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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15장 7. 량민보증서 74,7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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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3-05 12: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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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제15장 7. 량민보증서(제4회) 74-75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제15장 7. 량민보증서(제5회) 75-75

 

 

 

제5제15장 7. 량민보증서

 

 

원군운동의 최고형태는 참군이였다. 김정숙은 조국광복회 하강구위원회의 위원들과 함께 조직을 통하여 장악한 핵심들중에서 파악있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인민혁명군에 참군시키였다. 정동철의 회상에 의하더라도 하강구일대에서 혁명군에 입대한 청년들의 수는 무려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도천리부락에서만도 김혁철, 류영찬, 리철수, 최인덕, 한창봉 등 10여명이 입대하였다.

 

우리 혁명의 1세대인 한창봉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 련대를 이끌고 락동강을 희생적으로 도하하였으며 강대안의 산고지들을 점령하고 그것을 견지하는데서 특출한 군공을 세웠다.

 

김정숙의 지도를 받던 세 아이를 가진 요방자의 부녀회 회장 윤어복은 두살난 아이를 업고 80리도 넘는 우리 밀영에 찾아와 자기를 유격대에 받아달라고 강떼를 썼다.

 

참군열도가 어찌나 높았던지 어떤 집에서는 자식을 유격대에 보내고는 그 자식의 가짜무덤을 만들어놓고 제사까지 지냈다. 유격대가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하다나니 그런 방법으로라도 적들을 속여넘기자는것이였다.

 

김재수의 《3.1월간》 배포탄로사건이 있은후 얼마 안되여 우리는 김정숙의 신파공작을 뒤받침해줄 목적으로 최희숙을 요방자에 파견하였다. 최희숙이 오자 김정숙은 도천리를 비롯한 하강구지구의 부녀회, 청년회, 소년회 조직들에 대한 지도를 그에게 맡기고 신파공작에 주력하였다.

 

김정숙의 신파공작은 장해우와의 사업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 당시 장해우는 신파지구에서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 성원들과 함께 반일혁명운동을 하고있었다. 그무렵에 도천리 구장이며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인 정동철과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 성원들이였던 장해우, 림원삼, 서재일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고 호상기맥이 통하기 시작하였다.

 

서재일은 세탁공으로 일하면서 조직공작에 투신하였으며 김정숙과의 련락임무도 수행하였다.

 

장해우와 그 조직들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료해장악하기 위하여 김정숙은 정동철로 하여금 장해우네 조직성원인 림원삼과 결의형제를 맺게 하였다. 그는 정동철을 통하여 충분한 사전료해를 한 기초우에서 마침내 장해우와의 직접적인 접촉에 나섰다.

 

김정숙은 석전양복점 뒤방에서 처음으로 장해우를 만나보았다. 그날 김정숙은 장해우에게 나의 친서를 전하였다.

 

《김일성장군이 김형직선생의 자제분 김성주라니 이 장해우는 형직선생을 따를 때처럼 장군을 따르겠소.》

 

장해우가 그런 소신을 밝혔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그때 김정숙의 신파공작이 성공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였다.

 

장해우는 년령이나 투쟁년조 따위를 계산하며 코대를 세우거나 옹졸하게 구는 시시한 혁명가가 아니였다. 의로운것이면 조건없이 따르고 지지하였으며 사사로운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대의와 대업을 위하여서는 서슴없이 자신을 바칠줄 아는 사람이였다.

 

장해우는 얼마후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 성원들로 조국광복회 신갈파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같은 시기에 김재수와 김정숙의 지도밑에 석전양복점 뒤방에서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를 모체로 하여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직속 신파지구 당소조도 결성하였다.

 

조국광복회 지회결성모임은 광선사진관에서 진행되였다. 그 사진관의 2층 사진수정실은 김정숙이 가장 많이 리용한 비밀련락장소였다.

 

광선사진관을 운영하는 리순원은 조국광복회 신갈파지회의 핵심성원이였다. 그는 서울에 가서 사진강습소를 나온 다음 사진관을 차린 사람이였다. 리순원은 사진도 잘 만들고 인망도 높고 접촉성도 좋아서 그를 내세우면 사람들과의 사업을 편리하게 할수 있었다.

 

그는 많은 적측자료들을 촬영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언제인가는 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에 도움이 될수 있도록 신파전경도 찍어서 보내주었다. 그 집 사진현상실에서는 삐라도 많이 찍었다고 한다. 그의 안해는 조직의 비밀사업을 묵묵히 뒤받침해준 성실한 방조자였다.

