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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12장 1.새 사단의 탄생 23,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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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2-05 06:2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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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2장 1. 새 사단의 탄생 (제1회) 43-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2장 1. 새 사단의 탄생 (제2회) 44-61

 

 

 

4 12 1. 사단의 탄생

 

 

 

 

미혼진을 떠날 때의 우리 일행은 20명도 안되였다. 2명의 나어린 전령병과 오백룡을 포함한 10명의 호위성원들, 김산호와 화룡오지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우리를 찾아온 <대통령감>, 이들이 내가 거느린 식솔의 전부였다. 관지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왕청련대의 1개 중대도 북만의 부대들에 합류하기 위하여 의란현방면으로 떠나갔다.

나는 비록 홀가분한 차림으로 길을 떠났으나 오래전부터 품어오던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하여 형언할수 없는 희열을 느끼였다.

(어서 무송땅으로 나가자. 마안산에 가면 2련대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그들을 기둥삼아 무적의 새 사단을 꾸리리라.)

이것이 미혼진을 떠날 때의 나의 심정이였다.

새 사단을 조직하는 문제는 우리 혁명의 주체로선을 관철해나가는데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관건적인 문제였다.

이제는 우리가 조선혁명에 주력하는것을 어느 누구도 감히 시비하거나 훼방해나설수 없게 되였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탐색해왔고 축성해왔던 조선혁명의 궤도우에는 그 어떠한 차단봉도 가로질려있지 않았다.

그 궤도를 따라 곧바로 질주해나가면 조국광복이라는 경축광장에도 가닿게 되고 인민의 나라라는 별천지에도 가닿을수 있었다. 이렇게 하자면 그 궤도우로 달리게 될 든든한 기관차와 차량들을 마련해야 했고 위력한 사령지휘처도 꾸려야 했다.

조선혁명의 선두기관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새로 조직하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이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가 창립하려는 조국광복회는 그 기관차뒤를 따라가는 렬차차량에 비길수 있었다. 미구에 타고 앉으려는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사령지휘처라고 할가. 우리는 이러한 과업수행에 지체없이 매진하여야 하였다.

그때 우리가 꾸리려고 구상했던 새 사단은 일제의 군대와 경찰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군사활동만을 벌리는 본래 의미에서의 사단만이 아니였다. 이 사단은 군사활동을 하면서도 우리가 목표로 삼은 백두산에 나가 국내도처에 당조직망도 확대하고 조국광복회나 여러가지 반일조직을 통하여 전민을 반일항전에 집결하고 령도해나가야 할 정치군대로서의 새로운 임무와 면모를 갖추어야 했다. 물론 이런 임무는 다른 사단들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모든 부대들의 앞장에서 선구자적역할을 수행해야 할 주력사단이 있어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주력사단을 조선혁명의 기관차라고 특징지었다.

조선혁명의 기관차역할을 담당수행하여야 할 강유력한 주력부대를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것인가?

나의 의논상대가 되여온 사람들은 대체로 항일련군 각 부대들에 산재해있는 조선청년들을 모조리 불러다 대집단군을 편성해가지고 백두산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군관하의 여러 부대들에서 끌끌한 유격대원들만을 특별히 따로 선발하여 주력부대를 꾸려야 한다고 력설하는 전우들도 있었다. 일리가 있는 안들이였으나 이런 의견의 제창자들은 례외없이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함께 투쟁을 벌리고있는 중국동무들의 운명이나 우리의 공동투쟁의 발전전망 같은것은 안중에 두지 않고있었다. 그들은 사고의 출발점을 주력부대부터 꾸리고 보아야 한다는데 두고있었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부대본위주의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나는 결국 북만으로 데리고 들어갔던 수백명의 원정대원들을 위하에서 활동하고있는 부대들에 나누어주고 무송땅에 나가 그곳에서 활동하고있다는 2련대사람들을 기본성원으로 하고 여기에 동만일대와 국내의 우수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주력부대를 꾸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리가 미혼진을 떠나올 때 왕덕태는 적들의 목재소를 치고 로획해왔다는 말 스무나문마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고들여 키워온 용사들을 북만사람들에게 다 떼주고 이렇게 홀몸으로 떠나가는 김사령을 보니 미안하기 그지 없소. 사람 대신 이 말들이라도 타고 가며 길동무로 삼아주시오. 훈련을 받던 말들 같은데 더러 쓸모가 있을거요.>

