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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24장 5.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82,83,84,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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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5-10 23:2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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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4장 5.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1) 82-98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4장 5.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2) 83-98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4장 5.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3) 84-98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4장 5.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4) 85-98

 

 

 

제8제24장 5.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온 민족의 단합과 반일애국력량의 총집결로 조국광복을 이룩하려는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항일혁명의 전기간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오신 로선이였고 전략적방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대전을 시작하신 첫날부터 해내외에서 활동하는 모든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모색하여 온갖 심혈과 로고를 다 바치시였다.

 

모든 반일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한 위대한 수령님의 활동은 1940년대 전반기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나는 한평생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과의 단합을 중요한 로선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한때 민족주의운동은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서 2대구성부분을 이루고있었습니다. 조선민족해방투쟁은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하나의 사조로 남아있었고 민족주의운동세력도 미약하나마 하나의 반일애국력량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개량주의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민족운동자들은 의연히 반일의 기치를 들고 국내와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있었습니다. 민족운동세력은 국내인민들과 해외교포들 속에서 일정한 영향력도 가지고있었습니다.

 

량세봉과의 합작을 위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반일민족운동자들과의 통일전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반일민족운동자들도 우리와의 련대를 이룩하려고 여러모로 시도하였습니다. 지난날 공산주의자라면 덮어놓고 배척하고 경원시하던 사람들도 점차 우리한테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와의 련합을 성사시키기 위한 반일독립운동자들의 움직임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여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이루게 된것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였습니다. 1936년 5월에 우리가 조국광복회를 창립하고 민족의 총동원을 호소하면서 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벌려나가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그에 적극적인 자세로 호응해나섰습니다.

 

남만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참모장 윤일파가 우리에게 지지서한을 보낸것이라든가, 상해의 조선인거류민단에 있던 박씨성을 가진 독립운동자가 남만에까지 와서 조국광복회 남만대표였던 리동광을 만난것이라든가,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최윤구를 선두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스스로 편입한것은 그 대표적인 실례로 됩니다.

 

그러면 민족운동진영이 종전의 배타적인 립장에서 벗어나 어떻게 되여 우리와의 합작을 그처럼 중시하게 되였는가 하는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권위가 높아지고 그 영향력이 확대된데 있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민족해방운동에서 주축을 이루고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반일민족해방전선의 주력군이였고 민족의 독립의지와 신념의 최고대표자였으며 항일혁명의 조직자, 령솔자였습니다.

 

민족해방운동선상에 여러 갈래의 반일세력이 있었지만 그가운데서 적들에게 제일 심대한 타격을 가한것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두려워한 존재도 조선인민혁명군이였고 우리 인민이 제일 큰 기대를 가지고 바라본 무장력도 조선인민혁명군이였습니다.

 

우리 인민은 일제를 조국강토에서 몰아낼수 있는 실제적인 군사력은 조선인민혁명군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김구를 보좌하고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보천보전투에서 일제가 녹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환성을 올리며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남경에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도 《조선혁명무장운동의 희소식》이라는 제목으로 보천보전투를 상세히 소개하였습니다. 편집집단은 그 신문자료를 함흥에 있는 《조선일보》지국에까지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의주장을 초월하는 범민족적인 지지와 격려, 련대의 표시였습니다. 우리가 보천보를 답새겼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자들도 대단히 흥분했던것 같습니다.

 

김구는 일찍부터 무력항쟁을 모색한 사람이였습니다.

 

1920년대초에 그가 조직한 로병회라는 단체도 사실은 무력항쟁을 지향한 단체였습니다. 그는 무저항주의적인 실력배양이나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성사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한은 군대를 큼직하게 꾸려가지고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벌리지 못하는것이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우리의 무장투쟁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있었습니다.

 

해방직후 로스안젤스에서 발간되던 《조선독립》이라는 교포신문이 김구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은 일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 김구의 호소에 호응해서 김일성부대와 조선의용군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해보냈는데 헌금을 호소한 김구자신은 전란을 구실로 그 돈을 김일성부대에도 조선의용군에도 보내지 않고 중도에서 다 써버렸다는것이였습니다.

