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12장 2. 20원 49,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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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2-09 01:4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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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2장 2. 20원 (제3회) 49-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2장 2. 20원 (제4회) 50-61
제4권 제12장 2. 20원
내가 창덕학교를 다닐 때 강량욱선생도 학부형들을 만나면 이와 비슷한 말을 종종 하였다. 그 호소가 <어린이날의 약속>을 그대로 따온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자기 식으로 가공한것이였던지 그 여부는 잘 알수 없다. 아무튼 선생이 학부형들에게 아이들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어른들이 아이들한테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그 말속에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군 하였다.
어린이들을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라고 한 그들의 호소는 자기자신보다 후대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넋속에서만 울려나올수 있는 숭고한 리성의 목소리이다.
<아이들이 없는 세계는 태양이 없는 세계>라고 한 명언속에는 후대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격조높이 고동치고있는가.
력사에 이름을 남긴 세게적위인들은 누구나 다 아이들을 열렬히 사랑하였다. 맑스가 아이들의 충실한 벗이였다는것은 칼 립크네흐트의 글을 통해서만 전해지고있는 사실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손들의 쾌락을 위해 이 위대한 인간이 <말>도 되고 <승용마차>로도 되였다는 일화는 온 세상 사람들이 즐겨 회상하는 화제거리가 되고있다. 후대들이 스위스의 페스탈로찌를 지금까지도 고이 추억하고있는것은 그가 아이들을 위해 자기의 전재산과 전생애를 바친 훌륭한 교육자였기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인류가 기억하고있는 동서방의 모든 위인들은 누구나 다 후대들에 대한 사랑을 미덕중의 미덕으로 간주하여온 아이들의 진정한 벗이였고 스승이였고 어버이였다.
그런데 귀족도 아니고 부르죠아지도 아닌 마안산의 주인들, 입만 벌리면 인간성을 운운하고 인간해방을 념불처럼 외우는 이 밀영의 공산주의자들은 어찌하여 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는단 말인가!
나는 치미는 분노를 걷잡을수 없었다. 혁명 그자체를 생명보다도 더 신성시해온 어린것들의 깨끗한 신념이 망울채로 저렇게 무참히 짓밟힌다는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였다. 나는 저 아이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저 어린것들이 처창즈에서 어른들과 함께 어떻게 기아를 이겨냈고 내도산에서 인민혁명군을 도와 어떻게 주먹밥을 날랐고 어떻게 철야보초를 섰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아이들이 엮어온 그 개개의 자서전은 소설의 줄거리처럼 내 머리속에 죄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큰 아이들의 겨드랑이밑에서 비에 젖은 햇병아리처럼 온몸을 오돌오돌 떨며 언손으로 무르팍의 살을 가리우고 서있는 백초구출신의 아홉살내기 리오송의 경력만 보아도 마안산의 아이들이 겪어온 천신만고의 준엄성을 능히 판단할수 있을것이다. 그 아이는 벌써 처창즈에 있을 때 집단적인 아사를 체험하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리오송도 배가 고플 때마다 동면중의 개구리를 잡아먹든가 봄파종을 한 밭들을 돌아다니며 씨종자를 파먹었다.
리오송의 아버지도 처창즈에서 아사로 인생을 마치였다. 오송이가 밭에서 보리이삭을 잘라다가 거스러미를 비벼 없애고 줌에 채 차지도 않는 낟알을 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렸지만 죽음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리오송은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초근목피로 보리고개를 넘기다가 내도산으로 철거하는 인민혁명군을 따라 처창즈를 떠났다. 그러나 그도 김락천의 처남이라는 리유로 <민생단>협의를 받고있었다.
손명직을 단장으로 하는 14명의 아동단원들은 내도산으로 가는 수백리로정에서 조직생활을 통하여 부단히 련마해온 백절불굴의 투지와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앞에서는 허리를 치는 눈무지와 가파로운 산고개들이 길을 막아나서고 뒤에서는 <토벌대>의 무리들이 발목을 물고 늘어지였다.
