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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17장 6. 총을 쥔 소년들 50,51,5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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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3-19 12:3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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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7장 6. 총을 쥔 소년들(제5회) 50-8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7장 6. 총을 쥔 소년들(제6회) 51-8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7장 6. 총을 쥔 소년들(제7회) 52-84

 

 

 

제6권 제17장 6. 총을 쥔 소년들(2)

 

 

 

 

항일전쟁의 전기간 우리의 소년중대원들은 나이나 체력의 제한을 받지 않고 구대원들 못지 않게 잘 싸워 무장투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일본군경들은 소년중대를 거친 유격대원들과는 말도 말라고 하였다. 소년중대출신과는 맞서지 말라는것이였다.

 

김일의 도움으로 어린 나이에 입대한 김성국의 실례를 들어보자.

 

김일은 오래동안 간삼봉아래부락에 들어가 지하공작을 하였는데 그곳 조국광복회원인 김상현의 방조를 받으면서 많은 일을 하였다. 김상현은 김일을 자기의 농막에 3개월동안이나 숨겨주면서 그의 일을 성실하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농민은 홀아비였다. 안해가 죽은 다음 셋이나 되는 자식건사를 할수 없어서 그들을 남의 집 머슴으로 주었다. 그 세 아들중의 맏이가 바로 김성국이였다.

 

김일은 이 불쌍한 일가를 도와줄 방도가 서지 않아 고심하던 끝에 김성국을 유격대에 추천해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어느날 그는 김성국이 김을 매고있는 밭에 찾아가 나에게 보내는 소개신을 주면서 나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소년 김성국은 호미를 던지고 토스레옷차림으로 나를 찾아와 유격대에 입대하게 되였다.

 

어려서 남달리 고생을 많이 해온 김성국은 눈썰미가 빠른데다가 담차고 이악해서 사격술도 빨리 익히고 유격대의 행동규범도 빨리 터득하였다. 몇달후에는 기관총사수인 오백룡의 부사수로 뽑히였다. 김일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를 늘 보살펴주었다.

 

송화강변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던 때의 일이였다. 그때 김성국은 한동안 방차대에 나가있었다. 한번은 그가 우등불에 발을 쪼이다가 발바닥이 따가와서 신을 벗은적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에 적들이 달려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수인 오백룡마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김성국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급히 송화강얼음판에 나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적들에게 몰사격을 퍼부었다. 그는 자기가 신도 신지 않고 맨발바람으로 달려나와 싸움판에 뛰여들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그가 총을 쏘는데만 몰두해있을 때 등뒤에서 누구인가 그의 발을 잡아당기였다.

 

김성국은 벌컥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김일이 내의를 찢어 자기의 발을 싸매주고있지 않는가. 그때에야 김성국은 자기가 맨발로 싸움판에 뛰여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적들이 퇴각해간 다음 김일은 이게 무슨 꼴이냐, 발을 잘리고싶어 그러느냐고 하면서 그를 책망하였다.

 

김일이 전투를 끝내고 돌아와서 나에게 하는 말이 김성국이 기관총을 메고 송화강얼음판을 내달리는데 뒤에서 보니까 발이 얼음에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짜작짜작 하는 소리가 나더라는것이였다. 추운 겨울날 맨발바람으로 얼음판에서 기관총을 냅다갈기는 김성국도 보통내기가 아니였지만 탄우를 무릅쓰고 전장에까지 뒤쫓아가서 내의를 찢어 어린 사수의 발을 싸매준 김일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였다. 그때 김일이 그렇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김성국은 틀림없이 발에 큰 동상을 입고 날개없는 새가 되고 말았을것이다.

