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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6 장 8. 라자구등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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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07 03:4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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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6 장 8. 라자구등판에서

 

   


 

8. 라자구등판에서 

  

일본군대의 안도입성은 시간문제로 되고있었다. 친일적인 지주들은 일본인들을 맞기 위하여 벌써 기발까지 준비하였다. 구국군은 량강구에 더 오래 머물러있을수 없게 되였다. 맹탄장부대에는 산을 끼고 초원이 있는 라자구, 왕청방향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도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구국군과 함께 안도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채택한것이 바로 량강구에서 열린 병사공작위원회 회의였다. 총적인 지향은 왕청으로 활동거점을 옮기는것이지만 당분간은 퇴각하는 구국군부대들이 집결되고있는 라자구에 틀고앉아 거기서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우사령부대도 안도에서 라자구로 철수하였다.

 

 

우리가 북만으로 갈 준비를 한창 다그치고있을 때 철주동생이 나를 만나려고 량강구에 찾아왔다.

 

 

《형, 나두 형님네 부대를 따라가구싶어. 형님없이는 토기점골에서 더 못살겠어요.》

 

 

 

동생은 내가 묻기도 전에 찾아온 용건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생이 우리 부대를 따라가고싶어하는 심정은 나도 리해할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사하골짜기에서 남의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것이 감수성이 예민한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로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너마저 토기점골을 떠나면 영주는 어떻게 하니? 그 애가 고독해서 견디지 못할텐데.》

 

 

《둘이나 남의 집 밥을 먹으니 미안해서 못 견디겠어요. 막내 혼자만 있으면 덜 미안할것 같애.》

 

 

나는 철주의 말이 리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동생의 나이가 열여섯살이니 총을 메워주면 부대를 따라다니며 군인생활을 할수도 있었다. 철주는 나이에 비해 몸집도 크고 체격도 좋았다. 하지만 아직 뼈가 채 여물지 않아서 유격대의 짐이 될수 있었다. 더구나 철주는 안도지구에서 공청사업을 추켜세워야 할 무거운 책임을 걸머지고있었다.

 

 

《네가 이년이나 삼년후에 그런 청을 한다면 형은 너의 청을 선뜻 받아들일게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청을 들어줄수 없구나. 좀 고생스럽고 고독스럽더라도 몇해만 참아다구. 남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도 하고 계절로동 같은것도 하면서 공청사업을 좀 본때있게 내밀어보아라. 지하활동도 무장투쟁 못지 않게 중대한 사업인데 그걸 무시하면야 안되지. 공청사업을 하다가 때가 되면 혁명군에 오너라.》

 

 

나는 철주가 떼를 쓰지 못하게 여러가지로 구슬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를 데리고 못가에 있는 객주집에 갔다. 문풍지소리가 궁상스럽게 붕붕거리는 썰렁한 방안이였다.

 

 

나는 술과 안주를 청하였다. 싸늘하게 식은 언두부접시 두개, 그사이에 놓은 술병 하나.

 

 

그것을 보더니 철주는 눈물이 글썽해지는것이였다. 동생은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에 그 한잔의 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벌써 짐작하고있는 모양이였다.

 

 

《철주야, 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이 형을 용서해다구. 낸들 왜 너를 데리고 다니구싶은 마음이 없겠니. 너를 떼두고 가자니 내 가슴도 아파서 찢어질것만 같구나. 그렇지만 철주야, 섭섭한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헤여져야겠다.》

 

 

나는 술기운의 덕으로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입에 쉽사리 옮길수 없는 말을 단숨에 해버리였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내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밖에 나오자 철주도 마시던 술잔을 내버린채 나를 따라 일어섰다.

 

 

《알겠어요, 형!》

 

 

이 한마디와 함께 철주는 뒤로 다가와 내 손을 소리없이 잡았다놓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동생과 헤여졌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 음산하고 처량한 못가의 가을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날 내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놓고 가던 동생의 손을 더 오래 그리고 더 뜨겁게 잡아주지 못한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군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너무나 쓸쓸한 작별이였다.

 

 

만일 그때 내가 철주의 청을 들어주었더라면 동생은 스무살도 채 되지 못한 나이에 일찌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실로 불같이 살다가 불같이 가버린 인생이였다.

 

 

철주는 열살을 넘기기 바쁘게 혁명조직을 따라다니였다. 무송에 있을적에는 새날소년동맹 선전책으로 활동하였고 소사하에 와서는 구공청위원회 비서로 사업하였다.