 

김구가 군자금을 보내지 못한것은 리해할만한 일입니다. 돈을 전달하자면 조직선을 타야 하는데 우리의 조직선을 찾기가 그때로서는 힘들었을수 있습니다.

 

나는 김구가 우리를 위해 헌금을 호소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가 우리의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간삼봉전투도 관내의 독립운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해외의 민족운동단체들에서 우리의 투쟁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련공의 움직임이 전에없이 활발해지게 된것은 우리가 조국광복회를 창립하고 만인이 다 접수할수 있는 민족공동의 투쟁강령인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발표한것과도 관련되여있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관내에 있던 반일애국력량은 주의주장과 투쟁방식의 차이로 하여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렬되여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파로 갈라져있었는데 하나는 민족주의파라고 하는 김구파였고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파라고 불리운 김원봉파였습니다. 김원봉파는 공산주의계렬에 가까운 독립운동좌파였습니다.

 

두 파는 장개석국민당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중국공산당과 저마다 독자적인 련계를 가지고있었습니다.

 

관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과의 통일전선을 위해서는 두가지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였습니다. 우선 관내의 반일민족단체들자체가 하나의 력량으로 단합되여야 하였습니다. 다시말하여 각이한 주의주장과 활동방식을 가진 단체들이 상호간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항일애국의 기치밑에 단일전선을 형성해야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단일전선에 망라된 모든 반일력량과 우리와의 합작을 새로운 기초우에서 실현해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국광복회를 창립한 이후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종일관 성실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부터는 관내운동과의 련대를 위해 더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활동을 벌렸습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후 중국혁명에서는 2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여 내외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습니다. 국공합작의 실현은 중국인민의 구국항전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으며 중국혁명발전을 크게 추동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타고 작은 당으로 서로 분립되여있던 김구계렬과 김원봉계렬이 1940년 9월에 지난날의 대치상태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단일전선결성에 성공하여 공동선언까지 발표하였습니다. 그 공동선언에는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10대강령에서 제시한 사항들과 같은 내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림시정부는 그후 김원봉계렬을 인입하여 좌우합작을 이루었습니다.

 

민족운동내부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도 우리는 국내와 일본에 있는 반일애국력량의 결속을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만주와 관내에 있는 반일애국력량을 끌어당기기 위한 활동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벌렸습니다.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일본은 멸망의 함정속에 더 깊숙이 빠져들어갔습니다. 일본의 패망을 예고하는 사변들이 도처에서 련이어 일어났습니다.

 

격변하는 정세는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하는 모든 반일력량이 하나로 결속되여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준비할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수십년간의 반일투쟁력사는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주의와 당파를 초월한 민족력량의 굳건한 단합만이 조국광복의 날을 앞당기는 지름길로 된다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게 하였습니다.

 

국내외의 광범한 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강력한 전민항쟁력량을 꾸려나가는것은 시대가 우리앞에 부과한 력사적과제였고 각계각층의 애국인사들과 인민대중의 공통된 념원이였습니다.

 

 

 

1940년대 조선독립운동자들의 활동방식과 민심동향의 변화에 대하여 일제경찰은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있다.

 

《내외로부터 감행되는 조선민족의 책모목적은 민족주의계라든가 공산주의계라든가 하는것을 묻지 않고 조선독립에 있으며 현재 표면적으로 조선독립을 명확히 하고있다. 중경밑에 있는자와 미국밑에 있는자 … 쏘련과 중공하에 있는자들은 종국의 목적을 조선독립에 두고있다.》[조선총독부경무국장이 소화19년(1944년) 5월에 각 도 경찰부장앞으로 보낸 경찰문건]

 

《사상사건에서의 특이한 점

 

종래와 같이 주의주장의 리론구성에 구애되지 않고 중심목표인 조선민족의 독립에 중점을 지향시키고있으며 따라서 종래의 대립관계에 있었던 공산주의운동과의 관계에서도 심히 접근하고있으며 민족주의분자와 좌익분자와의 혼재합작으로 이루어지는 사건과 같은것도 드물지 않는 상황에 있다.》[《고등외사월보》 제51호 5페지,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3, 4월분]

 

 

 

우리가 중국관내 반일애국력량과의 련계를 확립하는데서 주목을 돌린 단체의 하나는 상해림시정부였습니다.