행군의 첫날에 먹을것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배고프면 솔잎을 뜯어 씹든가 눈빵을 빚어 그것을 한입씩 떼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군하였다. 강냉이떡 한 개를 가지고 14명이 한끼를 굼때는 날은 그래도 잘 먹는 날이라고 할수 있었다. 밤에 야숙을 할 때마다 손명직, 주도일, 김태천을 비롯하여 체통이 큰 상급반 아이들은 10살미만의 나어린 아동단원들을 엄지닭처럼 품고 앉아 몸으로 바람을 막아주며 잠간씩 눈을 붙이고는 교대로 주변을 감시하군하였다.
그 대오를 인솔하는데서 아동단 단장 손명직은 특출한 조직적수완과 통솔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원래 왕우구에 있을 때부터 아동단사업을 잘하였다. 한때는 적구에 내려가 김재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지하공작에도 참가하였다. 일곱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구학을 공부한 손명직은 10살도 되기전에 천자, <명심보감>을 다 떼였는데 눈썰미가 빠르고 총기가 좋아 지하공작에서도 적임자였다. 그는 아동단시절에 조직을 발동하여 교내의 일본어교원을 비롯한 7명의 반동교원들을 숙청하는 실적도 올리여 일찍부터 혁명가들의 신임을 받았다.
손명직의 집안은 대대로 애국애족의 넋을 굳건하게 이어온 믿음직한 혁명일가였다. 할아버지는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사람이였고 아버지 손화준은 백호장의 간판을 가지고 리면에서 비밀공작을 한 혁명투사였다. 손명직의 5촌숙부 김봉석(원명 손봉석)은 소부대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몇시간 앞두고 애석하게 전사한 나의 충실한 전령병이였다.
죽어도 혁명군을 따라다니다가 죽겠다고 언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이 깊은 산중에까지 찾아온 아이들, 부자집 아이들이 자개를 박은 밥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풍청거릴 때 우등불옆에서 가랑잎을 덮고 쪽잠을 자면서도 광복된 조국을 그려온 이 아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과연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귀여운 꽃봉오리들에게 금의옥식은 마련해주지 못할망정 왜 수수한 광목옷 같은것이야 못해입히며 콩죽 같은것이야 못해먹이겠는가.
<얘들아, 얼굴을 들어라. 너희들이 헌옷을 입고있는건 너희들의탓이 아니다. 어서들 이리 오너라!>
나는 두팔을 크게 벌리면서 아이들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전에 수십명의 아이들이 올망졸망 나를 둘러싸고 엉엉 소리를 내며 목놓아 울었다.
나는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갔다.
며칠째 병에 걸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네댓명의 아이들이 모포도 없이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누워있었다. 무슨 병인가고 물었으나 아이들은 하나같이 대답을 피하였다. 밀영을 지키고있던 대원들도 골병이라고만 하였지 정확한 병명은 대주지 못하였다. 그것이 마음속의 병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은 박포리밖에 없었다. 아무 죄도 없는 청옥 같은 아이들에게 <민생단>이라는 표쪽을 달아놓았으니 무슨 병을 앓는다고 대답하겠는가.
나는 전령병을 불러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라고 하였다. 그것은 왕청시절에 일본군수송대를 치고 로획한 나의 단매모포였다. 그 한장이나마 앓고있는 아이들에게 덮어주면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것 같았다. 나의 의도를 알아챈 대원들이 저마다 자기의 모포를 꺼내느라고 부산스럽게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포들을 임자들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동무들, 그만들 두시오. 이 아이들이 이렇게 병들어 누워있고 추워서 떨고있는데 100장의 모포를 덮고 잔들 내 마음이 더워질수 있겠소. 동무들이 나를 생각하겠거든 먼저 이 애들을 잘 돌보아주는것이 좋겠소.>
밀영의 후방부성원들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푹 숙이였다.