우리는 그 말들을 타고 남행길에 올랐다. 행군도상의 어느 휴식참에 그 말들을 세마리나 잃어버린적이 있었다. 제멋대로 새초잎을 뜯어먹게 놔두었더니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청림속으로 종적을 감추어버리였다. 나는 근처에 별다른 적정이 없다는것을 확인하고 전령병에게 공포를 한 둬방 쏘라고 지시하였다. 총소리가 울리자 잃어졌던 세필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곧장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우리는 어느 한 산중에서 이전날의 처창즈유격구인민들을 만난 기회에 그 말들을 역축으로나 쓰라고 넘겨주었다.

북만의 소자지하골짜기로부터 시작하여 소백수골이라고 부르는 우리 나라 북단의 두메에 이를 때까지 반년이상에 걸쳐 진행된 이해의 남하행군에서 제일 많은 곤난을 겪으며 애를 먹은것이 바로 미혼진에서부터 마안산까지의 로상이였다.

인원은 몇명 되지 않는데 도처에서 적들이 나타나 우리의 걸음을 지체시켰다. 우리는 미혼진을 떠난 다음날부터 매일 한두차례씩, 어떤 날은 서너번씩 전투를 치러야 하였다. 적들은 우리에게 때때로 밥을 지어 먹거나 꿰진 옷을 기워 입을만한 겨를도 주지 않았다. 밥은 굶어도 살지만 담배를 굶고는 하루도 못산다는 <대통령감>이 종일토록 대통을 입에 물어보지 못하는 날도 있었으니 적들과의 교전이 어느 정도로 빈번했는가하는것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밤이 돼야만 으슥한데를 찾아서 가까스로 밥도 지어 먹을수 있었고 젖은 신발도 말려 신을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도 별로 쉬여보지는 못하였다. 인원이 너무 적다나니 보초조직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학교때에 적어도 문전초 1명, 바닥초 2명, 망원초 2명 정도는 세워야 하는데 부상자와 간호자들을 내놓고나면 교대시켜줄 사람이 모자랐다. 그래서 나도 대원들을 대신하여 여러 번 보초를 섰다. 보초소들을 순찰하던 김산호는 어느날 밤 립초중인 나를 보고 무슨 큰 변이라도 난것처럼 소동을 피웠다. 사령관이 대원들을 너무 어루만진다는것이였다. 김산호가 그런 투정질을 할 때는 달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붙잡고 사정하였다.

제발 그러지 말고 어린 대원들을 좀 생각해보라.

낮에는 행군과 전투에 지치고 밤에는 밤대로 줄창 보초를 서야 하니 오죽 고단하겠는가. 내가 그들 대신 보초를 서준대야 몇밤이나 서주겠는가. 마안산까지만 가 닿으면 사람들이 수두룩해질터이니 보초를 대신 서볼 기회도 더는 생기지 않을것이다.

설복을 계속했대야 소용이 없다는것을 알게 된 김산호는 아무 말도 없이 보초소를 떠나가버리였다.

어서 마안산으로 가자!

마안산에 당도하면 무수한 전우들의 포옹과 따스한 안식의 보금자리속에 안겨들것이며 그때면 자연히 그동안 겪어온 간나신고도 끝장이 나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 희망찬 생각이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매일처럼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에 지친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남하행군로정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안도와 무송은 어느 골짜기나 어느 등성이 할것없이 다 낯익은 산천들이였고 일목일초가 깊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고장들이였다. 송강, 흥륭촌, 쓰우리, 소사하, 류가분방, 푸르허, 대전자, 류수하, 남전자, 두지동, 말리허, 내도산 등지는 다 나의 청춘시절과 천갈래, 만갈래의 인연을 맺고있었다. 그 낯익은 산천들을 수년만에 다시 밟아보는 나의 가슴에는 누를길 없는 격정이 갈마들었다.

