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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3장 8. 차광수가 찾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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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12 13:3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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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3장 8. 차광수가 찾은 길

  

  


 

8. 차광수가 찾은 길 

  

길림시절을 회상할 때면 잊을수 없는 얼굴들이 수없이 떠오르군 한다. 그 얼굴들의 전렬에는 항상 차광수가 서있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것은 1927년 봄이였다.

 

 

나에게 차광수를 처음으로 소개해준 사람은 최창걸이다. 최창걸은 화성의숙이 페교된 다음 정의부본거지의 하나였던 류하현의 삼원포에서 독립군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그의 련락원이 쪽지를 가지고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그 쪽지에는 이제 차광수란 사람이 길림에 가니 만나보라는것과 자기도 인차 길림에 한번 오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며칠후 내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목이 한쪽으로 약간 기울사 한 안경쟁이청년이 불쑥 내앞에 나타나 밑도 끝도 없이 최창걸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안다고 대답하자 그는 무작정 손부터 내밀었다. 그가 바로 차광수였다.

 

 

그날 차광수는 될수록 자기는 말을 적게 하면서 나한테 말을 많이 시켰다. 그러다보니 그는 묻고 나는 대답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였다.

 

 

그는 몹시 무뚝뚝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졌다.

 

 

얼마후 최창걸이 약속대로 길림에 왔다. 길림에는 정의부의 지도부가 있었고 그들을 호위하는 중앙호위대가 신개문밖에 막사를 정하고있었다. 최창걸은 자기네 중대에서 중앙호위대에 련락할 일이 생기자 그것을 핑게로 길림에 찾아온것이다.

 

 

나는 최창걸에게 차광수와의 담화내용도 이야기해주고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도 실토하면서 그가 아직 속을 주는것 같지 않더라는 말도 하였다.

 

 

최창걸은 자기가 처음 그를 만날 때에도 역시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 지내놓고보면 사람은 진국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최창걸이 속해있는 독립군중대장한테 류수하자학교에 공산주의선전을 하는 교원이 있다는 사실이 통보되였다.

 

 

중대장은 그를 당장 체포해오라고 하였다.

 

 

최창걸은 공산주의라면 덮어놓고 이단시하는 독립군한테 차광수가 혹시 행패라도 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기의 영향하에 있는 대원들에게 단단히 과업을 주어보냈다.

 

 

최창걸의 과업을 받은 독립군대원들은 차광수가 하숙하고있는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였는데 그들이 받은 저녁상이 몹시 초라했던 모양이다. 강조밥 한숟가락을 물에 마니 죽은 좀벌레와 쌀껍데기가 둥둥 떠올랐다고 한다.

 

 

돌아다니면서 대접을 받는데 습관된 독립군대원들은 이것도 밥인가, 독립군을 대하는 본때가 덜돼먹었다고 을렀다멨다.

 

 

그때 차광수가 집주인을 두둔해나섰다.

 

 

《이 집 주인들은 며칠째 낟알구경도 못하고 푸성귀로 끼니를 에우고있소. 독립군어른들이 왔다고 그래도 성의를 다하느라 지주집에 가서 쌀을 꾸어다 밥을 지었단 말이요. 잘못을 따지면 나쁜 쌀을 준 지주한테 있지 정성껏 밥을 지어 대접한 주인한테야 무슨 죄가 있겠소.》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치던 독립군대원들도 차광수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리치에 맞는 말이여서 트집을 잡을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독립군도 몰라본다고 우둘렁거리던 그들이 나중에는 차광수의 인품에 끌리여 체포는커녕 빈손으로 돌아가서 중대장에게 차광수란 사람은 공산당은 아니고 대단한 애국자라고 보고하였다.

 

 

최창걸자신도 차광수를 만나보았는데 과연 사귈만 하더라는것이였다. 원래 최창걸은 자기가 일단 좋다고 본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진지하고 지극하였다.

 

 

나는 최창걸의 눈에 좋게 보였으면 차광수가 좋은 사람일것이라고 믿었다.

