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5 장 5. 새 무장력의 탄생 >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5 장 5. 새 무장력의 탄생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29 16:24 댓글0건

본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5 장 5. 새 무장력의 탄생

 

   


 

5. 새 무장력의 탄생  


  

 

1932년 봄은 세계를 뒤흔드는 사변들로 하여 매우 소란스러웠다. 만주대륙을 강점한 일제는 손중산의 국민혁명에 의하여 밀려난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를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조작해냈다. 일본의 어용선전기관들과 중국, 만주의 친일적인 출판물들은 때를 같이하여 《오족협화》, 《왕도락토》건설을 부르짖으며 만주국을 찬양하였고 아세아와 세계의 진보적인 여론은 이를 강력히 반대배격하였다.

 

 

세계의 이목은 9.18사변의 발발원인과 그 책임을 해명할 사명을 지니고 방금 일본에 도착한 국제련맹조사단의 활동에 쏠리고있었다.

 

 

영국 추밀원고문관 릿든 경을 단장으로 하고 미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의 렬강대표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일본천황의 접견을 받고 수상, 륙군상, 외상까지 만난 다음 중국에 건너와 장개석, 장학량과 회견하는가 하면 만주에 나타나 관동군사령관 혼죠중장도 만나고 9.18사변 발발현장에 대한 시찰도 진행하였다. 일본측과 중국측에서는 서로 릿든조사단을 자기편에 끌려고 접대, 환영경쟁에 열을 올리였다. 조사단이 진상을 밝혀내고 국제련맹이 영향력을 행사하면 일본이 만주에서 철병할지도 모른다는 억측이 정계, 사회계와 보도계는 물론, 정치에 민감해진 소학생들과 마실방 늙은이들의 입에서까지 오르내리였다.

 

 

그러나 안도지구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던 우리는 그런 억측이나 뜬소문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군사훈련에만 열중하였다. 소사하부녀회원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함지에 담아 이고 토기점골등판으로 올라왔다.

 

 

우리는 3월 중순경에 안도에서 동만의 여러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소조의 지휘성원들을 위한 단기훈련(단기강습)을 조직하였다. 지방들에서 20명 가까운 지휘성원들이 소사하 토기점골로 모여들었다.

 

 

단기훈련은 2일간 진행되였는데 첫날에는 리론강의를 하였고 다음날에는 동작훈련을 하였다. 나는 조선혁명의 로선과 방침문제를 가지고 정치학습에 출연하는 한편 유격대의 생활규범과 활동준칙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군사훈련은 주로 박훈이 맡아 지도하였다. 우리는 그때 그 강습에서 대렬동작이나 무기분해결합법과 같은 초보적인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습격, 매복조직과 같은 전술적문제에로 훈련을 점차 심화시켜나갔다.

 

 

안도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본부로, 중심으로 되였다. 두만강연안의 여러 현들에서 공작원들과 통신원들이 우리와의 련계를 지으려고 소사하로 자주 찾아왔다. 우리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한입 건너 두입 건너 국내에까지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듣고 조선과 만주각지에서 20살안팎의 열혈청년들이 사선을 헤치며 안도에 모여와 참군을 요청하였다.

 

 

변달환이 입대를 지망하는 오가자의 청년들을 8명이나 데리고 안도로 나오다가 일본군경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간것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해방직후 나를 찾아왔던 변대우로인은 아들이 참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해동안 속절없는 감옥살이를 한데 대하여 몹시 아쉬워하였다.

 

 

간도 여러 현들중에서도 특히 연길지방사람들이 우리를 제일 많이 찾아왔다. 연길지방에는 적의 통치기관들과 폭압수단들이 집중되여있었고 밀정망이 발달되여있었다. 1932년 4월초에는 라남19사단소속의 38려단 75련대를 기간으로 하고 포병, 공병, 통신병으로 증강된 이께다대좌휘하의 간도림시파견대가 동만지방 《토벌》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길을 비롯한 간도일대에 쓸어들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그 고장 지하조직에서는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을 안도로 많이 보내주었다. 조직의 추천과는 관계없이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청년들도 많았다.

 

 

돈화의 진한장도 호진민(호택민)이라는 중국청년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호진민은 화룡에서 사범학교 교원을 하던 사람이다.