 

 

량강구에서 나와 헤여진 철주는 그후 수많은 공청원들을 키워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시키였다. 그는 자청해서 어려운 반일부대와의 사업도 하였다. 그는 반일부대병사들과 함께 대전자시가를 습격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가 관계하였던 두의순이 지휘하는 반일부대는 일본군의 간도토벌대와 잘 싸웠다고 한다.

 

 

그후 철주는 안도반일부대 공작부장의 중임을 지니고 연길현 부암동 장재촌 사슴페에 있는 서규오반일부대와의 사업도 하였다. 서규오는 반일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조선공산주의자라면 덮어놓고 적대시하는 성미가 괴벽하고 고집이 센 두령이였다. 그도 초기에는 조선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서규오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랭대하기 시작한것은 부암동의 반일부녀회원들이 그가 첩으로 삼으려고 억류해두고있던 공청원처녀(조선녀자)를 탈환해온 후부터였다. 그 처녀는 연예대원들과 함께 반일부대에 선전공작을 하러 갔다가 그에게 억류되였다. 일단 그렇게 걸려들면 어떤 녀자든지 서규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서는 무사할수 없었다.

 

 

서규오는 그런 방법으로 자주 녀자를 갈아대였다.

 

 

부녀회원들이 공청원녀자를 탈환해온 후부터 조선사람들은 서규오의 부대에 발을 붙일수가 없게 되였다. 과거에 서규오와 너나들이로 허물없이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곁에 가서 붙지 못하였다. 서규오는 상사병으로 고민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조선사람들을 박대하고 탄압하였다.

 

 

이런 때에 철주동생이 고려의사자격을 가지고있는 림춘추동무를 데리고 서규오의 부대에 찾아갔다.

 

 

《두령님병이 심하다기에 문병을 하러 왔습니다.》

 

 

철주가 류창한 중국말로 깍듯이 인사를 하였지만 서규오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조선사람은 보기도 싫고 조선사람들과는 말조차 하기 싫다는것이였다.

 

 

《두령님병을 떼볼가 하여 용한 의원 한분을 데리고왔는데 한번 치료를 받아보지 않겠습니까?》

 

 

철주가 다시 이런 말을 해서야 서규오는 조금 귀맛이 당겨 용한 의원이라면 진찰을 한번 받아보자고 하였다. 그는 림춘추동무의 침을 며칠동안 맞고나서 편두통때문에 죽을것 같았는데 이제는 림의원덕으로 골통속에 숨어들어왔던 잡귀를 쫓아버렸다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여 철주는 서규오부대에 눌러앉아 반일병사들과의 사업을 합법적으로 하였다.

 

 

후날 우리의 방면군에 편입된 서규오는 10련대장으로 임명되여 최후까지 잘 싸웠다. 한때 아편과 녀자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가지 못하겠다고 하며 난봉을 부리던 그가 혁명군에 편입된 후에는 공산당에까지 입당하였다. 내가 부대의 이름으로 입당을 축하한다고 말하자 그는 《군지휘동지, 나는 오늘 입당하면서 군지휘동지의 아우를 생각했습니다. 철주가 아니였더라면 나는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하지 못했을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철주가 림춘추동무를 데리고 와서 자기의 병을 떼주던 사실과 자기가 반일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꾸준히 이끌어주던 사실을 옛말같이 이야기해주는것이였다.

 

 

1935년 6월에 철주는 처창즈근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나는 철주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경박호반에서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큰 강이나 호수를 보기만 하면 동생생각을 하군 한다.

 

 

철주까지 전사하고나니 막내동생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고아가 되였다. 김정룡이네가 처창즈유격근거지로 들어간 다음부터 동생은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남의 집에서 아이보개도 하고 심부름군노릇도 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관동군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 써먹으려고 나의 연고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던 때였으므로 막내동생은 자기의 이름자와 출신마저 속이고 동북 3성은 물론, 중국관내의 도회지들과 농촌들에까지 들락날락하며 정처없는 류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다나니 그는 베이징에도 얼마간 가있었다.

 

 

나도 해방후 일본경찰들이 남기고 간 문건에서 동생의 수배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았다.

 

 

막내동생은 신경맥주공장에서 일할 때 고향이 너무 그리워 조국에 나와서 석달가량 지냈다. 그때 그는 검은 양복차림에 흰 구두를 신고 만경대에 나타났다.

