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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3장 길림시절 1. 선진사상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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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05 16:1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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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3장 길림시절 1. 선진사상의 탐구

  

  


 

제 3 장 길 림 시 절

 

 

1. 선진사상의 탐구

 

나는 집에서 한달가량 머무르다가 설까지 쇠고 이듬해 정월 중순에 무송을 떠났다. 내가 길림에 도착한것은 행인들의 왕래가 번잡한 한낮이였다. 길을 물을 때마다 아버지친지들의 주소가 적혀있는 수첩을 꺼내들고 언 손을 놀려가며 종이장을 번지는것이 거치장스러울것 같아서 나는 미리 내가 찾아야 할 거리와 번지들을 머리속에 다 외워두었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대도시의 번창한 풍경은 첫 순간부터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지대에서만 살아온 나를 위압하는상싶었다.

 

 

나는 개찰구를 나선 다음에도 가슴을 치미는 흥분때문에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나를 새 생활에로 부르는 신천지의 약동하는 모습을 오래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내가 본 도시의 풍경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거리에 물장사군들이 많은것이였다. 물의 도시로 이름나 한때는 선창이라고도 불렀다는 고장인데 음료수가 부족하여 저렇게 물장사만 성행해가니 길림이라는 도회지의 생활이 점점 각박해질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였다. 물 한모금에도 수판알을 튀겨야 한다는 도시생활의 중압이 첫걸음부터 심신에 육박해왔지만 나는 그 중압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가슴을 쭉 펴고 활개를 치며 도심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길림역에서 북산방향으로 뻗은 차루가를 따라 얼마쯤 걸어가니 도시를 성내와 성외로 구분하는 성벽이 보이고 조양문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는 성문이 보이였다. 조양문가까이에는 신개문이라는 성문이 있었다. 길림에는 조양문과 신개문외에도 파호문, 림강문, 복수문, 덕승문, 북극문을 비롯하여 모두 10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 매 성문을 장작상군대가 지키고있었다. 풍화작용으로 군데군데 허물어진 길림의 고색창연한 성벽은 이 도시가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성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길림은 처음 와보는 생소한 고장이였으나 별로 낯이 설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와보고싶던 곳이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많은 곳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나의 수첩에는 내가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할 아버지의 친구들과 친지들의 주소가 십여개나 적혀있었다. 오동진, 장철호, 손정도, 김사헌, 현묵관(현익철), 고원암, 박기백, 황백하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길림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이였으며 내가 만나보아야 할 사람들이였다.

 

 

나는 의례방문의 첫 순서로 오동진을 선정하고 차루가와 상부가사이에 있는 그의 집부터 찾아갔다. 사실 그때 나의 마음은 은근히 긴장되여있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모처럼 주선해준 화성의숙을 중퇴한것때문에 오사령이 못마땅해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동진은 이전과 다름없이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내가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길림으로 온 사연을 말했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중한 표정으로 머리만 끄덕이였다.

 

 

《소문도 없이 길림에 불쑥 나타난 너를 보니 너의 아버지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아버지도 숭실중학교를 그렇게 갑자기 중퇴하셨더랬지.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여간 아쉬워 하지 않았다. 그러나 퍽 이후에는 아버지가 결심을 옳게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아무튼 여섯달만에 의숙을 포기하고 길림으로 온 그 결단성이 놀랍다. 길림이 리상에 맞는 고장이라면 여기서 너의 우물을 파거라.》

 

 

나의 길림행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날 오동진이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역시 오동진다운 활달한 사고방식이라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길림에 와서 공부하게 된바에는 이번 걸음에 어머니와 동생까지 데리고 솔가이주하여 여기다 살림을 펼걸 그랬다고 하면서 서운해하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왔을 때에도 오동진은 우리 어머니에게 김선생의 친구들이 많은 길림으로 이사하라고 여러번 권하였다. 어머니는 그 권고를 고맙게 여기면서도 무송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양지촌에 산소가 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어떻게 길림으로 훌쩍 이사를 가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오동진은 자기의 수하에서 서기로 일하는 최일천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오동진이 서기자랑을 많이 하였기때문에 최일천에 대해서는 나도 일정한 예비지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정의부내에서 문장가로 이름난 사람이였다. 이날의 상봉을 계기로 하여 나와 최일천은 그후 특별한 동지적뉴대로 이어지게 되였다.