 

일본군대가 중국본토를 침공한후부터 림정은 거처를 빈번하게 옮기였습니다. 국민당정부를 따라 소재지를 자꾸 바꾸다보니 사실은 간판이나 겨우 유지할 정도로 고달픈 처지에 있었습니다. 림정관계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이사짐을 늘 지고다닐 정도로 줄곧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어떤 때에는 짐보따리를 풀어보지도 못한채 려관구석에 앉아있다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다른 고장으로 옮겨가기도 하였습니다.

 

끊임없는 파쟁과 헌법개정, 개각으로 진통을 겪는 림시정부는 초보적인 생존조건과 신변의 위험때문에도 고충을 겪고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김구가 경제적곤난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길도 막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군월급이 20원미만이였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번 송사를 당하기도 하였다, 나는 림정청사마루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거지중에서도 상거지였다고 하였겠습니까.

 

1940년에 림시정부는 방랑생활을 끝내고 장개석정부의 소개지인 중경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림시정부가 광복군을 조직한것도 중경에 있을 때입니다. 림정이 자기 산하에 광복군과 같은 무장력을 내온것은 그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전진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때 광복군관계자들은 자기들이 주관한 한 출판물에서 김일성과 양정우, 조상지 등의 이름을 찍어가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과 동북항일련군의 활동내용을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력사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무장장비로 보나 청소한 무장력이였습니다. 림정관계자들자신도 자기네 무장력의 발전은 한도가 있는것으로 보았습니다. 리청천이 해외반일력량의 실태를 분석하면서 림정세력의 주도권확립이 어렵다고 한것이라든가 림정은 대처할 아무런 준비도 없이 8.15해방을 맞이했다고 솔직히 술회한것은 이런 실정의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일제경찰이 광복군에 대하여 남긴 기록의 한토막을 소개한다.

 

《광복군의 진용은 림시정부의 과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매우 빈약하며 각 지대원은 불과 10여명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제5지대만이 총계 50명이 되나 그중 20명은 라월한직속의 무정부주의자, 기타는 모두 조선인포로로서 문맹에 가깝고 아편을 밀매하는 불령업에 종사하던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매우 빈약한것으로서 거의 볼만한 활동이 없이 지내고있었다.》[황해도경찰부 고등경찰과, 소화18년(1943년)2월]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도 손을 잡아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김구계렬과의 합작이 성사되면 조국해방을 위한 최종작전이 벌어질 때 그들의 무장력도 동원할수 있다는것이 우리의 견해였습니다.

 

김책은 처음에 우리가 림시정부의 김구네 계렬과 합작하려는것을 내키지 않아하였습니다. 리유인즉 반공분자인 김구와의 합작이 가능하겠는가 하는것이였고 설사 합작이 성사되는 경우 그것이 얼마나 큰 은을 내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내 설명을 듣고는 자기가 김구의 애국심을 중시할 대신 그의 반공적측면만을 너무 일면적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나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관내반일력량과의 관계는 허정숙을 통하여 추진시켰으면 좋겠다는 안까지 주동적으로 내놓았습니다.

 

최용건도 초기에는 김구와의 제휴를 그닥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림시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는 그가 김책보다 훨씬 더 회의적이였습니다. 파벌에 이골이 난 사람들과 손을 잡아서는 무엇하겠는가, 손을 잡았대야 덕을 보지 못한다, 합작을 하는바치고는 차라리 김원봉이네 계렬과 하는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물론 최용건도 나중에는 김책처럼 나의 주장에 리해를 표시하였습니다.

 

김원봉은 의렬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해가지고 관내와 동북지방은 물론, 국내를 무대로 암살과 습격파괴활동을 벌렸습니다.