 

 

그 차림새가 어찌나도 의젓하고 름름해보였던지 우리 할아버지는 막내손자가 무슨 벼슬자리라도 얻어가지고 자수성가를 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지경이였다. 그때 막내동생은 조부모님들에게 시름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장춘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였다. 경찰이 사진까지 내돌리며 지명수배를 하고있던 때여서 그는 고향에 나와서도 만경대에 있지 못하고 첫째고모네 집에서 숨어지내다가 다시 만주로 들어가버리였다.

 

 

량강구를 떠난 반일인민유격대의 40명 대오는 돈화와 액목을 거쳐 산발을 타고 남호두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우리 부대가 나의 《머슴군》시절이 흘러간 그 유명한 푸르허마을에 들려 정치공작을 한것도 이때이며 돈화현 할바령부근에서 돈도선(돈화-도문)철도부설공사에 동원된 일본군수송대와 격전을 벌린것도 이무렵이였다. 이 전투가 있은 후 나는 돈화현 두도량자에서 고재봉도 만났다.

 

 

적들의 폭압이 심한 사도황구를 떠나 두도량자로 활동무대를 옮긴 고재봉은 지하조직이 운영하는 농민학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두도량자에서 돈화현성까지는 30리밖에 안되였다.

 

 

나는 그때 두도량자에서 고재봉의 어머니도 만나보았다.

 

 

우리는 일본군수송대를 들이치고 로획한 밀가루를 집집마다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인민들과 함께 먹었다. 그 전투에서 로획한 광목천은 농민학원에 주어 학생들에게 교복을 해입히도록 하였다.

 

 

두도량자를 떠난 우리 부대는 다시 북상하여 관지부근과 남호두지방에서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한 다음 왕청지구에 들어가 당, 공청조직들과 대중단체들의 사업을 료해하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얼굴을 익히였다. 이것은 장차 왕청에 활동거점을 잡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할수 있었다.

 

 

우리는 왕청에 가서도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리광의 별동대가 총 몇자루를 해결하려고 잘못 건드려놓은 관보전부대를 만나려고 리수구에 찾아갔다. 그런데 관보전은 벌써 항일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때 관영장을 만나기만 하면 왕청동무들을 대신하여 그에게 사죄도 하고 공동투쟁을 위한 방도도 의논하면서 지난날 조, 중 무장부대들사이에 일시적으로 조성되였던 갈등과 대립을 청산하려고 하였다.

 

 

관보전은 달아났지만 나머지사람들이라도 만나려고 련락을 보냈더니 100명쯤 되는 반일부대병사들이 돈화현성에서 일본군대를 족친 김일성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보자고 하면서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앞에서 왕청별동대가 무기를 해결하기 위해 관영장부대의 병사들에게 손을 댄것이 비우호적인 처사였음을 인정하고 조중인민의 공동투쟁과 반일부대의 사명과 관련된 허심탄회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 대한 반일부대사람들의 반향이 좋았다. 코산이라는 지휘관은 그 연설을 듣고나서 자기도 관보전처럼 항일을 포기할 생각을 하였는데 이제부터는 옳은 길을 걷겠다고 하였다. 그 결의대로 그는 반일전선에서 잘 싸웠다. 왕청에서 큰 두통거리로 되였던 반일부대와의 화해는 이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서 나타나고있던 좌경적편향을 없애고 그들을 항일련합전선에 더 많이 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라자구에서 반일병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때 동녕현성에 집결된 구국군부대들은 쏘련을 경유하여 중국관내에로 퇴각할 차비를 하고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국경밖으로 달아나려고 서두르는 구국군의 도주를 막고 그들을 반일전선에 튼튼히 묶어놓으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유격투쟁앞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될수 있었다. 반일부대들을 격파하기 위하여 사방에 분산되였던 적들의 《토벌》력량은 몇백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유격대들에 집중되여 유년기에 있는 우리의 무장력을 단숨에 질식시킬수 있었다. 적아의 력량관계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질수 있었다.

 

 

그 당시 일본군은 만주의 군소도시들을 다 점령할 계획밑에 도처에서 반일무장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있었다. 그들은 현소재지까지 다 점령하려고 획책하였다.

 

 

회의에는 나와 리광, 진한장, 왕윤성, 호진민, 주보중을 비롯하여 30~40명이 참가하였는데 나와 리광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였고 진한장, 왕윤성, 호진민, 주보중은 중국측을 대표하였다.

