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1. 우리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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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4-23 19:4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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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1. 우리 가정
머 리 글
무릇 인생만년에 자기의 한생을 회고한다는것은 참으로 감회로운 일이다. 걸어온 행로가 같지 않고 보고 듣고 느낀 생활체험이 천차만별이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심경으로 지나온 나날들을 더듬어보게 되는것이다.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근대이후 세계정치에서 언제나 두드러졌던 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 정치가로서 나는 깊은 추억과 잊을수 없는 회포속에 자신의 한생을 돌이켜보게 된다.
민족수난의 비운이 칠칠히 드리웠던 망국 초엽에 태여났고 격변하는 내외정세의 소용돌이속에서 생의 첫걸음을 떼여야 했던 나는 어린시절부터 조국과 운명을 같이하고 겨레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길을 걷게 되였으며 바로 그 길에서 어언 팔순에 이르렀다.
인류의 생활에 미증유의 대흔적을 남기고 세계의 정치지도에 괄목할 변화를 일으켰던 20세기와 더불어 흘러온 나의 한생은 그대로 우리 조국과 민족이 걸어온 력사의 축도이다.
그 길에는 물론 기쁨과 성공만이 있은것이 아니였다. 거기에는 뼈를 에이는 슬픔과 희생도 있었고 심한 우여곡절과 난관도 많았다. 투쟁의 길에는 벗도
애국의 넋은 10대의 그 시절에 나로 하여금 길림시가의 포석우에서 배일의 함성을 웨치게 했고 적들의 추적을 피하는 아슬아슬한 지하투쟁도 체험하게 했다. 항일의 기치높이 백두밀림에서 풍찬로숙하며 광복의 그날을 믿어 눈보라만리, 혈전만리를 헤쳐야 했고 수십수백배나 되는 강적과 맞서 힘겹게 고군분투해야 하였다. 해방은 됐어도 분렬된 조국의 운명을 건지려 몇밤을 지샜고 인민의 나라를 세우고 지키던 나날에는 또다시 형언할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나는 이 길에서 한번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파란만장의 인생항로에서 내가 키를 잃지 않고 꿋꿋이 살고 싸워나갈수 있은것은 오로지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였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였다.
일찌기 량친을 여읜 나는 어려서부터
아직은 조국광복을 기약할수 없었던 20년대 화전의 언덕에서 나를 믿어주고 따르던 《ㅌ.ㄷ》의 첫
우리 혁명이 승리적으로 전진하고 우리 조국이 륭성번영하며 만민이 그 최성기를 구가하고있는것을 볼 때마다 바로 이날을 위해 자기 일신을 초개와 같이 바쳤던
원래 나는 회고록을 쓸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명망높은 정치가들과 저명한 문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나의 한생이 사람들에게 고귀한 교훈을 남길것이라고 하면서 회고록을 쓸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제는
나는 나의 한생이 결코 남달리 특별한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한생이며 인민과 더불어 지나온 한생이였다고 자부하는것으로 만족할뿐이다.
나는 나의 글이 인민을 믿고 인민에게 의거하면 천하를 얻고 백번 승리하며 인민을 멀리하고 그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번 패한다는 진리, 생과 투쟁의 교훈을 후세에 남기게 되기를 바란다.
먼저 간 선렬들의 명복을 빌면서
1992년 4월 묘향산에서
1. 우리 가정
나의 생애는 조선의 근대력사에서 민족수난의 비극이 가장 암담하게 중첩되던 1910년대로부터 시작되였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기 전에 우리 나라는 벌써 일본의 독점적인 식민지가 되였다. 황제의 통치권은 《한일합병》조약과 함께 일본천황에게로 모조리 넘어갔고 이 나라 백성들은 《총독제령》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판노예가 되였다. 유구한 력사와 풍요한 자연부원과 수려한 산천경개를 자랑하는 이 강토는 일본제군화와 대포바퀴밑에서 짓이겨졌다.
