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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7 장 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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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08 14:3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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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7 장 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우리는 마촌에 와서도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요영구의 승전소식이 간도전역으로 빠르게 퍼져가던 때여서 우리에 대한 소왕청인민들의 환영열도 대단히 높았다.

 

 

적의 통치에서 완전히 해방된 유격구의 생활은 우리일행을 몹시 흐뭇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신천지를 지배하는 모든것이 다 우리를 감동시킨것은 아니였다. 간도혁명을 움직이는 일부 지도자들의 일본새와 사고방식가운데는 우리의 불만을 자아내는 점도 없지 않았다.

 

 

우리를 제일 놀라게 한것은 동만지방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열병처럼 만연되고있던 좌경바람이였다.

 

 

좌경병은 유격근거지를 건설하는 사업에서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명월구, 소사하회의들에서 유격근거지창설문제를 론의할 때 우리는 이미 그 형태를 완전유격구, 반유격구, 활동거점의 세가지로 규정하고 형태설정에서 균형을 잘 보장할데 대하여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동만지방의 일부 열성공산주의자들은 해방지구형태의 완전유격구를 건설하는데만 몰두하고 반유격구나 활동거점을 창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낯을 적게 돌리고있었다. 초기에는 왕청에서도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만 건설하였다. 소왕청유격구역만 보더라도 오늘의 우리 나라 한개 군면적과 맞먹는 땅덩어리가 모두 혁명세력이 관할하는 해방지구형태의 쏘베트구역으로 되여있었다. 그 당시에는 완전유격구를 쏘베트구역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넓은 땅에다 공농정권을 상징하는 쏘베트기발을 띄워놓고 간부들은 《혁명!》, 《혁명!》 하면서 무사분주하게 돌아갔다. 유격구역밖에 나가서 싸움은 별로 하지 않고 프로레타리아독재니, 무산자사회건설이니 하는 허공중에 뜬 구호만 연방 웨치면서 얼렁얼렁 하루하루를 보냈다. 기념일이 오면 병실마당이나 운동장 같은데 모여 로씨야식단스도 하고 메데가도 불렀다. 어떤 날은 동만특위와 현의 간부들이 한데 모여서 목청을 돋구어가며 론쟁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사실 우리도 그해 봄을 덩덩해서 보냈다. 그러나 점차 유격구사업에서 발로되고있던 일련의 좌익소아병적인 편향도 포착하게 되였고 그것을 퇴치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도와 전술도 모색하게 되였다.

 

 

유격구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창기에는 왕청근거지에만도 수천명의 피난민과 망명자들이 와있었다. 훈춘, 연길, 화룡의 실태도 마찬가지였다.

 

 

부침땅이 적은 산골안에 수천명이 모여들어 와글와글하니 먹을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전부가 콩죽을 먹었다. 망에 콩을 갈아서는 쌀을 좀 넣고 죽을 쑤어먹군 하였는데 그것도 있을 때는 더러 타발도 하였지만 없을 때는 양재물에 끓인 송피를 두드려서 송기떡을 만들어 끼니를 에우든가 고사리, 닥지싹, 도라지, 더덕, 둥굴레뿌리 같은것을 삶아서 먹었다. 그렇게 하고서는 혁명가를 부르고 주먹을 흔들면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친일파를 타도하고 놀고먹는 기생충의 무리들을 타도하라고 연설하는것이 초시기의 근거지생활이였다.

 

 

물론 소소한 전투도 여러번 하였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후방물자를 실은 마차수송대도 들이치고 유격구역에 침습해오는 《토벌대》를 제끼고 무기를 빼앗아내기도 하였다. 승리하고 돌아오면 인민들은 기발을 들고 만세도 불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는 많이 하지 못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보초를 서든가 피난민들을 보호하는것으로 매일매일을 보냈다. 땅덩이는 컸으나 총도 적고 무장인원도 적다나니 유격대원들은 총을 몇자루씩 나눠가지고 근거지를 보위하는데 몰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늘이려고 하면 무슨 서기요, 위원이요 하는 사람들이 겁에 질린 소리로 혁명군은 통일전선군대가 아니니 로동자, 농민의 정수분자들만 흡수하여야지 아무 사람이나 망탕 받아들이게 되면 오합지졸의 무리가 된다고 하면서 한사코 막아나섰다. 그 당시는 항일유격대가 쏘베트구역안에 있는 무장력이라는데로부터 그 명칭도 공농유격대라고 하였다. 공농유격대란 로동자, 농민의 군대라는 뜻이다.

