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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18장 6.《혜산사건》을 겪으면서 82,83,8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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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3-27 18:5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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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8장 6.《혜산사건》을 겪으면서(제4회) 82-8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8장 6.《혜산사건》을 겪으면서(제5회) 83-8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8장 6.《혜산사건》을 겪으면서(제6회) 84-84

 

 

 

제6제18장 6.《혜산사건》을 겪으면서(2)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를 두고 론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전렬에 류경수와 같은 사람들을 세우군 한다. 자기 수령이나 지도자의 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그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한생을 곧바르게 걸어가는데서 류경수는 만사람이 따라배울만 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나와 류경수와의 첫 상봉은 1933년 9월 동녕현성전투직후에 이루어졌다. 싸움을 끝내고 소왕청으로 돌아와 대원들을 휴식시키고있을 때 최현이 인솔한 연길유격대의 대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대원들중에 최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어린 대원이 한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류경수였다.

 

류경수는 통신원의 불찰로 연길유격대가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데 대하여 몹시 원통하게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지각생》의 신세가 된 분풀이를 최현에게 막 해댔다.

 

《중대장동지, 소왕청까지 와서 밥만 얻어먹다가 어떻게 거저 돌아가겠습니까. 아무데라도 좋으니 김대장을 모시고 한번 답새기고 갑시다.》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나는 류경수가 보통배짱군이 아니라는것을 인차 간파할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였다. 그가 혁명대오에 들어선것은 16살때였다.

 

《김대장, 저 삼손이가 나이는 어려도 싸움군입니다. 애가 록록치 않수다.》

 

삼손이란 류경수의 본명이였다.

 

이것이 류경수에 대한 최현의 총적평가였다. 나는 그 한마디의 평가를 듣고 최현이 류경수를 몹시 애지중지해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18살밖에 안되는 이 어린 대원의 짤막한 인생속에는 망국으로 해와 달마저 빛을 잃었던 내 나라의 구슬픈 얼굴이 비껴있었다. 류경수의 경력가운데서 특기할만 한 점은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한 사실과 10대에 춘황폭동에 참가하였다가 군벌당국에 체포되여 룡정감옥에서 곤장맛을 본 사실이였다. 간도지방에 혁명가들이 많았지만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물고문이나 고추가루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장증렬이나 리종락과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류경수는 그 시련을 용감하게 이겨냈다. 무심결에 류경수의 손을 잡아보았는데 손바닥에 썩살이 어찌나 험하게 배겼던지 쇠판대기 같았다.

 

나는 류경수가 어렸을 때 이삭공부를 했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금할수 없었다. 이삭공부란 남들이 공부할 때 그곁에서 눈과 귀로 글자를 익히고 리치를 새기면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섭취하는 학습방법을 말한다. 그는 나무짐을 지고 장에 갔다올 때마다 사립학교 창문밑에 쭈그리고앉아 나무가치를 들고 교원이 칠판에 쓰는 글을 열심히 따라썼다. 그 과정에 조선말 자모와 구구표를 완전히 익히였다.

 

류경수의 이삭공부를 미구에 온 학교가 다 알고 동정하게 되였다. 류경수의 향학열에 감동된 곽찬영(곽지산)교원은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였다. 그리고 학비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이삭글을 배우는 나무군총각애도 쉽지 않은 소년이였지만 낯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아이에게 입학을 허락하고 그에게 학비까지 대준 훈장 역시 쉽지 않은 교육자였다.

 

하지만 류경수는 가정사정으로 인해서 학교를 졸업할수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지주집에 머슴군으로 끌려갔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곽찬영도 큰 충격을 받고 교사직에서 물러나 로동자, 농민들속에서 혁명적인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후에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류경수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계속 곽찬영의 지도를 받았다. 자기 제자에 대한 곽선생의 사랑과 관심은 실로 각별한것이였다. 그런데 이 선생이 그만 억울하게도 《민생단》올가미에 걸려들어 심판대우에 서게 되였다. 좌경배타주의자들은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를 중대장자리에서 철직시키였다. 그의 일거일동은 감시병들의 감시속에 놓여있었다.