 

그는 후에 나와 김일의 보증으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가 얼마나 혁명에 충실한 투사였는가 하는것은 소부대활동시기의 여러가지 일화들이 잘 말해주고있다. 1940년대 전반기는 매개 유격대원들의 혁명성을 검열하는 시련의 시기였다. 이 준엄한 시기에 김성국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잘 싸웠다. 지하공작임무를 받고 국내에 드나들던 김성국이 한번은 혼자서 라진시내에 들어갔다가 별치않은 실수로 경찰들에게 단속된 일이 있었다. 거리에서 비를 만난 그는 상점에 들어가 우산을 샀는데 그것이 그만 녀자용양산이였다. 가재수라는 산골에서 어려서부터 고역에 시달려온 김성국은 우산과 양산이 다르다는것을 몰랐다. 그가 상점에서 쓰고나온 녀자용양산은 대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얼마나 수상스럽게 보였던지 지나가던 경관이 그 양산을 가리키며 어디서 훔쳤는가고 물었다. 김성국은 사실대로 상점에서 산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왜 녀자용을 샀는가라는 경관의 물음에 그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부탁해서 사가는 길이라고 슬쩍 둘러대였다.

 

그러나 경관은 김성국을 경찰관주재소까지 끌고가서 지꿎게 심문하였다. 김성국은 의자를 들어 경관을 때려눕히고 뛸 궁리도 해보았으나 단념하였다. 그렇게 하면 시내에서 지하공작을 더할수 없게 될것이고 자기를 대신하여 다른 공작원이 또 사선을 넘어 라진에 침투해야 하였다.

 

김성국을 붙잡아온 경관이 시내순찰을 하려고 밖으로 나가자 이번에는 딴 경관이 그를 심문하였다. 순사는 심문중에 책상서랍을 열어보다가 동료순사가 김성국한테서 압수한 수백원의 공작비를 발견하고는 돈이 탐나서 얼른 그를 놓아주었다.

 

다음해 여름에도 김성국은 소부대공작을 나갔다가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었다. 공작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가던 그는 적들과 맞다들어 총격전을 벌리던 끝에 여러 군데나 부상을 당하였다. 김성국이 골짜기로 내려와 풀숲에 숨어있었기때문에 적들은 그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임철을 책임자로 하는 소조를 파견하여 김성국을 찾게 하였다. 그 소조가 골짜기에서 빈사상태에 빠진 그를 발견하였다. 상처를 여러 군데나 입은 김성국이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은것은 기적이였다. 그는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 풀을 뜯어먹었다고 하였다.

 

김성국이 훈련기지로 돌아온 다음 우리는 해당 기관과의 련계밑에 그를 쏘련의 한 야전병원에 후송하였다. 김성국은 그 병원에서 1년동안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병원의 의료일군들과 환자들은 모두 그를 극진히 돌봐주었다. 특히 담당간호원처녀는 김성국을 조선빨찌산의 불사조라고 하면서 수혈도 해주고 낮에 밤을 이어 헌신적으로 간호해주었다.

 

그 간호원은 독일처녀였다. 반파쑈투사인 아버지가 히틀러도당에게 총살당한 후 어머니와 함께 쏘련에 온 망명자였다. 처녀는 김성국을 동방약소민족의 투사로 존대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부었다. 그의 치료를 위한 일이라면 마른일궂은일 가리지 않고 도와나섰다. 위생실출입을 거들어주고 세수를 시켜주었으며 식사시간에는 밥을 먹여주었다. 환자가 회복기에 들어서자 처녀는 그의 식욕을 돋구어주려고 집에서 닭을 잡아 구미에 맞는 음식을 지어왔다.

 

퇴원하는 날 처녀의 어머니가 병원에 찾아와서 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다. 환자가 병원생활을 끝내면 료양을 하는것이 상례인데 자기 집에서 며칠동안 영양보충을 하다가 가라고 하였다. 김성국은 초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처녀의 어머니는 그 거리의 미술학교 교원이였다. 그 녀자는 씨비리의 사나운 기후조건에서도 닭을 수십마리나 기르고있었으며 다년생 고추나무도 재배하였다. 모녀는 하루에 한마리씩 닭을 잡아 여러가지 료리를 하여 김성국의 밥상에 놓아주었다. 그들은 짬만 있으면 김성국에게 조선빨찌산의 투쟁이야기를 들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처녀와 그의 어머니를 제일 감동시킨것은 10대의 어린 나이로 혁명의 폭풍우속에 몸을 내던진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나어린 소년들이 유격투쟁을 하는데 대하여 매우 신비롭게 생각하였다. 처녀의 어머니는 조선의 투사영웅을 그려 구라파에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화판에 김성국의 얼굴모습을 자주 옮기였다.

