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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23장 2.혁명가 김책 29,30,3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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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4-28 19:4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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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3장 2.혁명가 김책(4) 29-98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3장 2.혁명가 김책(5) 30-98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8 권 제23장 2.혁명가 김책(6) 31-98

 

 

 

제8제23장 2.혁명가 김책

 

 

 

 

 

 

 

적들이 한때 북만에서 항일유격대원들의 사기를 꺾어보려고 김책이 체포되였다, 박길송이 투항했다, 어느 지대가 귀순했다, 허형식이 어떻게 됐다 하고 엉터리없는 류언비어를 돌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날조라는것을 알고있는 유격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격분하였습니다. 그런 류언비어에 신물이 난 2지대의 지대장은 좋다, 너희들을 혼내주마 하고 적들을 골탕먹일 계책을 꾸미였습니다. 그는 부대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특무를 한놈 유인해다가 그에게 빨찌산이 투항하려고 하니 당신이 산에서 내려가 헌병대와 교섭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헌병대는 특무를 통하여 접선장소와 접선시간을 알려주고 지대장에게 후한 표창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순자대렬을 인수하기 위하여 약속된 접선시간에 특무를 앞세우고 지정된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수림속에 정렬한 2지대의 대오를 보자 벌쭉벌쭉 웃으면서 그들에게 손까지 흔들어보였습니다.

 

이때 2지대의 대원들은 일제히 총을 내들면서 《꼼짝말라!》고 고함쳤습니다. 지대장은 적들에게 이 어리석은 놈들아, 우리는 투항하러 온것이 아니라 네놈들을 잡아가러 왔다, 손을 들라고 호통쳤습니다.

 

그러자 적의 우두머리는 공산군은 거짓을 모르는 군대라던데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법이 어디 있는가, 군대란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지대장이 그 말을 듣고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네놈들이 눈만 째지면 류언비어를 퍼뜨리고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신의는 무슨 신의란 말이냐, 네놈들이 하도 대포를 불기때문에 우리도 대포를 불어본거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2지대는 적들을 몽땅 생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대장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들이 대단했습니다. 성공한 작전이라고 추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박득범이 식량을 해결하려고 《투항》을 광고했다가 되게 비판을 받은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였습니다.

 

김책은 2지대의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적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유격대도 거짓말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인가, 아무리 가짜귀순놀음이라 해도 어떻게 유격대와 투항이라는 말을 결부시킬수 있는가, 혁명군대의 지휘관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무섭게 다불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대장을 철직시키고 나머지지휘관들도 다 강직시켰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혹시 김책을 책벌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는 처벌을 망탕 주는 그런 무지막지한 지휘관이 아니였습니다.

 

실례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한 대원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덤벼치던 나머지 척탄통알이 들어있는 배낭을 전장에 두고 척탄통만 가지고 퇴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대에서는 모임을 열고 그 대원을 비판하였습니다. 무기를 잃은 대원을 비판하거나 처벌하는것은 혁명군부대들에서 간혹 보게 되는 일이였습니다. 비판무대에 오른 대원은 전우들이 주는 충고를 응당한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초급정치일군이 과오를 범한 대원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제기하는 바람에 회의분위기가 살벌해졌습니다.

 

김책은 과오를 범한 대원의 입대년도를 료해해보고 그가 신대원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책임은 그를 잘 교양하지 못한 지휘관들에게 있으니 책벌이 아니라 방조를 주어야 한다고 결론한 다음 초급정치일군의 제의를 기각해버리였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끝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처단을 주장하던 그 초급정치일군이 계속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사건은 확대되였습니다.

 

과오를 범한 신입대원은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하루종일 사색이 되여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날 밤으로 도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조롭게 매듭을 지을수 있었던 문제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심각하게 번져갔습니다. 책벌을 주장하던 초급정치일군은 증오의 대상이 되였습니다. 모두들 인정사정없는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를 반혁명분자라고 규탄하는 사람, 처벌해야 할 사람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책은 이런 사태를 보고받고서 책임은 다른데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대원들의 정치적생명을 귀중히 여길줄 모르는 정치일군이 있다는것은 정치주임인 내가 일을 쓰게 못한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그 초급정치일군을 자신의 호위반에 편입시키고 가까이 끼고있으면서 개별교양을 하였습니다.