 

 

어떤 날에는 청년들이 한꺼번에 10여명씩 무리를 지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구국군이 도중에서 그들을 붙잡아다가 무리로 학살하였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는 동북자위군, 반길림군, 항일구국군, 항일의용군, 산림대, 대도회, 홍창회와 같은 형형색색의 반일부대들이 많았다. 반일부대라는것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후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고 구동북군에서 떨어져나온 애국적인 군인들과 관리들 그리고 농민들로 이루어진 민족주의군대를 말한다. 이 부대들을 통털어 구국군이라고도 불렀다.

 

 

만주지방의 반일부대가운데서 유명한것으로는 왕덕림, 당취오, 왕봉각, 소병문, 마점산, 정초, 리두의 부대들을 들수 있다.

 

 

동만에서 제일 큰 반일부대는 왕덕림부대였다. 왕덕림은 한때 목릉과 수분하일대의 밀림속에서 아무런 주의주장도 없이 《록림호걸》의 토비생활로 청년시절을 보내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장작상예하의 길림군에 편입되여 정규군의 외모를 갖춘 장교로 된 사람이다. 그는 9.18사변전까지 구길림군에서 3려단 7련대 3대대장으로 복무하였다. 민간에서는 그의 대대를 《구3대대》라고 불렀다.

 

 

일본군대가 만주를 침공한 후 그의 상관이였던 려단장 길흥이 투항하여 관동군사령관을 만났다. 그는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길림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였다.

 

 

자기 상관의 반역행위에 분개한 왕덕림은 즉시에 반변하여 항일구국을 선언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중국 국민구국군을 조직한 다음 오의성을 전방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일본제국주의침략군대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라자구일대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간도지방의 적을 견제하면서 후날 우리 유격대와도 피의 인연을 맺은 오의성, 사충항, 채세영, 공헌영은 모두 왕덕림의 충실한 부하들이였다.

 

 

남만의 산간지대들에서는 당취오의 자위군이 활동하고있었으며 흑룡강성일대에서는 마점산부대가 북상하는 일본군에 저항하고있었다. 안도의 산간오지로 밀려든것은 오의성의 휘하에 있는 우사령부대였다. 이 부대의 드살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보았으며 조선사람들이 만주대륙에 일제침략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에 쐐기를 박느라고 리간질을 계속하는데다가 5.30폭동과 만보산사건에서 받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나쁜 인상이 그때까지도 중국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있었다.

 

 

구국군의 완고한 상층은 조선민족과 중화민족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에 의하여 꼭같은 재난과 불행을 강요당하고있는 피압박민족이며 중국사람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될수 없는것처럼 조선사람들도 일제의 개로 될수 없으며 중국사람들이 조선인민의 적이 될수 없는것처럼 조선사람들도 중국인민의 원쑤가 될수 없다는것을 리해할만 한 정치적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적대시하고있었다. 그것은 구국군의 상층부가 대부분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는 사정과 관련된다. 구국군의 상층부는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파쟁군이며 파쟁군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제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조선의 청장년들을 가차없이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도시들과 벌방지대에서는 일본침략군이 살벌하게 돌아치고 일본군이 채 점령하지 못한 농촌들과 산간지대들에서는 수천수만명이나 되는 구국군들이 길목을 지키고 서서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구국군의 적대행동은 청소한 우리 유격대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엄중한 난관으로 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물론, 산림대와 독립군들까지도 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반대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문자그대로 사면초가의 고립무원한 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우리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할수 없었다. 유격대를 합법화하지 않고서는 대오도 확대할수 없었고 공개적인 군사활동도 할수 없었다.

 

 

부대는 조직했지만 합법화할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뒤골방에 배겨있는 신세가 되였다. 세상에 나타나야 빛을 보겠는데 나타날수 없었다. 군복도 없이 모두 사복을 입고 남의 집 뒤골방에서 모젤이나 주무르며 이렇게 해가지고야 어떻게 항일을 하겠는가고 통탄만 하였다. 그것도 조선부락에나 숨어있을뿐 다른데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밤에만 몇사람씩 비밀리에 나다니는 형편이였다.

 

 

초기에 우리가 유격대를 비밀유격대라고 부른 리유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그때 일본군대들뿐아니라 구국군과 만주군패잔병까지도 피해다녀야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조선의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반동분자들도 경계하면서 다니였다. 합법적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공산당이라고 막 쏘고 행패질을 하는 판이여서 정말 문제거리였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사는 집만 골라다닐수도 없었다. 본래 어렵게 살던 사람들인데 몇십명씩 무리를 지어가서 다 털어먹고나면 생활이 더 어려워질것이니 그것도 야단이였다.