 

김정숙은 광선진관외에도 석전양복점, 샘물터국수집, 신파객주집, 사발상점, 물방아집을 비롯한 신파지구의 여러곳에 비밀련락장소와 비밀사업장소들을 정해놓고 그곳에 은밀히 드나들면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샘물터국수집, 신파객주집, 사발상점 같은곳은 조직원들의 접선과 련락을 위한 장소로 많이 리용된 동시에 유격대에 보낼 원호물자의 수집과 보관을 위한 장소로도 리용되였다.

 

원호물자의 기본운반통로로 리용된 비밀지점은 물방아집이였다. 읍거리에서 얼마쯤 떨어져있는 그 물방아집은 적들의 시선이 덜 미칠수 있는곳에 자리잡고있었기때문에 물자를 보관하고 운반하는데 아주 편리하였다. 그 집 주인의 친척되는 사람이 떼목군이여서 원호물자들을 압록강너머로 넘겨보낼 때에는 그의 도움을 쉽사리 받을수 있었다. 물방아집 주인이나 떼목군도 역시 조국광복회 회원들이였다.

 

신파를 통하여 우리에게 실로 많은 원호물자들이 들어왔다. 13도구에는 물품들이 많지 못하였기때문에 장백현 하강구일대의 조직들에서도 원호물자의 대부분은 압록강건너쪽의 신파에서 사들여와야 하였다.

 

신파지구 조직들에서 유격대에 보내오는 식량, 천 같은 다량의 원호물자들은 대부분 물방아집 아지트와 오함덕객주집을 통하여 떼목이나 나루배에 실려 압록강을 건너가군하였다. 오함덕객주집은 가족단위로 무은 특수분회였다.

 

김정숙은 도천리와 신파지구에서 활동하는 기간 백두산밀영과 삼수에도 다녀왔으며 신흥, 흥남, 북청, 단천을 비롯한 동해안지구에 나가 이 지대 혁명가들과의 사업도 심도있게 하였다.

 

아안리와 오함덕의 비밀련락장소들은 주로 타지방공작원파견아지트로 많이 리용되였다. 김정숙은 부전, 장진, 신흥, 흥남 일대에 가게 되는 지하혁명조직성원들은 주로 아안리분회책임자의 집에서 파견하였고 갑산, 북청, 덕성, 단천 일대에 가게 되는 성원들은 오함덕비밀련락장소들을 거점으로 하여 파견하였다. 흥남공업지구에 지하혁명조직들을 꾸릴 임무를 주어 파견한 위인찬공작조를 떠나보낸곳도 아안리아지트였다.

 

김정숙은 신파지구의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그 수많은 아지트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조직들을 넓혀나갔다. 그는 절대로 고정된 아지트를 쓰지 않았다. 자신을 변장해가며 여러가지 비밀련락지점들과 공작장소들을 엇바꾸어 재치있게 리용하였다. 그렇게 하는것은 조직을 위장하는데도 좋았고 신변안전을 위해서도 좋았다.

 

김정숙이 도천리에서 돌아온 다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신파경찰들의 눈이 올빼미눈이라는데 동무는 무슨 수를 써서 자기 정체를 로출시키지 않았는가. 신파시내에 수십번 들락날락하면서도 적들에게 잡히지 않고 마음대로 활동할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는가.

 

김정숙은 대답대신 웃으면서 신파에 건너갔다가 밀정의 미행을 당하던 일화를 말해주었다.

 

《신파도선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허줄한 농립모를 쓴 어떤 사람이 저를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미행인줄 몰랐는데 제가 시내에 들어선 다음에도 그 사람이 그냥 내뒤에서 어물거리는걸 보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음식점앞에서 소일거리삼아 담배를 꺼내물었는데 그게 마라초가 아니고 가치담배였습니다. 그 가치담배를 보니 수상한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가난한 농사군들이야 어디 가치담배를 피웁니까.》

 

김정숙은 골목과 골목들을 에돌며 밀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장마당안에 들어가 어린애를 업고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가는 어떤 낯익은 녀인의 임을 날래게 받아이였다. 그러는 바람에 밀정은 그를 놓치였다.

 

《제가 밀정들이나 경찰들의 손에 걸려들지 않은건 책임성때문이였습니다. 놈들에게 붙잡히면 사령부에서 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대담해지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군중이 저를 목숨을 걸고 보호해주었습니다.》

 

김정숙의 이 말은 도천리-신파지구공작에 대한 그자신의 총화이기도 하였다. 그로 하여금 어려운 적구공작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게 한 중요한 비결은 바로 책임성이였으며 군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것이였다.