 

그후 조선의용대라는것을 조직했는데 제1구 대장이 해방직후 중앙보안간부학교 교장을 잠간 한바있는 박효삼이였습니다. 박효삼은 휘하에 40명 정도의 대원들을 거느리고있었습니다.

 

후날 김원봉이 하는 말을 들으니 조선의용대는 규모도 작고 갖춤새도 빈약해서 독자적인 활동은 별로 하지 못하고 중국부대들에 섞여 돌아가면서 확성기를 가지고 반전선전과 적군와해공작 같은것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규모와 갖춤새는 그닥 변변치 않지만 힘으로 일제를 타승하려는 그들의 지향을 중시하였습니다.

 

우리는 화북에 있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무정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중국의 홍군건설과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도 기여를 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조국에 돌아와서는 민족보위성 부상도 하고 포병사령관도 하였습니다.

 

무정이 조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우리 집 가까이에 그의 집을 잡아주었습니다.

 

무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무력건설에 참가하여 공로도 세웠지만 워낙 군벌관료기가 심한 사람이여서 조국해방전쟁때에 비판을 받고 군직을 다 내놓았습니다.

 

무정이 현직에서 해임되였지만 우리는 그가 중병으로 신고할 때 최선을 다하여 치료대책을 세워주었습니다. 중국 장춘에 로므니아의료집단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무정은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후 무정이 우리곁에서 눈을 감고싶다고 하기때문에 그를 조국에 데려왔습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장례식을 잘해주었습니다.

 

무정은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김장군소문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힘이 났다, 왜놈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하는 장수가 조선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몸은 비록 8로군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백두산쪽에 가있었다, 조선의용군이 김장군부대와 합류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조선의용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공동으로 일제를 격멸할수는 없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일성장군과 손을 잡아보려고 여러모로 애썼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조직된 다음 이 지대가 위대한 수령님과 련계를 맺기 위해 활동한 정형에 대하여 일제의 관헌자료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동정

 

…1941년 5월, 6월경에 새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편성하였다.…

 

그후 경한선일대의 우리가 점령한 지역을 목표로 하여 동지획득, 각종 모략선전에 광분하는것과 함께 재만불령선인  김일성과의 제휴, 선내동지와의 련락 등 공작중인바…〈우리들은 내부의 단결을 굳게 하고 화북조선동포 20만, 동북(만주), 국내(조선)의 혁명인사 및 혁명단체, 무장대오를 련

 합하여 조선민족해방을 위하여 시종일관하게 반일투쟁을 견지한다〉운운의 선언 발표…》[황해도경찰부 고등경찰과, 소화18년(1943년) 2월]

 

 

 

해방후 내각에서 초대문화선전상을 한 허정숙도 1940년대에는 연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인운동자들가운데 한다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다 우리 부대를 그리워했다는것이였습니다. 우리 부대에 대한 동경심이 얼마나 컸던지 자기도 주은래와 주덕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만주로 가게 해달라고 청원까지 했다가 중국사람들한테서 민족주의를 한다는 비판까지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중국관내와의 련계를 모색하고 있을 때 관내의 조선인운동자들과 애국인사들도 우리와의 합작을 열렬히 추구하고있었다는것을 더 깊이 알게 되였습니다.

 

그때 그들도 8로군을 따라다니면서 적군와해공작을 많이 했는데 주되는 사업대상은 일본군대에서 복무하는 조선청년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런 청년들을 상대로 왜놈들의 총알받이가 되지 말고 과감무쌍하게 탈출하여 북중국방면에 있는자는 조선의용군이나 8로군에, 중부중국과 남중국 방면에 있는자는 조선의용대나 신4군에, 만주방면에 있는 자는 김일성부대를 찾아가라는 식으로 함화를 들이댔습니다.

