때란 거의 없었다. 3부계통의 독립군지도자들이 왕조정치나 부르죠아공화제를 주장하며 기염을 토할 때 김찬, 안광천, 신일용과 같은 구공산당계렬의 정객들은 즉시적인 사회주의의 실현과 프로레타리아독재를 부르짖었다.

 

 

박소심도 고전의 명제에 집착되여 로동자, 농민의 독재를 운운하였다. 그는 로농대중이 정권의 주인으로 되는것은 지지하면서도 독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늘 머리를 내저었다.

 

 

길림청년들은 그 준비정도와 리해관계의 차이에 따라 왕조정치를 지지하기도 하고 부르죠아공화제에 미련을 가지는가 하면 쏘련식사회주의에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하였다.

 

 

김혁, 차광수, 계영춘, 신영근과 같은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독립군령감들이 왕조복귀를 운운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열을 내였다. 즉시적인 사회주의실현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실정은 우리로 하여금 정치토론이 주되는 내용으로 되고있던 청년학생들의 연단에서 정권문제를 크게 상정시키고 치렬한 쟁론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그후 우리는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정식화한데 기초하여 공산주의자들이 광복된 조국에 수립해야 할 정권은 마땅히 왕조정치나 부르죠아의회제정치를 배제한 인민을 위한 정치제도, 다시말하여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는 민주주의정권으로 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31년 12월의 겨울명월구회의에서 정권문제가 론의될 때 우리가 표명한 주장도 본질상 이와 동일한것이였다.

 

 

간도지방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면서부터 우리 혁명에서는 정권건설문제가 본격적인 론의의 대상이 되여 일정에 올랐다.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를 유지하고 그것을 운영해나가자면 그 령역내의 인민들에 대한 경제조직자적, 문화교양자적역할을 감당할수 있는 정권을 건설해야 하였다.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는 유격구에 정권을 세우지 않으면 인민들을 먹여살릴수도 없었고 그들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할수도 없었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동만지방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은 1932년 가을부터 유격구역들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력사적인 로정에 들어섰다. 그해 10월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왕청현 가야허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쏘베트정부수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연길현 왕우구와 삼도만에서도 쏘베트가 수립되였다. 유격구역에 혁명정권이 선것은 의심할바없이 인민들의 세기적숙망을 실현시켜주는 의의있는 사변이였다.

 

 

처음에는 나도 유격근거지들에 쏘베트정권이 수립된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명칭이야 어찌되였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정권이라면 그만이라고 보았다.

 

 

당시는 《쏘베트열풍》이 온 동만땅을 휩쓸던 때였다. 쏘베트를 수립하는것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세계각국의 혁명투사들과 진보적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인된 사조로 류행되고 전파되였다. 그 열풍은 구라파와 아세아를 가리지 않았다. 중국 서금의 중화쏘베트와 윁남의 느구엔-딘쏘베트의 수립은 그 좋은 례증으로 된다.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으로 본 사람들도 로농쏘베트정권을 론하였다.

 

 

국제당본부에 가있던 조선의 최성우 등이 국제당집행위원회에서 동방부의 일을 맡아보던 일군들(꾸우씨넨, 마지야르, 오까노)과 함께 작성하였던 《조선공산당행동강령》은 조선의 완전독립과 함께 《로동자, 농민의 쏘베트국가수립》을 당면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쏘베트로선을 지지하고 그를 혁명실천에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는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의문의 여지조차 가질수 없는 하나의 상식으로 되였으며 혁명적, 공산주의적립장과 기회주의적립장을 가르는 일종의 기준으로 되고있었다. 식민지, 반식민지나라들은 말할것도 없고 자본주의나라의 공산당들과 공산주의조직들에서도 쏘베트정권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내세웠다. 실로 쏘베트는 전세계무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리상으로 되여있었다.

 

 

쏘베트가 그처럼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은것은 그것이 온갖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청산하고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절대화할 복지사회를 건설할수 있는 유일무이한 정권형태로 인정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세상에 대한 동경은 인류가 세기를 두고 꿈꾸어온 념원이고 리상이였다.