 

그가 적구지하공작에서 발휘한 놀라운 창발성도 결국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나온것이였다. 우리는 그를 도천리로 파견할 때 정치공작과 관련된 지시만 주었지 다른 과업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적구공작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정숙은 정치공작에 주력하는 한편 우리 부대의 활동에 필요한 군사정보들을 수시로 수집하여 사령부에 보내주었다.

 

그는 도천리와 신파의 지하조직들을 발동하여 많은 정보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정동철, 장해우, 림원삼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그에게 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정동철은 정보공작의 능수였다. 경찰서장, 세관장, 면장을 비롯한 적통치기관 우두머리들과 결의형제를 맺고 그들과 《형님》, 《동생》 하면서 살금살금 비밀을 뽑아냈다. 이 결의형제패에는 13도구의 관청우두머리들은 말할것도 없고 신파에서 파견된 고등계형사까지 망라되여있었다. 정동철은 그들을 위해 자주 술추렴을 마련하였다. 아편을 좋아하는 관리들을 위해서는 약담배먹기도 의식적으로 조직하였다.

 

조국광복회 하강구위원회에서는 적기관에 회원들을 교묘하게 박아넣었다. 13도구경찰서관하에만 해도 2∼3명의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 침투하였다고 한다. 적의 행정말단 단위의 심부름군들인 구장들과 십가장들도 대부분 혁명조직에 망라되였었다.

 

림원삼은 정안군 련대본부에 가서 필사작업을 하게 된 기회를 리용하여 많은 군사비밀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혁명군의 활동에 참고가 될만한 작전도나 통계자료가 나오면 종이에 날쌔게 기록하고는 꾸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가 저녁에 휴지들을 불태울 때 다시 꺼내여 조직에 가져다주었다.

 

광선사진관과 석전양복점은 적정자료수집과 련락장소로 많이 리용되기도 하였다. 신파지회산하의 조국광복회 회원들가운데는 면사무소나 금융조합 같은 적기관에서 서기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적정자료를 수집하여 광선사진관이나 석전양복점에 집결시켰다가 조직에 통보하군하였다. 김정숙은 간삼봉전투때에도 바로 이 지구의 아지트를 통하여 김석원이 인솔하는 대군의 움직임에 대한 자료를 낱낱이 조사수집하여 제때제때에 사령부에 통지함으로써 인민혁명군의 전투승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정숙은 조직성원들을 발동하여 신파일대에 진을 치고있는 적군경들의 병력과 군사시설 배치상태, 무장장비상태를 조사장악하고 압록강의 너비와 깊이, 류속, 지어는 도하와 철수에 유리한 지점까지 직접 확인한 다음 필요한 략도까지 작성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나는 도천리공작정형을 총화할 때 김정숙의 이 창발적노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도하와 철수에 필요한 지점들은 어떻게 되여 조사하게 되였는가고 물었더니 우리 혁명군이 아무때건 신파도 공격할 때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그는 대답하는것이였다.

 

1937년 여름에 김정숙은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도천리의 부녀회원들이 우리 출판소에 보내려고 장만해두었던 종이퉁구리들이 정안군의 수색과정에 발견되였는데 그것이 화근으로 되였다. 김정숙은 그 종이퉁구리는 정동철구장의 부탁을 받고 주민대장용으로 쓰기 위하여 자기가 사다 보관시킨것이였다고 그럴듯하게 변명해나섰다. 그의 당당한 태도와 사리정연한 대답이 적들의 부아를 돋구어주었다. 말문이 막힌채 약이 오른 장교는 네가 겁도 먹지 않고 말을 잘하는것을 보니 혁명군의 스파이가 틀림없다고 하면서 무작정 그를 결박하여 자기들의 부대본부가 있는 요방자로 끌고 갔다.

 

김정숙은 최후를 각오하고 조직에 보내는 유서를 썼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죽을것입니다. 그러나 조직은 살것입니다. 나의 재산의 전부인 2원을 보냅니다. 조직의 자금으로 써주십시오.》

 

연필로 씌여진 그 유서쪽지와 2원의 돈은 그가 갇혀있는 집 로파의 손을 거쳐 그 옆집에 전달되고 다시 정동철을 거쳐 조직에 전하여졌다.