민중은 국권을 강탈당한 슬픔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있던 이 땅의 초야와 지붕밑에서 수많은 충신들과 유생들이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름없는 백정까지도 칠성판에 오른 국운을 통탄하며 죽음으로써 치욕의 《한일합병》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경찰들과 일반문관들은 말할것도 없고 보통학교 훈도들까지 금테를 두른 양복을 입고 정모를 쓰고 칼을 차고 다니는 야만적인 헌병경찰제도가 수립되였다. 천황의 칙령에 따라 총독은 조선에서 륙해군의 통솔권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귀와 입을 틀어막고 수족을 얽어맬수 있는 무제한한 권한을 가지였다. 조선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정치단체들과 학술단체들은 해산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조선의 애국자들은 구류장과 감옥에서 연덩어리가 달린 소가죽채찍에 얻어맞았다. 도꾸가와막부시대의 고문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교형리들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조선사람의 살을 마구 지지였다.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총독제령》에 의해 조선사람의 흰옷마저 먹물을 들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의 재벌들은 무슨 《회사령》이니, 조사령이니 하는 법령들의 그늘밑에서 우리 조국의 보화와 재부들을 무데기로 실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지난날 식민지로 있었던 나라들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다른 민족의 말과 성까지 빼앗고 밥그릇까지 략탈해간 그렇게 지독한 제국주의는 보지 못하였다.
당시의 조선은 말그대로 사람 못살 생지옥이였다. 조선사람들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았다. 《… 일본은 모든 새로운 발명들과 순전한 아세아식고문을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야수성으로 조선을 략탈하고있으며 그를 계속 략탈하기 위하여 싸울것이다.》라고 한 레닌의 지적은 아주 타당하고 정확한것이다.
내가 성장하던 그 시기는 다른 대륙들에서도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각축전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때였다. 내가 태여난 그해에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복잡한 사건들이 련달아 일어났다. 바로 그해에 미해병대가 온두라스에 상륙하였다. 프랑스는 마로끄를 자기의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이딸리아는 토이기의 로토스섬을 점령하였다.
국내에서는 《토지조사령》이 발표되여 민심을 뒤숭숭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나는 어수선한 동란의 시대에 태여나 불우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시대상은 나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한테서 우리 나라의 망국사를 들은 다음부터 봉건통치배들을 몹시 원망하였으며 피눈물을 머금고 나라의 자주권을 찾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남들이 군함과 기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칠 때 우리 나라의 봉건통치배들은 갓쓰고 하늘소 타고 음풍영월로 수백년세월을 헛되게 보냈다. 그러다가 동서방의 침략세력이 함대를 끌고 접어들자 그렇게도 완고하게 닫아매였던 쇄국의 문을 열어놓았다. 봉건왕조는 외세가 마음대로 롱락하는 리권쟁탈의 흥정판으로 되였다.
력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그러다나니 오늘 친일파가 득세하면 일본군대가 왕궁을 지키고 래일 친로파가 득세하면 로씨야군대가 임금을 호위하고 모레 친청파가 득세하면 청나라군대가 대궐의 파수를 서는 판이였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비가 궁궐안에서 외국테로단의 칼에 맞아죽고(1895년《을미사변》) 왕이라는것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동안이나 갇혀있는가 하면(1896년《아관파천》) 임금의 당아버지가 외국에 랍치되여가서 귀양살이를 하여도 오히려 사죄를 해야 되는 판국이였다.
왕궁을 지키는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
무변광대한 이 세계에서 가정이란 하나의 작은 물방울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물방울도 세계의 한 부분이며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수가 없다. 조선을 망국의 비운속에 몰아넣은 근대력사의 파도는 우리 가정에도 사정없이 쓸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 사람들은 그 위협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족과 더불어 울고웃으면서 폭풍속에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였다.
우리 가문은 김계상할아버지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것은 증조할아버지(김응우)대부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평양 중성리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평양에 사는 지주 리평택의 묘지를 보아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채 얻어가지고 1860년대에 만경대로 이사해왔다.
만경대는 산천경개가 매우 아름다운 고장이다. 우리 집옆에 있는 산을 남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마루에 올라가 대동강쪽을 굽어보면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것 같다. 타고장의 부자들과 벼슬아치들이 만경대일대의 산들을 경쟁적으로 사가지고 조상의 묘를 많이 쓴것도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탐냈기때문이였다. 만경대에는 평안감사의 묘도 있었다.