 

 

몇개 중대밖에 안되는 유격대력량으로 몇천㎢에 달하는 커다란 땅덩어리를 사수한다는것은 참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방어밀도가 설피니 일단 《토벌》만 시작되면 적이 우리의 방어진을 뚫고 종심깊이에까지 쳐들어왔다. 그러면 수천명 인민이 보짐을 이고지고 피난을 가느라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이런 피난소동이 매일과 같이 유격구사람들을 들볶았다.

 

 

좌경병에 걸린 사람들은 마치 해방지구 령토의 크기가 혁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표징이라도 되는것처럼 적아의 력량관계에 대한 과학적인 타산도 없이 주관적인 욕망만을 앞세우면서 터를 넓게 잡고 유격구역을 고수하는데만 전념하였다. 그들은 지어 유격구역과 적통치구역을 《적색구역》, 《백색구역》이라는 간판밑에 인위적으로 갈라놓고 《반동군중》, 《량면파군중》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면서 적구인민들과 중간지대 인민들을 함부로 의심하거나 배척하였다. 국내인민들도 역시 《반동군중》의 대접을 면치 못하였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적색구역》에서는 녀성들이 단발머리를 함으로써 《백색구역》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말도 글도 노래도 학교도 교육도 출판물도 적백이 서로 달랐다. 《백색구역》에서 《적색구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무조건 단속을 했고 취조를 한 다음에도 집으로 잘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백색구역》에서 오는 사람은 덮어놓고 적의 간첩으로 치부하라는 상급의 지령이 아동단조직에까지 떨어졌다. 왕청현당의 일부 사람들은 소왕청골안에 있다가 도시로 내려간 사람들에 대하여 늘 악의를 품고있었다.

 

 

한번은 동일촌에서 망원보초를 서던 적위대원들이 소를 사려고 유격구에 온 대두천의 농민을 붙잡아다가 심문한 일이 있었다. 《백색구역》에서 수상한 농민 한명이 나타나 적위대의 심문을 받고있다는 통보를 받은 현당의 좌경분자는 그 농민이 스파이일수도 있으니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주리를 틀어서라도 정체를 실토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주리를 틀어도 농민은 스파이가 아니라고만 대답하였다. 그 농민은 사실 스파이도 아니고 주구도 아니였다. 그러나 좌경분자들은 농민이 가지고온 현금을 압수하고 불문곡직으로 악행을 가하였다.

 

 

왕청에서 다년간 공청사업을 해온 최봉송은 언제인가 좌경으로 인하여 빚어진 유격구시절의 비사들을 회고하는 좌석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좌경이라는 말만 들으면 초기유격구시절이 자주 눈앞에 서물서물합니다. 간도에서의 좌경이 정말 지독했습니다. 한번은 유격대원들이 왕청령에서 일본군의 소금달구지를 로획해가지고 소왕청으로 끌고온적이 있습니다. 근거지가 생긴 초창기이니 아마 수령님께서 남만진출을 하실 때일것입니다. 달구지군은 삯일을 하여 그날그날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최하층의 조선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좌경분자들은 〈량면파군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를 죄인처럼 다스렸습니다. 일본놈의 소달구지를 끌었으니 역적이라는거지요. 유격구밖에 있는 사람들이 유격구를 좋게 볼수 없었습니다. 참 기막힌 일이였습니다.》

 

 

적아를 구별하지 않고 기본군중까지도 서슴없이 처형하는 이와 같은 무지한 망동은 다른 현의 유격구들에서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이 저주받을 행위들이 모두 혁명이란 신성한 간판밑에서 꺼리낌없이 감행되여 항일을 하겠다고 따라나섰던 수많은 혁명군중을 《백색구역》으로 밀어던지는 가슴아픈 결과를 빚어낸다는데 있었다.