 

 

그날 오후 오동진은 나를 삼풍잔에 데리고 가서 독립운동자들에게 인사시키였다. 그 독립운동자들속에 김시우가 소개신을 써주면서 만나라고 하던 김사헌도 있고 정의부 경호대장으로 활동하는 장철호도 있었다. 삼풍잔이란 삼풍려관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려관을 《잔》이라고도 한다. 김사헌과 장철호외에도 이 려관에는 이름 모를 독립운동자들이 많이 와있었다.

 

 

삼풍려관은 태풍합정미소와 함께 길림에서 독립운동자들이 숙박소 겸 련락장소로 리용하는 2대거점이였다.

 

 

조선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도 삼풍려관을 많이 리용하였다.

 

 

이 려관주인은 손정도목사의 동향인이였다. 그는 평안남도 증산에서 살다가 손목사의 권유로 길림에 들어와 삼풍려관을 운영하였다. 간판은 려관이지만 기숙사나 공회당과 같은 인상을 더 주는 그런 집이였다.

 

 

삼풍려관에서 일본령사관까지의 거리가 100m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길림지방 정탐활동의 총본영이라고도 할수 있는 일본령사관의 문전이나 다름없는 려관에 밀정들과 경찰들이 그처럼 촉수를 늘이고 찾지 못해 애를 쓰는 반일독립운동자들이 무시로 찾아드는것은 재미 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자들은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면서 그 려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실지로 삼풍려관에서 애국자들이 붙잡혀가는 불상사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조직들을 내온 다음에는 이 려관을 자주 리용하였다.

 

 

김사헌은 김시우의 소개신을 보고나서 나에게 자기가 잘 알고있는 김강이란 조선사람이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교원을 하는데 그 학교에 들어가는것이 어떤가고 물었다. 시내의 신흥사회계에서 세운 사립학교인데 길림에서는 그중 경향성이 좋다는것이였다.

 

 

길림육문중학교가 경향성이 좋은 학교라는것은 사회계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그것은 《길장일보》가 이 학교에 대한 보도를 여러번 하였기때문이였다. 《길장일보》는 벌써 1921년에 육문중학교를 경영은 참담하나 성적이 매우 훌륭하여 사회 각계의 찬조를 받는 학교라고 소개하였다.

 

 

자금문제와 교장의 직권람용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육문중학교에서는 교장이 자주 교체되였는데 내가 길림에 도착한 그 당시에는 남경금릉대학출신인 장음헌을 대신하여 리광한이 교장으로 부임된지 얼마 안된다고 하였다.

 

 

교장을 네번이나 갈아치운것만 보아도 육문중학교가 정의와 법도를 얼마나 중시하는 학원인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육문중학교의 이 혁신적인 교풍이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였다.

 

 

김사헌은 다음날 나를 육문중학교의 김강선생한테 소개해주었다. 김강은 영어를 잘하였다.

 

 

나는 그의 안내로 리광한교장을 만났다. 리광한은 중국민족주의좌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주은래총리의 중학시절동창이였고 어려서부터 주총리의 영향을 받은 량심적인 지식인이였다. 내가 주총리와 리광한교장의 연고관계를 알게 된것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언젠가 나는 우리 나라를 방문한 주은래총리를 만나 청년시절을 회고하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중국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리광한교장의 이름을 들었다. 주총리는 그 말을 듣자 여간만 반가와 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천진에서 남개대학부속 중학교에 다닐 때 그와 같이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리광한교장은 그날 나에게 학교를 졸업하면 장차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내가 나라를 찾는 일에 한몸 바치고싶다고 서슴없이 대답했더니 그는 아주 좋은 포부라고 긍정해주었다.

 

 

흉금을 터친 담화의 덕이라고 할지 리광한교장은 1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해달라는 나의 요구도 쾌히 들어주었다.

 

 

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하던 시기 나는 이 선생한테서 여러번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내가 혁명사업때문에 자주 결석한다는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었으며 군벌당국에 매수된 반동교원들이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모저모로 보호해주었다. 군벌이나 령사관경찰들이 나를 붙잡으러 올 때면 미리 련락하여 울타리밖으로 빼돌리기도 하였다. 교장이 량심적인 지식인이다보니 그밑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발을 붙이고 일할수 있었다.

 

 

내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고 돌아오자 오동진부부는 나에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에 들어가지 말고 자기네 집에서 다니라고 하였다. 사실 그때 내 처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였다.