내 목소리는 갈리고 쉬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혁명가의 가치관을 두고 다시한번 심각한 음미를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혁명을 시작했고 지금도 무엇 때문에 만난을 무릅쓰고 혁명을 계속하고있는가. 우리는 그 무엇을 파괴하고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혁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온갖 불의와 페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적인것을 옹호하며 인간이 창조해낸 모든 부와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하여 우리모두가 이 저주로운 세상을 향해 반기를 든것이 아니겠는가. 학대받는 계급에 대한 동정이 없고 망국의 설음속에 울고있는 민족에 대한 련민이 없고 가난과 무권리 속에서 헤매는 부모처자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곤난을 하루도 참아내지 못하고 따뜻한 온돌방으로 돌아갔을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 내버려둘수 있겠는가. 동무들의 가슴속에서는 어느새 혁명의 길에 나설 때 간직했던 순결한 인간애가 식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지금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어떤 의미에서 놓고볼 때 우리 혁명은 후대들을 위한 혁명이라고도 할수 있다. 후대들에게 밥 한술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옷 한벌 제대로 해입히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혁명을 한다고 말할수 있으며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떳떳이 자랑할수 있겠는가.
후대들은 계급의 꽃이고 민족의 꽃이며 인류의 꽃이다. 이 꽃을 잘 가꾸는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신성한 임무이다. 후대들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따라 혁명의 장래가 결정된다. 혁명은 한 세대에 끝나는것이 아니라 여러 대를 두고 완성되게 된다. 오늘은 우리가 혁명을 담당한 주인으로 되고있지만 래일은 저 애들이 자라서 혁명을 떠메고나가는 주력군으로 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선혁명에 끝가지 충실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피줄기를 이어갈 후비대를 튼튼히 키워야 한다. 더구나 저 애들은 우리의 전우들이 남기고 간 유자녀들이 아닌가. 우리는 그 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저 아이들을 아끼고 따뜻이 돌보아주어야 하는것이다.
그 무슨 상급의 박해가 두려워 아이들을 외면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적의 총구앞에 가슴을 내댈수 있겠는가. 동무들은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자기자신만을 위한 보신의 철갑속에 들어박혀 인간이 당하는 불행을 보면서도 그것을 동정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는 용렬한 인간들이 된것이다. 동무들, 생각해보라. 이것이 세게를 개조하겠다고 나선 공산주의자들의 소위이겠는가.
후대들을 괄세하는것은 자기자신들을 괄세하는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그들을 잘 돌보지 않거나 그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자기 보신만을 생각하면서 외면한다면 먼 후날에는 후대들이 우리들을 돌아보지 않을것이다. 우리가 후대들을 위해 바치는 노력은 수십년후 후대들이 우리를 보는 눈빛을 결정하게 될것이며 그들이 건설하게 될 조국의 면모를 좌우하게 될것이다. 우리가 지금 후대들에게 많은 사랑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래일의 조국은 더 부강해지고 더 문명해지고 더 아름다워질것이다.
동무들, 후대들을 사랑한다는것은 곧 미래를 사랑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우리 조국은 이제 저 아이들에 의해 백화란만한 화원으로 건설되게 될것이다. 조국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후대들을 더 잘 가꾸고 돌보아주자!
내가 그날 병실에서 한 말은 대체로 이런 내용의것이였다.
이것은 80고령이 된 오늘에 와서까지 내가 변함없이 고수하고있는 후대관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는 지금도 후대들을 아끼고 돌보는데서 최대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있다.
후대들이 없이야 우리 생활에 무슨 락이 있겠는가. 우리가 연필문제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첫째 의정으로 상정한것이나 매해 설명절을 아이들과 함께 즐기고있는것도 다 이런 후대관의 표현인것이다. 후대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의 교육교양을 담당한 교원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도 표현되고있다.