 

 

로씨야에 수립된 청소한 쏘베트정권은 전복당한 착취계급의 반란을 분쇄하고 제국주의련합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며 경제를 복구하고 사회주의건설을 추진시키는데서 실로 이 세상 그 어떤 정권도 이루어본적이 없는 미증유의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쏘베트사회주의의 이러한 개선행진은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쏘베트에 대한 숭상을 환상의 경지에까지 떠밀어가게 하였다.

 

 

인류가 쏘련을 등대로 바라보고 쏘베트를 모든 정권형태들가운데서 가장 우월하고 선진적인것으로 받아들인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무리가 아니였다. 쏘련과의 접경지대였고 또 신생쏘련의 영향을 이모저모로 많이 받고있던 간도지방에서 쏘베트에 대한 환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남북만원정을 마치고 왕청에 돌아온 나는 쏘베트의 시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들이 유격구도처에서 울려나오는 현실을 목격하고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 목소리들은 우리가 무심히 스치고 지나서는 안될 심각한 문제거리들을 안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그 두서없는 뒤소리들에 진실이 담겨져있다는것을 곧 간파하게 되였다.

 

 

나는 유격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인민들이 쏘베트에 대하여 어떤 립장을 가지고있는가에 대하여 더 깊이 료해하기 시작했다. 수십수백명의 인민들과의 부단한 접촉, 그들과의 진지하고도 허심탄회한 담화는 나로 하여금 쏘베트정권이 빚어놓은 좌경적시책의 후과를 전면적으로 파악할수 있게 하였다.

 

 

유격구사람들이 쏘베트를 시답지 않게 보기 시작한것은 정부가 즉시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극좌적인 구호밑에 사유재산철페를 선포하고 토지와 식량으로부터 낫, 호미, 걸이대와 같은 농쟁기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소유하고있던 모든 동산, 부동산들을 공동소유로 만들어버린 때부터였다. 쏘베트정부는 재산의 공유화를 일사천리로 강행한 다음 유격구안의 모든 주민들이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공동생활, 공동로동, 공동분배의 새로운 질서밑에서 움직이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쏘베트급진론자들이 념불처럼 외우고 다니던 《아르쩰리》생활이라는것이였다.

 

 

유치원생이 소학, 중학, 고등학교도 거치지 않고 대학으로 직행한셈이였다.

 

 

쏘베트정부는 또한 큰 지주, 작은 지주, 친일지주, 반일지주를 가리지 않고 유격구역안에 있는 모든 지주들과 부농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였으며 마소와 량식까지도 일률적으로 수탈하였다.

 

 

동만땅이 소위 《적색구역》과 《백색구역》으로 분리된 후 적구로 내려가지 않고 유격구역에 남은 지주들은 대체로 반일감정이 강한 애국적인 지주들이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왕청골안에서 무장대오를 꾸릴 때 그들은 유격대에 대한 후원도 잘하였다.

 

 

그런 지주들가운데 장시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보적인 중국인지주도 있었다. 1932년 봄의 대《토벌》때 간도림시파견대는 그의 집 쌀창고까지 불태워버리였다. 《토벌대》가 총대를 휘두르며 강제철거령을 내리였지만 장시명은 그때 대두천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냥 남아있었다. 일본사람들에 대한 장지주의 원한은 그 봄부터 더 깊어졌다. 그는 지주였지만 유격구사람들의 생활을 물심량면으로 잘 도와주었다.

 

 

《유격구어른들, 나는 왜놈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이 골안에 그냥 남은 사람이웨다. 저 악귀같은 놈들을 대두천시내에서만이라도 좀 몰아내주시우다!》

 

 

유격대원들이 모연공작을 가면 장시명은 이런 부탁을 하였다.

 

 

유격구인민들은 그 지주와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쏘베트정권은 이 지주마저 적구로 쫓아버리였다. 장시명이 유격구역에서 내려가지 않게 사정을 봐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쏘베트는 그 요구를 외면해버리였다.

 

 

《쏘베트정권은 지주들의 재산을 다 몰수하게 되였다. 당신이 반일정신이 강한 사람이고 지난날 유격구사업을 잘 도와준것은 사실이지만 착취계급에 속하는 인물이기때문에 숙청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러니 이 고장에서 속히 떠나라.》

 

 

이것이 반일지주에게 내린 쏘베트의 선고였다.