 

 

 

회의의 기본안건은 구국군의 도주를 막고 반일련합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에 관한 문제였다.

 

 

회의에서는 먼저 왕청유격대의 과오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과오의 시초로 된것은 왕청부대에서 발생되였던 《김명산사건》이였다. 김명산은 원래 장학량군시절의 《보위탄》에 있다가 9.18사변후 6명의 중국인부하를 거느리고 왕청유격대로 반변해온 조선사람이였다. 그는 명포수출신으로서 싸움을 잘하였다. 왕청부대동무들은 그가 반변해오자 금덩이가 굴러들었다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반변해온 중국인대원 6명중 한명이 적통치구역에 정찰을 나갔다가 대감자음식점에 들려 값도 치르지 않고 호떡 한그릇을 먹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음식값을 물어줄 돈이 없었다. 그는 부대에 돌아와 자기가 돈도 내지 않고 음식을 먹고온 사실에 대하여 솔직하게 보고하였다.

 

 

현당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좌경분자들은 유격대의 명예를 훼손시킨 해독분자라는 감투를 씌워 그 중국인대원을 총살하였다. 현당 군사부의 조치로 왕청에서 처형당한 중국인대원들의 수는 무려 10여명에 달하였다.

 

 

김명산과 함께 반변해들어왔던 나머지 중국인대원들은 이러한 공포분위기에 놀라 부대를 탈출하여 마촌근방에 주둔하고있는 관보전부대에 찾아갔다. 유격대가 중국사람들을 함부로 총살한다는 그들의 선전을 듣고 위험을 느낀 관보전은 유격대의 주둔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깊은 골짜기에 부대를 이동시켜가지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살해할 기회를 노리였다.

 

 

10월혁명기념일이 되자 왕청사람들은 날창과 몽둥이와 같은 원시적인 무기들을 휴대하고 행사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이런 유치한 무기들을 들고 기념식장에 나타난것은 행사분위기를 돋구기 위해서였다.

 

 

기념식장에 사람들이 집결하는것을 자기네 부대에 대한 공격준비라고 잘못 판단한 관보전은 분개하여 자기의 수하에서 참모장의 직책을 가지고 구국군대원들에 대한 교양과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키고있던 유격대공작원 김은식과 홍해일, 원홍권 등 여러명의 조선사람들을 총살하였다. 속담에도 있는것처럼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와도 같은 역습이였다.

 

 

그후 투쟁을 포기한 관보전의 부대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적의 통치구역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왕청부대는 관부대의 투항을 막는다고 하면서 몇차례에 걸쳐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무장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고 하여 관부대의 투항병 몇명을 죽이였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관보전부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복수전을 시작하였다. 조선청년들중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붙들어다가 총살하였다. 조직된지 몇달 되지 않은 왕청유격대는 반일부대에 포위되여 많은 희생을 내였다.

 

 

반일부대와의 관계에서 발로된 이와 같은 미숙성과 무분별성은 조중관계를 급격히 약화시키고 조선혁명앞에 헤여나기 어려운 함정을 파놓았다.

 

 

회의참가자들은 반일부대와의 관계를 망쳐놓은 다음에도 그 과오의 엄중성을 잘 깨닫지 못하고 그 무슨 복수를 운운하는 왕청유격대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비판하였으며 장시간에 걸치는 론의를 거쳐 구국군과의 사업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행동조례에 대하여 다시한번 확인하고 그에 대한 공통적인 리해에 도달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회의에서 론의한것은 어떻게 하면 구국군의 발목을 만주땅에 잡아매두고 그들로 하여금 항일을 계속하도록 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구국군은 그 당시 수만명에 달하는 력량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자기들에게 일본군을 당해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일본사람들자신이 류포시킨 《천하무적》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 이 세상에는 일본을 당해낼 힘이 없고 일본군대에 대적할만 한 군대가 없다고 인정하면서 투쟁을 거의나 포기하였다. 그들에게 남은것이란 어떻게 하면 일본군에게 죽거나 포로되지 않고 아직 전쟁의 불찌가 튀지 않고있는 산해관너머로 안전하게 피신할수 있겠는가 하는 타산뿐이였다.