 

곽찬영이 군중심판장에 끌려나온 날 류경수는 목숨을 걸고 그를 보증해나섰다. 그가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보증해나선것은 사실 만인의 찬양을 받을만 한 큰 용단이였다. 그 당시는 류경수자신도 《민생단》혐의자의 명부에 등록되여있었다. 《민생단》혐의자가 《민생단》의 딱지가 붙은 《피고》를 두둔하거나 동정한다는것은 총구앞에 달려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청원하는것과 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류경수는 가슴을 내대고 스승의 무죄를 증명하였다. 그 《죄》로 하여 그는 《민생단》감옥으로 끌려갔다.

 

류경수의 용감한 행위는 제자가 스승을 위해 지킬수 있는 최고의 의리였다. 그는 한평생 스승의 은정을 잊지 않고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그처럼 의리에 충실할수 있었던것은 신념이 강했기때문이였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도덕과 의리도 잘 지키는 법이다. 혁명가는 정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증오하며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는것, 혁명하는 사람들이 동지들과 인민들에 대한 의리를 잘 지키자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어야 한다는것이 바로 그가 지니고있던 생활의 신조였다.

 

그는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중 절대다수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며 혁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아무렇게나 처형하는것은 범죄이라고 단호히 까밝히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비록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져 혁명대오내에서 혼란이 빚어지고있지만 언제인가는 꼭 수습될 날이 있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민생단》의 루명을 쓰고있는 견실한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견결히 옹호하였다.

 

생사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구원해낸 류경수의 용감한 소행에 대한 풍문은 동만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을 격동시키였다. 나도 다홍왜에서 그 소식을 듣고 소왕청에서 있었던 그와의 상봉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돌이켜보았다.

 

나는 마촌에서 연길유격대의 전우들을 바래줄 때 최현에게 이런 롱을 하였다.

 

《저 삼손이는 어느모로 보든지 욕심나는 싸움군입니다. 우리의 상봉기념으로 저 애를 우리한테 넘겨주지 않겠습니까?》

 

최현은 그 말에 롱담 절반, 진담 절반으로 응수하였다.

 

《지금은 안되우다. 저 녀석이 싸움은 본때있게 잘하지만 아직 속은 좀 궁글었수다. 3년만 더 키워서 김대장에게 바칠테니 그때까지 참아주시오.》

 

류경수가 우리의 가까이에 와서 중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것은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였다. 소왕청에서의 첫 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근 10년세월을 그는 최현부대에서 기관총수로 복무하였다. 그러다나니 그를 자주 만나보지도 못하였고 살뜰히 돌보아주지도 못하였다. 내가 류경수를 위해 해준것이 있다면 《어린 혁명가》라는 칭호를 준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류경수는 그 칭호를 자기자신에 대한 표창으로 받아들이였다. 그리고 우리를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혁명을 위해 한생을 바칠것을 결심하였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무산지구전투를 성과적으로 결속하고 천보산일대에로 진출하던 때의 일을 잊을수 없다.

 

우리의 행적을 탐지한 적들은 그때 천보산과 그 주변지구에 《토벌》무력을 집결하여 인민혁명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리려고 획책하였다. 최현부대는 우리에게로 쏠리는 적들의 력량을 최대한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천보산시가를 들이치는 싸움을 하였다. 그 시가공격전이 얼마나 가렬했는가 하는것은 적들이 녀자들까지 내몰아 수류탄을 던지게 한데서도 잘 알수 있다. 성시의 적들은 대부분 섬멸되였다.

 

하지만 최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토벌》력량을 소멸하기 위해 유인전을 벌리기로 결심하고 50명 남짓한 부대의 일부 성원들로 전투조를 조직한 다음 천보산시가에서 20리쯤 떨어진 수림속에 매복진을 펴놓았다. 바로 그 전투조에 류경수가 망라되여있었다.

 

류경수소조는 적을 유인하기 위해 《토벌대》의 숙영지들을 련속적으로 기습하였다. 어떤 날 밤에는 같은 숙영지를 두번씩이나 습격하였고 또 어떤 날 밤에는 《토벌대》의 작전지도까지 탈취해옴으로써 적들로 하여금 악에 받쳐 인민혁명군을 추격해오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류경수는 그때 옹근 사흘동안 물도 변변히 마시지 못하고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싸움을 도맡아하였다. 이 작전에서 류경수가 세운 공로를 두고 최현은 해방후에도 이따금씩 생동한 회상을 하였다.

 

최현부대는 산고개를 일곱개나 넘으면서 숨돌릴사이도 없이 적들을 연방 족치였다. 적들은 흔들레판에서도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다.