 

김성국이 료양생활을 하는 기간 처녀는 그를 통하여 조선을 리해하였고 조선의 력사를 리해하였으며 조선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을 리해하였다. 김성국을 알게 된 때로부터 처녀는 조선을 사랑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소년대원들에 대한 말만 듣고도 당신네 나라가 일본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리라는것을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일본을 타승하고야말것입니다.》

 

처녀는 이 말을 몇번이고 곱씹었다.

 

김성국이 부대로 돌아올 때 모녀는 쏘련의사들과 함께 멀리까지 따라나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모녀는 김성국에게 작별기념으로 많은 저금액이 기입되여있는 저금통장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국은 그 호의를 굳이 사양하였다.

 

처녀의 어머니는 리별의 마당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 당신은 아직 더 쉬여야 할 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이상 붙잡아두지 않겠다. 우리가 아무리 만류한들 당신이 우리 집에 남아있겠는가. 당신같은 투사들을 가지고있는 조선혁명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것이다.…

 

나는 김성국의 귀환담을 듣고 그에게 기울인 독일처녀와 그 어머니의 국제주의적소행에 크게 감동되였다. 그래서 김성국에게 돈과 돼지고기를 주어보내여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시하게 하였다.

 

소년중대가 얼마나 훌륭한 사상단련의 용광로이며 쓸모있는 군사정치학교였는가 하는것은 김철만의 실례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김철만은 지양개일대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대통령감》을 따라 우리를 찾아와 소년중대에 입대한 사람이였다. 그가 처음으로 내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대통령감》을 나무랐다. 《장총키보다 더 작은 애숭이를 부대에 데리고오면 처리는 어떻게 하랍니까?》 하고 답답한 소리를 했더니 리동백은 펄쩍 뛰면서 애숭이라니요, 그 애 나이가 자그만치 17살이나 됩니다, 키는 작아도 속은 령감이 다된걸요 하면서 김철만을 두둔해주었다.

 

나는 처음에 김철만이 《대통령감》앞에서 자기의 나이를 속였다고 생각하였다. 내 눈에는 그가 12살 아니면 13살쯤 되는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보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복하였다.

 

그러나 김철만은 씨물씨물 웃으면서 《장군님, 키가 작다구 얕보지 마십시오. 이래뵈두 못해본 농사가 없습니다.》 하면서 팔뚝을 흔들어보이였다. 그의 팔뚝은 과연 다른 아이들보다 힘살이 더 있어보이였다.

 

김철만은 소년중대에 입대한 후 무슨 일에서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소년중대가 해산된 후에는 7련대에 가서 오중흡련대장의 전령병으로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오중흡이 전사하였을 때 제일 눈물을 많이 흘린 대원이 바로 이 김철만이였다. 그는 오중흡의 후임으로 련대장이 된 오백룡의 신변호위를 위해 각별히 마음을 썼다.

 

김철만은 소부대활동기간에도 줄곧 오백룡이 인솔하는 소조에 망라되여 쏘만국경과 두만강을 뻔질나게 넘나들며 반일항쟁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정치공작과 적의 군사요충지들에 대한 정찰활동을 과감히 벌리였다.

 

항일의 불바다속에서 단련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김철만의 담력과 재능은 반미대전시기에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그는 1차남진의 길에서도 잘 싸웠지만 적후투쟁도 잘하였다. 그가 지휘하는 련대는 양구, 춘천, 가평, 통천, 포항, 청송, 군위를 비롯한 강원도일대와 경상북도일대의 천여리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적들을 배후에서 련속적으로 타격하였다.

