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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7 장 인민의 세상 1. 보 금 자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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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07 18: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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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7 장 인민의 세상 1. 보 금 자 리

  

   


  제3권


제7장 인민의 세상

(1933. 2-1934. 2)

1. 보금자리 

2. 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4. 국제당파견원 

5. 백마에 대한 추억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1934.2-1934.10)

1. 리 광 

2. 오의성과의 담판 

3. 동녕현성전투 

4.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론함 

5. 마촌작전 

6. 밀림속의 병기창 

7. 영생의 꽃  

 

제9장 제1차 북만원정

(1934.10-1935.2)

1. 조선인민혁명군 

2. 부자와 가난뱅이 

3. 로야령을 넘어 

4. 녕안땅에 울린 하모니카소리 

5. 천교령의 눈보라 

6. 인민의 품 

 



제 7 장 인민의 세상

1. 보 금 자 리  

 

 우리는 1933년 2월 중순에 마로인의 안내를 받으며 왕청유격구로 향하였다. 20일동안 산전막에서 정치토론만 하며 갑갑하게 지내던 18명의 유격대원들은 행길에 나서자 신바람이 나서 걸음을 다그치였다. 겨우내 겪어온 시련의 흔적들이 채 가셔지지 않았건만 대오는 청신하고 생기발랄하였다. 

 

 

지금 왕청지방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자기네 고장의 특징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현장의 연설이 길고 소학교의 길이가 길고 골짜기가 긴것으로 유명합지요 하는 기지있는 말로 대답하군 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롱질을 즐기는 왕청지방 해학가들이 자기 고장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지어낸 말인것 같다.

 

 

1933년 당시의 나에게 만일 그런 명구가 있었다면 모진 곤경을 치르고난 전우들에게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터뜨릴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수도 있을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왕청이 어떤 고장입니까?》 하는 대원들의 물음에 그저 망명자가 많은 고장이라는 대답밖에 해주지 못하였다.

 

 

망명자가 많은 고장이라는 말은 혁명가가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왕청은 간도의 여러 현들중에서도 일찍부터 반일독립운동이 가장 백열화된 지방의 하나였다. 백전로장 홍범도가 일본군《토벌대》를 대패시킨 전장도 여기에 있었고 서일, 김좌진, 리범석 등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활동기지도 이곳에 있었다. 리동휘는 이 일대에서 독립군인재양성에 심혼을 바치였다.

 

 

독립군의 맹활약과 독립운동자들의 출몰은 이 지방 인민들의 민족적각성을 촉진시키였고 그들을 반일애국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독립군운동이 조락단계에 들어서고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연해주지방과 쏘만국경일대로 자취를 감춘 다음부터 왕청지방에서의 민족해방투쟁령도권은 점차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였고 투쟁의 주류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 전환되였다. 민족주의자들이 걸구어온 애국애족의 토양우에서 새 사조의 선각자들은 공산주의운동을 발전시키였다.

 

 

그러나 그 운동의 동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족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던 사람들가운데서 압도적다수는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공산주의운동대렬내에는 처음부터 공산주의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었고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신봉하다가 사상개조과정을 거쳐 점차 공산주의자로 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런 주의에도 관계하지 않은 말쑥한 새 사람들만을 가지고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발전에서 우리가 지침으로 삼고있는 계승과 혁신의 원리이다. 공산주의사상이 인류사상사에서 최고봉의 사상이고 공산주의운동이 모든 형태의 혁명운동가운데서 최고단계의 혁명운동이라고 하여 이 운동이 아무것도 없는 빈터에서 발생발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어쨌든 왕청은 반일투쟁력사가 깊고 군중토대가 좋으며 정치적지반도 튼튼한 곳이였다. 조국의 륙읍지구와의 거리도 가깝고 간도지방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중심지인 연길, 룡정지구와도 이웃하고있어 이모저모로 좋았다.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는 말도 있지만 이런 고장에 혁명가들이 많이 집결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고학을 하려면 일본으로 가고 흘레브를 먹으려면 쏘련으로 가고 혁명을 하려면 간도로 가라는 류행어는 동만을 광복운동의 최전방으로 보고 그곳을 끝없이 동경하던 당시 조선청년들의 심정을 잘 반영하고있다.

