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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9.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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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23 20:3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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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9.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9.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한때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자들은 《리상촌》건설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리상촌》이라고 하면 누구나 착취와 압박이 없고 불평등이 없으며 만사람이 다같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계(마을)를 련상할것이다. 오랜 옛적부터 우리 민족은 이런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를 꿈꾸어왔다.

 

 

민족주의자들이 제창한 《리상촌》건설에 대한 주장은 만민이 유족하고 화목하고 평화롭고 오붓하게 살아가려는 조상들의 지향과 념원을 반영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리상촌》건설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물은 안창호였다.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직후 중국청도에서는 안창호, 리동휘, 신채호, 류동열 등이 모여 회담을 벌리였는데 여기에서 안창호가 내놓은것이 바로 《리상촌》건설에 대한 방안이였다. 심중한 론의끝에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미국사람들이 경영하던 대동실업회사(밀산현)의 땅을 사들여 그것을 개간하고 사관학교도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이런 《리상촌》을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자금도 뽑고 인재도 키우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물적, 인적, 재정적기초를 마련하자는것이였다.

 

 

이 계획이 류산된 후에도 안창호는 여러해동안 《리상촌》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적당한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고난에 찬 노력을 하여왔다. 그가 《리상촌》건설에 이처럼 큰 심혈을 기울인것은 《실력양성론》을 물질적으로 뒤받침할수 있는 독립운동의 기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데 있었다.

 

 

《리상촌》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당시 독립운동에서 하나의 풍조로 되여있었던것 같다.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장을 만들고 무관학교의 설립으로 실력양성의 소박한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료하농촌도 그런 풍조를 타고 생겨났다.

 

 

료하농촌을 처음으로 개척한것은 남만지방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이였다. 송석담, 변대우(변창근), 김해산, 곽상하, 문상목을 비롯한 남만의 민족주의세력중 일부가 서부방향으로 방황하다가 료하기슭에서 보짐을 풀었다. 그들은 조선의 리상촌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여기에 300여호의 동포들을 이주시킨 다음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별세상을 꾸리기 시작했다. 우에서 렬거한 다섯세대가 먼저 살았다고 하여 그들이 정착한 고장에 오가자라는 지명을 달았다.

 

 

그 당시 길림의 문광중학교에 다니는 동무들가운데 고유수와 오가자지방에서 온 청년들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이 오가자가 좋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는 오가자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으며 이 마을을 혁명촌으로 개조할 결심까지 품게 되였다.

 

 

내가 동만에서 오가자로 간것은 1930년 10월이였다. 나는 원래 동만에서 무장투쟁준비와 관련된 큰 회의를 소집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정세로 보아 그곳이 회의장소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여 장소를 오가자로 변경시키였다. 몇달동안 오가자에 눌러앉아 회의준비를 하면서 겸하여 마을의 혁명화도 다그치자고 결심하였다. 가보니 듣던대로 풍속도 좋고 인심도 좋았다.

 

 

이 고장에서는 바람이 심하여 지붕에 기와를 올리지 못하고 진흙을 발랐다. 염분이 섞인 진흙을 바르면 비가 새지 않았다. 오가자사람들은 담장도 흙으로 규모있게 쌓았다. 진흙을 파서 메로 두드리다가 돌처럼 굳어졌을 때 일정한 규격으로 잘라가지고 담장을 쌓았는데 그렇게 만들어낸 토피는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 그 고장 농민들이 장담하였다.

 

 

오가자를 개척한 유지들은 자기들의 리념이나 주의주장과 맞지 않는 이색적인 사상조류가 마을에 들어오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과 합심하여 진펄을 논으로 개간하고 마을에 학교도 세웠다. 농우회니, 청년회니, 소년학우회니 하는 대중조직도 내오고 촌공회라고 부르는 자치기관도 내왔다. 일본이 《한일합병》을 선포한 8월 29일이 오면 마을의 주민들을 모여놓고 《국치일가》를 부르게 하였다. 일본군경들과 중국반동군벌의 마수가 잘 미치지 못하는 자기네고장을 오가자사람들이 《천국》으로 여기게 된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가자의 주민구성에서 대다수를 이루는것은 평안도사람들과 경상도사람들이였다. 경상도사람들은 남만청총계통의 엠엘파의 영향밑에 있었고 평안도사람들은 주로 정의부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나는 평안도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오가자에 가서도 카륜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사람들의 집에 자주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상도사람들이 신경을 쓸수 있었다.