 

 

나는 어머니의 뒤받침으로 공부를 해야 하였는데 우리 어머니는 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품을 팔아서 한달에 3원정도씩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월사금과 공책값, 교과서값을 대고나면 신 한컬레 사신기가 힘든 형편이였다.

 

 

이런 처지에서 나는 아버지의 친구들의 권고와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길림에 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 있으면서 학교에 다니였고 그가 체포된 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 현묵관네 집에도 몇달 그리고 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의 사령을 하던 리웅의 집에도 얼마간 가있었다.

 

 

당시 길림에 있던 명사들이 대체로 아버지하고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여서 여러모로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친우들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과정에 독립군간부들과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많이 알게 되였으며 길림에 드나들던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였다.

 

 

그 당시 정의부간부들은 거의다 길림에 상주하고있었다. 정의부는 행정, 재무, 사법, 군무, 학무, 외교, 검찰, 검독 등 어마어마한 중앙기구와 지방기관까지 꾸려놓고 관할구역의 조선동포들한테서 세금까지 받아내면서 한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행세를 하였다. 이 방대한 기구를 보호하기 위해 정의부는 150여명의 군인들로 조직된 상비적인 중앙호위대까지 가지고있었다.

 

 

길림은 중국의 한개 성소재지로서 봉천, 장춘, 할빈과 더불어 만주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길림독군서에서는 장작림의 4촌동생 장작상이 우두머리노릇을 하였는데 그는 일본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일본사람들이 누가 공산당원이고 누가 나쁜 사람이라고 고소하여도 그는 당신들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해버리군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것은 그에게 무슨 정치적견해가 있어서라기보다도 무식하고 자존심이 강하였기때문이였다. 그의 이러한 특징이 혁명가들과 사회운동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만주지방으로 이주해온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또한 이 길림성에서 살고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하여 일본군경들에게 쫓겨다니는 조선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길림에 많이 모여들게 되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자연히 조선사람들의 정치활동무대로 되였으며 그 중심지를 이루게 되였다. 《동 3성에서의 배일의 책원지는 길림》이라고 한 일본사람들의 평가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길림은 1920년대 후반기 만주에서 조선민족주의운동의 기본세력이였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수뇌들의 집결처로 되여있었다. 독립운동자들이 신문을 발간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화전, 흥경, 룡정 같은데서 많이 하였지만 실지 그 수뇌들이 모여 활동한 곳은 길림이였다.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와 같은 종파분자들이 제각기 자기 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돌아치던 곳도 바로 길림이였다. 공산주의운동자들가운데서도 제노라고 하는 명물들은 거의다 이 길림에 드나들었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파분자, 망명자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여들었다.

 

 

새것을 지향하고 진리를 찾아 모대기는 청년학생들도 이 성시로 찾아왔다.

 

 

한마디로 말하여 길림은 형형색색의 사상조류가 집결된 곳이라고 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공산주의기치를 들고 혁명활동을 벌렸다.

 

 

내가 길림에 왔을 때 《ㅌ.ㄷ》의 몇몇 성원들은 화전에서 약속한대로 이 도시에 와서 문광중학교를 비롯한 시내 학교들과 기관구, 선창 등에 적을 붙이고있었다.

 

 

그들은 내가 길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기 바쁘게 오동진사령의 집으로 뛰여왔다. 《돈이 귀하고 마실 물이 귀하고 땔것이 귀하지만 책이 많아서 좋다.》는것이 그들의 길림인상이였다.

 

 

나는 책이 많으면 배고픈 고생과도 타협할수 있다고 롱을 하였다. 그것은 나의 진정이기도 하였다.

 

 

그들도 육문중학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었다. 교직원들중에 국민당우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교원들은 공산당계렬이 아니면 삼민주의의 숭배자들이라는것이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였다.

 

 

후에 판명된데 의하면 상월선생도 공산당원이였고 마준선생도 공산당원이였다고 한다.

 

 

우리는 새로운 고장에서 혁명의 진리를 마음껏 배우며 《ㅌ.ㄷ》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나가자고 결의하였다.

 

 

화전에 남아있던 《ㅌ.ㄷ》의 성원들도 활동무대를 찾아 무송현, 반석현, 흥경현, 류하현, 안도현, 장춘현, 이통현 등 만주일대의 조선인거주지역들로 떠나갔다. 그들가운데는 출신중대에 돌아가 다시 독립군의 모자를 쓴 동무들도 있었다.