대대로 소작살이를 하다나니 우리 집안은 매우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다가 3대를 두고 외독자로 내려오던 우리 가문이 할아버지(김보현)대에 와서는 아들딸 6형제를 보게 되여 열명 가까운 대식구로 불어났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나 자손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보려고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남들이 다 자는 이른새벽에도 쉬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진거름을 모았다. 밤이 되면 등잔불밑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멍석을 틀었다.우고는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할머니(리보익)도 밤마다 물레질을 하였다.
어머니(강반석)는 삼촌어머니(현양신)와 고모들(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을 데리고 낮에는 밭에서 종일 김을 매고 밤에는 무명낳이를 하였다.
집사정이 하도 어려우니 큰삼촌(김형록)은 9살에 천자를 좀 배
온 가정이 달라붙어 기를 쓰고 일했지만 늘 죽도 변변히 우리지 못하였다. 껍질도 벗기지 않은 수수로 타개죽을 쑤어 먹군 하였는데 목안이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니 과일이나 고기 같은것은 생각할수도 없었다. 한번은 내 목에 화기가 났는데 그때 할머니가 어디서 돼지고기를 얻어왔다. 그 고기를 먹고 화기가 뚝 떨어졌다. 그후부터 나는 고기를 먹고싶으면 화기가 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내가 만경대에서 어린시절을 보낼 때 우리 할머니는 늘 집에 시계가 없는것을 한탄하였다. 할머니는 물욕이 없는분이였지만 남의 집에 걸려있는 벽시계만은 몹시 부러워하였다. 우리 이웃에 벽시계가 있는 집이 한집 있었다.
할머니가 그 집 벽시계를 부러워하기 시작한것은 우리 아버지가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고 한다. 집에 시계가 없었으므로 할머니는 매번 쪽잠을 주무시다가 첫 새벽에 일어나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가늠하고는 서둘러 조반을 짓군 하였다. 만경대에서 숭실중학교까지 30리길이니 조반을 일찍 짓지 않으면 지각을 할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한밤중에 밥을 지어놓고도 등교시간이 되였는지 안되였는지 알수 없어 몇시간씩 잠을 못 자고 부뚜막에서 동창만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뒤집에 가서 몇시나 되였는지 알아보구 오렴.》 하고 분부하였다.
어머니는 뒤집에 가서도 주인을 깨우기 미안하여 뜨락에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밖에 쪼그리고 앉아 시계종이 땡땡소리를 낼 때까지 기다리군 하였다. 그러다가 시계종이 울리면 집에 돌아와 할머니에게 시간을 알려드리군 하였다.
내가 팔도구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삼촌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면서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큰아버지가 먼길을 통학하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성주는 칠골외가에 가있게 된다니 학교가 가까와서 좋겠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해방될 때까지 할머니가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벽시계를 끝내 사다 걸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비록 죽물을 우리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혈육이나 이웃간에 서로 도와주고 받들어주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돈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인덕이 없으면 살수 없느니라.》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이런 훈계를 하였다. 이것이 곧 우리 가정의 철학이기도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새것에 민감하고 향학열이 높았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도 늘 정규학교에 가고싶어하였다.
헤그밀사사건이 있은 그해 여름 슬매부락에서는 순화, 추자, 칠골, 신흥 네개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련합운동회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날 순화학교 선수로 운동회에 참가하여 철봉, 씨름, 달리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종목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데 높이뛰기에서만은 첫자리를 다른 학교선수에게 빼앗기였다. 가름대에 머리태가 걸리는 바람에 실수를 하였기때문이였다.
운동회가 끝난 다음 아버지는 학교뒤산에 올라가 그 머리태를 뭉청 잘라버리였다. 수백년을 두고 내려오는 낡은 인습을 무시하고 부모의 허락도 없이 머리태를 잘라버린다는것이 그때로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할아버지는 큰 변이 났다고 야단을 하였다. 원래 우리 집안사람들이 대가 셌다.
