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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 29,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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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8 22: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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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제3회) 29-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제4회) 30-61

 

 

 

4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

 

 

 

 

적군속에 있는 한사람의 량심적인 벗은 수천수만의 벗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일무장투쟁 초시기부터 <적군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자!>라는 구호를 내들었다. 적군속에 포대를 쌓는다는것은 적군속에 우리의 진지를 쌓는다는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적군와해공작을 목적으로 적군속에 우리의 혁명력량을 조성한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적군와해공작을 대적정치사업이라는 말로 통용하였다. 총탄으로 적을 잡는것과 대적정치사업으로 적을 와해시키는 이 량자는 항일투쟁을 위한 두가지 전략적로선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싸움, 어느 편을 막론하고 적과의 투쟁은 항상 이 두가지 선상에서 진행되여왔다. 하나는 무력에 의한 싸움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과 사상선전에 의한 싸움이다.

일제의 소위 치안숙정에서도 치표공작, 사상공작, 치본공작 등 세가지 방침을 내놓았는데 이것도 총체적으로 보면 무력을 전문으로 하는 이른바 <소비공작>과 선전선무를 전문으로하는 <사상공작>의 두 측면인것이다. 적들도 우리의 혁명대오를 정신적으로 와해시키려고 발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적정치사업을 위해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리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에 잘 호응해나서지 않았다.

목숨이 아깝다고 적군와해공작방침을 반대하여나선 졸장부는 물론 한사람도 없었다. 일부 사람들이 이 방침에 혼연히 호응해나서지 못한 주되는 리유는 그들이 그것을 계급적선에서의 탈퇴로 본데 있었다.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군대요, 상대는 부르죠아군대이니 적아는 수화상극이다, 물과 불이 서로 의좋게 이웃을 할수 없다는것은 삼척동자까지도 다 알수 있는 명백한 리치인데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린다는게 될 말인가고 하면서 머리를 내저었다.

맑스주의고전들을 한배낭씩 지고 다니는 축들은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린다는 것은 일종의 계급협조와 비슷한 우경적인 탈선이라고 비평하였다. 그것은 불상용적모순관계에 있는 계급적원쑤들과의 제휴를 꾀한다는것이겠는데 고전에는 적군와해에 대한 명제가 없다고 우기였다. 지금 청년들이 들으면 코 막고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겠지만 고전의 명제가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이런 일면적인 립장이 상당한 정도로 득세하였다.

계급투쟁이 심했고 계급적원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있는 때여서 누가 그런 립장에 선다고 해도 그것을 무슨 큰 탈선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적원쑤에 대한 증오의 감정으로부터 혁명을 시작하였고 만난을 극복하였으며 따라서 <계급>이라는 이 명사앞에서는 자그마한 양보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맑스주의창시자들의 게급투쟁론에 대한 교조적인 해석의 후과로 하여 적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사랑하는 감정보다도 증오하는 감정이, 포섭하고 용서하는 도량보다도 징벌하고 규탄하는 비타협성이 더 강해졌다. 지어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은 무조건적인 비타협성을 혁명가의 특질로 보면서 사상정신적으로 미숙한 청년들을 협애한 인간으로, 문자그대로 인정사정 없는 <홍호자>로 만들어놓았다. 사실상 맑스주의혁명은 이런 페단으로 하여 진통을 겪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영상에 검은 그을음이 끼게 하였다. 계급옹호와 계급적비타협성의 구호밑에서 계급의 리익 일면만은 고창해온 좌경분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혁명에 등을 돌려대고 적의 진지로 가는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문제는 선행고전에 적군와해에 대한 명제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혁명의 근본리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로선과 방침을 세우려고 하지 않은데 있었다.

자기 인민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우리는 맑스주의고전을 연구하는데서도 먼저 비타협성을 찾으려고 노력한것이 아니라 사랑과 단결에 대한 사상부터 얻어내려고 애썼다.