 

 

유격대를 합법화하여 대낮에 다니면서 노래도 부르고 군중들로부터 환영도 받고 선전도 해야 일도 되고 싸울 맛도 나련만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우리는 모여앉기만 하면 유격대를 어떻게 합법화하겠는가,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어떤 방법으로 풀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거듭하였다.

 

 

제일 심각하게 론의된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의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는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였다. 구국군은 그 상층부가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고 지주, 자본가, 관료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군대인데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그들과 손을 잡는것은 계급적원칙의 포기이고 타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는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들은 구국군과 일시적으로 관계를 개선할수는 있어도 동맹관계를 맺을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적대적행동에 대하여서는 실력으로 눌러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주장이였다.

 

 

우리는 구국군이 비록 여러가지 제한성은 있어도 투쟁목적과 처지의 공통성으로부터 항일전쟁에서 우리의 전략적인 동맹자로 될수 있다는 확고한 립장을 가지고 구국군과의 관계를 개선하는것은 물론, 그들과 련합전선까지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상과 리념이 다른 두 무장력의 련합전선에 대한 문제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처음으로 제기된것이기때문에 복잡한 론쟁을 불러일으켰다.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는것은 중국공산당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동만특위에서는 일찍부터 왕덕림부대에 주의를 돌리고 7~8명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파견하여 구국군과의 공작을 하게 하였다. 우리도 리광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구국군부대들에 파견하였다.

 

 

나는 통신원들을 통하여 동산호부대에 파견된 리광이 구국군공작에 부심하고있는 정형을 여러번 보고받았다.

 

 

구국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우리 동무들은 련합전선은 공상이니 우리도 이제는 맞불질을 해서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겨우 설복시켜놓았다. 구국군을 적으로 삼고 그들에게 1대 1로 보복을 가한다는것은 반일이라는 대의와 도리에도 맞지 않고 청소한 우리 유격대를 자멸에로 이끌어갈수 있는 무분별한짓이기도 하였다.

 

 

간도는 물론, 만주전역의 공산주의자들과 유격대원들이 구국군때문에 고심하고있었다.

 

 

당시 각 현에 있는 유격대라고 해야 얼마 안되였다. 한개 현에 몇십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구국군 한테 잡히기만 하면 모조리 죽는 판이니 부대를 늘일 욕심이 있어도 도무지 늘일수가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나는 우리 유격대가 당분간 우사령부대에 들어가서 별동대로 활동하는것이 합리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우사령부대에 들어가면 구국군의 간판을 가지게 되니 피해를 입을 념려가 없고 무기도 좀 해결할수 있지 않겠는가, 영향만 잘 주면 그들을 공산주의화하여 안전한 동맹자로 만들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동무들의 토론에 붙이였다.

 

 

이 문제를 가지고 당조직의 본부가 있는 소사하 김정룡의 집에서 하루종일 회의를 하였다. 그 모임을 지금은 소사하회의라고 한다. 그 회의가 아주 격렬하였다. 구국군부대안에서 별동대로 활동하는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걸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목이 아프게 론쟁을 하였다. 애연가들은 물론, 담배를 피울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마라초를 꼬나들고 쉴새없이 연기를 뿜어대는 바람에 눈이 쓰리고 숨이 막혀서 혼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결국 별동대에 관한 나의 착상은 동무들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

 

 

회의에서는 구국군과의 담판을 위하여 우사령부대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적임자로 내가 선발되였다. 동무들이 나를 선출한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가겠다고 자청해나섰다.

 

 

당시 우리한테는 군사외교를 해본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대표로 보내겠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론의되였다. 대표는 선출해서 보낸다 하더라도 상대측이 접근이나 시키겠는지, 정작 담판을 하게 되면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내대고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겠는지 그리고 수틀리면 우리 대표를 사살하지나 않겠는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대표로는 이 모든 정황에 능숙히 대처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 가야 한다는것이 이구동성으로 강조되였다.

 

 

우리들가운데는 이런 기준에 적합한 인재가 없었다. 우사령과 마주앉자면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발해야겠는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는 박훈, 김일룡, 호진민뿐이였다. 김일룡은 나이가 나보다 10여살이나 이상되는 사람이였지만 중국말을 잘 몰랐다. 그 나머지는 다 조아범처럼 학교를 갓 나온 18~20살내기들이였다.

