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7권 1. 고난의 행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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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4-04 11:3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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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7권 1. 고난의 행군(1)
편집국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7권
제 20 장 혁명의 새로운 고조를 향하여
1. 고난의 행군
1938년 12월초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행군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그 행군이 있은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지금도 이 행군에 대하여 잊지 않고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 행군을 통하여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과 항일유격대원들이 발휘한 불굴의 혁명정신은 우리 인민이 천추만대를 두고 따라배워야 할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
이 절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력사가들과 작가들에게 들려주신 고난의 행군에 대한 회고담을 편집하였다.
나는 고난의 행군을 총화하면서 아무리 원칙에 맞는 전술이라고 해도 그것을 적용하는데서는 교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게 느끼였습니다.
우리가 백일행군을 방금 시작했을 때 도주자가 또 생기였습니다. 리교관이라고 왕덕림이 보낸 북경대학 졸업생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뛰고 중국인대원이 대오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다가 대렬에는 부상자가 여러명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력량이 조금만 더 줄어든다면 보초교대도 못하게 될 판이였습니다.
오백룡은 행군명령이 떨어지자 나보고 장군님, 우리가 행군을 시작하면 포대에서 철알이 우박같이 날아오겠는데 어떻게 저 벌판을 돌파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겠는가, 앞뒤에 기관총을 한정씩 세우고 적이 앞으로 오면 앞에서 쏘고 뒤에서 오면 뒤로 쏘면서 강짜로 행군해야지 별수가 있는가고 하였습니다.
가재수의 적들은 포대에서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면서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주력은 《토벌》에 참가하느라고 산에 다 가있고 부락에는 력량이 얼마 없는데다가 우리의 기세에 압도되다나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대낮에 벌판을 뻐젓이 지나 수림지대에까지 갈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밥도 해먹고 잠시 휴식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아마 천행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벌판을 무난히 통과하고나니 우리자신도 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적들이 꼭 불질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불질은커녕 재채기소리도 내지 않고 포대에서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으니 왜 어리둥절해지지 않겠습니까. 유격투쟁을 하느라면 이런 경우를 가끔 당하게 됩니다.
벌판을 무사히 통과한 대원들은 또다시 《하느님》이 혁명군편을 들어주었다고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을 때 너죽고 나죽고 결판을 내자, 죽으면 한번 죽지 두번 죽겠는가 하는 배짱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대담하게 냅다 밀면 극복 못할 난관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림지대에서 벗어나 다시 행군을 하고있을 때 적들이 우리의 뒤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마 대렬에서 도주한자들이 우리 행군방향을 대주면서 《김일성이 지금 대부대는 다 떼내깔리고 몇십명만 데리고다닌다. 그러니까 인제는 제낄수 있다.》고 귀띔질한 모양이였습니다.
얼마후에는 우리의 앞에 적들이 나타났다는 전방척후들의 보고가 또 날아들어왔습니다. 적이 뒤에도 있고 앞에도 있다면 그것은 야단이였습니다. 오백룡은 또다시 내 얼굴을 보면서 《장군님, 이제는 우리가 사령부라는것도 다 들장난것 같은데 어떻게 하랍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생결단을 하는것밖에야 다른 길이 있는가, 앞에서 오는 놈들은 우리를 생판 모르는놈들이고 우리와 조우하는것도 모르고 마음놓고 오는놈들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은 우리 력량이 얼마나 되고 우리가 얼마만큼 피곤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것까지 다 알고있다, 때문에 그놈들과 본격적인 대항전을 하기는 곤난하다, 그러니까 다른 도리가 없다, 한개 분대쯤 되는 인원을 떼서 뒤에 있는 놈들을 견제하게 하고 기본력량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주 오는 앞에 놈들을 제껴버려야 한다, 그래야 포위를 돌파할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 우리를 추격하는것은 일본군《토벌대》였지만 앞에서 우리를 위협하는것은 만주국군대였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우리 부대와 맞서는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즉 약한 고리는 앞에 있었습니다.
나는 오백룡에게 부대를 데리고 앞을 돌파하라! 약한 고리를 답새겨서 조금만 주춤거리면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돌격해서 적들의 병영까지 따라가 혼쌀을 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오백룡은 대렬앞에다가 기관총을 걸고 적들을 한바탕 족친다음 나팔을 불면서 돌격을 들이댔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자 우리가 굉장한 대부대인줄로 알고 지고있던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퇴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적들이 던지고간 배낭들에서 먹을것들을 걷어서 걸머지고 꿰진 신발까지 갈아신고 대통로가 있는데까지 적들을 쫓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여 우리는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나 도리여 적들을 추격하는 주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였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전술을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적들을 따돌리는 전술로부터 선손을 써서 적들을 답새기는 주동적인 공격전술로 넘어갔습니다. 묘술을 써서 적들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전술만으로써는 대오를 구출할수 없었습니다.