 

그들은 의거해오는 조선인징병자들에 대한 대우규정을 날리기도 하였습니다. 중기관총을 가지고오면 돈 얼마를 주고 3년간의 일용품우대특전을 준다든지, 경기관총이나 척탄통, 소총을 가지고오면 얼마, 또 투항하는자는 각자의 희망에 따라 공부할수도 있고 치료받을수도 있다는 식으로 적군와해공작을 벌리군했는데 그 효과가 컸다고 합니다.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애국자들가운데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고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의주장에는 관계없이 모두가 우리와의 련대와 합작을 지향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느 모로 보든지 좋은 일이였습니다.

 

우리도 주의주장에 따라 사람들을 이편저편으로 갈라놓고 차별하는 놀음은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이건 장개석의 보호하에 있는 사람이건 그런것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애국을 지향하는 인사들은 다 합작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중국관내와의 련계를 위해서는 여러가지 통로를 리용할수 있었습니다. 쏘련의 군사당국이나 국제당선을 리용할수도 있었고 동북항일련군측에서 관내에 파견하는 련락선을 리용할수도 있었습니다. 또 우리자신이 련락원을 필요한 방면에 직접 파견할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국동북에서 무장투쟁을 할 때 관내와 련계를 취하면서 리용한 선가운데는 요하, 동강 방면의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교통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강성 이리와 감숙성의 란주, 연안으로 통하는 국제통로도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선은 만주의 동변도로부터 만주와 중국의 국경선을 련결하는 유격로였습니다.

 

원동의 훈련기지에는 그 당시 중국관내에서 홍군사단장을 하다가 쏘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은후 연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제련합군에 와서 강의에도 출연한 류아루와 로동생, 중공당 련락원 왕붕이 와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관내로 돌아가게 되면 연안과 중경에서 활동하는 조선사람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맡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세사람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연안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류아루는 동북해방작전당시 동북야전군 참모장을 하였습니다. 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사령원이 되였습니다.

 

로동생도 동북땅에 남아서 송강군구 사령원을 하였습니다. 그를 아마 송명이라고도 했던것 같습니다. 그는 1945년말에 희생되였습니다.

 

우리는 동북지방에 소부대공작을 나가는 편을 통해서도 관내와의 련계를 시도했고 국내에 있는 지하조직선을 통해서도 관내인사들과 접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의 말대로 허정숙을 중시하였습니다. 허정숙이한테 우리의 선이 닿기만 하면 그를 통해서 연안과 중경 일대의 반일력량과 손을 잡을수 있는 출로도 열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허정숙을 특별히 점찍은것은 그의 애국적인 투쟁경력을 좋게 본데도 있었지만 그가 김책과의 연고가 깊은 허헌의 딸이라는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ㅌ.ㄷ》성원인 강병선이 주관했던 신의주의 지하조직에 관내와의 련계를 확보할데 대한 지령을 내려보냈습니다. 그 지령에 따라 신의주의 지하조직은 천진에 있는 한 공작원에게 중경과 연안쪽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련락통로를 개척할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중경, 연안과의 합작을 위한 중간련락지점을 만들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국제련합군시절에 중국관내 반일애국력량과의 민족통일전선, 중국공산당을 비롯한 항일세력과의 반제공동전선을 위해 각방으로 활약한 사실과 관련하여 일제의 경찰기관들은 여러건의 정보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김일성의 활동상황

 

김일성은… 현재 쏘련원동 울라지보스또크부근의 오께안스까야 야영학교에 있으면서 만주에 있는 불령선인들의 획득령도에 암약중인바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미쏘합작의 비밀협정에 기초하여 중국에 있는 미공군의 만선지방공습에 호응하여 만선지대에서 만선련락의 철도파괴에 의한 군수수송을 방해하는것과 함께 민심교란공작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까운 만선주요지구에 공작원을 밀파하려고 목하 준비중이라고 한다.