 

 

나는 동무들한테 나를 보내줄것을 제기하였다.

 

 

동무들은 그 제의를 반대하였다. 성주동무는 대장인데 우사령이 공산당이라고 잡아제끼면 곤난하다, 그러니 진한장이나 조아범이나 호진민 같은 중국동무들가운데서 누구든지 외교에 능한 사람이 가는것이 좋겠다는것이였다.

 

 

나는 동무들에게 우사령이 내가 가면 무엇때문에 죽이겠는가고 물었다. 동무들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들어갔다가 《꼬리빵즈》 하고 죽이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데 너라고 못 죽일게 뭔가, 왕청 관부대사건때문에 요즈음은 구국군이 조선청년들이라면 더 눈을 밝힌다는데 너는 가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관부대사건이란 왕청에 있는 리광동무의 비밀유격대가 관부대란 반일부대의 무장을 해제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하여 유격대와 구국군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유격대의 활동에 더 어려운 국면이 조성되게 되였다. 왕청에서 온 통신원은 자기네 고장에서 관부대사건이 있은 다음 그 보복으로 여러명의 유격대원들이 구국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고 하였다. 김책동무가 북만에서 산림대에 붙잡혀 죽을번 한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였다.

 

 

나는 그냥 내가 가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내가 그렇게 고집한것은 남들보다 뛰여난 외교술을 가지고있거나 우사령을 굽혀낼 특별한 처방이라도 있어서가 아니였다. 유격대의 존망이 우사령과의 담판에 달려있고 우리의 성패도 그들과의 련계를 조정하는데 달려있다는것과 구국군을 동맹자로 만들지 않고서는 우리가 동만땅에서 유격전은 고사하고 문전출입조차 할수 없다는것이 엄연한 현실로 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무장투쟁을 시작하지 못한다면 조선의 남아로서 살 보람도 없고 살아야 할 리유도 없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혁명을 하지 못한다, 내가 중국말을 잘하고 청년운동시기에 풍랑도 여러차례 겪어본것만큼 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사령을 만날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가야 한다고 동무들을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박훈, 진한장, 호진민 그밖의 중국청년 한명을 더 데리고 우사령을 찾아 떠났다. 아무런 신변안전담보도 없는 모험의 길이였다.

 

 

상대측의 사령부는 량강구에 자리잡고있었다.

 

 

구국군이 우리더러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으면 우리는 안도에서 왔다고 하지 말고 길림에서 왔다고 대답하기로 약속하였다. 구국군들앞에서 유격대의 주둔구역인 동만의 지명을 대는것은 재미가 없었다.

 

 

우리는 대사하로 가는 길에서 우사령부대와 맞다들었다. 수백명의 대오가 《삼국지》에 나오듯이 《우사령》이라고 쓴 기발을 날리며 위풍당당하게 행군해오고있었다. 우사령부대가 남호두에서 일본군대를 소탕하고 기관총까지 로획한 후여서 그들에 대한 소문이 굉장히 날 때였다.

 

 

《피하지 않겠소?》

 

 

호진민이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니, 맞받아나가자구!》 하면서 그냥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머지 네사람도 나의 량옆에 가지런히 서서 보조를 맞추어 걸어나갔다.

 

 

구국군들은 우리를 보자 《꼬리빵즈, 오라!》 하고 호령하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우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도 당신들처럼 항일을 하는데 왜 붙잡으려고 하는가고 중국말로 항의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조선사람이 아닌가고 되물었다. 나는 떳떳하게 조선사람이라고 대답한 다음 진한장, 호진민동무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은 중국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급히 상의할 문제가 있어 당신네 사령한테로 찾아가는 길이요. 우리를 사령한테로 안내하시오!》

 

 

내가 이렇게 위엄을 풍기며 요구하자 그들은 좀 수그러들면서 자기네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 얼마쯤 갔을 때 구동북군장교차림의 지휘관이 점심식사지령을 내리고 우리를 어떤 농가에 구금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길림육문중학교시절의 나의 스승이였던 류본초선생이 그 집으로 들어왔다. 류본초선생은 육문중학교에서 얼마동안 한문을 가르친적이 있고 그후 문광중학교와 돈화중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은 사람이였다. 그는 상월선생과도 친교가 깊었고 진한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선생이 호인이고 지식이 해박한데다가 좋은 책들도 많이 알선해주고 훌륭한 시들을 지어 학생들앞에서 즐겨 읊어주었기때문에 우리는 무척 그를 따르고 존경하였다.