 

 

유격구의 좌경분자들은 지어 온성땅에서 적의 《토벌》에 희생된 부모의 제사를 지내려고 상경리에 온 리치백로인의 친척까지도 《반동군중》이라고 하면서 붙잡아가는 추태를 부리였다.

 

 

이런 행위를 목격할 때마다 나는 온몸과 넋으로 참을수 없는 수치를 느끼였다. 만일 어떤 공산주의자가 반동이라는 감투를 씌워 무고한 백성을 마음내키는대로 처형한다면 그는 벌써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특급범죄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왕청에서 유격구생활을 할 때만 하여도 이런 특급범죄자들은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특급혁명가》로 행세하면서 군중을 아무렇게나 망탕 다스리고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쏘베트만 가지면 만사가 다 해결될것처럼 생각하고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근거지도 고수하고 혁명도 발전시키자면 페쇄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활동범위를 넓혀야 한다는것이 우리가 얻어낸 결론이였다. 말하자면 유격구사수에만 매달리는 근시안적인 활동방식으로부터 벗어나 큰 정예부대를 꾸려가지고 자유자재로 기동하면서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자는것이였다.

 

 

군대가 본격적인 군사작전에로 이행하자면 근거지방위에서 안고있는 부담을 줄여야 하였는데 이 부담을 줄이는 하나의 방책이 바로 완전유격구주변의 광활한 지역에 반유격구들을 대대적으로 늘이며 이러한 반유격구들이 유격구를 옹위하도록 하는것이였다. 우리는 반유격구를 창설하는데서 우리 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담보할수 있는 돌파구를 찾았다.

 

 

나는 중국관내에서의 유격구건설경험을 참고할 목적으로 동장영과도 여러번 진지한 담화를 하였다.

 

 

1931년 가을 중국 강서성 서금에서는 중화쏘베트림시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쏘베트구역을 창설하였다. 동장영의 말에 의하면 중국혁명의 수뇌부가 집결되여있는 쏘베트중앙구는 그 면적이 대단히 넓고 주민도 수백만을 헤아리며 무력도 몇개 군을 이룰만큼 막강하다는것이였다. 동장영자신도 하남성에서 쏘베트구역을 창설한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홍군은 10여만명에 달하였고 그 관할지역은 강서성 남부로부터 광동성 북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령토와 인구상으로 볼 때 어지간한 한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중국의 쏘베트구역건설경험을 두만강연안에 그대로 이식할수 없다는것과 간도를 활동기지로 삼고있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혁명의 책원지를 튼튼히 사수하고 유격전쟁을 판이 크게 벌릴수 있는 유일한 첩경은 완전유격구주변과 북부조선일대에 반유격구를 창설하는것이라는 견해를 더욱 굳히게 되였다.

 

 

반유격구창설의 필요성은 무장투쟁의 실천속에서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였다. 광대한 령역을 사수하자니 힘이 딸리였고 힘이 딸리니 그 타개책을 빨리 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가 만일 유격전을 해보지 않고 고전이나 뒤적거리며 로씨야볼쉐비크들이 어떻게 했소, 중국 서금의 경험이 어떻소 하는 식으로 탁상공론만 하였더라면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외에 또 다른 형태의 유격근거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것을 인식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그 창설을 그토록 절감하고 빨리 다그치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반유격구문제는 근거지에 대한 단순한 형태상의 고찰이 아니였다. 그것은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에서 주체적대를 세우는가 못세우는가 하는 사상적립장문제였으며 좌경에서 벗어나 지난날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배척했던 광범한 인민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는가 보지 않는가 하는 군중관점문제였고 그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결속시키는가 못시키는가 하는 혁명력량편성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반유격구란 우리도 통치하고 적들도 통치하는 지역, 형식상으로는 적의 통치지역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우리의 관할지역으로서 항일유격대에 대한 지원조건도 지어주고 그 후비원천을 비롯한 혁명력량도 키워내며 적구와 유격구사이에서 중간련락소의 역할도 담당하는 그런 곳을 말한다. 좀더 형상적으로 표현하면 낮에는 적들이 통치하지만 밤에는 우리가 관할하는 그런 지역을 말한다.