 

 

간도로 가는것은 화구앞으로 가는것과 같이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을 더 본때있게 하기 위하여 그 화구앞으로 주저없이 돌진하였다.

 

 

유격구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이 그렇게도 경쾌했던것은 거기에 기름진 음식이나 푹신한 잠자리가 기다리고있어서가 아니였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생사를 같이할 동지들이 있고 인민이 있고 우리가 자유롭게 디디고다닐 땅이 있으며 일본천황의 칙령이나 총독제령으로써도 뒤집어버릴수 없는 우리 식의 참세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우리가 마로인을 앞세우고 전각루로 향하던 1933년 2월은 동만각지에서 유격근거지창설사업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여 그 생활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뒤였다.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그에 기초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리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미 겨울명월구회의에서 그 사상을 제시하고 방침으로 채택했던 중심과업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때 무력항쟁을 하자면 진지를 꾸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진지란 유격근거지를 의미하는 우리 식의 소박한 표현이였다.

 

 

우리가 겨울명월구회의에서 론의된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창설에 관한 문제를 독립적인 의제로 내세우고 그 실현방도를 다시금 진지하게 모색한것은 1932년 봄의 소사하회의에서였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우리는 간도 여러 지방들에 유능한 지도핵심들을 파견하여 농촌혁명화를 다그치였다. 이것은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이였다.

 

 

혁명화된 농촌지역은 유격구가 꾸려질 때까지 반일인민유격대가 발을 붙이고 활동할수 있는 림시거점으로 되였으며 유격근거지가 탄생할수 있는 바탕으로 되였다.

 

 

겨울명월구회의에서 리상적인 후보지로 선정되였던 안도, 연길, 왕청, 화룡, 훈춘의 산악지대들인 우복동, 왕우구, 해란구, 석인구, 삼도만, 소왕청, 가야허, 요영구, 어랑촌, 대황구, 연통라자를 비롯한 여러 고장들에 유격근거지가 속속 건설되였다.

 

 

 

간도의 산악지대들에 건설된 유격구역들에는 적들과의 첨예한 대결속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바친 견인불발의 노력과 그들이 겪은 피어린 진통이 깃들어있다.

 

 

 

 

 

 

 

 

 

두만강연안의 유격근거지들을 꾸리는데서 량성룡, 리광, 장룡산, 최춘국, 주진, 박동근, 박길, 김일환, 차룡덕, 강석환, 안길, 리국진, 리봉수를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바친 선혈과 로고는 력사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그 당시 국내와 해외에서 한다하는 인물들은 앞을 다투어 간도지방의 유격근거지들에 집결하였다. 왕청지구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백룡, 조동욱, 최성숙, 전문진을 비롯한 북만의 공산주의자들도 소왕청으로 찾아왔다.

 

 

소왕청의 새 주민들가운데는 연해주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운동자들도 있었고 적구에서 다년간 지하활동을 해오다가 정체가 탄로되여 투쟁무대를 바꾼 사람들도 있었으며 조선혁명의 중심이 간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월경탈출한 국내의 애국인사들과 맑스주의신봉자들도 있었다.

 

 