우리가 적군속에 능히 혁명력량을 조성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로동자, 농민의 자제들인 절대다수의 병사들과 중하층장교들은 물론, 일부 상층장교들속에도 우리 혁명을 동조하고 착취사회의 수난자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량심적인 인간들이 있을수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혁명의 편에 돌려세우고 우군으로 전취한다면 적들은 그만큼 와해되고 우리의 혁명력량은 수배로 장성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총포탄을 쏘지 않고 계급적원쑤들을 섬멸하는 대공격전으로 되며 공산주의자들이야 말로 인류의 행복과 화목을 념원하는 고상한 리념의 소유자들이라는것을 인식시키는 일대 선전으로 된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리상과 뜻을 가지고 <적군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자!>라는 구호를 대적정치사업의 기본구호로 제기하였다.

적군속에 혁명의 포대를 쌓을수 있다고 본 우리의 사상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주체적인 립장에 그 기초를 두고있다.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정의로운것을 옹호하고 지향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볼 때 착하고 고상한것을 추구하며 악하고 더러운것을 경멸한다. 이 고유한 본성이 바로 인간성이다.

극소수의 반동적인 상층을 제외한 다수의 중하층인간들과 상층의 일부 인물들은 우리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좋은 영향을 주기만 하면 혁명의 지지자, 동조자, 방조자로 만들수도 있는것이다. 아무리 지주, 자본가계급에 복무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성이 있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인간적인 향기가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쟁취할수 있는 기초로 되는것이다.

극소수의 반동들과 악한들을 제외한 민족의 모든 성원들을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묶어세울수 있다고 보는 우리의 정책은 바로 이런 립장으로부터 출발하는것이다.

해방후 우리 나라 사람들은 김구를 테로의 왕초라고 하면서 리승만과 동렬에 놓인 인간으로 반동시하였다. 그가 일생동안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적대시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들에 대한 증오가 오죽했으면 김구, 리승만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만화까지 나돌았겠는가. 강선제강소로동자들은 자기네 공장굴뚝에 <김구를 타도하라!>는 구호까지 써갈기였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 인민들중에는 김구를 개조할수 있다고 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김구자신은 4월남북련석회의때에 우리의 영향을 받고 반공분자로부터 련공, 친공 인사로 개조되였다. 그가 이런 개조과정을 거칠수 있은것은 우리의 영향도 영향이지만 공화국북반부의 현실을 목격하는 과정에 그가 일생을 바친 애국애족의 정신이 고도로 발동되고 그의 인간성이 최대한으로 계발되였기때문이다.

애국애족과 인간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우리는 반공일선에서 우리를 겨누던 최덕신과도 손을 잡지 않았을것이며 오늘날의 남조선집권자들과도 대화의 마당을 마련하지 않았을것이다. 우리가 남조선의 통치자들과 함께 대화의 방법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협상탁에 마주앉는것은 비록 제한성은 있지만 그들이 지나고있는 민족적량심과 인간성에 기대를 걸고있기때문이며 그 량자가 어느때든지 민족화합의 대화원에서 꽃으로 만발하리라는것을 믿기때문이다.

우리는 적군전취의 대상과 방법문제를 놓고도 적지 않은 론쟁을 하였다. 일본군대를 상대로 하는 대적정치사업에 대한 론쟁은 더구나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동무들은 위만군의 중하층은 전취할수 있는 대상으로 보면서도 어릴 때부터 <야마도 다마시>로 <천황>을 맹신하고 강압적인 규률에 길들여진 일본군인은 도저히 전취할수 없는 존재로, 원쑤로 보았다. 일본륙군사관학교 출신의 독립군두령에게서도 반공사상을 뽑아내기 어려운데 하물며 일본군장병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도리질을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 이 견해를 쉽게 부정해버렸다.

어느해인가 간도의 농촌부락들에 열병이 돌아서 일본군대들이 앓는 사람들을 집에 걷어넣고 불을 질러 태워죽이는 살인만행을 감행한적이 있다. 동장영이 앓고있는 부락에도 <토벌대>가 달려들었다.