 

김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군민관계와 상하관계를 잘 가지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김책은 우리가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조선혁명의 기치를 든데 대하여 자주성과 결부시켜 높이 평가하였지만 사실은 그자신도 조선인대원들에게 우리는 중국인부대에서 싸우지만 항상 조선혁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혁명은 남이 해주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자신이 해야 한다, 우리는 늘 자기 조국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혁명에 대한 견해, 인민에 대한 관점, 자주성에 대한 립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당건설과 국가건설, 군건설은 물론,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면에서 나와 김책은 공통점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김책이 내가 자기의 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 알고있는것이 놀랍다고 하기에 나는 그에게 나도 처음부터 김책을 주시해왔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그 말을 듣자 웃으면서 《얼굴도 모르고 만나도 못본 사람들끼리 서로 주시하고 그리워했다면 그거야 연분이지.》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감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이 나를 만나려고 길림에 찾아온것이 1930년 여름이니 우리의 우정은 벌써 그때부터 시작되였다고 해야 옳을것입니다.

 

북만부대에서 높은 직급을 가지고있던 김책은 나이로 보나 혁명투쟁경력으로 보나 만주빨찌산의 조선인군정간부들중에서 좌상대접을 받을수 있는 인물이였습니다.

 

또 나로 말하면 그때에는 아직 국가수반도 아니고 당총비서도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김책은 쏘련사람들앞에서나 중국사람들앞에서나 나를 조선혁명의 대표자로, 지도자로 내세웠습니다.

 

어떻게 되여 그가 자기보다 9살이나 아래인 나를 그처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내세웠겠습니까. 물론 그 리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설명할수 있을것입니다. 김책이한테는 혁명을 하자면 령도중심이 있어야 하고 그 령도중심의 두리에 모두가 하나로 튼튼히 뭉쳐야 한다는 사상이 온몸에 꽉 차있었습니다. 령도중심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결국은 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표현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김책은 나를 만난 다음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여 시종일관 변함없이 나를 따르고 받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시국이 어떻게 변하건 상관치 않고 나에게 모든것을 의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왔습니다.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서도 김책은 사방으로 뛰여다니면서 당건설도 하고 군건설도 하고 국가건설도 하고 산업건설도 하느라 편히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전쟁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김책이 소갈데 말갈데를 다 갔습니다. 전선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충청도에까지 나가있었습니다. 자기는 최전선에 나가있으면서도 내가 전선에 시찰을 나가면 나의 수원들을 보고 여기가 어딘데 최고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오는가, 동무들이 도대체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인가고 생야단을 했습니다. 나와 함께 수안보에 갔던 사람들이 그때 김책이한테서 욕을 단단히 들었습니다.

 

길림시절에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나를 령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을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로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혁명에서는 령도중심이 형성되였습니다. 이 령도중심을 꾸리는데서 김책은 특출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김책이 차지하는 몫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때 원동의 기지에는 북만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와있었고 남만출신들도 와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곳에서 나서자란 조선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서로가 자기 부대를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게 된다면 혁명대오가 단합되지 못하고 중심도 이루어지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원동의 기지에 모인 조선공산주의자들속에서는 지방주의라든가 령도권쟁탈과 같은 놀음이 한번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순결한 사람들이여서 그런 일이 있을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김책, 최용건과 같은 로장들이 처음부터 나를 내세우다나니 령도중심이 확고했습니다.

 

김책이 나를 어느 정도로 따르고 신뢰했는가 하는 실례를 말해주겠습니다.

 

김책은 하바롭스크회의에 참가한 후 1942년과 1943년의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만주에 나간것은 북만에서 활동하는 소부대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소부대들에 대한 지도가 끝난 다음에도 기지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북만부대의 지휘관들인 허형식과 박길송이 전사한 후였습니다.

 

김책은 전우들의 피가 스며있는 땅을 떠나고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국제련합군을 조직하면서 지휘부에서는 여러번 무전을 쳐서 그가 철수할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매번 할 일을 다하고야 돌아간다는 답전을 보내왔습니다. 그때 김책이네 소부대에는 무전기가 있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의 지휘성원들은 무전을 받을 때마다 그의 처사를 두고 매우 못마땅해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이 변화된 정세의 요구로부터 우리가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고있는 사실을 잘 모르고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직접 나의 이름으로 무전을 쳤습니다.

 

김책은 내가 무전으로 들어오라고 권고해서야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국제련합군지휘부에서 들어오라고 해도 꿈쩍하지 않던 사람이 왜 내 련락을 받고는 그달음으로 들어왔는가. 그것은 그가 나를 그만큼 따르고 신임했기때문입니다. 김일성동지가 나를 들어오라고 했으면 내가 들어가는것이 옳은 처사이다, 그러니 리유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내 말이나 요구를 절대화하였기때문입니다.