 

 

최창걸이 돌아간 다음 한주일쯤 있다가 불쑥 차광수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한동안 길림바람을 좀 쐬였노라고 하면서 아닌밤중에 홍두깨라는 식으로 나에게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를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배신한것과 관련하여 당시 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가 격렬하게 론의되고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와 기회주의자를 가르는 하나의 시금석처럼 되여있었다. 그래서 차광수도 만나자 바람으로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은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장개석의 변절로 중국혁명에서는 복잡한 사태가 조성되였다.

 

 

장개석이 배신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중국혁명이 눈부신 앙양기에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혁명을 추동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되였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 중국혁명은 혁명전쟁의 방법으로 전국의 반동통치를 전복하는데로 나아갔다. 제국주의타도, 군벌타도, 봉건세력숙청이라는 구호밑에 1926년 여름부터 북벌을 개시한 국민혁명군은 호남, 호북, 강서, 복건 등 여러 성들을 장악하고 양자강류역의 주요도시들을 련이어 점령하면서 일제의 조종밑에 화북지방까지 차지하고있던 장작림반동군벌들에게 드센 압력을 가하고있었다.

 

 

상해의 로동계급은 세차례에 걸치는 영웅적봉기로 도시를 장악하였으며 무한과 구강의 인민들은 북벌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영제국주의자들로부터 조계지를 탈환하였다. 로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북벌군의 진공에 호응하였고 농민들은 로동자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대중적으로 북벌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런 때에 장개석은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혁명을 배신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는 혁명의 지도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음모적인 방법으로 국민당지도부와 정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제국주의렬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막후교섭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장개석이 이런 배신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중국혁명이 보다 멀리 앞으로 전진하였을것이며 따라서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도 지금처럼 날카롭게 제기되지 않았을것이라고 하면서 차광수는 몹시 분해하였다.

 

 

광동혁명근거지가 공고화되고 북벌혁명이 일정에 오르자 장개석은 곧 군사독재를 수립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파시스트적인 테로전에로 이행하였다. 그는 1926년 3월에 중산함사건을 조작한 후 그것을 계기로 황포군관학교와 국민혁명군 1군에서 주은래를 비롯한 모든 공산당원들을 몰아냈고 1927년 3월에는 손중산의 3대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당 남창시당부와 구강시당부를 무력으로 해산하였으며 3월 31일에는 중경에서 군중대회장을 습격하여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1927년 4월 12일에는 상해에서 혁명군중에 대한 야수적인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 피비린내나는 대도살은 지방에까지 파급되였다.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하여 중국혁명은 일시적인 퇴조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는 중국혁명의 이러한 실태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일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오게 되였다.

 

 

이런 분위기가 아마 차광수에게 자극을 준 모양이였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민족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것은 우리가 《ㅌ.ㄷ》를 무을 때부터 내세운 립장이였다.

 

 

그날 나는 차광수에게 조선의 일부 타락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자치》와 민족개량주의를 설교하고있지만 량심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국내와 해외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고있다, 일제의 야만적식민지통치를 체험하고있는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일정신이 강하다, 그러므로 그런 민족주의자, 민족자본가들과는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민족주의에 대한 우리 식의 독자적인 해석에 그 기초를 두고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우리는 민족주의를 민족해방투쟁무대에 맨 처음으로 등장한 하나의 애국적인 사조로 보았다.

 

 

원래 민족주의는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발생하였다.

 

 

몰락의 비탈길을 굴러내려가고있던 왕조정치의 심연속에서 내우외환이 거듭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한 개국의 진통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하였을 때 개화의 등불을 들고 《자주독립》,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력사무대에 태여난것이 바로 민족주의라고 말할수 있다. 민족의 자주권이 외부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히고 국토가 리권쟁탈을 위한 렬강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있을 때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조가 등장하여 대중의 지도사상으로 된것은 력사발전법칙에 부합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신흥부르죠아지들이 민족주의기치를 들고 민족운동의 선두에 섰다고 하여 민족주의가 처음부터 자본가계급의 사상이였다고 보는것은 공정한 견해라고 볼수 없다.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에는 인민대중의 리익과 신흥부르죠아지의 리익이 기본적으로 일치하였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의 리익을 반영하였다.