공화국의 초대 내각성원들중에는 리병남이라고 부르는 보건상이 있었다. 그는 해방전부터 소아과계통에서 의료활동을 꾸준히 벌려온 이름난 박사이며 성실하고 량심적인 애국자였다.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석하려고 서울에서 평양으로 들어온 그는 우리의 권유로 공화국의 초대보건상이 되였다. 그 사람의 품성가운데서 제일 표가 나는것은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특별히 잘 다루는 점이였다.
소아과를 전공한 리병남은 주머니에 딸랭이를 늘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였다. 중병이 들어 골골거리던 아이들도 그가 딸랭이를 몇번씩 흔들기만 하면 울음을 그치고 공손히 진찰을 받군하였다. 어리광대들도 찜쩌먹을 능청스러운 얼굴표정과 배꼽이 떨어져나갈 정도의 재미나는 익살로 상대방을 흐물흐물하게 만들면서 눈껍벅할사이에 치료는 치료대로 다 해치우군하는 능란한 솜씨로 하여 그는 어데 가서나 어린환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살뜰한 벗이 되군 하였다.
우리 딸 경희는 홍역을 앓을 때 발진이 잘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게다가 바람간수를 잘하지 못하여 페염에까지 덜컥 걸리였다. 딸은 어머니를 찾으면서 줄곧 울었다. 어린 동생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김정일조직비서는 <경희야, 아버지앞에서 어머니를 찾으면 안돼!>하고 타이르군 하였다. 정부병원의 소아과 의사들은 어떻게 할바를 몰라서 전전긍긍하였다. 그때 리병남보건상이 경희의 침상으로 찾아왔다.
리병남은 청진기를 꺼내지도 않고 세심히 증상을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곧 <홍역보다 페염이 먼저 왔습니다.>하고 진단을 내리였다. 보건상의 처방대로 소아과 의사들은 즉석에서 어린 환자의 입에 산소를 불어넣었다. 의식을 잃고있던 경희는 하루만에 울음을 터뜨리며 혼수상태에서 깨여났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발진도 잘되였다.
나는 리병남을 보고 물었다.
<리선생, 어떻습니까? 저 아이가 우는건 무엇때문입니까?>
<그건 좋은 징조입니다. 병이 나을 때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지요. 사흘후에는 따님이 완쾌될것 같습니다.>
리병남은 줄도 테도 다 금으로 되고 호박노리개까지 달린 회중시계를 풀어서 경희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것은 그가 어린 환자들을 달랠 때마다 딸랭이와 함께 진정제처럼 사용하군 하던 금시계였다. 딸은 울음을 그치고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사흘후에 정말 병이 완쾌되였다.
나는 보건상의 그 능란하고 거침없는 치병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것 참, 신통합니다. 어쩌면 리선생의 예언이 그렇게도 딱딱 맞아떨어집니까. 리선생은 의사이기전에 아이들의 친구이고 아동심리학자입니다. 그러니까 소아과 의사들은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열렬히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함부로 대지 말아야 합니다.>
1950년 가을에 나는 고산진에서 리병남을 만났다. 모든것이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였으나 한가지만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는 끈도 없는 허술한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군 하였다. 경희를 달랠 때 풀어서 흔들던 번쩍번쩍하는 시계를 어떻게 했는가고 물으니 군기 헌납으로 나라에 바치였다고 하였다. 전쟁승리를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려는 리병남의 애국적지성과 량심인으로서의 진정은 나를 크게 감동시키였다. 그 회중시계가 너무도 초라하기에 나는 후날 그에게 새 손목시계를 채워주었다.
이 자그마한 세부를 통하여 나는 후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애국자가 될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지닌 사람들만이 참다운 애국자가 될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였다. 후대들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지니고있는 사랑가운데서도 가장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이며 인류에게 바쳐지는 송가가운데서도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송가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 송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들이며 이 송가를 위해 투쟁하는 복무자들이다.