한 일본장교가 방안에 누워있는 동장영을 보자 대뜸 자기부하에게 문을 걸고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다. 일본군인은 상관의 말대로 불을 달려고 서둘렀다. 최후의 순간이 닥쳐왔다고 생각한 동장영은 죽을바에는 마지막으로 선전이나 하다가 값있게 죽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한바탕 선전을 하였다. 일본에서 대학까지 마친 그는 일본말을 아주 류창하게 하였다.

너도 로동자, 농민의 자식이겠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이렇게 마구 죽이는가? 죽여서 얻을것이 무엇이냐. 인사불성도 분수가 있지 앓는 사람을 이렇게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는가.

량심의 문을 두드리는 격렬한 절규에 마음이 움직여진 일본군인은 뒤문짝을 차던지고 상관이 눈치채지 못하게 동장영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에야 불을 달았다.

동장영은 밭고랑에 숨어있다가 가까스로 사지에서 구원되였다.

이 일화는 일본군을 전취대상으로 할수 없다고 고집하던 사람들의 입을 봉해버리게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신심을 가지고 견결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총명하고 지략에 능한 동무들을 선발하여 대담하게 적군속에 파견하였다.

적군속에 홀로 있는 고립무원한 상태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대적정치사업을 훌륭히 수행한 유명무명의 많은 공작원들에 의하여 위만군과 자위단들 속에서는 매일과 같이 병변이 일어났다.

우리는 유격대원이라면 누구나 다 함화, 출판물보급, 여론 류포, 가요보급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을 가지고 대적정치사업에 적극 참가할수 있도록 준비시키였다.

적군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하고 개별적으로도 하고 집단적으로도 하는 우리의 열렬하고 감화력 있는 선전공세로 하여 많은 위만군부대들이 유격대와 싸우기를 그만두고 충실한 <무기수송대>로 되였다.

위만군들은 편지 한장만 내도 무기, 탄약, 식량을 실어다 주었고 전투마당에서 <요창 부요밍(총을 요구하지 목숨은 필요없다.)>하고 입대포만 놓아도 총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적<토벌대>들은 우리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지만 우리는 적군을 포로하면 위만군이건 일본군이건 차별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잘 대우하고 친절히 교양하여 려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니 심지어 우리 부대에 총을 메고 7차례나 포로되여온 위만군병사까지 있었다. 우리가 그 병사에게 롱조로 이 친구 또 왔구만 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혁명군에 총 바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군 하였다.

우리는 동만에서 활동할 때 왕청현 라자구 문영장부대의 중대장들을 비롯해서 적의 중대장급이상의 장교들도 무수히 전취하였다.

1934년 남하마탕의 마굴령부대에 들어가 와해공작을 훌륭히 수행한 <첸렌장>도 원래는 위만군 중대장이였는데 우리가 영향을 주어 공산주의자로 개조하였다.

일본군병사들속에도 우리를 잘 도와준 잊을수 없는 벗들이 있다.

소왕청방어전투때 전지수색을 하던 오백룡이 일제침략군 운전수의 시체에서 유격대에 보내는 쪽지편지 한장을 가져온 일이 있었다. 그 편지의 임자는 로동계급출신의 일본침략군 운전수였으며 일본공산당원이였다. 그는 탄알 10만발을 자동차에 싣고 우리를 찾아오다가 유격구 가까운 산기슭에서 발각되여 유서를 호주머니에 써넣고 자결하였다.

그가 지닌 고결한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혁명정신은 만사람을 감동시키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일본에 남겨두고 망망한 창해와 험악한 산악을 넘고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다가 이국의 산기슭에 조용히 묻힌 일본공산당원의 형상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후덥게 해주고있다. 소왕청사람들은 자기네 고장 소학교에 이 국제주의전사의 이름을 달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교명이 그대로 전해지고있는지 알수 없다.

액목땅에서 위만군련대장을 쟁취한 경험에 토대하여 우리는 후날 안도?돈화 현경에 있는 대포시하라는곳에서도 적군와해사업을 령활하게 하였다.