 

 

길림과 같이 복잡한 도시에서 얼마 되지 않는 핵심들을 가지고 만사람이 우리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게 하며 《ㅌ.ㄷ》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싸운다는것은 헐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가 한점의 불씨가 되여 주변의 열사람, 백사람을 불러일으키고 그 백사람이 다시 천사람, 만사람의 심장을 달구어 세계를 변혁할 굳은 결심에 차넘치고있었다.

 

 

길림에서의 나의 활동은 맑스-레닌주의를 더 깊이 연구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나는 길림으로 올 때 화전에서 시작한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더 깊이 해보자고 결심하였다. 길림의 사회정치적분위기는 새 사조를 깊이 파고들려는 나의 결심을 부채질해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보다도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들을 탐독하는데 더 열중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대혁명시기여서 쏘련이나 일본에서 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였다. 베이징에서는 《번역월간》이라는 잡지도 찍어냈는데 거기에 청년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진보적인 문학작품들이 자주 실리였다. 무송이나 화전에서 볼수 없었던 책도 길림에서는 얼마든지 구할수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책을 살만 한 돈이 없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그때 나는 운동화도 학교에 갈 때에만 신고 집에 와서는 거의 맨발로 다니였다.

 

 

그때 우마항거리의 도서관에서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받았는데 나는 그 열람권을 달마다 떼가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도서관에 들려 몇시간씩 책과 신문을 읽군 하였다. 그러면 적은 돈을 가지고서도 여러가지 출판물들을 볼수 있었다.

 

 

책방에 좋은 책이 들어온것을 보면서도 돈이 없어 못 살 때에는 부자집학생들을 부추겨 사게 하고 그들이 사온 다음 그 책들을 빌려다 보군 하였다. 돈많은 집 자식들가운데는 읽지는 않으면서도 멋을 부리기 위하여 책을 사다가 장식용으로 꽂아두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시기 육문중학교에서는 학교관리를 민주주의적으로 하였다. 도서주임도 반년에 한번씩 학생총회에서 선출하였다. 선출된 도서주임은 학교도서관운영계획을 세우고 책을 사들일 권한을 가지였다.

 

 

나는 육문중학교시절에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선거되였다. 그 기회를 리용하여 맑스-레닌주의서적들을 많이 사들이였다.

 

 

책이 많고보니 시간이 모자라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독서시간을 1분1초라도 더 얻어내기 위하여 애를 쓰면서 차례진 시간안에 하나라도 더 많은 책을 읽고 그 본질을 깊이 알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어려서부터 책을 읽게 하고는 그 책에서 중심이 무엇이며 배운 점은 무엇인가 하는것을 꼭꼭 쓰는 습관을 키워주었다. 아버지가 키워준 이 습관이 크게 은을 내였다. 중심을 잡아쥐면서 책을 정독하게 되면 아무리 복잡하게 뒤엉킨 내용도 명확히 파악할수 있고 짧은 시간안에 많은 책들을 볼수 있다.

 

 

내가 중학시절에 밤을 새우며 책을 본것은 단순한 학구적취미나 탐구심때문만이 아니였다. 나는 학자가 되고 그 무슨 출세의 길을 톺으려고 책을 파고든것이 아니였다. 어떻게 하면 일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찾겠는가? 어떻게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고 근로하는 인민들을 잘살게 하겠는가? 내가 책에서 찾고싶었던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였다. 어디서 무슨 책을 보건 나는 항상 이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맑스-레닌주의를 교조로가 아니라 실천의 무기로 대하게 되고 진리의 기준을 추상적인 리론에서가 아니라 항상 조선혁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찾으려는 나의 립장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싹텄다고 할수 있다. 나는 이 시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로동과 자본》을 비롯한 맑스-레닌주의고전들과 그를 해설한 도서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다.

 

 

정치서적들과 함께 혁명적인 문학작품들도 많이 읽었다. 내가 그때 제일 흥미를 가지고 읽은것은 고리끼와 로신의 작품들이였다. 무송이나 팔도구에 있을 때는 《춘향전》, 《심청전》, 《리순신전》, 《서유기》와 같이 옛날생활을 담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면 길림에 와서부터는 《어머니》, 《철의 흐름》, 《축복》, 《아큐정전》, 《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와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과 당시의 현실생활을 담은 진보적인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후날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고난의 행군과 같은 어려운 시련에 부닥쳤을 때에도 나는 길림시절에 본 《철의 흐름》과 같은 혁명적인 소설들의 내용을 회상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군 하였다. 문학작품은 사람들의 세계관형성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혁명적인 소설들을 많이 써내라고 말하군 한다. 지금은 우리 작가들도 혁명적인 대작들을 많이 써내고있다.