 

적아간에 밀고밀리는 싸움이 얼마나 격렬하게 벌어졌던지 그 당시 양구지방 인민들은 가을걷이도 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김철만은 양구를 해방하자 군내 간부들을 다 불러다놓고 배포유하게 가을걷이조직부터 하였다. 양구군의 인민들은 그의 련대와 함께 며칠사이에 밭에 서있는 곡식을 다 베여들이였다.

 

김철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당의 신임과 사랑을 받는 군사정치일군으로 자라날수 있은것은 수령님의 덕이다, 수령님께서 나를 소년중대에 받아들여 친부모의 사랑으로 키워주고 돌보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름도 없는 초부나 농사군으로 남아있었을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그의 진심의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중대에는 망라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무장을 잡고 유격대에서 싸운 꼬마대원들도 항일전쟁의 승리에 당당하게 기여하였다.

 

김병식은 15살때 차굴공사장에서 로동을 하다가 단신으로 유격대에 찾아와 입대한 당돌한 소년이였다. 참군후 한동안 문붕상과 최춘국의 전령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지휘관들이 그를 날파람있는 싸움군이라고 하면서 몹시 총애하였다.

 

김병식은 적후공작에 자주 파견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경계가 삼엄한 두만강을 휘파람을 불며 마음대로 넘나들었고 웅기(선봉), 라진, 회령을 비롯한 조선의 북부국경도시들을 이웃마을 다니듯 하였다. 그가 목숨을 내대고 국내에 들어가서 수집해가지고온 적정자료들은 우리의 조국해방작전준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해방전야에 김병식은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일본의 교형리들은 그가 한 모든 일이 자기네 제국의 밑뿌리에 시한탄을 파묻는것과 같은 엄청난것임을 알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은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였다. 적들도 아마 그가 미성년이라는것을 고려한것 같다.

 

김병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제일 나어린 《죄수》로 되였다. 그는 잡역로동에 끌려나갈 때마다 그 감옥에서 복역중이던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 박달, 서응진 등의 감방을 오가면서 련락원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적들은 그를 귀순시켜보려고 고문도 하고 위협도 하고 구슬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였다. 그는 절개가 강한 투사였다.

 

항일혁명투사들가운데서 제일 어린 나이에 입대한 사람은 리종산과 리오송이였다. 리종산은 11살때 항일련군 3군에 입대하여 유격대원이 되였다.

 

리종산이 혁명군에 찾아갔을 때 그의 입대심의를 한 사람은 3군 정치주임이였던 풍중운이였다. 풍중운은 처음에 리종산을 보고 나이가 어리기때문에 받을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11살 나이에 군인생활을 한다는것은 사실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였다. 게다가 리종산은 키도 작았다. 나이는 한두살 속인다 해도 키를 속이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리종산은 찰거마리처럼 달라붙어 끝끝내 풍중운의 허락을 받아내고야말았다.

 

그는 입대후 만사람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군인생활을 잘하였다. 부대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눈썰미가 빠르고 동작이 민첩하고 일욕심이 많은 그를 친동생처럼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하였다. 리종산은 3군에서 주로 전령병생활을 하였다. 한때는 김책과 박길송의 수하에서 전령병으로 복무하였다.

 

김책이 좋은 부관감이라고 하면서 리종산을 나에게 처음으로 소개한것이 1943년경이라고 기억된다. 그때로부터 리종산은 나의 측근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김책이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나에게 여담삼아 들려준 이야기이다. 리종산네 가정은 원래 평양 팔동교에서 살았는데 내가 창덕학교를 다니던 무렵에 만주로 들어갔다고 한다. 만삭이 된 어머니가 심양행렬차에서 낳은 새 생명이 바로 리종산이였던것이다. 산모에게는 포단도 없고 기저귀도 없었다. 그래서 승객들이 한잎두잎 돈을 모아서 그에게 주었다. 리종산의 어머니는 그 돈으로 갓난애의 옷을 가까스로 마련하였다.