 

김책은 원동의 기지에 있을 때부터 진심으로 나를 내세우고 보호해주었습니다.

 

1941년 봄에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나갈 때에도 나와 동행하게 될 호위성원들 한사람한사람에 대하여 마음을 썼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에 대한 최후공격작전준비를 하고있을 때에는 김책이 나도 모르게 국제련합군의 조선지휘관들만 따로 모아놓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나의 신변호위와 관련된 회의였습니다. 각자가 경각성을 높여 김일성동지의 신변호위를 잘해야겠다, 김일성동지는 조선인민과 조선혁명가들을 대표하는 령도자이니 목숨으로 옹위해야 한다고 력설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조국에 개선하자마자 김책은 나의 호위와 관련된 모임을 또 열었습니다. 조국에 와보니 듣던것보다 정세가 훨씬 더 복잡하다, 테로분자들의 준동이 여간 심하지 않다, 정신을 차리지 않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평안남도당의 책임비서 현준혁이도 테로분자들한테 피살당했다, 김일성장군이 개선했다는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 공개할 때가 있으니 함부로 루설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경위대원이 된 심정으로 김장군의 호위를 각별히 잘해야겠다고 호소하였습니다.

 

후에는 그가 주동이 되여 경위대도 조직하였습니다.

 

김책이 나에게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루종일 해도 못다할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방직후에도 나는 사람들과의 사업에 큰 힘을 넣었습니다. 인민들과의 사업, 남조선혁명가들과의 사업, 외국인들과의 사업으로 정말 눈코뜰새가 없었습니다. 노사까 산조도 해방직후 우리 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방직후에는 귀한 손님들이 와도 그들을 접대할수 있는 봉사체계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손님들을 먹이고 재울수 있는 초대소조차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우리 집에 데려다가 접대하였습니다. 우리 집이라야 밥 한그릇에 국 한사발이 고작이였습니다.

 

해방이 갓 되였으니까 별수 없지 하고 다들 심상하게 여기였지만 김책이만은 이런 실태를 두고 상당한 정도로 마음을 썼습니다. 그는 우리 집에서 차린 식탁에 좋은 술을 내놓지 못하는데 대해 은근히 걱정하였습니다.

 

그는 나라사정이 딱한것도 사실이고 우리 수중에 돈이 없는것도 사실이지만 장군님댁에 손님이 올 때마다 어떻게 노상 되병을 들고 장마당출입을 하겠는가, 이제 공화국이 창건되면 우리 장군님한테로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겠는데 술공장을 하나 꾸려가지고 우리 손으로 접대용술을 만들자, 장군님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도 술은 우리자체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전국적으로 제일 유명한 술은 무엇이고 그 술을 만들어내는 양주전문가가 누구인가 하는걸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직후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다고 소문이 난 술은 룡강에서 만드는 술이였습니다. 그 술을 한 양주업자가 딸과 함께 만들어냈는데 해방전에 일본인 고관들과 부자들이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김책은 그들을 찾아 룡강으로 내려갔습니다.

 

김책의 말에서 큰 충동을 받은 양주업자는 나라에 양주기술자가 필요하다면 내 딸을 데리고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딸의 이름이 강정숙이였습니다. 강정숙은 그때부터 한편으로는 김책의 밥을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술을 고았습니다.

 

그가 양주작업장을 꾸리기 시작하자 김책은 한 일군을 데리고 장마당에 가서 쌀을 사왔습니다. 김책의 숙소는 미구에 양주장으로 변하였습니다.

 

며칠후 김책은 처음으로 뽑은 술을 병에 넣어가지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장군님, 강정숙이 뽑은 첫 룡강술입니다.》

 

김책은 이렇게 말하며 잔에 술을 찰랑찰랑 부었습니다.

 

룡강술이 최고라고 하던 항간의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였습니다.

 

내가 술맛이 좋다고 하자 김책은 《그렇다면 됐습니다.》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강정숙이 제조하는 룡강술은 국가연회용술이 되였습니다.

 

이것이 연줄로 되여 그들은 부부가 되였습니다.

 

김책이 수령의 권위를 어느 정도로 절대화했는가 하는것은 그가 내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단추를 채운 다음에야 통화를 시작하군 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병석에 있을 때에도 나한테서 오는 전화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받군 했습니다. 옆에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노상 그렇게 했습니다. 수령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김책은 내가 없으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였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제일 준엄했던 때가 후퇴때였습니다. 일시적후퇴다, 전략적후퇴다 하고 선포했지만 신념이 약한 사람들은 공화국의 운명이 끝장나는가보다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적들이 사리원을 돌파하자 전선사령관인 김책은 중화, 상원, 강동일대에 평양방위선을 구축해놓고 나에게 전선정황을 보고하면서 자기는 후퇴해들어오는 부대들로 방위력량을 보강하고 끝까지 견지하겠으니 장군님만은 최고사령부성원들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며칠후 김책은 또다시 전화로 최고사령부의 위치를 옮겨달라는 건의를 하였습니다.