 

 

그후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부르죠아지가 반동적지배계급으로 되면서 민족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상적도구로 되였다. 그러므로 민족의 리익을 진정으로 옹호하는 참다운 민족주의와 자본가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상적도구로서의 부르죠아민족주의는 항상 구별해보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게 되면 혁명실천상에서 엄중한 과오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부르죠아민족주의는 반대하고 경계하지만 참다운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지지하고 환영한다. 왜냐하면 참다운 민족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감정이 애국에 바탕을 두고있기때문이다. 애국심은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다같이 소유하고있는 공통적인 사상감정이며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을 위한 하나의 궤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수 있게 하는 최대공약수이다. 애국애족은 공산주의를 참다운 민족주의와 련결시켜주는 대동맥이며 참다운 민족주의를 련공의 길로 이끌어주는 원동력이다.

 

 

지난날 참다운 민족주의자들은 이 애국애족의 기치밑에 나라를 근대화하고 외적에게 침탈당한 국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쌓아올리였다.

 

 

오늘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제도와 사상이 존재하는 분단상황하에서도 우리가 조국을 통일할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그 실현을 위해 완강하게 투쟁하는것은 바로 공산주의자들과 참다운 민족주의자들이 다같이 소유하고있는 애국애족에서 민족화합의 대업을 이룩할수 있는 절대적인 원천을 보고있기때문이다.

 

 

단일민족국가인 우리 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민족주의가 곧 애국주의로 된다는것은 움직일수 없는 하나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나는 애국적인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의 단결과 협력을 언제나 중시하였고 그것을 우리 혁명승리의 확고한 담보로 보았다.

 

 

이것은 청년학생운동을 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한평생 견지해온 견해이고 립장이다.

 

 

나는 차광수를 만난 그날도 참다운 민족주의와 부르죠아민족주의는 구별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차광수는 말을 다 듣고나서 나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격한 목소리로 《성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리론이 월등해서 그를 납득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조선의 구체적현실에 기초하여 판단하며 공리공담이 아니라 혁명실천을 중시하는 나의 립장과 사고방식이 차광수한테 공명을 불러일으켰던것 같다.

 

 

그때부터 차광수는 자기의 속을 터놓기 시작하였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순간에 변하였다. 지금까지 내가 주로 말을 하고 그는 질문을 하며 듣기만 했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묻지 않아도 그가 스스로 이야기를 하였다.

 

 

속을 터놓고 사귀여보니 차광수는 대단한 멋쟁이였다. 나이는 나보다 일곱살이나 우였는데 일본에 건너가 대학공부까지 한 사람이였다. 그는 글도 잘 쓰고 연설도 잘했지만 마음씨가 무한정 좋아서 청년들을 많이 끌었으며 맑스주의전문가로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차광수와 박소심이 맑스주의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론쟁할 때면 서로 더 잘 안다고 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화요파의 두령 김찬은 차광수한테 맞다들기만 하면 쩔쩔매군 하였다. 김찬은 맑스주의에 대한 론쟁에서 차광수한테 견디지 못하였다. 김찬을 공산당거물이라고 그렇게도 신비스럽게 생각하던 차광수가 그를 몇번 만나보고난 다음부터는 중학생 다루듯 하였다. 차광수와 서상파인물 신일용을 론쟁시켜본 일이 있는데 그도 차광수한테는 어쩌지 못하였다.

 

 

차광수의 특징은 목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다니는것이였다. 어렸을 때 목에 종처가 나서 고개를 삐뚜름하고 다닌것이 버릇이 되여 그렇게 되였다고 한다.

 

 

차광수는 평안북도사람이였다. 어려서부터 동네사람들한테서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어오던 그는 10대의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을 하였다. 그가 맑스-레닌주의서적들을 읽고 공산주의를 동경하기 시작한것이 바로 이때였다.