 

 

혁명을 성심성의로 원호하던 장시명의 재산은 즉석에서 수탈되여 쏘베트정부가 관할하는 창고로 모조리 들어갔다. 알몸이 된 장지주는 눈물을 흘리며 일본군이 주둔하고있는 대두천으로 내려갔다.

 

 

그 당시 숙청사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지주들의 장궤속에 있는 아이들의 꽃신까지도 다 털어갔다. 중국사람들한테는 집에 녀자애가 태여나면 그 아이가 커서 시집간 다음 낳을 어린애에게 신길 신발까지 미리 다 만들어두는 재미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신발을 꽃신이라고 하였다. 돌전애기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살, 두살 올라가면서 문수가 다른 꽃신들을 연방 만들어 장궤속에 간수해두군 하였는데 그런 신발가운데는 골무만치 작은것도 있었다.

 

 

이런 신들까지 다 수탈해갔으니 그것을 묵묵히 감수할수밖에 없었던 지주들이 유격구를 떠나면서 무슨 생각인들 안하였겠는가.

 

 

소왕청골안에는 유산자들한테서 몰수한 마소가 우글우글하였다. 어지간한 목장을 꾸리고도 남을만 한 량이여서 근거지의 청년들은 누구나 다 말을 타고 다니였다. 쏘베트의 치하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멋이라면 멋이였다.

 

 

좌경분자들은 중국녀자들이 전족을 하고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것까지 투쟁대상으로 삼았다.

 

 

1930년대 전반기는 동만지방에서 좌경의 전성기였고 좌경의 전횡속에서 신성한 혁명적원칙들이 시련을 겪고있던 시기였다. 어떻게 되여 좌경바람이 이처럼 동만땅을 휩쓸수 있었던가. 간도의 유격구역에 모여있던 혁명가들이 모두 망종이였거나 리성을 잃은 미친 사람들이였단 말인가.

 

 

아니다. 유격구를 다스리던 절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숭고한 혁명적리상과 따뜻한 의리를 지닌 훌륭한 인간들이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며 정의로운것을 열렬히 지향했다. 그런데 그처럼 인정에 무르고 분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여 좌경로선의 제창자, 집행자가 되여 돌이킬수 없는 실책을 범하게 되였던가?

 

 

우리는 그 원인을 로선에서 찾았고 그 로선을 작성한 사람들의 사상적미숙성에서 찾았다. 실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꼭대기에 앉아서 고전의 일반적원칙과 선행자들의 경험을 통채로 직수입한 현실성이 없는 지령들을 마구 만들어 내려보내다나니 실천상에서도 무리가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무턱대고 배척하는것, 닥치는대로 청산하고 타도하고 매장하는것이 가장 철저한 계급성으로 인정되고 가장 선봉적인 혁명가의 표징으로 평가될 때였다.

 

 

좌경이 얼마나 신성시되였으면 왕청농민들이 한때 과부가 길쌈을 해서 벌어 얼마간 변돈을 놓은것까지 고리대라는 딱지를 붙여 그 채용증을 소각해버리고 본전마저 떼먹었겠는가. 지도자들의 배후조종이 없이는 순박한 농민들이 이런 강짜를 부리지 못한다.

 

 

나는 언제인가 왕청에서 리응만중대장이 무장대오에 가입한 경위를 듣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초기에 무장단에서는 자기 대오에 로동자출신들과 빈고농출신들만 받아들이였다. 그런데 리응만이네 집에는 1만평가량 되는 척박한 산전이 있었다. 이 1만평때문에 그는 빈고농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무장대오에 받아달라고 여러번 간청하였으나 동무들은 성분이 나쁘다는 리유로 매번 퇴박을 놓았다. 1만평이면 중농이라는것이다.

 

 

리응만은 고심끝에 부모들 모르게 밭을 팔아 장만한 돈으로 브로닝권총 한상자를 사가지고 가서 무장대오에 넣어달라고 졸랐다. 그때에야 동무들은 그를 무장대오에 받아주었다. 리응만은 유격대원이 되였다고 기뻐하였지만 땅 1만평을 하루밤사이에 잃어버린 그의 가족들은 생존의 길이 막혀 하늘만 쳐다보게 되였다.