병서들에도 강한 적의 예봉은 피하고 교란하여 피로케 만들며 적이 동요하면 드센 공격을 들이대고 적이 퇴각하면 맹렬히 추격하며 강한 적을 약한 적으로, 아군의 역경을 순경으로 만드는것이 상등의 용병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전술을 광범하게 활용하여 고난의 행군때에도 어려운 고비들을 수없이 이겨내고 피동에서 벗어나 주동을 장악하군하였습니다.
나는 집단부락을 하나 들이쳐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는 한편 식량을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음력설이 오늘래일하던 때여서 여러달째 주림에 시달려온 대원들을 배불리 먹이고싶은 생각도 간절했습니다. 이렇게 되여 조직한 전투가 바로 13도만집단부락습격전투입니다.
우리는 전투에 앞서 적들의 전화를 도청했습니다. 12도구로 철수해간 위만군장교가 림강현에 있는 자기 상관에게 거는 전화였습니다. 그는 보고하기를 《김일성부대와 우연히 맞다들었는데 어떻게나 공격을 드세게 하는지 견뎌내지 못하고 퇴각하여 12도구에 와있다. 차후행동에 대한 지시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 장교는 이웃 집단부락에도 전화를 걸어 빨찌산이 습격해올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그 정보자료에 기초하여 가까이에 있는 적을 치고 련이어 다른 부락도 하나 더 쳐서 많은 식량과 식료품을 로획하였습니다. 식료품중에는 적들이 먹으려고 준비해놓은 교즈도 있었습니다. 짐이 너무 많아서 더러는 눈속에 파묻고 표식을 해두었습니다. 우리는 13도만전투에서 로획한 식량과 식료품으로 그해 음력설을 푸짐하게 쇴습니다.
유격투쟁이라고 해서 노상 고생스럽기만 한것은 아닙니다. 못먹고 못입는것이 일상사이기는 하지만 배불리 먹고 뜨뜻이 입고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13도만전투가 있은후 적들은 우리 사령부에 이전보다 더 많은 《토벌》력량을 집중하였습니다. 동서남북 어디에나 다 《토벌대》뿐이였습니다. 적들이 얼마나 검질기게 우리를 따라오는지 우리는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지에서 며칠밤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령부 대오는 그런 곤난속에서도 피동에 빠지지 않고 집단부락을 또하나 들이쳤습니다. 분산활동을 하고있는 대부대들에 우리의 위치를 알리기 위한 싸움이였습니다. 그 부락이름이 무엇이였던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전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장백현 상강구일대에서 활동하던 오중흡의 7련대가 사령부가 위험에 처한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령부에 쏠리는 적의 력량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집단부락들을 또 들이쳤습니다. 그 전투들은 우리에게 자기네 부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7련대가 사령부를 찾아온 다음에는 무송쪽에서 활동하던 8련대와 독립대대도 우리를 찾아왔고 청봉밀영에 있던 후방성원들까지 다 북대정자에 모이였습니다. 대렬을 점검해보니 전해에 몽강현 남패자를 떠날 때의 인원수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남패자를 떠났던 대원들의 거의 전부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그때의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항일전쟁기간에 리별도 많이 해보고 상봉도 많이 해보았지만 아마 그때의 그 상봉만큼 격동적인 상봉은 없었을것입니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전마당처럼 흥성거렸습니다. 100여일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 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기도 하고 딩굴기도 하면서 회포를 나누었습니다.
고생끝에 이루어진 상봉일수록 그 열도는 더 큰것 같습니다. 동지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려면 서로 헤여져있어도 보아야 합니다. 피를 나눈 동지들이 서로 리별도 하고 상봉도 하는 과정에 동지애는 더 공고해지고 열렬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동지애는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쉽사리 깨지지 않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부대의 이동을 위한 단순한 행군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옹근 하나의 전역과 맞먹는 규모가 큰 군사작전이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축도였다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우리는 군인으로서 겪을수 있는 고통도 다 겪었고 인간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온갖 시련도 다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아들, 인민의 아들들이며 자기 민족과 민족해방위업에 가장 충실한 혁명투사들임을 다시한번 온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격을 높은 경지에서 련마하였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형성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아름다운 영상은 우리 인민이 후손만대를 두고 따라배워야 할 공산주의적인간의 훌륭한 전형으로 되였습니다.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자기 지도자의 두리에 튼튼히 뭉쳐 적들을 타승한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창조한것, 이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거둔 중요한 성과이며 항일혁명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중의 하나입니다.
고난의 행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가 영웅들입니다. 이 행군에 참가한 사람들은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다 영웅들입니다.