 

최현부대의 덕으로 우리 주력부대는 적들의 저항을 많이 받지 않고 천보산일대에 무사히 진출할수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당초에 계획했던 최현부대와의 상봉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최춘국부대를 만났다. 우리가 최춘국이네 부대를 만나고있을 때 최현부대는 오히려 천보산으로부터 수십리 떨어진 지점에서 다음차례의 유인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있었다.

 

최현의 말에 의하면 그때 4사의 전체 유격대원들은 우리를 만나지 못하는데 대하여 몹시 섭섭해했다고 한다.

 

우리에 대한 류경수의 의리는 참으로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것이였다. 그 의리가 얼마나 고결하고 진실한것인가를 나는 소부대활동시기에 더욱 절절하게 체험하였다.

 

혁명가로서의 류경수의 인간미는 자기 사령관의 명령,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행정신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였다. 그는 사령관의 명령을 집행하는데서 맹세나 약속을 번지르르하게 하지 않았지만 일단 한 맹세나 약속은 어김없이 리행하는 좋은 품성을 가지고있었다.

 

우리가 믿을 곳은 사령관동지의 품밖에 없다, 사령관동지를 잘 모시고 받들어야 우리는 조국의 해방도 이룩할수 있고 자기자신의 운명도 개척할수 있다, 사령관동지의 의도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긴다, 이것이 바로 류경수가 일상적으로 간직하고있던 신념이였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나의 명령이나 지시를 훌륭하게 집행할수 있었다.

 

1941년 이른봄에 나는 만주각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소부대들의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 류경수네 중대를 데리고 쏘련 원동의 훈련기지를 떠나 백두산일대에 나온적이 있었다. 그때 류경수는 중대성원들과 함께 나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우리는 한총구에 사령부자리를 정한 다음 각지에 소조들을 파견하였다. 류경수도 나의 명령에 따라 여러차례에 걸쳐 련락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령부를 떠날 때마다 자기네 소조에 차례진 식량을 경위대원들에게 맡기며 장군님께 밥을 지어드리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그리고 우리한테 화가 미치지 않게 하려고 유인전을 자주 조직해서 적들의 주의를 딴데로 돌리군 하였다.

 

사령부가 한총구에 자리잡고있을 때 나는 류경수에게 화전현 로금창에 있는 련락지점에 가서 위증민을 만나고 오라는 과업을 준적이 있었다.

 

그것은 몇십겹을 헤아리는 적의 보초소들과 봉쇄구역들을 돌파해야 하는 어려운 과업이였다. 그래서 사령부에서는 그에게 10명에 가까운 인원을 떼주었다. 그러나 류경수는 사령부호위를 념려하면서 두명만 데리고 로금창으로 떠나갔다. 그는 3명분 식량으로 내가 배당한 한포대의 쌀마저 전문섭에게 슬그머니 맡기고 대여섯되박밖에 안되는 쌀만 휴대하였다.

 

류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총구는 온통 《토벌대》의 불무지로 가득차있었다. 사령부가 천막을 치고있던 자리에서도 여러개의 불무지가 타오르고있었다. 내가 돌아오라고 명령한 마지막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어린 두 대원은 나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사실 그날 밤 한총구에 펼쳐진 불바다를 보고서는 사령부가 살아서 건재해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류경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밖에 없다, 이 30분동안에 우리가 저 불무지가 있는 사령부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위험속에서도 우리 세사람을 끝까지 기다리실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는 대원들을 달래였다. 그리고는 그들을 산봉우리에 남겨두고 사령부의 천막자리를 향해 주저없이 기여내려갔다. 그러다가 그 근처에서 우리가 떨궈두고온 대원을 만났다. 류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사령부자리부터 어김없이 찾을것이라는 나의 확신과 정황이 어떻게 변하든지간에 자기 사령관이 소조를 파견한 출발지에서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부하들을 기다릴것이라는 류경수의 판단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였다.

 

내가 정해준 날자와 시간과 장소를 털끝만큼한 편차도 없이 엄수하려는 류경수의 드팀없는 자세와 철저한 집행정신은 자기 사령관은 어떤 정황에서나 대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사령관의 신임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각오해야 한다는 진정한 의리심에 그 뿌리를 두고있었다.

 

이런 신념과 의리심을 가지고 류경수는 해방후 철도경비대를 조직하고 땅크부대를 건설하였으며 전쟁의 매 단계에서 최고사령부의 작전적방침을 실현하는데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인민무력부의 지도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군인들을 그 어떤 정세변화나 역경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념과 의지를 굳건히 지키는 강의한 투사, 충신들로 키우라고 말하군 한다.