 

 

혁명근거지건설에서 반유격구형태는 우리의 투쟁실정에 맞는것이였다. 이런 형태는 다른 나라들의 유격전쟁경험에도 별반 없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혁명의 발전로정은 반유격구창설을 절실한 과제로 내세웠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키며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급속히 앙양시키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1933년 3월 중순 함경북도 온성군 왕재산일대에 진출하였다.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며 조국해방을 이룩하려는것은 항일대전을 선포한 그날부터 우리가 시종일관 견지해온 전략적목표였고 우리의 가슴속에서 단 한순간도 떠나본적이 없는 불변의 신념이였다.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륙읍일대를 비롯한 북부조선지역에 반유격구를 꾸리는것이였다. 반유격구를 잘 꾸려놓으면 유격구건설에서 나타나고있는 이러저러한 좌경적편향도 능히 청산할수 있었다.

 

 

우리는 셋째섬에 활동기지를 두고있는 왕청대대 2중대성원 40명과 각 중대들에서 선발된 10명의 지휘관들과 정치일군들로 국내진출대오를 편성하고 박태화소대장과 그밖의 몇몇 대원들로 구성된 선발대를 온성지구에 파견하였다.

 

 

그 당시 동만당조직의 책임적인 자리에 앉아있던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국내로 나가는데 대하여 몹시 신경을 쓰면서 그것을 저지시키려고 각방으로 제동을 걸었다. 그들은 중국령내에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는것은 민족주의적인 《조선연장주의》경향이라고 비난하였으며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는 행위이므로 국내진출도 애당초 단념하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민족적임무에 충실한것이 곧 국제주의적임무에도 충실한것으로 되며 조선의 혁명가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것은 그 누구도 방해할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자기나름의 배짱을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론박하였으며 변함없이 국내진출준비를 하였다.

 

 

이런 때에 항일유격대의 국내진출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의 분노를 격발시키였다. 국내와의 련계를 위하여 온성지방에 나갔던 2중대의 대원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자마자 김성도라는 사람에게 체포되여 동만특위로 끌려갔다는것이였다.

 

 

그 당시 2중대장은 안기호였고 정치지도원은 최춘국이였다. 그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허둥지둥 마촌에 뛰여와 내앞에서 중대지휘관들도 모르게 유격대원을 함부로 붙잡아간 김성도의 월권행위를 두고 의분을 터뜨리였다.

 

 

성미가 첫날색시처럼 얌전하고 마음씨가 비단결같아 남의 흉이라고는 좀처럼 보지 않는 최춘국이 《외눈깔왕가》라는 별명까지 입에 올리며 김성도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함구무언으로 앉아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였다. 김성도에 대한 파악이 별로 깊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내가 알고있는것이란 그가 공청동만특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동만당특위로 갓 소환되여온 사람으로서 각 현으로 순시를 다니는중이라는것뿐이였다. 동만당조직에서는 상급조직의 간부들이 하부조직을 돌아다니며 지도사업을 하는것을 순시라고 하였다.