대포시하에는 유격대<토벌>에서 악명을 떨친 1개 대대의 위만군이 상주하고있었다. 이 대대는 전투경험도 풍부하였고 지휘체계와 대렬관리에서도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악질적인 부대였다. 공작원들을 파견하려고 하여도 우선 침투할수 없었다. 우리는 허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 부대에 대한 립체적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 잡아쥔것이 바로 이 대대의 대대장이 봉급이 낮아서 상급에 불만을 품고있는 사람이라는것과 그가 돈에 궁한 나머지 부관을 시켜 아편장사를 한다는 사실이였다. 이것은 우리가 그 부대에 대한 와해공작에 착수할수 있는 유력한 단서였다.

어느날 우리 공작조성원들은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아편을 잔뜩 사가지고 돌아오는 부관을 체포하였다. 부관은 혁명군이 화페와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통용되는 대대장의 아편을 빼앗을것 같아서 몹시 걱정하였다. 그러나 우리 동무들은 아편따위는 다치지도 않고 부관을 잘 교양하여 대대로 돌려보냈다. 여기에 감동된 부관은 부대에 돌아가 자기 대대장에게 일본사람들의 선전을 듣고 공산군을 <비적>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만나고 보니 다 점잖고 문명한 사람들이더라고 루루이 보고하였다. 대대장도 그 말을 듣고는 대단히 감개무량해 하였다.

그후 우리는 부관을 통하여 그에게 나의 이름자가 찍혀있는 명함장과 편지를 보냈다. …유격대는 당신들과의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비록 혁명군을 쫓아다니면서 나쁜짓을 많이 해왔지만 그것을 계산할 의사가 없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민을 해치지 말고 인민혁명군을 해치지 말라!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것이다, 당신들이 만일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고 혁명군과 우호적으로 지낼 의향이 있다면 <철군>과 같은 출판물이나 종종 보내달라. …

이 편지에 대한 반응으로 부관이 우리에게 <철군>잡지를 가지고 와서 출판물을 넘겨줄 비밀장소를 협의하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그들은 어떤 고목의 구새통속에 대내와 대외에서 발간되는 여러가지 신문, 잡지들과 중요한 정보자료들을 넣어두는 방법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보내주었다. 우리가 돈을 주면서 부대생활에 팰요한 필수품과 군수물자들을 사오라고 하면 그 부탁도 어김없이 들어주었다.

우리의 호의에 감심한 위만군대대장은 유격대부상병치료까지도 자진하여 해주었다. 병영안에 우리 부상병들을 숨겨두고 대접을 잘해가면서 총상자리가 아물 때까지 깨끗이 치료해주었다.

인민혁명군을 진정한 인민의 군대라고 본 그는 우리와의 우호관계가 깊어지게 되자 <산중에 있는 전우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동적인 편지까지 써서 나에게 보내왔다.

진실을 따르고 사랑을 례찬하는것은 인간본연의 량심이다.

우리는 늘 동무들에게 적들은 기만과 허위, 위협과 공갈로써 우리 대오를 와해시키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진실과 사랑을 가지고 적군의 심장을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의 이 말을 소중히 생각하고 대적정치사업을 성실하게 수행한 공작원들중에는 임은하라는 나어린 처녀유격대원도 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연극 <해바라기>는 바로 그의 실재한 투쟁을 형상한 예술작품이다.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나것은 1936년 봄 미혼진밀영에서 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새 사단 편성과 조국광복회창건 준비사업을 위한 일련의 주요한 문제들이 토의되고 있던무렵에 그 처녀도 우리를 따라 장차 백두산지구로 나갈 생각에 몹시 들떠있었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예쁘고 귀여운 처녀였다. 그의 나이는 그때 20살도 못되였고 소녀처럼 체구도 자그마했다.

 <장군님, 이번엔 꼭 저를 데려가시지요?>

처녀는 나를 만날적마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자기를 넣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우리는 병약한 위증민을 위하여 처녀를 그의 곁에 떼두었다.

우리를 따라 조국으로 가게 되리라던 기대가 무너지자 처녀는 삽시에 눈물이 가랑가랑해졌다.