 

력사적경험은 혁명이 승승장구하고 정세가 유리할 때에는 대오안에서 동요분자, 변절자들이 나오지 않지만 내외정세가 복잡하게 변하고 혁명의 길에 어려운 난관이 조성될 때에는 대렬안에서 사상적혼란과 동요가 생기고 투항분자, 락오분자들이 나와 막대한 해독을 끼친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일제의 만주강점이나 중국본토침공과 같은 큰 국제적사변들은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이나 공산주의운동대렬안에서 커다란 정치적자극과 사상적혼란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9.18사변이후 일제를 반대하는 전면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력사적시기가 도래하였다고 보고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었다면 일부 민족운동자들과 혁명적각오가 굳세지 못한 공산주의운동자들은 만주까지 강점한 일제를 더는 당해낼수 없다고 단정하고 투쟁을 포기하는 길로 나갔다.

 

일제의 중국본토에 대한 침공을 놓고도 그렇게 말할수 있다.

 

그때 우리는 일제가 중국을 대거 침공하는것은 불피코 력량의 분산과 소모를 가져오지 않을수 없는것만큼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발전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게 될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할 때에 우리는 중일전쟁이 가져오게 될 새로운 정치군사적난관을 모르거나 무시한것은 아니였다. 우리는 중일전쟁으로 하여 급변하는 어려운 정세에서 유리한 측면을 중시하고 불리한 국면을 유리하게 전변시키기 위하여 주동적으로 노력하였다. 혁명가에게 있어서 중요한것은 바로 조성된 난국을 과감히 뚫고나가는 이러한 백절불굴의 투지와 신념인것이다.

 

그런데 이때에도 항일운동대렬내에 끼여든 우연분자들과 일시적동반자들속에서는 수습하기 어려운 사상적혼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일제가 중국본토로 쳐들어가 무한 삼진까지 삼키는것을 보고서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런 대세를 돌려세울 힘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사상적변질과정은 결국 패배주의를 낳고 그것을 온상으로 하여 적지 않은 혁명의 탈락분자들과 시정배들, 배신자들이 나오게 되였다.

 

게다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국령토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태평양전쟁준비에 달라붙는 한편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을 종국적으로 말살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공세를 련속 벌렸다. 결과 남북만 도처에서 그렇게도 번성하던 반일부대들이 거의다 소멸되고 열하원정의 소용돌이속에서 남만의 양정우부대마저 큰 피해를 당하였다.

 

열하원정의 실패로 하여 동북항일련군의 적지 않은 부대들이 시련을 겪고있던 그무렵에는 중국사람들속에서도 투항분자, 도주자들이 생기였다.

 

1938년 여름 양정우휘하의 1군부대는 열하에로의 또 한차례의 원정을 개시하자마자 적의 대포위에 들어 말할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 당시는 적들이 군사적공세와 함께 항일유격대원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집요하게 벌리고있던 때였다. 항복한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귀순자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이른바 만주국 황제의 《은사의 대조》라는것이 공포되여 혁명에서 타락한 사람들과 비겁분자들, 의지박약자들을 유혹하였다. 항일무장부대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악랄하고 끈질기게 벌어지는 가운데 유격대와 인민을 갈라놓기 위한 《비민분리》책동도 심화되였다. 혁명군은 인민들의 지원을 받을래야 받을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정들고 때묻은 본래의 유격근거지를 떠나 열하방면에로의 승산없는 원정길에 오른 항일련군부대들은 아무런 파악도 없는 생소한 땅에서 인민들의 지원도 별로 받지 못하고 적의 거듭되는 《토벌》에 시달릴대로 시달리였다.

 

이런 때 양정우의 오른팔이라고 불리우며 남만의 항일맹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1군 1사 사장 정빈이 료녕성 본계에서 투항을 반대하는 정치일군을 총으로 쏘아죽인 다음 부대를 데리고 적들에게 귀순하는 배신행위를 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1군앞에는 심각한 난국이 조성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제1군 지휘일군들의 활동경로와 소속부대의 번호, 밀영설치의 비밀들을 잘 알고있는 정빈의 변절은 1군에 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이였다. 정빈의 귀순으로 하여 1군의 서정계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정빈은 그후 통화성 경무청장 기시다니의 앞잡이가 되여 양정우포살작전의 돌격대로 나섰다. 그가 안내하는 《토벌대》와의 격전에서 남만의 명망높은 항일용장 양정우는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기시다니가 열하성 부성장으로 조동된 다음 정빈은 거기에 따라가서 《열하일심대》라는 경찰 《토벌대》를 무어가지고 대장노릇을 하였다.