 

 

 

나는 최춘국이 김성도를 이름대신 상스러운 별명으로 부르는것이 마음에 걸리여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춘국동무, 동무는 언제부터 다른 사람들을 이름대신 별명으로 부르는 고약한 버릇을 배웠소? 김성도라는 사람이 우리를 무시하는 탈선행위를 한것만은 사실이지만 동무한테는 그래 그의 인격을 존중해줄만 한 아량도 없단 말이요?》

 

 

최춘국은 비판앞에서 허심한 사람이였다. 그는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담고 송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언행이 조금이라도 불손했거나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유격구도 인간들이 모여사는 곳이니 별명이 없을수 없겠지. 그런데 그 별명은 너무도 야비하구만. 외눈깔이라고 하다니…》

 

 

나는 김성도가 2중대의 대원을 체포해간것보다 당장은 왕청사람들이 그를 《외눈깔왕가》라고 부르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어째서 김가를 왕가라고 하는가고 물으니 최춘국은 조선사람인 김성도가 중국사람냄새를 너무 내고 간부들앞에서 지나치게 굽실거리는것이 아니꼬와서 간도사람들이 그에게 《왕가》라는 성을 붙여준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동만특위로 가던 길에 현당에 잠간 들렸더니 거기서도 김성도를 이름대신 《외눈깔왕가》라고 부르는것이였다.

 

 

현당사무실에서 리용국이 나에게 들려준 말에 의하면 김성도는 1927년에 벌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화요파 만주총국의 어느 세포위원을 하다가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여 매도 맞고 감옥밥도 먹어본 로당원이라고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에는 재빨리 중국당에 전당하여 특위급간부로 승진되였는데 곯아빠진 한쪽눈의 허물을 감추느라고 그러는지 늘 색안경을 끼고 다부산자차림으로 다닌다는것이였다.

 

 

리용국은 김성도를 《날아가는 까마귀발에 버선이라도 신길수 있는 수완가이고 변설가》라고 평가하였다.

 

 

나는 동만특위사무실에서 3시간쯤 김성도와 담화를 하였다.

 

 

정작 마주앉고보니 그의 월권행위를 문책하려던 결심은 뒤전으로 밀려나고 측은한 감정부터 앞섰다. 곯아버린 눈과 몹시 지친듯 해보이는 컴컴한 얼굴표정으로부터 환기된 동정심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한쪽눈의 실명이라는 불우한 신체적조건을 무릅쓰고 간도의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혁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것은 얼마나 장하고 눈물겨운 일인가.

 

 

《순시원동무, 동무는 우리와 토론도 하지 않고 무슨 리유로 공작중에 있는 유격대원을 함부로 체포해갔소?》

 

 

나는 음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례절있게 물었다.

 

 

김성도는 안경너머로 나를 유심히 보았다. 언감 특위순시원도 몰라보고 당돌하게 문책을 들이대느냐고 사뭇 못마땅해하는듯 한 눈치였다.

 

 

《그런 질문을 받는다는게 참 이상하구만. 그 대원의 월경이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에 모순되는 민족주의의 표현이라는걸 모를리 없겠는데 … 우린 그를 〈민생단〉으로 보고있소.》

 

 

《무슨 근거로?》

 

 

《조선에 갔다왔으니 민족주의인것이고 민족주의적오유를 범했은즉 그거야 〈민생단〉이 아니고 뭐겠소.》

 

 

《그게 동무의 생각이요?》

 

 

《그렇소. 나의 상급도 그렇게 보고있소.》

 

 

나는 김성도가 이런 대답을 하였을 때 그가 괘씸하다는 생각보다도 가련하다는 생각이 앞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무런 과학적타당성이나 진리성도 없는 망발에 분노를 표시하고 쇠망치와 같이 드센 론리로 그 망발의 부당성을 립증해야 할 그런 정황에서 분노와 경멸대신 일종의 동정심이 발동되였다는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김성도가 지니고있는 허황한 편견과 유치한 사고방식이 동만특위 순시원이라는 요란한 직급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를 더욱더 가련한 존재로 보이게 하였던것 같다.

 

 

(육체적불구에 정신적불구까지 겹치였으니 저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불행한 인간인가. 색안경으로 밀정들의 목표물이 될수 있는 애꾸눈을 가리우고 혁명을 위해 투신하는 그 기개야 물론 찬양받을만 한것이지. 그 기개에 건전한 넋까지 담겨져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어떻게 되여 저 사람의 정신은 저렇게도 참혹하게 병들었을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보다 음성을 더 낮추어 조용조용 그를 타일렀다.