리병남과 같은 아동들의 벗이 한명만 있었어도 마안산아동단원들의 처지는 그처럼 험악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것이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어머니가 림종을 앞두고 나에게 유산으로 남긴 그 20원을 소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금전이 없이는 도저히 뚫고 나갈수 없는 역경에 처했을 때에만 쓰라고 당부하시던 20원이였다. 손끝에 피가 나도록 삯일을 하여 한푼 두푼 힘겨웁게 벌어들인 로력의 열매였다.
나는 어렸을 때 돈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자식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학습장이나 연필을 사는것도 어머니에게 맡기고 나를 상점이나 장마당 같은데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돈맛을 알기 시작하면 사람이 자라서 수전노가 되고 조국도 모르고 민족도 모르는 속물로 될수 있다는것이 돈과 관련된 아버지의 지론이였다.
어느날 병환에 계시던 아버지는 거리구경을 하자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바깥출입을 거의 못하시던 아버지가 나와 같이 나들이를 떠난것은 전에 없는 일이였다. 중국말에 능하지 못한 아버지는 통변이 필요할 때마다 이따금식 나를 데리고 다니군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충실한 중어<통역원>이였다.
(병이 심한 때에 나들이를 떠나시는걸 보니 필경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오늘은 무슨 사람들을 만나시려고 저렇게도 바삐 서두르실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침상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를 부축해드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팔을 끼고 거리에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는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시는 때여서 생일 같은것을 머리에 새겨둘 경황이 없었다.
거리를 한바퀴 돌아본 아버지는 뜻밖에도 내 손을 잡고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예상을 뒤집어엎는 놀라운 나들이였다. 무엇하려고 이 상점에 나를 데리고 들어왔을가,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진렬장을 덤덤히 바라보고있을 때 아버지는 나더러 마음에 드는 회중시계를 하나 고르라고 하였다. 그 상점에는 여러가지 회중시계들이 수두룩하게 진렬되여있었는데 어떤 시계들에는 손중산의 초상까지 새겨져있었다.
내가 손중산의 초상이 없는 회중시계를 한개 골라잡자 아버지는 그 값으로 3원 50전의 돈을 치르어주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는 시계를 찰 때가 되였다. 나라를 찾는 싸움에 나선 사람이 아껴야 할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동지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을 귀중히 여기라는 뜻으로 주는 생일선물이니 잘 간수해라.>
시계를 찰 때가 되였다고 한 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내가 성인이 다되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였다.
내 귀에는 어쩐지 그 말이 림종전야의 유언처럼 들리였다. 아버지는 실지로 그때 벌써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한것 같았다. 그런 예감을 가지고 시계와 함께 평생의 로고가 바쳐진 독립의 위업을 나에게 넘겨주었던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성년식과도 같은것이였다.
회중시계를 생일선물로 사준지 두달도 못되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였다. 그후 나는 그 시계를 가지고 화성의숙에 갔고 거기서 뜻이 맞는 동지들을 만나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였다. 우리는 빨찌산시절에도 그 시계에 맞추어 매일매일의 일과를 집행하였고 공격개시시간과 접선시간을 정할 때에도 그 시계를 기준으로 삼았다.
내가 그 회중시계대신 손목시계를 차기 시작한것은 보천보전투무렵이였다. 전우들은 나의 회중시계가 고물로 되였다고 하면서 사령관의 체모를 생각해서라도 이제부터는 새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나는 10년동안 가지고 다니던 회중시계를 다른 동무에게 주고 신식손목시계를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이처럼 내가 혁명투쟁의 길에 나설 때까지 돈을 모르고 자라나게 하였다.
내가 자기 손으로 값을 치르고 상점의 물건을 사본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길림시절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돈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조장되였다고 하면 독자들은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사람이 돈이나 물건에 포로되면 당도 수령도 조국도 인민도 안중에 없고 나중에는 부모처자조차도 모르는 인간추물이 되고만다는것이 80풍상의 인생을 총화하면서 내가 후대들에게 하고싶은 말이다.
이처럼 자식들이 어려서부터 돈맛을 모르고 자라도록 엄하게 단속하고 통제한것은 아버지가 세워준 우리 일가의 독특한 가풍이였다.