 

 

우리는 카륜에 있을 때 조선혁명군 대원들을 공작원으로 몇명 파견하였지만 그들이 오가자에 와서 크게 맥을 추지 못하였다. 고집이 세고 지반도 확고한 마을의 유지들을 설복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동무들의 소개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 한두주일도 아니고 몇달동안이나 한고장에 그처럼 오래 붙박혀있은것은 우리가 오가자를 그만큼 중시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는 오가자를 중부만주일대에서의 민족주의세력의 마지막보루로 보았다. 여기에서 사업을 잘하면 오가자를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만들수 있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북부국경일대에서 농촌마을들을 우리의 영향하에 둘수 있었다.

 

 

우리가 혁명의 기본동력을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로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의 혁명화에 많은 힘을 기울인것은 우리 나라 계급구성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된다. 농민은 우리 나라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었다. 간도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구의 80%이상이 조선사람이라면 그중 90%정도는 농민이였다. 군벌들의 박해와 지주, 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한 가혹한 수탈로 하여 그들은 최악의 빈궁과 무권리속에서 살고있었으며 지대를 통한 착취와 함께 노비라든가 노예들에게 가해지는것과 같은 경제외적착취에 의해 사정없이 혹사당하였다.

 

 

국내에 사는 농민들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였다. 이것은 농민대중이야말로 로동계급과 더불어 혁명에 가장 절실한 리해관계를 가지는 계급이며 우리 혁명에서는 농민이 로동자와 같이 주력군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농촌의 혁명화는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서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고리였다.

 

 

공작원들의 활동으로 청년들속에서 우리의 지향을 따르려는 열망이 급속히 높아지게 되자 오가자의 유지들은 대통을 휘두르며 요새 젊은것들의 머리에 딴물이 들어간다고 하면서 료하벌에 사회주의를 끌어들이는 놈팽이들은 뼈가 성하지 못할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간도는 공산당때문에 다 망했다는데 그 미친 바람이 오가자에까지 들어오면 료하농촌도 무사치 못할것이라고 말하는 유지들도 있었다.

 

 

서뿔리 서두르다가는 유지들의 대통에 얻어맞을수 있었다.

 

 

청년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공산주의행진곡에 발을 맞추어야겠는데 령감들의 눈에 날것 같아서 망설이였다. 주대가 좀 있다는 청년들은 유지들과 엇서나갔다.

 

 

나는 공작원들의 보고를 듣고 오가자를 혁명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보다도 유지들과의 사업을 잘하는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유지들의 사고방식을 돌려세우지 않고서는 오가자를 《리상촌》건설의 허황한 꿈에서 건져낼수 없었으며 료하농촌을 중부만주의 본보기농촌으로 만들어보려는 우리의 구상도 실현할수 없었다. 유지들만 돌려세우면 나머지사람들은 우리가 할탓이였다.

 

 

그런데 우리 공작원들은 석달째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변두리만 돌고있었다. 오가자의 유지들이 그만큼 간단치 않았다. 독립운동의 전적에다가 학식과 리론을 겸비한 령감들이여서 보통수완을 가지고서는 그들에게 말도 붙일수 없었다. 이 유지들의 집단이 마을을 쥐락펴락하였다.

 

 

촌공회를 뒤에서 조종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총찰하는 사람은 변대우라는 로인이였다. 그가 마을의 실권자로서 유지들을 조종하였다. 마을에서는 그를 《변뜨로쯔끼》령감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그런 별명을 붙인것은 그가 뜨로쯔끼에 대한 말을 자주 하였기때문이다.

 

 

변로인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국내와 만주각지를 떠돌아다니였다. 초기에는 고향 한천(평안남도)과 자성, 도청거우(림강현) 등지에서 학교들을 세우고 교육활동을 하였다. 그가 무장활동에 관여한것은 1918년 림강의 모아산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독립군부대에 들어가있을 때부터였다. 그때 그는 나의 아버지와 련계를 가지느라고 림강의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변로인이 오지 못할 때에는 강진석외삼촌이 그와 아버지사이의 련계를 지어주었다.

 

 

 

대한독립단 선전부장과 민족독립군 부총재, 광복군 군법부장 겸 제1영장직을 거쳐 통의부의 실업부장직까지 차지하고 독립군운동을 추켜세우려고 동분서주하던 그는 1926년부터 군직에서 물러나 《리상촌》건설에 몰두하였다.

 

 

이 로인이 한때는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면서 쏘련의 원동지방에도 드나들었다. 그에게는 고려공산당에 관여했을 때 받았다는 푸른 뚜껑의 당증도 있었다.

 

 

변대우로인을 돌려세우지 않고서는 완고한 유지집단을 돌려세울수 없었으며 마을을 혁명화할수 없었다.

 

 

내가 오가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농우회사업을 책임지고있던 변로인의 아들 변달환이 나한테로 왔다. 그는 나에게 민족주의자들을 제끼고 오가자를 《리상촌》으로부터 혁명촌으로 만들어야겠는데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하면서 김선생이 왔으니 이제는 완고하고 쓸모없는 령감들을 타도하자고 하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변달환에게 물었다.