 

즉  김일성은 지난 6월중순경 전후 두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 다녀온 외에 중경, 연안에 건너가 주중 쏘미대사관들과 중공관계기관과 여러가지 협의를 한후 장래에 대처하는 …공작밀파요원을 그전에 압록강연안지대에서 활동하였던 당시의 선만인항련비로써 철도파괴모략단 및 사상모략공작반을 재편성하고 쏘련 하바롭스크부근에서 이 모략공작의 교육훈련중이라고 전해지고있다.》[《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11월분 76페지]

 

 

 

우리가 관내에 있는 반일애국력량과의 련계를 모색하고있을 때 중경에 있던 반일애국력량도 우리와의 합작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모로 활동하였습니다.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의 회상에 의하면 김구도 우리에게 련락원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련락원은 만주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도에서 해방을 맞이했다는것입니다.

 

1942년 12월에는 림시정부파견원의 자격으로 김가성을 가진 사람이 목단강까지 왔다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중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일제는 우리와 관내에 있는 중공당소속의 조선인공산당계가 중강진, 림강, 혜산진, 통화 부근을 중심선으로 해서 서로 련락하고있다는 정보도 전하고있습니다.

 

우리는 국제련합군시절에 소부대공작을 하면서 종교세력에도 관심을 돌렸습니다.

 

1942년말에 녕안현 동경성에 있던 대종교본부의 3세교주 윤세복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대종교의 교인들은 자기네 교의 사명이 일본과 만주국의 기반에서 벗어나 조선민족에 의한 배달국의 재건을 기도하는것이라고 하면서 반일활동을 벌렸다고 합니다. 대종교의 한 간부는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은 불가피한 운명이며 따라서 이 기회에 조국광복의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하면서 버마에 바모가 있다면 조선에는 김일성이 있다, 조선민족의 행복은 독립에 의하여 이룩될것이라는것을 드러내놓고 주장하였습니다.

 

소부대공작에 나갔던 동무들을 통하여 목단강성 경무청이 대종교간부들을 마구 체포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녕안현에 총본부를 두고있던 제2방면군소속의 반일회에 적들의 탄압책동을 분쇄하고 애국적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데 대해서와 화전, 돈화, 안도 일대의 반일력량을 조직의 주위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대일작전을 준비하던 나날에 우리가 주목한 국내의 반일민족단체는 려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이였습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에 나온 반일지하단체입니다. 이 동맹은 려운형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일대의 농민들을 기본으로 하여 무은 농민동맹이라는 산하조직도 가지고있었습니다.

 

1944년이면 민족주의단체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하던 때입니다. 패망에 직면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국가총동원법이요, 뭐요 하는 파쑈방망이들을 마구 휘두르며 반일요소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대상이면 그가 누구든지 닥치는대로 잡아가고 문초하고 처형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서울일대에서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반일단체를 내온것은 과시 려운형다운 배짱이였습니다.

 

건국동맹이 비밀을 얼마나 철저히 지켰던지 서울에 있은 우리 공작원들도 얼마동안은 자기네 코앞에서 그런 조직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우리는 1945년에 가서야 겨우 건국동맹의 존재를 알게 되였습니다.

 

려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내온 다음 인차 나에게도 사람을 보내고 조선독립동맹에도 련락원을 파견하였습니다. 아쉽게도 그가 보낸 련락원은 우리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려운형이 보낸 사절들이 연안쪽에 있는 조선독립동맹 인사들과는 만났다고 합니다.

 

려운형의 련락원이 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것은 우리가 그 당시 쏘련의 훈련기지에서 활동하였기때문이였습니다.

 

려운형이 보천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우리를 만나려고 각방으로 애를 쓴것처럼 우리도 려운형과의 합작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려운형과의 사업은 서울에 가있는 정치공작원에게 맡겼습니다. 품을 들여서라도 려운형과 접촉해보라는 임무를 주었으나 후에 들은데 의하면 상대가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 그와 한번도 속깊은 말을 나누지 못했다고 합니다.

 

려운형은 건국동맹안에 군사위원회를 내오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배후를 교란시키기 위한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이 계획은 우리가 지향하고있던 전민항쟁로선에도 부합되는것이였습니다.