남하행군길에서 대서북차 서쪽 봉우리에 올랐을 때 불현듯 내앞에는 깊은 감회를 자아내는 희한한 전경이 펼쳐졌다. 봉우리앞에 앉은 자그마한 벽촌은 유격대창건준비를 다그쳐가던 나날에 내가 머슴으로 가장하고 지하공작을 하던 잊을수 없는 마을이였다. 우리가 딛고선 봉우리도 그때 지하조직원들과 함께 발이 닳도록 다니며 모임을 가지던 곳이였다. 실로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바위돌 하나도 무심히 대할수 없는 유정한 고장이였다.

흘러간 옛일을 추억하며 련련히 뻗은 남쪽 산봉우리들을 더듬던 나의 시야에는 4년 전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했던 소사하등판이 멀리 안겨왔다. 그 등판에서 얼마간 내려가면 양지바른 산기슭에 어머니의 묘소가 있다.

이 걸음으로 옛 발자취가 남아있는 저길을 따라가서 어머니의 묘소에 절이라도 하고 무송행을 하면 어떨가 하는 한가닥의 애틋한 미련이 내 발목을 거머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떼장이 듬성듬성 어설프게 얹혀있는 어머니의 묘에 고별의 눈물을 뿌리고 토기점골을 떠난지도 어언 4년이 되여오고 있었다. 4년이면 떼장의 잔디도 어지간히 뿌리를 내렸으리라. 지금쯤은 마른잎새들사이로 고개를 내밀었을지도 모르는 애어린 싹들에 볼을 비비며 지하의 어머니와 잠간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싶은 애끊는 욕망이 불현듯 내 가슴을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일행이 봉우리를 다 내려간줄도 모르고 그냥 동성이에 서있었다.

한식을 앞둔 절기여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렬해졌는지도 모른다. 양지촌의 아버지묘소는 강제하선생네 집안사람들이 한해에 두번씩 찾아가서 제도 지내고 벌초도 한다고 하였는데 토기점골의 어머니묘소는 어떻게 되여가는지…

<장군님, 왜 산을 내리지 않습니까?>

기슭으로 내려가던 최금산이 되돌아와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명상에서 깨여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장군님, 왜 그러십니까? 소사하에 어머니묘소가 있다더니 혹시…>

최금산은 내 귀전에 두손을 오그려붙이고 귀속말로 물었다. 내장까지도 속속들이 투시해보는것 같은 어린 전령병의 놀라운 판단에 나는 자기의 심중을 드러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옳아~ 내 방금 어머니생각을 하댔지…>

<그럼 장군님, 산소에 갔다오셔야 하지 않습니까?>

<갔다오고는 싶은데 시간이 허락해야지.>

<소사하가 지척인데 시간이 바쁘다고 어머니산소도 찾아보지 않으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토기점골에 가면 동생도 있다는데…>

<설사 시간이 있다고 해도 나는 갈수 없는 몸이야. 어머니가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그것 참 이상합니다. 왜 바라시지 않을가요?>

<우리 어머니는 유언으로 내가 조선을 독립하기전에는 무덤을 파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단다. 내가 지금 토기점골의 산소로 가지 않는건 그 유언을 존중하기때문이지.>

최금산은 그런 말을 듣고도 무엇이 못마땅한지 그냥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무덤에 찾아가신다고 조선독립이 안되겠습니까. 장군님, 유언은 유언이고 한번 다녀오십시오.>

<아니다. 그럴수가 없다. 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효자가 되지 못했다. 돌아가신 다음에라도 효자구실을 하고싶은 심정이니 더 권하지 말아라. 크게 해놓은것도 없이 어머니를 어떻게 찾아간단 말이냐.>

김산호와 오백룡까지 합세해서 소사하행을 권유하였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히 토기점골의 어머니곁에 가있었다.