 

 

좌경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겠다는 나의 결심은 간도땅에 와서 더 굳어졌다. 나는 그때부터 일생동안 좌경과의 투쟁을 하여왔다. 간도시절의 체험은 해방후 우리가 좌경을 예방하고 관료주의를 청산하는 투쟁에서 큰 도움으로 되였다.

 

 

번지르르한 혁명적언사와 초당적인 구호의 뒤에서 좌경은 항상 대중을 우롱하고 억누르고 기만하며 공명과 출세를 꿈꾼다. 그 공명과 출세를 위하여 자기를 최전선에서 돌진하는 땅크나 장갑차로 묘사하는것이 좌경이다. 변장한 반혁명이 좌경의 모습으로 둔갑하는것은 그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경각성을 높여 자기 진지에 좌경이 발붙일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좌경적인 쏘베트시책이 빚어낸 후과로 하여 유격근거지에서는 수습하기 어려운 동요와 혼란이 생기였다. 많은 가정들이 쏘베트시책에 불만을 품고 적구로 떠나가버리였다.

 

 

어느날 밤 나는 대원들을 데리고 2중대 정치지도원 최춘국이 있는 셋째섬으로 가다가 유격구를 버리고 솔가도주하는 한 장년의 가족을 만났다. 대낮에 떠나가다가 붙잡히면 반혁명의 딱지를 쓸수 있으니 밤시간을 택한것이다. 식구는 다섯이나 되였는데 짐짝들은 얼마 없고 알몸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그 사람에게는 안해와 아이들 셋이 올망졸망 달려있었다.

 

 

50에 가까운 그 장년은 총멘 군인들을 알아보자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유격대지휘관한테 발각되였으니 이제는 다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댁에서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나는 추위에 떨고있는 세 아이를 한아이, 한아이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 아무 죄도 짓지 않았수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유격구를 떠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여기서는 숨이 막혀 더 살수가 없어서…》

 

 

《그럼 어디로 가실 생각이였습니까? 적구에 가면 여기보다 숨이 더 막힐텐데.》

 

 

《우리가 왜놈들의 등쌀에 못 이겨 유격구에 들어왔는데 그 몹쓸놈들한테야 어찌 다시 발길질을 하겠습니까. 인적이 없는 깊은 산골에 찾아가서 화전이라도 일구어 연명을 해갈가 합니다. 그러면 마음만이라도 편할게 아닙니까.》

 

 

나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마촌보다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간다고 래일의 생계조차 기약할수 없는 그들에게 과연 마음편한 생활이 펼쳐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토도 되지 않고 풀도 돋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끼니를 댈 차비새가 돼있습니까?》

 

 

《있기는 뭣이 있겠습니까. 가서 기력이 진할 때까지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그저 그런거지요. 이제는 목숨이 붙어있는것도 막 귀찮습니다.》

 

 

곁에서 그 말을 듣고있던 그 사람의 부인이 문득 어깨를 떨며 흐느끼였다. 그러자 내 품에 안겼던 세 아이도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삼키면서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렇게 하나둘씩 다 떠나고나면 구경은 누구를 믿고 혁명을 한단 말인가? 우리 혁명이 어쩌면 이렇게도 처량한 막바지에 다달았을가? 쏘베트의 무모한 시책이 빚어낸 후과는 이처럼 파국적인것이였다.

 

 

《이제 얼마간 있으면 세월도 바로 잡히게 될터이니 너무 락심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시국이 평정될 날을 기다려봅시다.》

 

 

나는 대원들을 시켜 로상에서 만난 그 가족을 집에 데려다주게 하고 2중대 병실에 가서 자려던 예정계획을 변경시켜 서대파에 있는 최자익로인을 찾아갔다. 이왕 가슴아픈 일을 당한바에는 유격구의 민심이 어떤지 더 속속들이 캐고들려는것이였다. 최자익은 왕청별동대의 대원으로 유격대생활을 시작한 후 중대장을 거쳐 독립려단 련대장으로까지 승진되여 활동하다가 전사한 최인준의 아버지인데 내가 셋째섬에 올 때마다 꼭꼭 잊지 않고 만나군 하는 로인이다.