 

 

우리는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현상과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직접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였다.

 

 

그때 조선에서 만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가운데는 길림을 경유하여 다른 고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국내의 참상을 수시로 청취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들은 단동을 거쳐 남만철도로 장춘에까지 와가지고는 거기에서 동지철도를 리용하여 북만쪽으로 가든가, 길장선을 타고 길림을 경유하여 그 근방의 오지로 들어가기도 하고 봉천으로부터 봉해선, 길회선을 거쳐 돈화, 액목, 녕안방면으로 가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철과 이른봄철이면 길림역과 려관들에서 조선이주민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 이런 이주민들가운데는 별의별 곡절을 겪은 사람들이 다 있었다.

 

 

어느날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극장에 《창시》구경을 갔다. 공연이 끝난 다음 《창시》를 하던 녀배우가 우리한테로 찾아와 자기 애인의 이름을 대면서 최 아무개라는 사람이 혹시 여기에 살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 녀배우가 조선말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조선에서는 《창시》라는것을 하지 않기때문이였다.

 

 

옥분이라는 그 녀배우는 경상도녀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날 뒤집에 있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너의 처가 아들을 낳으면 내 사위로 삼고 우리 처가 딸을 낳으면 네 며느리로 주마, 만약 다같이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결의형제를 맺어주자고 약속하였다.

 

 

얼마후 한집에서는 아들이 태여나고 다른 한집에서는 딸이 태여났다. 두 집에서는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켰다는 표적으로 명주수건 하나를 둘로 갈라 각각 반쪽씩 나누어 가지였다.

 

 

그후 두 집은 살길을 찾아 제가끔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들을 본 집에서는 길림에 와살았는데 그 아들이 커서 문광중학교에 다니였다. 그 집에서는 그래도 길림에 온 다음 집도 한채 얻고 자그마한 정미소도 하나 차려놓고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녀자를 낳은 집에서는 단동까지 와서 려비가 떨어져 중국사람한테 어린 딸을 팔게 되였다. 옥분이는 매를 맞으며 《창시》를 배워가지고 배우가 되였는데 나이가 들면서부터 고향에서 살 때 결정해놓았다는 그 남자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새 고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조선사람들을 몰래 찾아다니며 그 남자의 행처를 탐문하군 하였다.

 

 

그날 옥분이란 그 녀배우는 문광중학교에 다니는 남편되는 사람과 극적인 상봉을 하였다.

 

 

옥분이가 《창시》를 그만두고 남편한테 떨어지겠다고 하자 그를 데리고 다니던 흥행단 주인녀자는 굉장한 돈을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옥분이는 자기 몫으로 나오는 돈을 몇해동안 모아서 몸값을 물어주고 길림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그때 이런 사연을 목격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피가 맺히고 분노가 생기였다. 학생들은 돈만 알고 인정을 모르는 흥행단 주인녀자를 《뱀같은 녀자》라고 욕질하였다.

 

 

수십만의 인생이 한데 모여 생존경쟁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돌아가는 대도시의 생활은 계급사회가 내뿜는 악취를 감추지 못하였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어느 여름날 동무들과 함께 북산에 갔다오던 나는 길가에서 인력거군이 부자와 다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인력거를 타고 온 부자가 인력거군한테 돈을 적게 준 모양이였다. 인력거군이 부자에게 지금은 《삼민주의》시대인데 《민생》문제를 좀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몇푼만 더 달라고 빌었다. 부자는 돈을 더 줄 대신에 도리여 《삼민주의》만 알고 《오권헌법》은 모르는가고 하며 단장을 들어 인력거군을 때리였다.

 

 

분격한 우리 학생들은 부자놈에게 달려들어 돈을 더 주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왜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인력거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열두대문이 달린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강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지가 되여 거리를 헤매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불만을 가지게 되였다.

 

 

혁명적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처지와 리해관계를 인식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리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였을 때 형성된다고 볼수 있다.

 

 

나도 맑스-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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