 

 

나와 진한장은 류본초선생을 알아본 순간 탄성을 내지르며 선생의 앞으로 뛰여갔다. 역경에 처했을 때 선생을 만나니 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류본초선생도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에게 연방 질문을 던지였다. 너 김성주, 어째서 여기 있느냐? 어떻게 되여 여기에 왔느냐? 어데로 가다가 이렇게 붙잡혔느냐?

 

 

내가 사연을 간단히 설명하자 선생은 자기 부하들에게 《이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 나도 여기서 점심을 함께 먹겠다. 잘 차려오라.》 하고 큰소리로 지시하였다. 알고보니 그는 일본군대가 만주로 쳐들어오자 교단을 떠나 우사령부대에 들어와 참모장으로 활동하고있었다.

 

 

류본초선생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라가 망해가는걸 보고 참을수 없어 군복을 입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부하들을 데리고 싸우자니 속타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하면서 같이 가서 자기네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우리가 그 의견에 동의하고나서 우사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자 그는 량강구에 있던 우사령이 지금 안도성시에 들어가니 자기와 함께 가면 만날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선생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들도 조선사람부대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제놈들에 대한 원한이야 중국사람들보다 조선사람들이 더 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일부대에서는 왜 조선사람들이 항일을 못하게 자꾸 행패를 부리고 잡아죽입니까?》

 

 

《아, 그러게말이야. 나는 그러지 말라고 자꾸 말리는데두 그 모양이거든. 공산당이 뭔지두 알지 못하는 무지막지한것들이. 공산당이 일제를 반대하는데 무엇이 나쁜가?》

 

 

류본초선생도 분개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제는 됐다, 살길이 나졌다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박훈을 소사하에 보내여 그곳 동무들에게 우리가 무사하다는것과 우사령부대의 참모장이 우리를 진심으로 후원해주었기때문에 유격대를 합법화할수 있는 전망이 보인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류본초선생을 따라 안도성시로 떠났다.

 

 

류본초에게는 전용군마가 한필 있었다. 우리가 선생에게 말을 타라고 권고하였으나 그는 《너희들이 걸어가는데 내가 말을 타구 가다니 될 말이냐. 같이 걸어가면서 이야기나 하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시에 가닿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줄곧 도보행군을 하였다.

 

 

반일부대병사들은 거의 모두 팔에 완장을 두르고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나같이 《부파스 부요민》이라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그것은 죽기를 겁내지 말며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다.

 

 

군졸들에게서 풍기는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그들이 내세우고있는 좌우명은 매우 건전하고 전투적이였다. 그 글이 나에게 우사령과의 해후가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의 기대를 품게 하였다.

 

 

그날 우리는 류본초선생의 안내로 거침없이 우사령을 만날수 있었다. 그는 참모장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우리를 례절있게 맞이하고 대우도 높은 급으로 잘해주었다. 우리모두가 중학교졸업생으로서 연설도 할줄 알고 격문도 쓸줄 알고 무기도 다룰줄 아는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이라는것을 내탐하고 자기네 곁에 붙잡아두고싶은 욕심이 나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짐작과 같이 우사령은 정말로 우리를 자기네 부대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보고는 사령부선전대 대장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나의 속심은 자기 군대를 만들어 그것을 합법화하자는것인데 사령이 나더러 선전대대장을 하라고 하?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6일(목)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9일(목) ​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2일(일)
[동영상] [혁명활동소식]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5차전원회의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10일(금)
인민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새겨준 의의깊은 회의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
최근게시물
[사설]도전과 시련이 겹쌓일수록 천백배로 강해지는 주체조선의 불가항력을 힘있게 과시하자
명당자리에 깃든 위대한사랑
외무성 국제기구국장 우리를 부당하게 걸고든 G7수뇌자회의를 규탄
모략재단조작놀음에 숨겨진 흉심을 발가본다
경애하는총비서동지의고귀한 가르치심 일군들은 혁명적군중관을 가져야 한다
군사적지원에 탕진되는 미국민들의 혈세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7월 2일, 7월 1일)
천추만대를 두고 결산해야 할 미제의 살륙만행(5)
미국은 서산락일의 운명에서 벗어날수 없다
칼물고 뜀뛰기를 해볼 심산인가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7월 2일(토)
민족어발전을 조국의 통일을 위한 중요한 문제로 보시고
Copyright ⓒ 2000-2022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