 

 

차광수가 새 사조를 섭취하며 힘겨운 고학살이를 하고있을 때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운동이 하강기에 들어서고있었다. 창건된지 얼마 안되는 일본공산당은 1923년 6월에 있은 당지도핵심들에 대한 1차 검거와 간또대지진시기의 백색테로로 하여 몹시 약화되였으며 그후 지도부에 잠입한 기회주의분자들의 책동으로 인하여 해산되고말았다. 공산주의운동이 퇴조기를 걷고있는 일본땅에 앉아 무슨 운동을 모색하며 맑스의 책이나 뒤적거린다는것은 싱거운 일이였다.

 

 

차광수는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와서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런데 같은 맑스-레닌주의를 한다면서 무슨 파가 그리 많고 무슨 갈래가 그리도 복잡한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차광수는 어느 파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고 자기가 갈길을 찾기 위해 우리 나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력사와 그 계보, 파벌관계를 품을 놓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궁을 헤매는것과 다름이 없었다.

 

 

3인1당, 5인1파식으로 파와 갈래는 수두룩하였다. 각파는 서로 날카롭게 대립되여있었지만 실제상 사상적립장이나 정치적견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차광수는 자기가 국내에 있을 때 종파분자들의 책동가운데서 제일 너절하게 생각한것은 락양관사건이였다고 하였다. 락양관사건이란 화요계, 북풍회계인물들이 락양관이라는 료리점에서 회합을 가지고있을 때 이 두파의 결탁에 반감을 가지고있던 서울파사람들이 회합장소를 습격하고 폭행을 가하여 몇사람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중상을 입은 사람들은 서울파의 가해자를 걸어 일제의 재판기관에 형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런 사건이 있은지 며칠 안되여 북풍회파사람들이 서울파인물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울파에서 중상을 입은 사람이 일제의 재판기관에 찾아가 북풍회파의 가해자를 걸어 형사소송을 하였다.

 

 

이런 파벌싸움이 발전하여 마지막에는 저마끔씩 테로단들을 만들어가지고 다른 파와 대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쩌면 저렇게까지 험하게 타락할수 있을가 하고 주야장탄하던 차광수는 생각끝에 서울을 떠나 만주로 들어왔다. 만주는 쏘련과 가까운 곳이니 거기에 가면 국제공산당의 연줄도 잡을수 있고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새길도 찾을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한줄기의 희망때문이였다는것이다.

 

 

만주에서 그는 정우회선언에 맞다들었다.

 

 

종파분자들은 정우회선언에서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분파투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서로 중상할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토론을 하자고 하였으며 리론투쟁을 전개하여 대중에게 진정한 진로를 가리켜줘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정우회선언의 주장대로 공개적인 론쟁을 하게 되면 덕을 볼것은 조선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고등계형사들이였다.

 

 

조선공산당이 창건된 후 화요파는 서울파와 대립되여 파쟁을 하면서 자파세력이 강하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기들이 준비하고있던 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72명의 명단을 신문에 공개한적이 있었다. 이것은 령도권쟁탈에 피눈이 된 종파분자들이 공산당간부들의 명단을 일제에게 송두리채 넘겨준 공개밀고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명단을 가지고 일제는 공산당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검거선풍에 의하여 화요파의 인물들은 거의다 감옥에 잡혀가고말았다.

 

 

이 교훈을 망각하고 종파분자들의 주장대로 이제 다시 공개적인 론쟁을 하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리라는것은 명백하였다.

 

 

일본의 물정에 밝은 차광수는 정우회선언이 일본공산주의운동내부에 나타난 기회주의사상조류인 《후꾸모도주의》의 재판이라고 규탄하였다.

 

 

후꾸모도는 당을 재건하기 위하여서는 《리론투쟁》을 통해 순수한 혁명의식을 가진자와 불순한 사상을 가진자들을 갈라낸 다음 순수한 요소들만 결합하여야 한다고 력설했는데 그의 주장은 분렬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것으로서 일본로동운동에 커다란 해독을 끼치였다.