모든 대원들이 만난을 이겨내고 불사신으로 살아남아 승리자로 되게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그 요인들가운데서 몇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내가 첫번째로 말하고싶은것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혁명적락관주의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적요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만난을 이겨내게 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무서운 곤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락망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승리할 앞날을 그려보며 그 모든 곤난을 이겨냈습니다. 말하자면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이 강했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당면한 난관에만 집착하여 맥을 놓았거나 혁명승리에 대한 전망을 암담한것으로만 생각했다면 그처럼 엄청난 시련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눈구뎅이속에 주저앉았을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마감지을수 있은 요인으로는 혁명적동지애도 들수 있습니다. 행군을 끝내갈무렵 오중흡이네와 만나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붙잡고 막 울었습니다. 나도 그를 보자 눈물이 났습니다. 육친을 만난것보다 더 반가왔습니다. 너무 반가와서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나는 그때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그 귀중한 전우들과 다시는 절대로 헤여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전우들에게 분산활동을 시키고나서 내가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내가 정말 그해 겨울처럼 전우들을 목마르게 기다린적은 없었을것입니다. 동무들중에도 제대군인이 적지 않기때문에 전우애라는것이 얼마만큼 강렬한 감정인가를 잘 알고있겠지만 세상에 전우애보다 더 열렬하고 생명력이 강한 사랑은 없을것입니다. 그리고 전우들사이에 오가는 도덕의리보다 더 숭고한 도덕의리는 없을것입니다.
혁명적동지애는 항일혁명 전로정을 관통해온 승리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과정에는 우리 대원들의 도덕의리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집중적으로 발양되였습니다. 《한홉의 미시가루》와 같은 일화는 그 시기에 창조된 무수한 미담들중의 하나일뿐입니다. 전령병들이 사령관을 위해 배낭속에 한홉쯤 되는 미시가루를 비상용으로 가지고다니였는데 내가 그것을 혼자서 먹을수 있습니까. 그래서 대원들과 같이 나누어먹었는데 이것이 후대들에게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게 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한두번만 있은것도 아닙니다.
아마 그때 우리 동무들은 자기 전우를 위해 살이 필요하다면 살이라도 떼여주었을것입니다. 자기를 깡그리 바쳐서라도 혁명동지를 위해주는것, 그것이 혁명적동지애입니다.
언제인가도 이야기하였지만 리을설은 한 신입대원이 불곁에서 자다가 옷을 태우고 우들우들 떠는것을 보자 자기 솜옷을 벗어 그 동무에게 입혀주고 무서운 혹한속에서 홑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얼어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동무들이 또 그에게 불보다 뜨거운 동지적인 사랑을 기울여주었기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100여일에 걸친 행군의 전행정에서 모두가 한홉의 미시가루를 나누어먹는 정신으로 살며 싸웠기때문에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해진 옷을 입고 혹한속을 헤치고 다녔지만 늘 몸이 훈훈했고 마음은 후더웠습니다. 우리 동무들이 한사람도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불사신처럼 살아남을수 있은 비결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랑의 힘이 죽음을 타승하게 한것입니다.
동지애로 뭉친 집단, 동지애에 기초하여 하나로 굳게 단결된 대오는 필승불패한다는것을 우리는 그때 다시한번 절실히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성과적으로 끝마칠수 있게 된 또하나의 요인은 우리에 대한 인민들의 사랑과 지원이였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과정에 가재수의 물방아간주인과 같은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우리 군대만 참가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행군에는 인민들도 참가하였습니다. 쌀이나 소금이나 신발이나 천과 같은 후방물자를 지고 사선을 헤치며 우리를 찾아온 이도화원과 요구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모두가 고난의 행군에 참가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라자구등판과 천교령에서도 체험한바이지만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빠질 때마다 구원자, 방조자, 동행자로 나선것은 언제나 인민이였습니다. 나는 이런 인민이 있는 한 우리가 고난의 행군도 승리적으로 결속하게 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힘을 가다듬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승리한 행군으로 될수 있은것은 또한 부닥치는 정황에 맞는 령활한 유격전법들을 능동적으로 활용한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서 사회주의건설을 하고있습니다. 우리 혁명은 의연히 간고한 행군길을 이어가고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고난의 행군은 계속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수십만의 일본군이 우리를 포위하고 추격하였지만 오늘은 그와는 대비도 할수 없이 막강하고 포악한 제국주의세력이 우리 나라를 압살하려 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전쟁시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살고있는셈입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우리가 살아나갈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항일혁명선렬들이 고난의 행군과정에 발휘하였던 백두의 혁명정신을 그대로 실생활에 철저히 구현하는것입니다.
우리는 항일전쟁시기뿐아니라 새 조국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에도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락관주의정신으로 만난을 극복하고 혁명의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고난의 행군과 같은 행군을 한 위대한 력사를 가진 인민들에게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행군의 력사를 유산으로 가지고있는 인민은 어떤 힘으로써도 정복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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