동만의 유격근거지들로는 이처럼 혁명에 참가할 각오가 되여있거나 실천투쟁속에서 직접적으로 단련된 풍부한 투쟁경험을 가진 정수분자들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주민구성도 대왕청하의 청수처럼 깨끗하였다. 그 기개와 담력으로 말하면 전부가 일당백이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책원지가 마련된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항일근거지들에서 유격대오를 늘이고 당, 공청을 비롯하여 반제동맹, 농민협회, 반일부녀회, 아동단, 적위대, 소년선봉대와 같은 계층별 조직들과 반군사조직들을 내옴으로써 전민항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우리의 선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참다운 민주주의적권리와 자유를 인민에게 주고 인민의 리익을 진정으로 옹호하고 대변하는 혁명정권이 유격구역마다에서 태여나 인민의 보금자리를 꾸리기 시작했다. 혁명정권은 사람들에게 땅을 주고 로동의 권리를 주고 누구나 무상으로 공부하며 치료받을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며 력사상 처음으로 만민평등의 리념이 실현된 사회, 서로 돕고 이끌어주고 위해주며 받들어주는 고상한 륜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였다. 유격구에는 개화장을 짚고 거들먹거리는 부자도 없었고 빚과 세금에 짓눌려 세상을 한탄하며 통곡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격근거지들에는 그 어떤 수난이나 고통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나래치는 희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온갖 사회악과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여 자주적인 새 삶을 개척해나가는 인민들의 랑만이였다. 인민혁명정부가 나누어준 분여지에 말뚝을 박아놓고 꽹과리를 울리며 춤을 추는 농민들의 모습은 간도의 불모지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만이 창조해낼수 있었던 세기적인 화폭이며 천지개벽이였다. 끝없는 류혈과 희생을 동반하는 시련에 찬 생활이였으나 사람들에게는 래일에 대한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으며 노래가 있었다.

 

 

적들의 그 어떤 도발이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고 동방일각에 거연히 솟아 민족해방의 장엄한 새 력사를 개척해가는 간도지방의 유격근거지들은 조국인민들의 찬탄과 동경을 자아내는 락원으로, 지상천국으로 되였다. 조선민족은 그 거주지와 리념에 관계없이 공산주의자들이 피로써 쌓아올린 이 성새를 조국해방의 유일한 등대로 바라보며 충심으로 지지성원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유격구는 사람들이 랑만과 희열과 희망에 넘쳐 사람답게 살수 있는 곳이였으며 수천년을 두고 꿈꾸어온 인민의 숙망을 꽃피워준 리상향이였다.

 

 

유격근거지의 존재는 도꾜 대본영의 우두머리들에게 있어서 만성적인 우환거리로 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북부지대와 잇닿아있는 이 지대를 그들은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였다. 간도일대를 《반만항일의 심장부이며 북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일본으로 향하는 공산당의 동맥이기도 하다.》고 한 다까기 다께오의 표현은 적중한것이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동만의 유격근거지를 가리켜 《동양평화의 암》이라고 불렀다. 이 말속에는 유격근거지에 대한 일본군국주의집단의 공포심리가 정확히 반영되여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을 《동양평화의 암》이라고 본것은 이 일대의 령역이 특별히 넓거나 이 지방에 관동군을 제압할만 한 공산주의자들의 대무력이 진을 치고있어서가 아니였다. 간도에서 던진 작탄이 도꾜의 궁성이나 대본영의 지붕우에 날아가 떨어지는것도 아니였다. 그들이 간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위험시한것은 무엇보다도 이 지역 주민의 절대다수가 반일감정이 극렬한 조선사람들이고 그 조선사람의 대부분이 일본의 지배를 반대하는 일이라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내던질수 있는 혁명성이 강한 주민들이라는데 있었다.

 

 

간도지방 공산당원들과 공청원들의 9할이상이 조선사람이였다는 사실을 념두에 둔다면 일본지배층이 이 지대의 유격구역들을 만주통치에서의 최대의 두통거리로 여기게 된 까닭을 쉽사리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을 반대하여 국내와 만주광야에서 십년 유여의 항쟁을 계속해온 의병시대의 용장들과 독립군잔류세력의 대부분도 이곳에 남아 화승대로 일본군경들을 겨누고있었다.

 

 

조중량국 공산주의자들의 형제적우정과 혈연적뉴대의 본보기도 여기에서 창조되여 만주전토와 전 중국적인 판도에로 확대되고있었다.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은 《동양평화의 암》이 아니라 동양평화의 꽃이며 등대였다.

 

 

유격근거지를 꾸리기 위한 우리 혁명의 전략적과업은 항일무장투쟁을 그 요람기에 말살하려고 미쳐날뛰던 일본군국주의세력의 무차별적인 《토벌》에 의하여 엄중한 시련에 부딪치였다. 그러나 적의 초토화작전은 오히려 간도땅에서 유격근거지의 창설과정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을뿐이다.