 

정빈이나 전광이와 같은자들의 실례를 통해서도 알수 있는바이지만 직급이 높은 사람들의 변절일수록 그 양상은 보다 악랄했고 후과도 몇곱절 더 컸다.

 

정빈이 적들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적들의 진영으로 넘어갈만 한 특별한 리유가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는 직위불만도 없는 사람이였다. 그렇다면 그가 투항할 리유란 무엇이겠는가 하는것이다. 내 판단에 의하면 정빈의 배신행위는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데서 온것이다. 그는 7.7사변후 매일과 같이 전과를 확대해가고있는 일본군의 위세앞에서 겁을 집어먹었고 따라서 혁명의 전도를 암담한것으로 보았다. 언제 성사될지 모를 혁명을 하느라고 고생할바에는 차라리 역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내 한몸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길을 택하자, 이것이 분명 정빈이 적들의 편으로 넘어가게 된 사상적동기라고 본다.

 

정빈은 이름난 싸움군이였지만 보매 사상수양을 잘하지 못한것 같다. 내가 념두에 둔 사상수양이란 주로 신념교양, 락관주의교양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상단련을 잘하지 않으면 역경에 부닥쳤을 때 곤난앞에서 인차 굴복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도 사상제일론을 주장한다.

 

상전이였던 기시다니는 패전후 가족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그러나 정빈은 그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많은 일본인포로들을 제 손으로 사살한 다음 정체를 속이고 팔로군에 들어가 지휘관의 자리에까지 기여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오래갈리는 만무하였다. 정빈은 보호색을 쓰고 애국자로 가장하였지만 배신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오래 숨길수가 없었다. 해방후 어느해인지는 잘 알수 없으나 그가 우산을 받쳐들고 비내리는 심양의 거리를 걸어갈 때 그 우산밑에 기여들어 비를 긋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도 역시 정빈이처럼 보호색을 쓰고 살던 반역자였다. 그는 정빈이 어떤자인가를 잘 알고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지 그들은 당국에 찾아가 서로 상대방을 변절자라고 고발하였다. 그 과정에 정빈이 투항분자였다는것이 폭로되였다. 신념을 버리고 적의 품에 기여들어 혁명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이 너절한 인간에게 인민재판은 응당한 판결을 내리였다.

 

정빈의 운명은 신념을 버리고 동지들을 배반하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생동한 실례로 된다.

 

양정우부대가 녹아난 다음부터 《토벌》의 포화는 우리에게로 집중되였다. 적들은 김일성부대만 소멸하면 만주와 조선의 항일운동은 끝장이라고 하면서 사면팔방으로부터 우리를 포위하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우리앞에는 실로 헤아릴수 없는 난관이 가로놓이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타도제국주의동맹시절부터 혁명투쟁을 해오던 사람들가운데서도 비겁분자, 투항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것이다. 이무렵에 동북항일련군안에서 지휘관으로 있던 방진성, 박득범도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쏘련과 일본사이에 중립조약이 체결되였을 때에도 우리 대오에서는 도주자가 생기였다. 우리의 적지 않은 대원들속에는 쏘련에 대한 의존심 즉 지금말로 하면 사대주의가 있었다. 일부 지휘관들이 민족자주의식을 배양하는 교양에는 힘을 덜 돌리고 쏘련옹호, 쏘련중시, 쏘련제일의 사상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다나니 쏘련만 믿고 의존하면 모든것이 다 해결되는것으로 생각하는 페단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쏘련의 지지나 도움이 없이는 조선독립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이때처럼 내가 민족자주의식이야말로 혁명가의 신념을 좌우하는 하나의 결정적요인으로 된다는 진리를 절감한 때는 일찌기 없었다고 할수 있다. 혁명을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자주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자력독립의 관점을 확고히 가지고있던 사람들중에는 도주자나 변절자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자신이나 자기 나라 인민의 힘은 하치않은것으로 보면서 큰 나라의 덕으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보려고 시도하던 사람들가운데서는 락오자들과 투항분자들이 생겨났다.