 

 

《동무는 민족주의와 〈민생단〉을 동일시하고있는것 같은데 어떻게 그 량자를 감히 한천평우에 올려놓을수 있겠소. 박석윤이나 조병상, 전성호와 같은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발기인이 되여 〈민생단〉을 조직했다고 해서 민족주의와 〈민생단〉을 동일시하는것이야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삼단론법이 아니겠소. 내가 알기에는 동무도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주관하는 단체에 들었다가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한것 같은데 그것을 근거로 삼아 동무에게 〈민생단〉감투를 씌우면 납득이 가겠소? 어떻소?》

 

 

김성도는 《그거야 어떻게…》 하면서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나는 그가 반성해볼수 있는 여유를 좀 주었다가 조리있게 설복을 계속하였다.

 

 

《동무가 상부라고 한것은 동장영서기를 념두에 두고 한 말 같은데 나는 그가 그렇게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만일 동장영서기가 실정을 잘 몰라서 일시적인 편견이나 오해를 가지고 그런 판단을 내린다면 조선의 물정을 잘 아는 동무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가 옳은 리해를 가질수 있도록 조언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김성도는 그 말에도 역시 묵묵부답이였다.

 

 

체포당했던 2중대의 대원을 데리고 지휘부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김성도가 가련하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숙반공작을 진두지휘하기 전까지는 리론투쟁때문에 여러번 충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그를 불쌍하게 여기였다.

 

 

그러나 김성도가 《민생단》숙청의 간판밑에 견실한 혁명가들을 무수히 살해하는것을 보고서는 그를 더는 동정하지 않았다. 후날 그자신도 결국은 《민생단》감투를 쓰고 처형되였다. 테로는 테로한테 망하고 좌경은 좌경의 심판대에서 죽는다는것, 신념과 주대가 없이 간에 붙었다 섶에 붙었다 하는 사람에게 차례지는 운명은 자멸이라는것이 수십년에 걸치는 동란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인생체험이라고 할수 있다.

 

 

3월 초순에 마촌을 떠나 온성군 타막골대안에 도착한 국내진출대오는 솔골이라는 곳에 숙영지를 정하고 온성땅에 침투한 선발대를 기다리면서 한주일가량 이 일대를 혁명화하여 반유격구로 꾸리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낮에는 송동산서쪽기슭에 가서 전투훈련을 하였고 밤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속에 지하조직을 꾸리는 일을 하였다.

 

 

우리는 그때 만주국의 말단행정책임자들인 십가장, 백가장들과의 사업도 하였다. 우리가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지 않고 혁명군대의 복무조례에 맞게 주민들과의 관계를 잘 가지였기때문에 그들도 우리에 대해서는 매우 깨끗한 인상을 가지고있었다. 유격대원들은 그때 솔골에 머물러있으면서 농민들의 일손을 많이 도와주었다. 어떤 대원들은 산에서 싸리나무를 해다가 주인집 울타리까지 고쳐주었다.

 

 

박영순의 회상기에 나오는 그 유명한 도끼이야기도 바로 우리가 이 마을에 주둔해있을 때에 생긴 일이였다.

 

 

어느 날 나는 중국사람인 주인집 로인부처의 일손을 덜어드리려고 도끼와 물초롱을 들고 두만강가로 나갔다. 이 지방 주민들은 겨울에 두만강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도끼나 곡괭이 같은것으로 얼음을 까고 구멍을 낸 다음 초롱에 물을 퍼가지고 돌아오면 그것이 곧 음료수가 되였다.

 

 

나도 그런 얼음구멍을 내려고 도끼를 들고나갔다. 그런데 얼음을 다 까내려갔을 때 그만 자루가 빠지면서 그 구멍속에 도끼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긴 장대기를 가지고 몇시간동안 강바닥을 훑어보았으나 도끼는 좀처럼 나지지 않았다.

 

 

나는 주인집로인에게 도끼값을 후히 치르어주고 재삼 사과하였다. 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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