 

나는 동무들도 적들의 공격을 그만큼 지체시켰으면 되였으니 이제는 후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후퇴하지 않고 당원증만 보내왔습니다. 결사전을 하기로 결심했던것입니다.

 

나는 전화로 김책을 찾아 동무가 들어오지 않으면 나도 평양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야 김책은 방어부대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인민군대가 재진격을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당원증을 찾아갔습니다.

 

김책을 매우 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일군들도 있었지만 사실 그가 무섭게 구는것은 건달군들과 아첨쟁이들, 불평분자들, 리기주의자들, 탐위분자들과 종파쟁이들앞에서였지 아래일군들과 인민들앞에서는 무한히 인자하고 겸손하였습니다. 김책이 딴꿈을 꾸는자들을 몹시 증오했기때문에 박헌영도 그앞에서만은 처신을 조심스럽게 하였습니다. 김두봉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했지만 김책이만 보면 슬슬 피해다니였습니다.

 

김책은 가식과 위선을 모르는 사람이였습니다.

 

해방직후 그의 아들이 만주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단추 2개가 달린 베적삼에 짚신바람이였습니다. 김책이 아들을 나한테 인사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짚신바람으로 어떻게 장군님을 만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런 때 어지간한 부모들 같으면 상점에 가서 옷도 사입히고 신발도 사신긴 다음 자식을 내 방으로 데리고왔을것입니다.

 

그렇지만 김책은 처신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짚신바람이라고 부끄러워할것은 없다, 네가 김일성장군님이 어떤분이라는걸 잘 몰라서 그러는것 같은데 걱정말고 어서 들어가자, 지금까지 내처 발을 벗고 살아오다가 갑자기 부자집자식들 흉내야 낼수 없지 않느냐, 장군님께서는 네가 짚신에 이렇게 입고온것을 더 좋아하신다, 네가 만약 좋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찾아왔다면 좋아하지 않을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16년만에 짚신바람으로 찾아온 아들을 데리고 김책이 내 방에 나타났을 때 나는 눈물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은 김책이보다 내가 더 울었습니다. 김책자신도 속으로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가 오래동안 헤여졌던 자식들과 눈물나는 해후를 했지만 그들과는 네해 남짓하게밖에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김책이 우리의 곁을 떠난것은 과로때문이였습니다. 그가 안고있는 부담이 너무나 컸습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것이 1951년 1월 30일입니다. 1951년 1월말이면 최고사령부가 건지리에 있을 때입니다. 그날 저녁 김책이 불쑥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지난달 24일이 김정숙동무의 생일이였는데 수상동지가 적적해하시리라는것을 알면서도 일이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이달도 다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처신이 잘된것 같지 않고 또 그냥 있을수도 없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라고 하면서 걸음이 늦어진것을 두고 사과하였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하길래 나는 지난해 12월이야 북반부땅에 쳐들어온 미국놈들을 몰아내느라고 눈에서 불이 일던 때인데 언제 찾아다닐 경황이 있었는가,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김책은 왜 그런지 기분상태가 김책이답지 않게 감상적이였습니다.

 

그가 나보고 산보를 하자고 하기에 우리는 산보를 했습니다. 김책은 나에게 전쟁전에는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줄 모르고 다니지 못하였는데 전쟁이 끝나면 여기에 휴양소를 하나 잘 짓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사실 해방후 우리는 새 조국 건설로 몹시 바삐 보내다나니 어디에 휴식에 적합한 골짜기가 있고 명소가 있는가 하는것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휴식이라고 해야 장수원다리밑이나 맥전나루터 같은데 가서 발이나 씻고 돌아오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그날 내앞에서 뒤축이 꿰진 양말을 감추느라고 애쓰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김책에게 일만 일이라 하지 말고 몸을 좀 돌보시오, 이 엄동설한에 살이 보이는 양말을 신고 다녀서야 어떻게 견디겠소, 나를 생각해서라도 몸을 조심해주시오라고 하면서 새 양말을 꺼내 신기였습니다.