 

 

일본군은 간도지방에서 왕덕림부대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고있었다. 일본군이 왕덕림부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게 되면 라자구도 불원간 적의 수중에 들어갈수 있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어떻게 하나 구국군과 함께 라자구를 사수하자고 결의하였다. 라자구를 사수하자면 왕덕림을 설복하여 그가 쏘련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 하였다. 구국군의 속심은 쏘련을 거쳐서 중국본토로 가자는것이였다. 반일부대 두령들과 병사들속에서 쏘만국경을 넘어가는것은 하나의 추세로 되고있었다. 수만명의 병력을 가지고있던 리두와 마점산도 쏘련을 경유하여 중국본토로 달아나버리였다. 구국군의 도주를 막을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일본군과 전투를 한번 본때있게 하여 그들의 머리속에서 《무적황군》에 대한 환상과 공포심을 완전히 숙청해버리는것이였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가운데서 왕덕림을 설복할수 있는 적임자는 주보중이였다. 주보중은 국제공산당의 위임을 받고 왕덕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있었다.

 

 

나는 주보중에게 왕덕림을 설복하여 그가 어떤 일이 있던지 퇴각을 중지하고 유격대와의 련합전선에 나서도록 해보라고 권고하였다.

 

 

《우리는 동만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을 토대로 해가지고 유격전을 장기적으로 할수 있소. 문제는 구국군인데 당신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왕덕림을 설복해서 그들이 만주땅에 버티고서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항전을 계속하도록 해야 하오. 그 사람들이 쏘련으로 가겠다는건 씨비리에 가서 사회주의혁명을 하겠다는것이 아니고 쏘련땅을 거쳐 관내로 도망치려는것이요.》

 

 

주보중은 그 말을 듣자 해결하기 힘든 숙제라고 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들이 아직 속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구국군이라는건 사실 겁쟁이들의 집단이요. 일본놈들의 비행기가 우르릉 하고 삐라 한장만 뿌려도 부들부들 떨면서 꽁무니를 빼는 시라소니무리란 말이요. 그러니 도저히 전투를 해볼수 없구만. 그렇게 비겁한 무리들을 나는 난생처음 보았소. 구국군과 련합하여 일본군을 친다는건 망상이나 다름없소.》

 

 

주보중과 같이 련합불가능설을 제창하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였다. 이렇게 되여 의견대립이 생기고 불가능론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진행되였다. 그때는 다 제마끔 영웅이고 천재고 지도자였다.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라고 하는것은 각지에 나가서 지방공작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림시적인 조직인것만큼 누구라고 할만 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러나 회의는 내가 의장이 되여 집행하였고 회의는 회의대로 다하였다. 내가 의장으로 회의를 집행한것은 직급이 높아서가 아니라 구국군들과의 사업에서는 김일성이 로장이라고 하면서 중국동무들이 나를 추대하였기때문이였다.

 

 

이것이 바로 라자구회의다.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로서는 마지막회의였다. 이 회의를 마감으로 병사공작위원회는 해체되였다.

 

 

라자구회의의 결정에 따라 나와 리광, 진한장과 주보중, 호진민은 왕덕림부대, 오의성부대, 채세영부대와의 사업을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오의성과 채세영은 다 왕덕림의 부하들이였다.

 

 

얼마후 오의성부대에 간 진한장한테서 통보가 왔다. 오의성이 라자구회의의 방침에 응하기로 약속하였다는 락관적인 소식이였다.

 

 

내가 왕덕림부대와의 사업을 하고있을 때 일본군이 라자구일대로 밀려들었다. 적들은 우리 주력부대가 왕덕림부대와 련합전선을 형성하면 큰일이라고 하면서 대병력을 동원하여 빠른 속도로 공격해왔다. 왕덕림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라자구에서 도망쳤다. 수천수만명의 대병력이 돌개바람에 말려가는 가을락엽처럼 일본군의 탄막을 피해 쏘만국경쪽으로 철퇴하였다.

 

 

몇십명에 지나지 않는 유격대력량만으로는 도저히 라자구를 사수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구국군과 함께 동녕현쪽으로 후퇴하였다. 동녕현까지 따라가서라도 기어이 구국군을 돌려세우자는것이였다. 적은 인원을 가지고 대병력과 격전을 벌리면서 후퇴하다나니 우리는 도중에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우리가 적의 대군과 싸우면서 동녕현방향으로 갈 때에는 추운 동지달이여서 반일병사들가운데도 얼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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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3차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24일(금)
인민의 심장에 간직된 어머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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