나는 봉우리를 내리면서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였다.

(어머니, 갈길이 너무도 총총해서 토기점골에는 들리지 못합니다. 사시장철 찬눈과 찬비에 젖고 계시는 어머니의 분묘에 흙 한줌 덮어드리지 못하고 풀 한번 깎아드리지 못한채 안도 땅을 밟고 보니 송구스러운 마음 이를데 없습니다. 그동안 아우들 건사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철주는 지난해에 전사했다는데 그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조선혁명앞에는 창창한 대로가 열려졌습니다. 이제 마안산에 나가면 큼직한 사단을 하나 꾸리자고 합니다. 그 부대를 거느리고 백두산을 타고앉아 본때있는 싸움판을 벌리겠습니다. 나라를 다시 찾지 못하면 어머니의 유언대로 묘소곁에도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기어이 조국을 되찾고 어머니를 만경대로 모셔가겠습니다.)

우리는 마안산으로의 행군을 다그쳤다. 그 마안산행에 걸고있는 우리의 기대는 상당히 컸다. 그러므로 수해속에서 말안장 같이 생긴 산발이 나타났을 때 다들 <마안산이다!>하고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맨먼저 우리를 맞아준것은 인삼포전이였다.

그 밭머리에 허술한 귀틀집 두채가 있었는데 모두 비여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여서야 깊숙한 골짜기에서 또 한채의 자그마한 귀틀집을 찾아냈다. 두세사람이 숨어사는 그 귀틀집에서 감자를 구워먹고있던 1사 정치주임 김홍범을 만났다.

<2련대는 어디 있습니까?>

<이달초에 교하쪽으로 원정을 가고 없습니다.>

김홍범의 천연스러운 대답이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이 느껴졌다. 2련대가 없다는것은 남호두에서부터 벼르고 또 별러왔던 새로운 주력부대의 조직이 불가능하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믿었던 나무가 거꾸러진 셈이였다.

2련대는 독립련대로 활동할 때부터 싸움을 잘하는 <고려홍군>이라고 소문난 순수한 조선인부대들중의 하나였다. 그 련대는 동만의 연길, 왕청, 화룡 등 각 현 유격구들에서 1개 중대씩 선발해다 조직한 부대였다. 대부분의 성원들은 나와 연고가 깊은 사람들이였다. 련대장인 윤창범이나 련대정치위원인 김락천은 두말할것도 없고 권영벽, 김주현, 오중흡, 김평등 련대의 핵심성원들도 우리가 직접 양성해낸 사람들이였다.

내가 마감으로 2련대전투원들을 만나본것은 1935년 5월, 그들이 나의 부름을 받고 왕청현 당수하자에 왔을 때였다. 10여일 그들과 같이 지내며 학습도 시키고 훈련도 주고 싸움도 시켜보았는데 그들은 내가 데리고있던 부대사람들 못지 않게 발전이 빨랐다. 바로 그들이 처창즈유격구를 최후까지 잘 방비고수하여 <불굴의 처창즈>라는 실화전설을 창조해낸 영웅들이였다.

우리가 제2차 북만원정을 떠나고 처창즈유격구가 해산된 다음 2련대는 남만으로 진출했다가 이해초에 안도현 내도산을 거쳐 무송현 마안산으로 이동하였다. 련대는 마안산에 지휘부와 후방기지를 두고 겨울동안 무송지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되여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남호두에서 알게 된 2련대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의 전부였다. 내가 마안산으로 나올 때 북만원정대전원을 남들에게 다 떼준것은 2련대를 접수하면 그것을 모체로 하여 새 사단을 조직할수 있을것이라는 타산을 하였기때문이였다.

<2련대에 보낸 우리의 통신은 받지 못했소?>

나는 미혼진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이곳에 통신원을 파견하여 2련대가 자리를 뜨지 말고 나를 기다리고 있으라는 지시를 보냈었다.