 

 

1932년 봄 관동군과 조선군(조선주둔군)은 이른바 간도처리방책이라는것을 협의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소속의 림시파견대를 투입하여 간도지방의 혁명운동을 탄압하려는 흉악한 모의였다. 이 모의에 따라 라남사단소속의 일본군련대를 기간으로 하고 경원수비대, 기병, 야포병, 한개의 비행중대까지 포함한 간도림시파견대는 추수, 춘황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던 동만 4개 현의 모든 촌락들과 시가지들을 과녁으로 삼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위해 궐기한 모든 생명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들에 사정없는 포화를 들씌웠다.

 

 

1932년 4월초의 대감자습격을 시발점으로 하여 왕청의 산과 들도 피바다에 잠기였다. 대감자는 한때 리광이 리웅걸, 김용범 등과 함께 추수투쟁을 지휘하던 곳이고 김철, 량성룡, 김은식, 리응만, 리원섭 등 투사들이 공안국을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던 부락이다. 대포와 기관총, 비행기로 무장한 라남19사단의 대병력이 물밀듯이 쓸어들어오자 이 부락에 주둔하고있던 왕덕림휘하의 구국군부대는 마반산을 넘어 서대파로 황급히 철수하였으며 마을의 보위대도 저항을 포기하고 《토벌군》에 투항하였다.

 

 

대감자를 점령한 일본군은 련이어 비행기로 왕청시가를 들부시고 주민가옥들에 달려들어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왕청시내에서 제일 큰 지주이고 부호인 리항종의 집도 점령군에 의해 불타버리였다.

 

 

그다음은 덕원리와 상경리가 불바다로 변하였다.

 

 

이 《토벌》이 얼마나 잔학무도하고 광란적인것이였던지 왕청사람들은 그때 이런 노래까지 지어불렀다.

 

 

 

 

 

1932년 4월 6일

 

 

대감자에서 반일전쟁 개막되였다

 

 

대포알은 앞뒤산에 들들 울리고

 

 

기관총과 류산탄은 비발같도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탄을 던져

 

 

무산대중학살을 능사로 한다

 

 

대두천에 화염은 하늘에 닿고

 

 

덕원리의 농촌은 재터뿐이다

 

 

무죄량민주검은 들에 널리고

 

 

왕청들엔 인적이 고요하구나

 

 

만주땅에 살고있는 무산대중아

 

 

일치단결 일어나 싸워나가자

 

 

우리들은 끓는 피로 전쟁장에서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리라

 

 

 

 

 

 

 

 

소왕청과 대왕청골안으로는 야수들의 《토벌》에 집을 잃고 혈육을 잃은 피난민들의 분류가 그칠새없이 흘러들었다. 일본의 비행기들은 일반주민들밖에 없는 그 인파를 향해서도 폭탄을 마구 던지였다.

 

 

수정같이 맑은 왕청의 강물은 삽시간에 선혈로 물들었다. 어떤 날은 그 강물로 학살된 사람들의 창자가 떠내려가기도 하였다.

 

 

마로인이 우리를 데려다준 전각루도 간도림시파견대 살인마들의 행패가 심했던 고장이였다. 이 고장에 달려든 적들은 수십명의 청장년들과 부녀자들, 어린이들을 불붙는 집에 걷어넣고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마을은 순식간에 재더미가 되였다. 동만의 여러 현들에서 《전각루참안에 제하여 전체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 배포되여 돌아간것만 보아도 이 《토벌》의 규모와 야만성을 능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간도혁명의 중요한 발원지들의 하나인 소왕청과 라자구가까이에 위치하고있는 전각루는 일찍부터 항일투쟁의 세례를 많이 받아온 고장이였다. 수천명의 농민들과 떼목군들, 채벌로동자들이 한데 뒤섞여 와글와글하는 이 골안에는 당, 공청을 비롯한 전위조직과 함께 계층별로 되는 혁명조직들이 다 들어가있었다. 이 조직들이 군중을 동원하여 춘황투쟁때에는 마을에 둥지를 틀고있는 보위단을 들부시기까지 하였다.

 

 

군중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보위단원들은 그때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도 못하고 토비가 되고 말았다.