나는 그를 위로하였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오. 우리가 백두산쪽에 나가 자리를 잡으면 위증민동지를 데려다 치료를 시키겠소. 그러면 동무도 같이 오게 될거요.>

 <장군님, 알겠습니다. 저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녀는 이렇게 우리를 안심시키면서도 맥이 풀린듯 하염없이 남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후에 우리는 미혼진을 떠나 소푸르허부근 마을에서 속영하게 되였는데 집이 네댓채밖에 안되는 이 외진 산간마을에서 뜻하지 않은 불상사를 당하였다. 새벽에 대포시하에 있던 적들이 마을에 달려들었던것이다.

우리는 신속히 유리한 지대를 차지하고 달려드는 적을 화력으로 타격하였으나 골짜기 건너편에서 따로 숙영하던 동무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는 집에는 위증민과 모스크바중산대학 출신으로서 우리에게 새로 파견되여온 리주임 그리고 조아범의 안해와 임은하가 있었다.

적을 격퇴하고 전지를 수색하던 우리는 집천정에서 위증민을 찾아냈다. 총상을 입은 그의 허벅다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있었다.

이날따라 위증민은 병세가 악화되여 운신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임은하가 용케 그를 천정에 숨겨놓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적의 화력을 피해 산으로 내달리다가 적탄에 다리를 맞고 체포되였다.

그날 조아범의 안해와 리주임은 희생되였다.

적들은 임은하를 대포시하부근에 주둔해있는 위만군중대로 데리고 가서 빨래도 시키고 식모일도 시키였다. 일본지도관놈이 처음엔 모진 고문을 들이대며 비밀을 짜내려고 했으나 그것이 소용없게 되자 전술을 바꾸어 잡일을 시키면서 속을 뽑아보려고 하였다.

임은하는 적진속에 홀로 있는 조건에서도 어떻게 하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 궁리를 거듭하던 끝에 위만군의 옹근 중대를 의거시킬 담대한 계획을 가지게 되였다.

임은하는 우선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로써 고달픈 병사생활에 이지러진 사나이들의 가슴을 움직여보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위만군병사들과 접촉할 기회를 조성하기 위해 빨래줄을 일부러 병영마당에 치고 무시로 빨래를 쏜질하며 향수를 자아내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

원래 그가 시중을 들어주는 중대의 병사들은 과거 구국군에 있다가 우두머리의 변절로 위만군에 편입된 사람들이였는데 반일기분이 강했다.

아름답고 류창한 그의 노래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교들도 그의 애수에 찬 노래를 들을 때면 먼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군 하였다.

포로로 잡힌 유격대처녀가 명창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어떤 병사들은 일부러 찾아와서 노래를 청하기까지 했다.

 <유격대아가씨, 노래 한번 불러주!>

그러면 임은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까짓 돈도 들지 않는 노래 100번인들 못부르겠어요.>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가며 처량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 구슬픈 노래속에는 일본사람들의 학대밑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중국인들의 원한이 사무쳐있었다.

옛날엔 만리장성의 고역이 중국인의 무덤을 쌓았고 오늘엔 왜놈들의 총칼이 우리의 무덤을 쌓는다. 일어서라, 나가자, 중국인의 원한을 씻으려…

이런 노래를 부르느라면 어느덧 처녀도 울게 되고 억대우 같은 병사들도 눈물을 짓게 되는것이다.

임은하는 노래만 불러준것이 아니라 병사들을 도와 바느질도 해주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남겼다가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 임은하와 병사들사이에는 따뜻한 정이 흐르게 되였다. 그 병사들중에는 그를 친누나처럼 극진하게 따르는 애숭이사병들이 몇명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류랑걸식하다가 밥술이나 얻어먹으려고 군대에 들어온 청년들이 였다.

임은하는 이 외롭고 불쌍한 청년들을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인정에 주렸던 어린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는 어느덧 친누나나 어머니와 같은 귀중한 존재로 되였다.

하루는 어린 병사 3명이 그를 찾아와서 결의형제를 뭇자고 하였다.