 

조직에서는 성원들을 발동하여 비상구출작전을 벌리였다. 도천리의 조직원들은 대표단을 무어가지고 정안군부대 본부에 찾아가서 아무런 죄도 없는 량민을 불법체포한데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즉시 석방을 요구하였다.

 

도천리조직원들의 항의투쟁이 마침내 은을 내였다. 정안군부대 본부에서는 부대이동을 구실로 김정숙을 14도구경찰서에 넘겼다.

 

정동철은 김정숙을 그 경찰서에서 13도구경찰서로 이송시키도록 교섭하였다.

 

13도구경찰서가 한급 높은 1급경찰서였기때문에 김정숙을 거기로 이송시키는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되였다.

 

김정숙은 두손을 묶이운채 압송당하였다. 그 두 경찰서사이에 도천리부락이 있었다.

 

그가 경찰들의 호송하에 도천리부락을 지난것은 한낮이 조금 지난 때였다.

 

신도 없이 맨발로 경찰들의 총부리에 떠밀리우며 걸어가는 《무산집새애기》의 결박당한 모습을 보게 된 도천리마을사람들은 비분의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다. 한 할머니는 짚신짝을 들고 길바닥에 달려나와 김정숙의 피흐르는 발에 신겨주면서 그를 호송하는 순경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놈들아, 우리 옥순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생사람을 잡아가느냐? 네놈들이 우리 옥순이를 공산당이라구 잡아간다는데 옥순이 같은 사람이 공산당이라면 나도 공산당을 따라가겠다!》

 

정동철은 그길로 김정숙을 뒤따라가서 13도구경찰서장에게 석방교섭을 들이댔다. 경찰서장은 500명분의 량민보증서를 작성해오면 김정숙을 《량민》으로 인정하고 석방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경찰서장이 그와 같은 엄청난 량의 보증서를 요구한것은 차후 상급에서 문제시하게 되는 경우 책임을 회피할 증빙문건을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바치라는것만치나 실행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그러나 정동철은 그들이 요구하는 보증서를 작성해가지고 가서 서장의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서장은 눈알이 튀여나올 지경으로 놀랐다. 《역적》이나 《공비》로 지목된 《불온분자》를 《량민》으로 인정하는 보증서에는 아무나 함부로 손지장을 누르려 하지 않는것이 보편적인 대중심리였다. 경찰서장은 정동철과의 《우정》때문에 체면상 량민보증서를 받아오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실행될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던것이다.

 

500명의 도장과 지장이 주런이 찍혀있는 량민보증서, 실로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였다.

 

그와 같은 일이 어떻게 생겨날수 있었는가? 200여호밖에 안되는 도천리마을에 그렇게 많은 지하조직원이 있었을수도 없다. 아무리 조직이 발동되였다 해도 조직원보다 몇배나 더 많은 그 숱한 비조직원들이 모두 남의 풍에 떠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보증서에 함부로 도장을 누를수는 없었을것이다.

 

그 뭇사람들로 하여금 량민보증서에 서슴없이 도장을 누르게 할수 있은것은 김정숙에 대한 인민들의 다함없는 사랑이였고 지지였다. 달리 말하여 강권이나 금권보다도 더 위력한 인민의 절대적 신뢰와 지지가 그런 기적을 낳게 한것이다.

 

적들의 마수에서 무사히 풀려난 김정숙은 도천리에 돌아와 마을사람들속에 에워싸이기 바쁘게 《아이구, 난 배가 너무 고파서 혼났어요. 형님, 나 밥부터 줘요.》 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집안식구들끼리만 할수 있는 허물없는 말이다. 그가 도천리사람들을 한집안식구처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을 선뜻 하지 못하였을것이다.

 

해방후 흥남시인민위원회 위원장사업을 하던 림원삼이 회의차로 평양에 올라왔던 기회를 타서 옛날의 도천리, 신파 친구들이였던 장해우, 정동철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장해우와 정동철은 그 당시 중앙의 주요직무에서 일하였다. 평남도민주당위원회 위원장사업을 하던 김재수도 함께 왔었다. 그날 김정숙은 손님들을 위해 교즈를 빚었다. 그날의 화제는 자연히 도천리-신파시절로 흘러갔다.

 

김정숙은 동지들의 도움으로 사경에서 구원되던 때의 일을 감회깊이 회고하면서 눈물을 지었다. 그는 불쑥 자기는 요방자에 잡혀가 감금당했을 때 얼마든지 탈출할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노라고 말하였다.