<받지 못했습니다. 2련대가 원정을 떠난 다음 여기에는 누구도 왔던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통신원이 중도에서 무슨 불상사를 당한것이 틀림없었다. 설사 그가 무사히 와닿았다 해도 없는 2련대를 만나낼리도 없었을것이다.

<2려나 교하쪽으로 원정간 목적과 리유는 무엇이요?>

<그건 저도…>

<언제쯤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었소?>

<없었습니다.>

<누가 데리고 갔소?>

<련대장 장전술동무와 련대정치위원 조아범동무입니다.>

<다 원정가고 없으면 마안산에 남은건 동무들뿐이요? 동무들은 여기 남아서 뭘하고 있소?>

내가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물었을때 김홍범의 입에서는 더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저 삼포밀영에 100여명이나 되는 <민생단>이 있습니다. 그자들을 감시하느라고 제가 남아있지요.>

<무슨 <민생단>이 그렇게 많다는거요? 삼포곁에 있는 귀틀집은 텅 비여있던데.>

<<민생단>혐의자들은 지금 림강 마의하쪽으로 식량구하러 가고 없습니다.>

<식량공작을 나갈수 있는 정도라면 무슨 <민생단>이겠소?>

<그것들을 굶겨죽일수야 없지 않습니까.>

<<민생단>이 확실하다는 무슨 증거라도 있소?>

<증빙문건이 다 붙어있는자들입니다. 자백서, 진술서, 심문조서…>

김홍범은 컴컴한 방구석에서 큼직한 문서보따리를 끌어냈다.

<이게 다 그런 문서들입니다.>

그 <민생단>문서보따리가 2련대사람들을 만나려고 만난을 무릅쓰면서 불원천리하고 달려온 나에게 안겨준 마안산의 첫 대접이였다. 문서보따리가 얼마나 많았던지 방 한칸에 가득 차 있었다.

떠들썩한 환성과 격정적인 포옹대신에 곰팡이내가 물씬 풍기는 범죄기록뭉테기를 받아안게 된 그 순간 나는 엄청난 기만과 우롱 속에 빠져든것 같아 몸이 떨리였다.

<민생단>이라는 말마디만 들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지금이 어느때라고 아직도 유격구에서 살판치던 <민생단>마귀가 살아 돌아가며 숱한 사람들을 괴롭히고있단 말인가? 그리고 고물단지 같은 이 문서보따리는 어떻게 되여 여기까지 따라왔는가?

다홍왜와 요영구에서 거듭되는 론쟁이 있었던지도 1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다. 국제당에서 내린 판결이 우리에게 전달된것은 달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판결내용이 여기까지 미처 전달되지 못했을수 있다. 하지만 <민생단>이 허구라는 절규가 동만땅을 진감한지도 오랜 지금에 와서까지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감행되고 광대놀음이 지속되고있다는것은 실로 상상밖이였다.

김락천 같은 사람마저 다 쓰러뜨리고도 무엇이 또 모자라서 100여명이나 되는 생때 같은 사람들을 잡으려 드는가?

나는 김산호에게 림강 마의하방면에 지체없이 통신원을 파견하여 그들을 전부 데려오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민생단>문서보따리를 풀어 헤쳐놓고 한장 한장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밤잠도 자지 않고 문서장들을 뒤져보았다. 다음날도 계속 뒤지고 또 뒤졌다. 그 문서장들을 뒤져갈수록 나는 차츰 더 깊은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 종이장들에는 누구도 감히 부인할수 없는 어마어마한 죄상들이 너무나도 생동하게 기록되여 있었다.

나는 문서장들을 탁 덮어버렸다. 그것을 뒤지는것은 백해무익한짓이였다. 그 종이장들을 믿어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잃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었다. 어떤 잉크나 다 받아들이지는 백지장의 글을 믿을수는 없었다.

림강현 마의하쪽에 가있던 <민생단>혐의자들은 우리의 련락을 받자 험준한 룡강산줄기를 넘어 수백리산길을 단 이틀사이에 와닿았다.