 

사람이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으면 어려운 환경에 부닥칠 때 례외없이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며 패배주의에 빠지면 곧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투쟁을 포기하거나 중도반단하게 된다.

 

이런 류의 인간들은 큰 나라들이 혁명에서 곡절을 겪을 때면 자기 나라 혁명도 다 망한것처럼 생각한다. 혁명이 국제적성격을 띠는것만큼 국제반제력량과의 단결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실패에 동정을 표시하거나 그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여기는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또 큰 나라 혁명의 실패가 자기 나라 혁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수 있다. 그러나 큰 나라 혁명이 일시적인 좌절을 당한다고 하여 작은 나라 혁명도 다 망하는것처럼 생각하면서 기발을 내던진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혁명은 국제적성격을 띠기 전에 우선 민족적성격을 띤다. 혁명이 민족국가단위로 진행되는 조건에서 매개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자체의 힘으로 혁명을 완수하려는 확고한 결심과 신념을 가지고 자기 나라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완강하게 투쟁을 벌려나간다면 어떤 어려운 고지든지 능히 점령할수 있다는것이 나의 시종일관한 주장이며 지론이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혁명을 식은죽먹기로 생각하고 무장대오에 들어왔던 사람들, 신념이 뚜렷하지 못하고 의지가 박약한자들, 종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남을 깔보거나 따돌리는 사람들, 패배주의자들은 례외없이 내외정세가 복잡하고 혁명앞에 시련이 닥쳐올 때 배신의 길로 굴러떨어진다.

 

림수산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우리를 배신한 후부터 나는 전우들에게 이런 말을 종종 하군 하였다.

 

… 정세는 엄혹하고 투쟁은 점점 더 간고해진다. 우리 혁명위업이 열매를 맺어 나라가 반드시 독립되리라는것은 누구나 다 일치하게 믿고있는바이지만 그런 날이 언제쯤 오겠는가 하는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런즉 우리를 끝까지 따라갈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마음놓고 집으로 돌아가라. 도주는 비렬한것이지만 보고하고 가는것은 일없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10년이상이나 혁명을 같이하다가 인사도 하지 않고 헤여지겠는가.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바래워주겠다. 그리고 투쟁을 중도반단한데 대하여 문제시하지 않겠다. 힘이 모자라고 신념이 약해서 대오를 떠나는거야 어떻게 하겠는가. 갈 사람은 가라. …

 

이런 식으로 내놓고 말하면서 혁명승리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가지도록 대원들을 교양하였다.

 

내가 이렇게 선언했지만 대원들가운데는 전우들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조선의 참다운 공산주의자들은 아무리 정세가 복잡하고 난관이 심하여도 신심을 잃지 않고 완강하게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종당에는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해방의 대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

 

우리는 《혜산사건》을 통하여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제때에 수습책을 세우고 그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에 의하여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 줄기차게 진행되였다.

 

항일전쟁이 낳은 영웅들의 뒤를 이어 지금은 어려운 초소들에서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강자들이 끝없이 배출되고있다. 김정일시대의 거창한 혁명투쟁과정은 곧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을 낳는 온상이며 터전이다. 김정일동무가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내세우고 높이 평가하고있는 리인모의 실례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것을 말해주고있는가. 온 나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김정일동무가 말한대로 리인모를 따라배우는 운동을 벌리고있는데 나는 그것을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는 신념과 의지가 황금보다 훨씬 더 값비싸게 평가되는 때이다. 우리 시대는 전체 인민들의 신념과 의지를 가다듬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당과 국가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제국주의련합세력의 집요한 봉쇄정책과 반동적인 사상공세로부터 우리의 신념과 제도를 고수하며 금강석같은 의지를 가지고 조성된 난국을 뚫고나갈것을 요구하고있다.

 

혁명선렬들이 피로써 고수해온 신념을 버리고 그 신념의 창조물인 사회주의를 버린것으로 하여 지금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온갖 사회악과 패륜패덕이 란무하고있다. 력사는 신념을 버린자들에게서 응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법이다.

 

우리 나라가 그 어떤 역풍에도 드놀지 않는 강한 나라로 된것은 우리 당의 신념이 강하고 우리 인민의 신념이 강한 덕이다. 신념이 강한 당은 변질되지 않고 신념이 강한 국가는 붕괴되지 않으며 신념이 강한 인민은 와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날 어려운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더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될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인민은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념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변함없이 전진하는 인민들만이 자주시대의 상상봉에 올라설수 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3-27 18:53:55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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