 

 

이 로인이 서일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에서 서기까지 하며 따라다닐 정도로 식견이 높은데다가 성미가 활달하고 솔직하여 만나기만 하면 참고가 될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수 있었다.

 

 

《로인님,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의 인사에 최자익은 《사니까 사는구나 하지요.》하는 말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 퉁명스러운 어조가 유격구의 민심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한번 말을 걸었다.

 

 

《로인님, 유격구생활이 그렇게도 힘듭니까?》

 

 

최자익은 그런 질문을 받자 어성을 높여 벌컥 화를 내였다.

 

 

《쏘베트정부에서 역축과 농쟁기를 거둬갈 때까지만 해도 난 참았댔네. 아라사에서도 농업집단화라는걸 할 때 그런 놀음을 했으니까 우리도 그걸 본받는다고 짐작했거든. 그런데 며칠전에 공동식당을 경영한다면서 숟가락, 저가락까지 다 거둬가는걸 보고서는 침을 뱉았네. 〈그래 우리 늙은이들이 공동식사때문에 하루 세번씩 자기 집 온돌방을 두고 한지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단 말이냐? 이런 식으로는 더는 못 살겠다. 꼼무나인지 아르쩰리인지 그런 귀신단지 같은 세상을 만들겠거든 젊은것들끼리나 해라. 우리는 숨이 차서 더 따라 못 가겠다.〉구 말일세. 그랬더니 이번에는 봉건숙청이요 뭐요 하고 로인들을 군중대회장에 내다놓고 며느리들한테 비판을 시키지 않겠나. 우리 나라 력사가 자그만치 5천년이라는데 어느 세월에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있었는가? 우리 인준인 그래두 나보고 쏘베트를 비방하면 안된다구 야단질이 아니요. 그래서 내 그 녀석의 사등뼈를 꺾어놓으려구 했네.》

 

 

유격대지휘관의 아버지가 쏘베트의 시책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면 다른 주민들의 동향은 더 알아볼 필요조차도 없는것이였다.

 

 

나는 그후 유격구에서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지던 공포시기와 유격구의 해산을 앞두고 군대와 인민이 눈물로 석별의 정을 나누던 그 쓸쓸한 나날에 이 로인을 만났을 때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시국을 통탄하던 그의 하소연을 자주 회상하였다.

 

 

쏘베트정부가 수립된 후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조중인민의 관계는 다시금 급격히 악화되였다. 청산된 지주들의 대부분이 중국인지주들이였던것만큼 5.30폭동때와 같은 갈등이 재연된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반일부대들은 이전날처럼 또다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였다. 일본군대와 만주국군대는 물론, 구국군도 적이 되고 중국지주도 적이 되였다.

 

 

항일유격대는 소규모의 비밀유격대처럼 남의 집 뒤골방에 숨어있던 창건초기의 처지와 꼭같은 처지에 빠져 조선사람들이 사는 부락에 조심스레 배겨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별동대라는 간판을 부활시킬수도 없었다. 구국군은 우리를 만나기만 하면 《꼬리빵즈》라고 답새기였다. 유격대의 활동이란 반지하투쟁이나 다름없이 되였다.

 

 

우리가 1년 남짓하게 투쟁해서 쌓아올린 모든 공적들이 억울하게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있었다.

 

 

쏘베트의 시책을 놓고 우리 동무들가운데서도 분해작용이 시작되였다. 차라리 이럴바에는 로씨야에 가서 혁명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이나 배워가지고 와서 새 출발을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간도사람들식으로 하다가는 혁명이고 뭐고 다 망치겠는데 다시 돌아가서 우리끼리 투쟁을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같지도 않는 혁명을 할바엔 집에 돌아가서 부모들에게 효도나 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집에 가고싶어하는 중국동무 한명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쏘련에 가서 공부하고싶어하는 다른 중국동무 한명은 쏘련에 보내주었다.

 

 

이런 사태하에서도 유격구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들은 정책전환을 단행할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동만특위가 지도기관으로 존재하였지만 국제당의 시정방침에 수정을 가할만 한 로선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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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24일(금)
인민의 심장에 간직된 어머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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