<민생단>혐의자들이 삼포밀영귀틀집에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곧 김홍범을 데리고 그들을 찾아갔다.

성에가 하얗게 낀 귀틀집문을 열자 람루하기 이를데없는 사람들이 안에 꽉 들어차있었다. 그것은 정녕 격정도 환성도 눈물도 없는 야릇한 상봉이였다. 나에게 경례를 붙이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보고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쥐죽은듯한 정적과 침묵만이 무겁게 방안을 감돌고 있었다. 얼마나 짓눌렸으면 쳐다볼 권리, 인사할 자격마저 잃은것인가. 설사 아무리 중한 죄를 진 사람들이라 한들 저다지도 기가 꺽이고 저다지도 험상스러울수 있는가?

<그동안 동무들의 고생이 막심했겠습니다.>

어쩐지 말이 목에 걸려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동무들을 대하고보니 그동안 모두 안녕했는가 하는 말조차 나오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무들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나는 동무들을 만나고싶어 멀리 북만의 경박호반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그 인사말에 대한 반향은 어느 구석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숨소리, 기침소리 하나 없는 침묵뿐이였다. 항일전쟁을 진행해온지 만 4년세월이 되여오지만 대원들이 그런 식으로 나를 맞아준 례는 한번도 없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내가 이리로 온것은 2련대동무들을 만나서 새 부대를 꾸려가지고 백두산에 데리고 나가 싸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정작 여기 와보니 쓸모있는 사람들은 다 교하쪽에 원정을 가버리고 남아있는것은 몹쓸 사람들뿐이라고 했다.

나는 동무들에게 붙어있는 <민생단>혐의문서장들을 뒤져보았다. 그걸 봐서는 동무들가운데 어느 한사람도 <민생단>이 아닌 사람이 없다. 나는 문서장만 보고, 동무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동무들이 제 입으로 하는 말을 들어봐야 정확한 견해를 세울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동무들이 스스로 속심을 툭 털어놓고 얘기해보라. 두려워하지 말고 눈치를 보지도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라.

그렇게 호소하였지만 두텁게 얼어붙어있는 침묵의 얼음장은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았다.

나는 맨 앞자리에 있는 한 청년에게 동무부터 대답해보라, 동무가 <민생단>에 들었다는 것이 사실인가고 따져물었다.

그는 머리를 수그린채 주밋거리다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사실입니다.>

나는 그런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눈물을 쏟고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민생단>이 아니라고 절규하기를 기대하였다. 그 청년의 대답은 실망만 자아냈다.

나는 키가 큰 다른 청년에게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그럼 리두수동무가 말해보라. 동무가 <민생단>에 들었다는것이 사실인가?>

강원도 춘천출신의 그 젊은 소대장은 일제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있는 사람이였다. 리두수의 오른쪽 허벅다리에는 푸릿푸릿한 상처자국이 있었다. 언제인가 내가 어느 전투에서 부상당한 자리인가고 물었더니 개한테 물어뜯기운 자리라고 하였다.

그가 여라문살 되던 해였다고 한다. 노상 죽으로 끼니를 에우고있더 보리고개무렵의 어느날 두수는 한숟갈의 소금조차 없어서 죽가마에 소금을 넣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푸나무 석단을 해지고 장마당으로 내려갔다. 나무 석단을 파니 소금 한되가 되였다. 그는 소금자루를 지게다리꼭대기에 데룽데룽 매달고 의기양양해서 자기 마을로 향했다. 어느 일본인의 집앞을 지날 때 불시에 사나운 세빠드가 그에게 달려들어 허벅다리를 물어메쳤다. 그를 물라고 개를 부추긴 일본인소년은 집안으로 숨어버리고 그 집 출입무에는 안으로 빗장이 질려졌다. 주인집처사에 격분한 목격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진 두수를 업고 경찰서에 몰려가 항의를 하고 고소를 하였다. 살점을 뭉청 뜯기운 허벅다리의 상처는 험상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두수는 난생 처음으로 병원혜택을 입어보면서 거기서 내내 흰쌀밥생활을 하였다. 죽에 신물이 난 더꺼머리소년은 흰쌀밥을 먹는것이 너무 좋아서 상처가 빨리 아물가봐 조마조마해 하였다. 그는 입원생활이 자기자신과 자기 가정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치료비는 개주인이 보상하는줄로만 알고있었다.