 

김책은 그날 저녁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싶어했습니다. 그런데 허가이가 갑자기 내앞에 나타나 당사업정형에 대해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에게 외교를 하느라고 오래동안 이런말저런말을 하며 흐지부지하다나니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김책은 식사도 못하고 건지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는 최고사령부를 떠나면서 나를 보고 《장군님, 미국놈들과의 싸움은 저희들이 하겠으니 장군님께서는 너무 과로하지 마시고 건강에 류의하여주십시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한 마지막부탁이였습니다. 그런 부탁을 받고보니 왜 그런지 그날따라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날 밤도 김책은 집무실에서 철야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군의국장을 겸하고있던 리병남보건상이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할 때 나는 그 사실을 조금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시간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간 사람이 그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호위성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낮에 자동차를 달려 내각이 자리잡고있던 곳에 가보고서야 나는 리병남의 보고가 사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나는 전날밤 그를 내곁에서 재워보내지 못한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가 내곁에서 자고갔으면 밤을 새우지 않았을것이고 심장마비에도 걸리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후회한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김책이 나를 찾아온날 밤 식사를 나누지 못하고 돌려보낸것이였습니다. 밥 한그릇을 먹여보냈다고 해서 내 슬픔이 덜어질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그게 지금까지도 속에 얹혀서 내려가지 않습니다.

 

김책과 영결하던 날의 일들은 거의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똑똑하게 기억되는것은 령구를 발인하기 전에 김책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아보던 일입니다. 10년전에 하바롭스크에서 처음으로 잡고 오래 놓지 못하던 손이였습니다. 10년전에 잡아보고 그 따뜻한 온기를 평생 잊지 못했는데 그를 영결하던 그날은 얼음처럼 차거웠습니다. 지방에 현지지도를 갔다가 돌아오면 제일 선참으로 뛰여나와 내손을 부둥켜잡던 김책의 손이였습니다.

 

김책은 한생을 나의 충직한 전우로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내 그래서 그 사람을 더 잊지 못합니다. 김책이 돌아간다음 나는 그의 자식들을 친부모처럼 돌보아주었습니다. 외국에 류학도 보내고 잔치도 차려주고 손녀가 태여났을 때는 축하도 해주고 우리 집에 종종 불러다가 음식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김책을 위해 무엇인가 더해주지 못한것만 같아 노상 허전한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혁명이 시련에 부닥치거나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할 때면 김책생각이 정말 간절해집니다.

 

내가 그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김책의 묘앞까지 차를 타고가지 못합니다. 그의 묘지를 찾을 때는 차를 타고가는것이 죄스러워 대성산밑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군 했습니다.

 

김책이 저세상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마음이야 변할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혁명을 하면서 많은것을 체험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가슴깊이 새긴것중의 하나가 동지에 대한 체험입니다.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결사의 각오를 품고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중한것이 바로 동지이고 동지애입니다. 진실한 동지는 제2의 나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충직하고 의리깊은 동지들이 뭉치면 하늘도 이길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동지를 얻으면 천하를 얻고 동지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고 말하군 합니다.

 

동지라는 말은 뜻을 같이한다는 말인데 뜻이란 곧 사상입니다. 일시적인 리해관계나 타산에 의하여 맺어진 동지관계는 공고할수 없으며 때에 따라 쉽게 깨여지고 맙니다. 그러나 사상의지적으로 결합된 동지관계는 영원하며 총알도 단두대도 그런 동지관계를 갈라놓을수 없습니다.

 

조선혁명은 령도자에 대한 충정으로 숭고한 모범을 보여준 수많은 동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동지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의 은하계를 이루고있습니다.

 

김책이 서거한 다음 우리는 그를 영원히 추억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성진시와 그의 심혈이 깃든 청진제철소 그리고 평양공업대학을 각각 김책시, 김책제철소, 김책공업대학으로 명명하고 인민군대의 한 군관학교도 그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김책시에는 그의 동상도 세웠습니다.

 

나는 오늘도 사회주의건설에서 언제나 김책의 이름을 가진 도시와 공장, 대학이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김책은 남의 뒤꽁무니에서 우물거리는것을 제일 싫어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선봉에서 달려나갔습니다. 우리 나라 산업건설에서 김책이 해놓은 일이 적지 않습니다. 나는 경제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공장, 기업소들을 볼 때면 속으로 김책이 만일 이걸 안다면, 김책이 만일 이걸 안다면 하는 생각을 하군 합니다. 그가 산업상으로 일할 때 우리 나라 경제는 치차처럼 잘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김책과 함께 사업하던 일군들도 적지 않은데 동무들은 그가 우리 나라 산업건설을 위해 바친 심혈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4-28 19:50:31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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