 

 

투쟁은 승리하였으나 혁명군중은 13명의 희생자를 내였다.

 

 

이런 투쟁의 와중에서 전각루는 우수한 혁명가들을 배출하는 온상으로 되였다. 왕청유격대 3중대장이였던 장룡산도 전각루에서 삼차구까지 다니는 떼목군으로 일하던 사람이였다. 리광이 백호장의 간판을 가지고 활동하던 하마탕은 이 마을로부터 수십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적들은 공산당원 한명만 있어도 그 부락 주민들을 전멸시키였다. 공산당원 1명을 없애기 위해서는 100명의 군중을 죽여도 좋다는것이 일본군경들이 제창한 구호였다. 중일전쟁때 화북주둔 일본군사령관인 오까무라 야스지가 화북지방의 해방구들을 공격할 때 적용했다는 3광정책(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략탈하는 정책)은 사실상 1920년대의 간도《토벌》에서 벌써 감행되였고 193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동만의 방방곡곡에서 유격구역들을 초토화하는 본격적인 실천행동으로 그 진면모를 적라라하게 드러내놓았다.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일제가 제창한 3광정책과 이른바 《비민분리》를 목적했던 집단부락정책은 알제리의 항쟁세력을 탄압하는 군사작전에서 프랑스식민주의자들에 의하여 적용되였고 윁남땅에서 미군에 의해 더욱 완성되였다.

 

 

삼도만, 해란구, 룡정, 봉림동을 비롯한 연길현의 이름있는 혁명촌들도 모두 주검으로 덮이였다. 훈춘현의 삼한리일대에서는 1,600여호의 집들이 불에 타버리였다. 연길 한개 현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수만 해도 무려 1만여명에 달하였으니 간도림시파견대의 죄행을 무슨 말로 다 고발할수 있겠는가.

 

 

일본군은 간도인민들의 생명재산은 말할것도 없고 초보적인 생존수단인 화식도구까지도 모조리 파괴하였다. 밥도 못해먹게 가마를 깨뜨리는가 하면 노전을 들어내고 구들장을 파헤치였다. 나중에는 집을 허물고 달구지들을 끌고와 재목들을 대두천시내로 실어갔다. 사람들은 풀막에서 잠을 자고 가마대신 자갈돌을 달구어 밥을 지어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산으로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감자나 대두천과 같은 시가지로 내려가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토벌군》의 강압적인 퇴거령은 지주들에게도 례외가 되지 않았다. 항일무장부대들이 소비하는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적지 않은 몫이 지주나 자산가들을 통해서 흘러나온다는것은 사실상 비밀이 아니였다. 적들은 이 원천마저 봉쇄함으로써 식량과 피복의 부족을 상시적으로 느끼고있는 혁명군을 완전히 질식시키려는것이였다.

 

 

《토벌대》의 검질긴 추격을 피해 혁명군중은 끼니를 번지며 산중에서 헤매였다. 그러나 산이라고 해서 다 안전한것은 아니였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도 막바지까지 가면 더 들어갈 곳이 없었다. 막바지가 나지면 더 올라가지 못하고 수림속에 몸을 숨기군 하였는데 이런 때에 어린애들이 울음소리라도 내면 몰살을 당하는판이였다.

 

 

어떤 녀인은 《토벌대》가 근처에 와서 돌아칠 때 등에 업힌 갓난아이가 울음소리를 낼가봐 입에 젖꼭지를 물리고 품에 꼭 그러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의 총구앞에 놓여있는 수십수백명에 달하는 혁명군중의 신변안전을 지켜낼수가 없었다. 《토벌대》가 돌아간 다음 아이를 보니 그 어린것은 벌써 숨져있었다. 이런 비극은 간도 어느 마을, 어느 골짜기에나 다 있었던 비일비재의 일화이다.

 

 

이런 페단을 없애려고 어떤 고장에서는 애기들에게 아편을 먹이기도 하였다. 아편을 먹이면 아이들이 잠에 취해서 울지 못하였다. 어떤 녀성들은 거듭되는 적의 《토벌》에 성화를 먹다 못해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에게 주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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