얼마 후 병원에서는 돈을 물지 않으면 그 이상 입원치료를 해줄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치료비는 자그마치 20원이나 되였다. 한달에 20전씩 되는 월사금도 물지 못하여 소학교 1학년에서 석달밖에 공부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 가난뱅이소년의 집에서 20원이나 되는 뭉치돈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리두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들은 번갈아 개주인과 정찰서와 병원에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사정도 하고 항의도 하고 제소도 하였다. 그러나 어디서도 피해자의 하소연과 항의와 제소를 받아주지 않았다. 개한테 물린 책임은 물린 사람에게 있다는것이다. 그네들은 모두가 조선사람의 편을 들어줄수 없는 일본사람들이였다.

결국 리두수는 20원의 빚을 내여 병원에 바쳤다.

그 빚이 새끼를 치며 덧붙고 또 덧붙어서 이태후에는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집을 팔아도 다 갚을수 없으리만치 엄청나게 불어났다.

빛단련 때문에 더는 춘천땅에서 살수 없게 된 리두수네 일가는 정든 고향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빚쟁이들은 야밤도주하는 일가족을 20리나 뒤쫓아가서 할머니의 보퉁이속에서 최후의 가산인 명주 한필마저 다 뺏아냈다.

한때는 사랑채와 행랑채까지 달린 팔각기와집에 몇정보의 농토까지 갖추어놓고 뭇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 속에 살아왔던 리왕조가문의 후예들은 왕조도 나라도 집도 다 빼앗기고 최후의 천필마저 다 빼앗긴채 순전한 알거지가 되여 류랑의 길에 올랐다.

이국살이를 떠나가는 어린 두수의 가슴에 망국의 설음과 리향의 슬픔을 심어준것은 원산발 청진행 화륜선 식당에서 밥을 날라다주던 접대원들의 구슬픈 목소리였다.

이국살이를 떠나가는 여러분네들의 설음과 슬픔은 구천에 닿고 류랑객들이 흘려온 피눈물은 동해물만 못하지 않지만 한숨과 눈물로는 살길이 열리지 않으니 슬픔을 참아가며 조국의 쌀과 조국의 물로 지은 하직밥들을 잡수시오, 그렇게 여쭈는 접대원의 동정어린 몇마디 말이 소년 리두수의 목을 매게 하였다.

왜놈들 때문에 나라도 뺏기고 집도 고향도 다 잃고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온 그의 뇌리속에는 왜놈들과는 절대로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수 없다는 서리찬 생각이 꽉 들어찼다. 그는 장차 자기가 어른이 되게 되면 조선의 하늘아래에서는 왜놈은 물론, 왜놈들의 개 한마리, 고양이 한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리두수는 어른이 채 되기전에 총을 잡고 유격대오에 들어섰다.

이런 사람이 <민생단>에 들어갈리는 만무한것이다.

그런데 리두수 역시 전사람과 꼭 같은 대답을 하였다.

<네, <민생단>에 든것이 사실입니다.>

소왕청 리수구골의 <민생단>감옥에 찾아갔을 때 장포리가 나에게 했던 첫 대답과 같은 소리, 같은 태도였다.

나는 솟구쳐오르는 분기를 억누르며 <민생단>에 들었다면 어떻게 들었는지 만사람앞에서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는 떠듬거리며 자백서와 진술서에 기록되여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였다.

<민생단>에 들게 된 과정 이야기를 하는 리두수의 말은 얼마나 사개가 잘 맞아떨어졌던지 의심할 여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민생단>혐의자들은 모두가 일치하게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나는 인내성을 가지고 재차 리두수에게 물어보았다.