그러나 림종을 앞둔 어머니는 처음으로 그 가풍을 어기고 나에게 평생의 신고가 집약된 20원을 유산으로 넘겨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풍랑세찬 일생이 몇장의 지전으로 압축된것 같은 감을 느끼며 그 돈을 소중히 받아안았다. 20원,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호신부와 같은것이였다. 그 돈을 품고있으면 배고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항상 내곁에 계시면서 온몸과 넋으로 나를 지켜주는것 같았다. 내 개인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쓰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20원이였다. 가능하다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표적으로 영원히 남기고싶었던 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준엄한 현실은 이 결심을 여러 번 뒤흔들어놓았다. 나는 그 돈을 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뺐다 하며 동요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우리에게는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황이 수없이 생기였다.
라자구등판에서 우리 일행을 구원해준 잊지 못할 마로인과 헤여질 때에도 나는 그 로인의 은공을 어머니가 준 20원으로 갚으려고 하였다. 사람이 자기를 구원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를 하는거야 응당한 처사가 아닌가. 근 20일동안이나 이 산막에서 로인의 한해 량식을 다 파먹었는데 주머니에 돈을 두고서도 사례를 치르지 않는다면 하늘이 굽어보고 나를 뭐라고 책망하겠는가. 하지만 그 신선 같은 로인이 종시 나의 성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나라를 찾자면 이보다 더 험악한 지경에 빠질 때도 있겠는데 그때에나 쓰라, 나야 다 죽은 몸이나 다름없고 이 궁벽한 산속에서 돈이 필요치도 않은데 그것을 받아 무엇에 쓰겠는가, 나는 옹노에 걸리는 산짐승만으로도 호구지책을 할수 있다고 하면서 한사코 돈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이런 곡절을 거쳐 어머니의 사랑이 고인 20원의 돈은 한푼의 허실도 없이 내 주머니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되였다.
그 돈으로 헐벗은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해입힌다면 어머니도 기뻐하실것이다. (어머니, 이 돈을 가지고 어머니의 곁을 떠난지도 네해가 되였습니다. 그동안 딱한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도 장래를 생각해서 그럭저럭 보존해왔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이 20원을 소비해야 할것 같습니다. 세상에 살붙이가 하나도 없는 저 불상한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혀야겠습니다. 장차 이보다 더 험한 고비가 있을수 있으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마음먹고 택한 결심이니 어머니도 지지해주십시오. 아이들을 류달리 좋아하는 저의 성미를 어머니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멀리 토기점골의 차디찬 산등성이에 홀로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향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뇌이였다.
<이 20원을 가지고 무송시내에 내려가서 천을 사오시오. 그리고 그 천으로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히시오.>
이것은 련대정치위원 김산호에게 하달된 나의 명령이였다.
김산호는 몹시 딱해하면서 마지 못해 그 돈을 받아들었다. 지주집에서 머슴군노릇을 하다가 작두날에 손가락 하나를 잃어버린 오가자시절부터 우리와 함께 반체청년동맹사업을 많이 해온 호남아 김산호는 20원속에 깃들어있는 사연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사령관동지의 령이니 집행은 하겠습니다만 어쩐지 손이 떨립니다.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나서 무송시내에 내려가 한자에 10전씩 한다는 캬바진비슷한 천을 7필인가 8필인가 사왔다. 힘이 장사인 김산호였지만 그것을 지고 오느라고 혀가 나올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귀환도중 공교롭게도 토비화된 산림부대의 잔당들에게 그 천을 모조리 강탈당하였다. 토비들은 김산호를 나무에 비끄러매놓고 달아나버리였는데 힘이 황소 같은 경치위원이였지만 하마터면 얼어죽을번하였다. 우리는 소부대를 파견하여 김산호도 구원하고 산림부대가 강탈해간 천도 모조리 되찾아왔다.