 

 

《타도라니? 그건 어떻게 하자는겁니까?》

 

 

변달환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였다.

 

 

《령감들이 뭐라건말건 우린 우리끼리 조직들을 내오고 딴 가마밥을 먹으면서 오가자를 사회주의동네로 만들자는거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오가자가 둘로 쪼개질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로선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오가자를 저 락후한 령감들에게 맡길수는 없구.》

 

 

《문제는 유지들이 우리를 지지하게 만드는겁니다. 내가 회장선생네 아버지와의 사업을 좀 해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달환은 그 누가 접근해도 소용없다고 하였다. 그동안 국민부에서도 오고 상해림시정부에서도 오고 엠엘계의 공산당재건위원회의 인물들도 와서 저마다 오가자에 발을 붙이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 아버지한테서 랭대를 받고 돌아갔다, 어지간한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고 설사 상대가 록록치 않은 민족주의거두라고 해도 훈계를 해서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회장선생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친분관계가 있고 또 회장선생과 나도 구면이니 생판 모르는 남남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고 했더니 변달환은 벽창호같은 자기 아버지한테는 연고관계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몹시 난처해하였다. 변달환은 10년전에 우리 아버지에게 보내는 변로인의 편지를 가지고 림강에 온적이 있었다.

 

 

나는 마을의 유지들이 늘 모여앉군 하는 변달환이네 집에서 여러날 《변뜨로쯔끼》령감과 담화를 하였다.

 

 

첫날에는 주로 변대우로인이 말을 많이 하였다.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려대는데 기상이 아주 도도하였다. 김선생의 아들이 와서 반갑다고는 하면서도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였다. 말끝마다 《너희들》, 《너희들》 하면서 훈시만 하였다. 인물이 잘나고 기상이 칼칼한데다가 리론수준도 상당해서 처음부터 위압을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변로인이 내 나이를 묻자 다섯살을 불쿠어 스물세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나이를 불쿠지 않고 열여덟살이라고 하면 그가 더욱 애숭이처럼 대할수 있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것만큼 스물세살이라고 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어디에 가나 나이를 물으면 스물세살 아니면 스물네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는것이 유지들과의 사업에서도 유리하고 청년들과의 사업에서도 유리하였다.

 

 

나는 변로인이 리치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는 경우에도 반박하거나 중단시키지 않고 례절을 차리면서 참을성있게 들어주었다.

 

 

로인은 요새 젊은이들은 남이 열마디를 하면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봉건이요, 뭐요 하면서 트집만 잡는데 성주와는 말할 재미가 있다고 하였다.

 

 

하루는 그 로인이 저녁을 차려놓고 나를 청하였다. 김형직선생이 생존해계실 때 자기는 림강에서 식사대접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은 자기가 변변치 않은 음식이지만 한상 차렸다고 하였다.

 

 

로인은 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이런 질문을 하였다.

 

 

《너희들이 우리 〈리상촌〉을 허물어버리려고 왔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자기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을 제일 경계한다고 하던 변달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리상촌〉을 허물다니요. 우리가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로인님들이 공을 들여 꾸려놓은 〈리상촌〉을 왜 허물어버리겠습니까. 우리에겐 그런 힘도 없습니다.》

 

 

《음, 그런가. 그런데 우리 달환이를 필두로 해서 오가자의 젊은 녀석들은 밤낮 〈리상촌〉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늙은것들을 타도하고 우리 동네에 붉은기를 날릴 생각만 하고있지. 소문을 들어보면 오가자의 청년들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성주라는데 길림청년들도 그 녀석들처럼 〈리상촌〉이라는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어디 한번 우리 〈리상촌〉에 대한 견해를 솔직히 터놓아보아라.》

 

 

《나는 〈리상촌〉을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국에 쫓겨와서 방황하던 조선동포들을 한곳에 모여놓고 오붓이 살아보자고 꾸린것이 〈리상촌〉이겠는데 왜 나쁘다고 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료하진펄에 이런 정도의 조선동네를 만들어놓은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로인님들이 마을을 꾸리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변로인은 그 말을 듣자 흡족해서 코수염을 쓰다듬었다. 말투도 《너희》로부터 《자네》로 변하였다.