<동무, 동무는 일본사람이 기르는 개 때문에 빚도 지고 집도 잃고 고향도 잃었다. 일본사람네 개가 동무의 살점만 물어뜯은것이 아니라 열사람도 넘는 동무네 일가족의 생활도 다 파헤치고 짓뭉개놓았다. 동무는 일본개 때문에 개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였다. 그런 동무가 이제 와서는 스스로 원쑤놈들의 품에 안겨 자기 동포들을 잡아먹고 자기 동지들을 물어먹는 미친 개노릇을 한다는것인데 과연 그런가? 동무가 적들의 뜨물 한그릇도 얻어먹지 못하면서 적들의 개노릇을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리두수는 눈물만 떨어뜨리며 한마디의 대꾸도 못하였다. 입술을 깨문채 오열로 전신을 떨뿐이였다. 사람을 질식시킬것 같은 오랜 침묵이 계속되였다. 나는 저주스러운 그 귀틀집에서 물러나왔다. 신선한 대기는 차츰 답답하던 가슴도 열어주고 울기도 식혀주었다. 흐리터분하던 머리속이 한결 맑아졌다.

<민생단>혐의자들과의 담화에서 나는 하나의 리해할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형장에 끌려간 우리 투사들은 대부분 중세기의 종교형벌을 방불케 하는 악형을 당하면서도 <모른다!>는 한마디의 말로 자기가 한 일도 안했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결단은 사형선고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공산주의자들앞에서는 안한 일도 했다고 대답하며 아닌것도 그렇다고 진술하고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것이다.

나는 숲속을 거닐며 <민생단>혐의자들이 자살적인 대답을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저 사람들이 모두 <민생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것은 하늘이 땅으로 될수 없고 땅이 하늘로 될수 없는것과 같은 진리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동무들은 <민생단>에 들었다고 말하며 <민생단>책동을 하였다고 저절로 죄를 뒤집어 쓰겠는가?

가야허마을의 박창길소년도, 마촌의 장포리도 이미 자신들이 토설한 허위진술을 사실이라고 우겨댔다. 이런 괴이한 현상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것인가?

<민생단>혐의자라는 올가미에 흘쳐든 첫 순간에는 그들이 모두다 자신이 <민생단>에 든 일이 없었다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 진정, 그 진심의 토로가 그들에게는 더 큰 화를 가져왔다. 진정은 가식으로 인정되고 진심은 기만으로 인정되고 솔직성은 교활성으로 인정되였다. 진정의 고백이 반복될수록 가상적인 죄상은 더욱더 엄중한것으로 확대되고 고문은 정비례로 증대되였다.

야수적인 고문과 번뇌가 극한점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어떠한 이질적변화가 생기겠는가?

몇해동안 한지붕밑에서 동고동락을 해온 혁명동지들한테서 불신을 당하며 학대를 당할바에야 구태여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살려면 총을 집어던지고 산에서 내려가 귀순문서장에 도장을 찍거나 적의 앞잡이가 되여야 하는데 명색이 공산주의자인 우리가 그런 배신이야 어떻게 하겠는가, 처분에 맡기는것이 상책이다 하는식 자포자기상태에 빠질수 있다.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한테서 받는 억울한 오해와 불신, 이것이야말로 100여명의 빨찌산장정들을 극단적인 절망과 자포자기에로 몰아넣은 근원이였다.

돈이나 리윤추구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리념의 공통성에 의해서 상의리적으로 결합된 혁명가들의 집단에서 믿음은 그 집단의 통일단결과 공고한 발전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생명으로 된다고 말할수 있다. 집단의 매개 성원들은 믿음의 힘에 의하여 동지를 사랑하게 되며 믿음의 힘에 의하여 상급이 하급을 아끼고 하급이 상급을 존대하는 공산주의적의리가 집단을 지배하게 된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2-05 06:28:4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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