7,8필의 천으로는 밀영의 아이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다. 나는 장울화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어 김산호를 다시 무송으로 내려보냈다. 김산호는 장울화의 도움으로 많은 천을 해결하였다. 우리는 그 천으로 밀영의 아이들과 <민생단> 루명을 벗어내치고 새 사단에 편입된 100여명의 유격대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히였다. 그리고나니 무거웠던 내 마음도 어느정도 가벼워졌다.
사실 20원이 무슨 큰 돈이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때 후련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다음에 우리는 마안산을 떠나갔다.
새 옷을 입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밀영의 아이들이 모두 따라가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물리치고 아이들의 그 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우리를 따라다닐수 없는 유년기의 아이들과 병든 아이들 약간명을 내놓고는 대부분이 남하하는 우리 대오와 함께 간고한 장정의 길에 들어섰다. 유격전으로 동분서주하는 혁명군이 10대의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데리고 다닌다는것은 일종의 모험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록 유격전의 력사에 없고 상식에 어긋나는 처사라 하더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불길속에서 단련시켜 그들전부를 강철 같은 인간들로 키우려고 결심하였다. 우리는 싸움할 때와 행군할 때 아이들을 보호할데 대한 분공을 따로 주었다. 우리 대원들은 실로 아이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였다. 진대나무는 안아넘기고 강물은 업어 건늬였으며 적들의 총알은 몸으로 막아주면서 그들을 자래웠다.
그때 나를 따라 백두산지구로 나왔던 아이들은 그 후 빠짐없이 혁명군에 입대하였고 가렬처절한 유격전을 통해 훌륭한 군정간부들로 성장하였다. 종군이 허락되지 않아 얼마간 대첨 창밀영에 가있던 9살내기의 리오송까지도 손장상의 전령병으로 복무하다가 후에는 장백에 나와 나의 전령병으로 되였다. 1939년 5월에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무산지구로 진공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였다. 그는 물이 깊어 강을 건느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를 안고 강을 건네주었다. 그때 그렇게 병아리처럼 품에 안아 키운 아이들이 지금은 우리 당과 국가와 군대에서 핵심적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이들을 보고 울본을 참지 못했던 그때의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조국이 해방되면 어떻게 하나 아이들에게 국가가 무료로 옷을 해입히는 제도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령락된 나라를 재건하던 1950년대 후반기에 벌써 우리는 국가가 옷을 지어 공급하는 력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안산에서의 고뇌를 체험한 조선공산주의자들만이 창조할수 있었던 하나의 기적이였다. 우리는 해마다 아이들의 옷을 해입히는데 수천수억원의 돈을 지출한다.
우리 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인사들은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그 많은 돈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지출하면 국가가 손해를 보지 않는가. 각자가 상점에서 필요한 천을 사다가 해입어도 되겠는데 왜 국가가 아이들에게 교복을 지어 입히는가. 무가로 옷을 해입히는데서 생기는 손실은 무엇으로 메꾸는가.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동단원들을 만나던 때의 사연을 말해준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할 때 그 전쟁의 포성을 들어보지 못한 자본주의나라의 정객들이 공화국정부의 시책속에 담겨져있는 심오한 력사적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재정적계산의 각도에서만 문제를 고찰하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인민을 위해 당하는 국가의 <손실>은 손실이 아니다. 인민의 복리를 위해 더 많은 돈이 지출될수록 우리 당은 더 큰 기쁨을 느끼며 후대들을 위해 더 많은 <손실>을 당할수록 우리 국가는 더 큰 만족을 느낀다.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제도가 존재하고 백두의 전통이 계승되는 한 국가가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히는 공산주의적시책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안산시절의 옛 아동단원들과 항일투사들은 온 나라의 아이들과 함께 김정일조직비서의 은정이 깃든 새 옷을 철따라 받아안군 한다.
나의 생일 70돐에 나를 만났던 리오송, 손명직은 조직비서가 선물로 지어준 새 군복을 받아안고 내앞에 나타나 마안산시절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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