아버지는 그날 할아버지가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오고 울바자밖에서 서성거리였는데 증조할머니가 뒤문으로 데려다가 밥을 주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장손으로서 각별히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숭실중학교에 들어갈수 있은것도 증조할머니의 덕이라고 늘 말씀하였다. 증조할머니가 보현할아버지를 설복하여 아버지를 신식학교에 다닐수 있게 해주었다. 봉건이 심했던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할아버지네 세대는 신식학교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숭실중학교에 입학한것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1911년) 봄이였다. 당시는 개화의 첫 시기여서 량반들도 학교공부를 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우리 집 같이 타개죽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집에서 자손들을 중학교에까지 보낸다는것은 대단히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 당시 숭실중학교의 월사금이 2원이였다고 한다. 그 2원을 벌려고 어머니는 순화강에 나가 가막조개까지 주어다 팔았다. 할아버지는 참외를 심고 할머니는 열무농사를 하고 열다섯살밖에 안되였던 큰삼촌조차도 형님의 학비를 보탠다고 짚신삼이를 하였다.
아버지자신도 학비를 벌려고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학교당국이 운영하는 실습장에서 해가 질녘까지 고된 로동을 하였다. 그런 후에 학교도서관에서 몇시간씩 책을 읽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와 한두시간 쪽잠에 들었다가는 다시 학교로 가군 하였다.
이처럼 우리 가정은 그 당시 조선의 어느 농촌, 어느 고을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이였다. 남들보다 별로 표가 나는것도 없고 특이한 점도 찾아볼수 없는 가난한 가정이였다.
그렇지만 조국과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나 아낌없이 몸을 내대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의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였으나 나라와 향토를 열렬히 사랑하는분이였다.
미제침략선 《샤만》호가 대동강을 거슬러올라와 두루섬에 정박하고있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집집에 있는 바줄을 다 모아 강건너 곤유섬과 만경봉사이에 겹겹이 건너지르고 돌을 굴리면서 해적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샤만》호가 양각도밑에까지 기여들어 대포와 총을 쏘아대면서 시민들을 살해하고 재물들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그달음으로 평양성에 들어갔다. 그때 성안사람들은 관군과 함께 나무단을 가득 실은 매생이 여러척을 련결시켜 불을 지르고 《샤만》호쪽으로 띄워내려보내여 배도 해적들도 모조리 수장해버리였는데 증조할아버지도 여기서 한몫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샤만》호가 격침된 다음에는 미제침략자들이 또 군함 《쉐난도아》호를 끌고 대동강하구에까지 기여들어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하였다. 만경대인민들은 《쉐난도아》호가 침입하였을 때에도 의병을 뭇고 조국방위에 한사람같이 궐기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남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집안식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떳떳이 살도록 교양하였으며 자손들을 혁명투쟁에 아낌없이 내세웠다.
할머니도 자식들에게 대바르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한때 일본사람들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을 하느라고 엄동설한에 할머니를 데려다가 만주산야로 끌고다니면서 별 고생을 다 시킨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적들을 노복처럼 호령하면서 혁명가의 어머니, 혁명가의 할머니답게 굳세고 당당하게 처신하였다.
나의 외할아버지(강돈욱)는 고향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을 공부시키면서 일생을 후대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쳐온 열렬한 애국자, 교육자의 한사람이였으며 맏외삼촌(강진석)도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나선 애국자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부터 애국의 넋을 깊이 간직하도록 꾸준히 교양하였으며 그런 지향과 념원으로부터 내 이름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성주》라고 지어주었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두 동생을 데리고 집오래에 삼형제를 상징하여 백양나무 세그루를 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경대에는 백양나무라는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날 두 동생에게 백양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라고 하면서 우리 형제들도 그와 같이 씩씩하게 자라 나라를 독립시키고 잘살아보자고 말씀하였다.
그후에 아버지는 혁명을 위하여 만경대를 떠났고 뒤따라 작은삼촌(김형권)도 싸움의 길에 나섰다.
만경대고향집에는 큰삼촌 한분만 남았지만 백양나무는 세그루 다 잘 자라 큰 나무가 되였다. 그 그늘이 지경을 넘어 지주의 밭에까지 드리워지게 되였다. 지주는 밭에 그늘이 지면 소출이 떨어진다고 하면서 남의 집 백양나무를 사정없이 찍어버리였다. 그래도 말 한마디 할수 없는 무도한 세월이였다.
나라가 해방된 다음 집에 와서 그 말을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깨끗한 꿈이 생각나서 참으로 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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