 

해방후 리종산은 손종준 등과 함께 나의 부관으로 여러해동안 사업하였다. 그는 부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담배부터 끊었다.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였다. 10년이상이나 붙여온 습관을 일조일석에 떼버린다는것이 말처럼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청구자에서 군정간부들을 3군에 파견할 때 그 성원들중에는 왕청유격대에서 분대장으로 복무하던 오중흡의 동생 오중선(오세영)도 포함되여있었다. 오중선은 3군에 가서 대대정치위원을 하다가 어느 전투에서 적탄에 오른쪽 지시손가락을 잃어버리였다. 그가 마라초를 피울 때면 리종산이 대신해서 담배를 말아주고 다른 대원들한테 뛰여가서 불도 붙여오군 하였다. 불을 붙이자면 상대방의 담배대에 담배대를 대고 한두모금씩 연기를 빨아들여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애연가가 되고 말았다는것이다.

 

내가 이따금씩 담배를 권해도 리종산은 받지 않았다. 나는 그가 금연의 도리를 지키는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와 함께 항일혁명의 험난한 고개들을 수없이 넘어온 나어린 유격대원들가운데는 1936년 봄에 녀성소대를 인솔하고 미혼진에 나타났던 태병렬도 포함되여있다. 그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처음으로 총을 멘것이 15살인가 16살때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고추알》이라는 별명이 늘 붙어다니였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지만 속은 다 영글었다는 뜻이다. 태병렬은 싸움도 맵짜게 하였고 생활도 모가 나게 하였다. 그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한 후 묘령전투, 금창전투, 간삼봉전투, 무치허전투, 대포시하전투, 대사하, 대장강전투, 액목현성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에 참가하여 로병들에게 짝지지 않는 자랑할만 한 무공을 세웠다. 그가 소유하고있는 백발백중의 사격술은 이런 무공을 세우는 과정에 실전을 통하여 련마한것이였다. 태병렬이 리룡운련대장과 함께 돈화현의 어느 집단부락에 들어가 30여명의 위만군을 눈깜짝할 사이에 녹여낸 무훈담은 지금도 항일투사들속에서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로 전해지고있다. 그가 솜씨있는 싸움군이였기때문에 한다하는 로병들도 그를 나이가 어리다고 감히 얕보지 못하였다.

 

항일전쟁의 나날에 태병렬은 주로 안길, 전동규, 리룡운을 비롯한 군정간부들의 전령병으로 활약하였다. 많은 군정간부들이 눈썰미가 빠르고 책임성이 높고 일욕심이 많은 그를 제가끔 자기의 수하에 두고싶어하였다.

 

태병렬은 전령병으로 있을 때 지휘관들의 신변안전에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지휘관들이 위험한 모퉁이에 뛰여들려고 할 때마다 태병렬은 그러지 못하게 두팔을 벌리고 막아나섰다. 모험을 하지 말라는건 장군님의 요구인데 그 요구를 어기면 되겠는가고 총알같이 내쏘군 하였다. 대사하, 대장강전투때 전동규련대장이 전사한것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탄막속에 몸을 내대는 모험을 했기때문이였다.

 

안길은 태병렬이 자기 옷섶에 매달리면서 모험을 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할 때 그의 말을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기도 전동규처럼 죽었을것이라고 하였다.

 

소할바령회의후 소부대활동에 참가하였던 태병렬은 왕청현의 어느 깊은 수림속에서 적 대부대와 불의에 맞다들어 치렬한 전투를 벌리다가 허벅다리에 중상을 당하였다. 뼈짬에 총알이 들어가박혔는데 그것을 끄집어낼 도리가 없었다. 출혈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는 이따금씩 실신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총상자리에서는 구데기까지 우글우글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였다. 제때에 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밸이나 방광까지 곪아들어갈수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그런데 간호병의 임무를 받고 밀림에 떨어진 왕가대원은 수술은커녕 아무런 의학상식도 없는 사람이였다.