 

 

차광수는 후꾸모도의 리론을 통채로 삼키다못해 문장까지 그대로 본딴 정우회선언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종파분자들의 범죄행위에 환멸을 느낀 그는 류하로 갔다. 시골훈장이 되여 아이들의 머리에 민족의 정기나 넣어주며 조용히 살아가려고 결심했던것이다. 그러다가 최창걸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길림에 나타나게 되였다.

 

 

이국땅에서 찬비를 맞으며 걸어갈 때 차광수는 자기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줄수 있는 옳바른 투쟁로선과 지도자를 목마르게 기다렸노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자기의 경력을 다 소개하고나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성주, 우리 서로 믿음과 사랑속에 공산주의운동을 할수 없을가? 분파와 헤게모니싸움이 없이 말이요!》

 

 

차광수의 그 부르짖음은 혁명의 길을 찾아 만리타향을 헤매던 끝에 그가 찾은 인생총화이며 교훈이기도 하였다.

 

 

나도 그의 손을 잡고 우리 새 세대들은 종파분자들처럼 분렬의 길을 갈것이 아니라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혁명의 곧바른 길을 가자고 격해서 말하였다.

 

 

차광수는 최창걸을 통해 나를 소개받았을 때의 솔직한 심정도 털어놓았다. 우리가 길림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중학생이 맑스-레닌주의를 알면 얼마나 알며 공산주의운동을 하면 얼마나 잘하랴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한번 중떠보려는 마음도 먹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그러니 푸접좋고 덜렁광창인 그를 나는 처음에 뚝바우로 알수밖에 없었다.

 

 

차광수는 그후 인차 우리의 《ㅌ.ㄷ》성원이 되였다.

 

 

그해 여름에 나는 차광수를 신안툰에 보냈다. 신안툰은 길장연도에서 서쪽으로 얼마 안되는 곳에 있는 자그마한 동네로서 조선의 애국지사들이 리상향으로 개척해놓은 마을이였다. 만주의 조선인거주지역들중에서도 몇개 안되는 정치운동의 책원지였다. 이 마을을 혁명화하면 농민대중속으로 들어가는 첫 통로를 개척할수 있었다. 나는 차광수에게 그 과업을 맡기고싶었다.

 

 

내가 신안툰마을에 내려가 사업하라고 하자 차광수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시골에 있다가 운동선을 찾아 모처럼 올라온 사람을 왜 도로 시골로 보내는가고 롱담절반, 진담절반으로 물었다. 남들은 서울이야, 동경이야, 상해야 하고 큰 도회지에서 돌아치며 운동을 하는것도 성차지 않아 국제당에까지 찾아다니며 바람을 일구는데 손바닥만 한 시골에 내려가서야 무슨 일을 치르겠는가고 하는것이였다. 그는 낡은 운동방식을 반대하면서도 기성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차광수한테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큰 도시 같은데 틀고앉아야 혁명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도시건 시골이건 인민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말고 가야 한다, 우리 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다, 만주지방의 조선사람들도 대부분 농촌에서 살고있다, 농민들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조국광복위업에 인민을 동원시킬수 없으며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승리에 대하여서도 생각할수 없다, 나도 학교를 마치면 농촌에 가서 사업하려고 한다, 국제당 같은데나 들락날락해야 공산주의자의 명분이 서는것처럼 생각하는것도 옳지 못한 사고방식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국제당을 존중하는것은 로동계급의 위업이 국제적성격을 띠고있기때문이며 로동계급이 국제적으로 단합되여야 국제적으로 결합된 자본의 철쇄를 부실수 있기때문이다, 오직 자기앞에 부과된 민족적의무와 국제적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투쟁한다면 국제당의 승인도 받을수 있고 우리가 목마르게 바라는 조국광복의 날도 앞당길수 있을것이다, …

 

 

지금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우로만 올라가고있다, 시골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국제당으로, …우로 올라가야 축에도 들고그 무슨 인정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고있다,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우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로동자, 농민들속으로 들어가자.

 

 

《우로 올라갈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자.》

 

 

차광수는 이 말을 혼자소리로 심각하게 되뇌이고나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책상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치면서 《그것 참 신통한 발견이요!》 하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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