 

《사실 보초 하나쯤 제끼고 내뛰는거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더군요. 제가 갇혀있던 집의 늙은 내외의 가긍한 정상을 생각하면 어떻게 보초를 제끼고 달아날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도망가기는 쉽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빠져나가면 이 집 늙은이들은 어떻게 되고 나를 좋은 녀자라고 보증해나선 정구장은 어떻게 되고 도천리의 지하조직과 인민들은 또 얼마나 큰 피해와 시달림을 당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내 한몸이 희생되더라도 조직을 지켜내고 인민을 지켜내야 하겠다는 각오가 생기였습니다. 저는 그날밤 편안한 마음으로 그 집 웃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일신을 바치려고 마음먹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두려운것도 없고 주저할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천리-신파시절의 《무산집새애기》의 모습이였다.

 

량민보증서의 덕으로 역경에서 구원된 김정숙은 얼마동안 도천리지구와 국내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사령부로 돌아왔다. 그가 부대로 돌아올 때 조국광복회 도천리지회성원인 류영찬도 같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김정숙의 보증으로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우리가 하바롭스크주변의 훈련기지에서 대일작전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1944년에 류영찬은 야영지의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건설자재들을 배로 실어 나르다가 불행하게도 아무르강에서 익사하였다.

 

김정숙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을수 없는 은인이라고 하면서 그를 회상하군하였다.

 

김정숙이 도천리를 떠날 때 그를 따라가려고 결심한 사람은 비단 류영찬뿐이 아니였다고 한다. 부녀회원들도 울면서 그를 따라오며 함께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는것이다.

 

한 부녀회원은 김정숙이 포대산을 넘을 때까지도 그냥 그에게 매달려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김정숙은 달래다 못해 자기가 끼고있던 은가락지를 부녀회원의 손에 끼워주고 그가 띠고있던 빨간 허리띠를 풀어 자기의 허리에 띠였다. 털실로 뜬 빨간 허리띠는 그 녀자가 김정숙의 보증으로 부녀회에 가입하는 날 기념으로 손수 떠서 자랑삼아 띠고다니던 소중한 치장품이였다.

 

《데리고가고싶지 않아서 그러는게 아니라 데리고 갈수 없어서 나혼자 떠나는거니 섭섭해말아요. 나는 이 빨간띠가 다 해여져서 마지막 실 한오리가 남을 때까지 품고 다니며 정든 도천리사람들을 잊지 않겠어요.》

 

그 유정한 말을 받아안은 녀인은 더이상 따라가겠다는 말을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 가서 소식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자기가 한 약속대로 부대에 돌아와서도 늘 군복안에 그 빨간털실허리띠를 띠고지냈다. 나는 그와 결혼한 다음에야 그의 허리에서 한번도 풀려본적없는 빨간 허리띠에 깃든 사연을 알게 되였다.

 

그 띠와 함께 김정숙은 늘 인민의 체온을 자기 몸에 간직하고 살았다. 그의 넋은 언제나 인민에게서 떠나본적이 없었다.

 

나는 이따금 이런 질문을 던져보군한다. 어떻게 되여 김정숙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후원 속에서 어려운 지하공작을 해낼수 있었을가?

 

만일 김정숙이 인민에게 참다운 사랑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인민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을것이다. 인민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치지 않는 사람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인민의 진정한 도움을 받을수가 없다. 김정숙은 인민에게 사랑을 바친것만큼 자기가 그처럼 아끼고 품어준 인민들로부터 응당한 보답을 받은것이다. 그러고보면 500명의 인장이 찍힌 량민보증서는 그가 인민의 참된 충복임을 증명하는 영원한 증서라고도 해야 할것이다.

 

김정숙이 도천리를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1991년 가을에 나는 량강도지방을 현지지도하다가 그가 심혼을 바쳐 개척한 신파땅을 찾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때였지만 그의 지하활동과 관련된 사적물들은 옛모습 그대로 고이 보존되여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유물들과 사적지들에 바친 신파사람들의 정성은 실로 탄복할만한것이였다.

 

그날 강사들은 김정숙의 발자취가 깃들어있는 사적지로 나를 일일이 안내하면서 그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 설명가운데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건이나 세부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압록강기슭에 옛모양 그대로 서있는 음험한 포대를 바라보면서 김정숙이 그고장을 혁명화하느라고 모험도 많이 하고 아슬아슬한 고비도 여러번 당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무렵에 정거장으로 나오면서 신파거리를 뒤돌아보니 어쩐지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3-05 12:59:4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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