 <은하는 우리의 맏누님이요. 누나를 위해서라면 이 동생들은 목숨도 바치겠소.>

청년들의 맹세는 엄숙하고 절절하였다.

임은하는 물론 그들의 제의를 승낙했을뿐아니라 <이 누나도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겠어요!>라고 하면서 뜨겁게 청년들의 손을 잡았다.

임은하는 그들을 핵심으로 결의형제대렬을 더욱 확대하고 점차 그것을 반일회조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거사를 위해 위만군중대장에게도 접근하였다. 중대장 역시 구국군출신이였는데 일본지도관놈의 전횡으로 늘 울분속에서 지내고있었다.

이런 기분상태를 제때에 포착한 임은하는 어느날 중대장을 찾아가 일부러 품을 내여 유격대에 의거한 여러 위만군들의 생활에 대해 실감있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대담하게 들이댔다.

 <중대장님도 부하들을 데리고 의거하세요!>

처녀의 돌발적인 제기를 받고 처음에 중대장은 당황해하였다.

 <당신들은 언제까지 마소처럼 천대받으며 살겠습니까. 어제도 중대장님이 제일 사랑하는 왕사병이 일본지도관놈한테 매를 맞아 인사불성이 됐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놈에게 말 한마디 못하더군요.>

임은하는 격분에 치를 떠는 중대장에게 연방 들이댔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의거하세요! 당신의 부하들은 모두 나의 결의형제들이며 반일회원들입니다.>

중대장은 불같이 타오르는 처녀의 눈을 경이에 차서 바라보았다. 과연 이 조그마한 유격대처녀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작은 몸집에 비해 심장이 너무도 크다는 사실에 중대장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내 사내자식으로 태여나 부끄럽소!>

그는 그저 이 한마디를 내던지고 도망치듯이 처녀의 곁을 떠났다.

그 이튿날이였다.

임은하의 영향을 받고있던 병사들이 여섯달째나 체불된 임금을 요구하여 집단적인 항의투쟁에 나섰다. 일본지도관은 이날에도 병사대표를 마구 때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임은하는 바로 이때야말로 운명적인 시각이라고 판단하고 병사들앞에 분연히 나서서 반변을 호소하였다.

나의 형제들, 사랑하는 오빠들!

저 오만무례한 일본지도관놈을 처단하라!

치욕스러운 위만군생활을 버리고 나와 함께 항일유격대를 찾아가자!

위만군병사들은 그의 호소에 따라 일본지도관을 처단하고 신속히 대렬을 지어 항일유격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때 그들이 가지고 간 무장은 체스코제기관총 3정, 보총 19정, 권총 1정, 탄알 4,700여발이였다.

20살도 못되는 나어린 처녀가 적의 1개 중대를 의거시킨 이런 사건은 력사에 흔치 않은 일이다. 일제의 비밀문건도 녀대원이 일으킨 위만군중대의 반변사건을 미증유의 경이로운 사건으로 특기하였다.

임은하는 우리의 뜻대로 진심과 사랑과 공산주의자의 높은 도량을 가지고 위만군병사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준 유격대의 꽃이였으며 큰 심장을 가진 조선의 딸이였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 우리의 대적정치사업은 더욱 활발해져서 지어 악질적인 정안군에까지 혁명조직이 뻗치였다. 자위단과 위만군경찰 같은데는 우리 조직이 판을 친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조국광복을 위한 대일작전시에 위만군들은 거의나 다 일제에게 총부리를 돌렸거나 와해상태에 있었다.

부정의의 군대였던 일제침략군과 위만군의 수치스러운 운명은 다르게 될수 없는 력사의 합법칙적귀결이였다.

어쨌든 인간은 직선으로 가든 에돌아가든 또는 오늘이 아니면 래일이라도 반드시 정의와 진리의 편으로 찾아가기마련이다.

나는 액목에서 사귄 위만군련대장의 생사안위에 대해 아직까지 모르고있다. 그러나 련대장자신은 물론이요, 그의 부인이나 후손들도 어디엔가 살아있다면 자기 조국과 중화민족은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있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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