 

태병렬은 막돌에 손칼을 선뜩선뜩하게 갈아가지고 그 칼로 총상자리를 수술하였다. 상처속에 칼을 집어넣고 힘있게 잡아돌리자 싯누런 농즙과 함께 썩어문드러진 살과 뼈짬에 박혔던 총알이 섞여나왔다. 이런 모험의 덕으로 그는 자기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수 있었다.

 

이듬해에 왕청의 공작지에서 나를 만난 태병렬의 전우들은 그가 스스로 자기 다리를 수술하던 전말을 이야기하면서 《저 친구는 독종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독종이라는것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뜻일것이다. 나는 태병렬에 대한 전우들의 평가가 지나친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상처를 치료한다는것은 사실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뛰여난 담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모험이다.

 

나는 오랜 기간의 공동생활을 통하여 그가 실지로 독하고 담이 큰 사람이며 혁명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맹호가 되여 투쟁하는 충직하고 결패가 있고 원칙적인 인간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그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항상 원칙을 견지하였고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가 제일 증오한것은 종파분자들과 군벌주의자들이였다. 태병렬이 대가 세고 당성이 강한 사람이였기때문에 김창봉과 같은 군벌주의자도 그에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하였다.

 

태병렬은 항일전쟁때에도 잘 싸웠지만 조국해방전쟁때에도 많은 공로를 세웠다. 전후에는 부관이 되여 측근에서 나의 사업을 성실하게 뒤받침해주었다.

 

초년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는 속담도 있지만 태병렬이 이처럼 온갖 풍상고초를 다 이겨낸 혁명가로 성장할수 있은것은 어린시절에 잡은 총대의 덕분이였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무장투쟁을 하게 되면 쇠소리가 나는 혁명가가 된다. 그리고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같은 인간이 된다.

 

반년사이에 소년중대원들은 구대원들 못지 않은 전투원들로 성장하였다. 그들의 발전은 실로 놀랄만 한것이였다.

 

우리는 그들이 군인다운 틀거리를 갖추게 되자 1937년말경에 소년중대를 해산하고 그 성원들을 다른 중대들에 배속시키였다. 그 조치로 하여 소년중대원들은 예비군으로부터 기본부대전투원으로 될수 있었다.

 

소년중대출신의 유격대원들가운데는 배신자나 락오자가 한명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앞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실증해준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에서 파쑈가 최후의 광태를 부리던 해방전야의 그 엄혹한 세월에도 그들은 나와 함께 소부대활동을 충실하게 하였다. 새 조선건설의 나날에는 그들이 사단장도 되고 련대장도 되여 혁명선배들과 함께 이 나라의 무력을 건설하였으며 미국의 장군들과 땅크들을 함정골에 몰아넣고 족쳐버리였다.

 

인민군대의 초대총참모장이였던 강건도 16살에 혁명군에 참가한 사람이였다. 그는 30살에 총참모장이 되였다. 강건은 1948년말에 쏘련을 방문한적이 있는데 그를 영접하기 위해 비행장에 나온 상대국의 대장, 원수급의 고위군사간부들은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강건이 조국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였을 때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동무가 아이적에 벌써 소문난 군인이였다는걸 이야기해주었을거요.》

 

나는 소년중대를 조직한 후부터 사람의 생리적년령과 정신적년령을 완전히 갈라보기 시작했다. 그 두 년령가운데서 내가 기본으로 본것은 정신적년령이였다. 청소년기의 정신적년령은 한해에 두살, 세살, 지어는 다섯살씩 늘어날수도 있다.

 

청소년교양은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데서 또 하나의 천하지대본이다. 소년중대의 경험이 보여주고있는바와 같이 혁명의 계승자, 후비군의 준비는 이를수록 좋고 잘할수록 좋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3-19 12:39:47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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