 

관내의 모든 반일애국력량과의 합작을 위한 우리의 활동은 응당한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이 너무나도 빨리 패망했기때문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 국내의 항쟁조직들이 내응외합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종작전을 벌릴 때 관내의 무장력은 거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김구는 이것을 매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는 왜적의 항복이 자기에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일이였다고 하면서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준비를 한것이 다 허사로 돌아갔다고 통탄하였으며 자기네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때문에 장래에 발언권이 약할것이라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합작을 위한 쌍방의 노력이 그렇게 허사로 돌아갈수는 없었습니다. 당장에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때에 가서든지 꼭 은을 내기마련입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북두칠성이 굽어본다는 말도 있지만 민족해방을 위해 바치는 노력에 대해서는 력사가 꼭 보상을 하는 법입니다.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력사의 밑거름으로 되여 해방된 조국땅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항일혁명초기부터 통일전선사업을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로선으로 삼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온것이 백번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때 청년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사이에는 일정한 마찰과 대립도 없지 않았습니다. 고이허나 현묵관과 같은 국민부상층이 우리 동무들을 여러명이나 살해한 왕청문사건이 있은 때로부터 우리는 얼마동안 민족주의자들과 거래를 끊고 그들을 통렬히 규탄하였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의 일부 동무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영원히 단절하자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청문에서의 희생이 아무리 참혹하고 가슴아픈것이라 하더라도 국민부의 반동적인 상층이 범한 죄행을 민족주의진영전체의 잘못으로 증폭시켜 전가할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서 동지들의 희생으로부터 오는 슬픔과 분노를 묵새겨가며 통일전선의 기발을 시종일관하게 추켜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백지화하고 국민부의 잔존세력으로 남만에서 활동하던 량세봉이네 부대에도 찾아갔고 반공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로 되여있던 김구와의 합작도 모색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심리적곡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정에 사로잡혀 처신을 극단적으로 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방향으로만 나갔더라면 통일전선은 지상공론으로만 남아있었을것입니다.

 

통일전선을 위한 우리의 변함없는 노력과 성의 앞에서는 김구와 같은 완고한 반공인사도 감동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가 하루아침사이에 우리한테로 돌아섰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가 림정을 인정하지 않은 미군정의 처사가 고깝고 또 단순히 리승만과 의가 맞지 않아서 반공대신 련공을 한것도 아닙니다. 항일의 나날로부터 뜨겁게 간직해오던 애국의 열정이 우리와 김구를 하나로 융합시킨것입니다.

 

력사적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우리가 일찍부터 점을 찍어두었던 대상들은 해방후 모두 통일전선의 기발아래 모여들었습니다. 1948년 4월의 남북련석회의에 어떤 정객들이 참가했는가를 보시오. 김구,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김월송 … 이름있는 민족주의자들은 다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따지고보면 김구네 림시정부인사들은 다 우리에게로 온셈입니다.

 

조선건국동맹의 주인공인 려운형도 평양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갔고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들도 동료들과 함께 평양으로 찾아왔으며 김원봉도 평양에 와서 초대국가검열상으로 사업하였습니다.

 

공화국북반부에서는 벌써 1946년에 각당, 각파, 각계의 애국력량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였습니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대일작전을 준비하던 나날에 더 련마되고 공고한것으로 되였습니다. 만일 그런 의지의 련마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해방후 애국과 매국, 진보와 보수, 민주와 반동 사이에 첨예한 대결이 벌어지고있던 복잡한 상황속에서 각이한 주의주장과 투쟁경력을 가지고있는 해내외 각계각층의 애국력량을 그처럼 인내성있게 통일전선의 광장으로 불러내지 못했을것입니다.

 

외세의 위협을 항시적으로 받아오고있는 우리 민족의 좌우명은 무엇보다도 민족대단결로 되여야 합니다. 민족의 흥망성쇠여부는 우리 민족모두가 이 좌우명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데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과 리념, 정견과 제도에 앞서 민족을 우선시하는 시종일관하고 공명정대한 정책의 깊은 력사적뿌리와 크나큰 업적과 고귀한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내놓고 온 민족을 통일위업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킬수 있는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5-10 23:30:02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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