 

 

《그러면 그렇겠지. 자네도 이제 알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경찰도 없고 감옥도 없고 관청도 없네. 촌공회라는 자치기관을 통해서 조선사람들끼리 만사를 민주주의적으로 풀어나가고있단 말일세. 이런 리상적인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나는 이때야말로 《리상촌》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립장을 명백히 밝혀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로인님, 자치기관을 꾸려놓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생활상편의를 도모하는 마을을 건설한것은 애국적인 소행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마을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독립할수 있겠습니까?》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리며 위엄을 뽑던 로인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눈섭만 씰룩거리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독립은 못해. 자네가 내 아픈 곳을 면바루 건드렸네. 〈리상촌〉이라고 만들어는 놓았지만 독립운동에 보탬은 못 주고있지. 그래서 나도 고민하고있네. 〈리상촌〉을 건설해서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리상촌》건설의 허황성을 론증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이국땅에다가 《리상촌》을 건설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로인님들의 노력으로 오가자가 다른 고장에 있는 조선인부락보다 더 살기가 편한 동네로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사람들의 리상이 해결되였다고 볼수는 없다, 우리 민족의 리상은 왜놈도 없고 지주도 없고 자본가도 없는 독립된 조국에서 착취와 압박을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것이다, 그런데 지주한테 빚을 지고 살면서 리상적으로 산다고 말할수 있는가, 왜놈들이 만주로 쳐들어오면 오가자도 무사치 못할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먹는것은 시간문제이다, 왜놈들은 조선민족이 리상적으로 사는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리상촌〉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는건가?》

 

 

변로인은 초조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였다.

 

 

《우리는 이 마을을 현상유지나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위해서 싸우는 마을로, 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자는것입니다.》

 

 

《그러니 오가자에 사회주의를 퍼뜨리겠단 말이지. 그건 안되네. 난 사회주의라면 질색이야. 기미년 여름에 관전에서 자네 아버지가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을 때 우리는 다같이 그 뜻을 지지했네. 그런데 그후 고려공산당을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공산주의자들이라는게 말짱 미친 놈들뿐이더란 말일세. 그놈들이 하는짓을 보면 전부 종파질뿐이야. 그다음부터는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오한이 나더군.》

 

 

변대우로인이 고려공산당에서 받은 푸른 당증을 꺼내보인것이 이때였다.

 

 

《성주가 혁명을 하느라고 아무리 애를 쓰며 돌아다녀두 이런 당증이야 없겠지?》

 

 

로인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나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나는 그 당증을 펼쳐보다가 양복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었다.

 

 

뜻밖에 그런 일을 당한 로인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종파질을 하다가 망한 고려공산당 당증인데 좀 두고보겠습니다.》

 

 

로인이 당증을 돌려달라고 할것 같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자네들이 오가자를 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겠다고 하는데 특별한 방략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강동, 신안툰, 내도산, 카륜, 고유수 등의 마을들을 어떻게 혁명화하였는가 하는데 대해서 장시간 이야기하였다.

 

 

로인은 이야기를 매우 주의깊게 들었다.

 

 

그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네들이 말하는것을 다 들어보면 쓰딸린주의자들인데 나는 반대 안하네. 그러나 쓰딸린만 쓰딸린이라고 해서는 안돼. 뜨로쯔끼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라고 하면서 뜨로쯔끼의 리론을 풀었다.

 

 

그렇다고 그가 맑스-레닌주의를 반대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뜨로쯔끼에 대하여 아주 강한 인상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내가 공산주의리론에 정통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상대하였지만 뜨로쯔끼를 그처럼 두둔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이상하여 변로인에게 물었다.

 

 

《로인님께서 뜨로쯔끼를 그처럼 숭배하는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사실 나는 뜨로쯔끼를 숭배하지 않네. 지금 청년들이 덮어놓고 큰 나라 사람들을 숭배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거네. 뜨로쯔끼면 뜨로쯔끼고 쓰딸린이면 쓰딸린이지 지금 젊은것들은 쩍하면 큰 나라 사람들의 명제를 끄집어내놓고 무엇이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그리 대단한것인가. 쓰딸린의 명제가 어떻고 뜨로쯔끼의 말이 어떻다는것이야 로씨야사람들이나 할 말이지 조선사람이야 조선의 얼을 가지고 제 나라 혁명을 잘하기 위한 말을 해야 할게 아닌가.》

 

 

로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며칠동안 《변뜨로쯔끼》령감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나는 그가 보통로인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처음에 혹시 이 로인이 뜨로쯔끼파가 아니겠는가 하는 의혹도 가지였다. 그러다가 뜨로쯔끼파는 아닌데 종파싸움에 신물이 나서 청년들에게 한번 경종을 울리는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너희들은 맹목적으로 이것도 숭배하고 저것도 숭배하는 식으로 살아가서는 안된다, 무엇때문에 로씨야가 어떻소, 쓰딸린이 어떻소 하면서 남의 나라의 말만 하는가, 매사에 로씨야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 로인이 우리한테 말하자고 하는 사상은 분명 이런것이였다. 요컨대 제정신을 가지고 살라는것이였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상관하지 않네. 내 아들의 일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네. 우리 달환이가 무엇을 하건 그것은 자기에게 달렸지.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자기 얼도 없이 남들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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