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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 27,2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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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7 19:4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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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제1회) 27-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제2회) 28-61

 

 

 

4권 제11장 2. 기이한 인연

 

 

예술영화-민족의 태양 중 장군님의 넓으신 도량에 감격하는 위만군연대장 부부

 

북만의 액목지구는 우리가 길림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고장이였다. 강명근과의 련계밑에 려신청년회라는 혁명조직을 내오고 그 조직에 망라된 청년들과의 사업을 해오던 교하와 신잔, 삼송도 당시까지는 액목현에 속해있었다. 이 현이 교하현으로 개칭된것은 1930년대말기부터였다고 한다.

우리는 2차 북만원정때 액목땅에서만도 수천리의 장정을 하였다. 청구자, 비파정자, 남천문, 삼도구, 마록구, 신흥툰, 관지, 류채구, 삼과송, 목단강촌, 흑석향, 타요자 등은 다 우리가 그때 개척한 고장들이며 북만원정대의 무공이 새겨진 추억도 깊은 전적지들이다.

그 과정에 흥미있는 사건들도 많이 체험하고 인상 깊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보았다.

2차 북만원정 당시까지만 하여도 이 지방에는 혁명바람이 전혀 미치지 못한 미개척지들이 많았다. 우리가 액목원정문제를 토의할 때 주보중이 걱정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김사령이야 벽창호 같은 오의성령감도 일조에 돌려세운 사람이니 어련하겠소만 우린 지난봄에 액목땅에 갔다가 <홍호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곳곳에서 문전거절을 당했소.>

주보중이 말하는 <홍호자>란 붉은 홍, 되 호, 아들자 자를 쓰는 중국말로서 비적을 가리키는 뜻이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을 경원시하던 오의성이 <홍호자>라는 말로 주보중을 욕했는데 그 후 언제부터인지 그 말은 공산주의자들의 군대 일반에게 붙이는 상욕으로 되였다.

과연 주보중의 말대로 우리는 원정부대를 이끌고 액목땅에 들어간 첫 순간부터 <홍호자>의 대접을 받았다. 액목사람들이 원정부대를 보자 <고려홍군>이 왔다고 하면서 마을을 비우고 도망친것은 우리를 <홍호자> 못지 않게 경계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분명 그들에게 있어서 붉은 홍자는 패덕과 잔인성의 대명사처럼 되여있었다.

이런 사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원정중의 많은 시간을 군중과의 사업에 바치였다. 군중공작을 위해 시간을 바치는것은 랑비가 아니다. 그런 노력으로 인민혁명군을 멀리하던 사람들이 친근한 벗으로, 방조자로 되고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련공, 친공의 길로 돌아설 때 우리는 참으로 일확천금에도 비길수 없는 무상의 희열을 느끼였다.

요영구회의후 울면서 유격근거지를 떠나가던 인민들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얼른거리고 또 혁명에 대한 걱정이 천갈래 만갈래로 겹쳐서 심신이 고달프던 때에 액목땅에서 얻은 그런 수확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녕 커다란 기쁨으로 되였다.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중의 기쁨은 동지와 벗을 얻는 것이요, 슬픔중의 슬픔은 그것을 잃는것이다.

우리는 액목현경에 들어서기전에 벌써 경박호반의 소산저자에서 채화라는 중국어부를 사귀여 그 호수를 쉽게 건너올수 있었다. 채화도 우리를 만나기전까지는 혁명군을 멀리하던 사람이였다. 19살때부터 30년 가까이 경박호에서 고기잡이를 유일한 생업으로 삼아온 이 순박한 어부는 <고려홍군>을 <비적>이라고 묘사하던 일본사람들의 선전을 그대로 곧이듣고 있었다. 그러나 원정대의 위용과 질서정연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우리 대원들의 소탈하고 겸허한 인품에 끌리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그도 태도를 바꾸어 혁명군을 후덥게 대하였다.

격강이 천리란 말처럼 군대의 원정에서 앞길을 막는 강물은 천리길에 맞먹는 장애물이였다. 그러기에 적의 눈을 피해가며 원정대의 경박호도하를 전력을 다하여 보장해준 채화의 수고는 평생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1959년에 우리 답사단 동무들이 중국에 갔다가 그의 사진을 가지고 돌아왔다. 사진속의 채화는 이미 70살고령에 이른 주름 많은 로인이였다. 그러나 키가 크고 목이 성큼한 옛모습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자못 감개가 무량했다.

청구자전투때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후방물자를 공급해준 백가장 류영생과 흑석향부근에서 아들을 유격대에 입대 시킨 유춘발로인을 비롯하여 우리는 액목땅에서 참으로 많은 벗을 얻었고 군중을 쟁취하였다.

인민들속에 들어가서 각계각층 군중과의 사업을 하는 과정에 우리는 한 위만군 련대장과도 깊은 친교를 맺었다.

원정대가 돈화현쪽에 있는 목재소를 치려고 밤새껏 강행군을 하던 때였으니 아마 1936년초에 생긴 일이였을것이다. 날이 훤히 밝아올무렵에 우리는 행군을 중지하고 대도로옆의 어떤 지주집에 려장을 풀었다. 큰 토성을 둘러치고 포대까지 가지고 있는 만만치 않은 집이였다.

위만군이 조직된후이고 또 일본사람들이 사설무렵을 허용하지 않는 때여서 그 집에 가병만은 없었다.

지주집은 두채로 되여있는데 한채에는 대원들이 들고 다른 한채에는 지휘부성원들과 후방일군들이 들었다. 우리는 대문앞에 머슴군차림을 한 대원 3명을 교대로 파견하여 주변을 감시하게 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쉬게 하였다.

오후 4시쯤 되였을 때 보초소로부터 마차 1대가 우리가 머무르고있는 지주집쪽으로 접근해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금후 마차가 지주집 앞에 멎어 섰는데 그 안에서 웬 귀부인이 병사 1명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와 잠간 몸을 녹이다가 가겠다고 하면서 지주집으로 곧추 들어왔다.

문밖을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는 마당에 여우털을 댄 외투를 두벌씩이나 껴입은 미모의 젊은 녀성이 서있었다. 그 호화로운 옷차림에 눈이 뒤집힌 우리 동무들이 벌써 마당에 쓸어나와 행색이 지나치게 현란한 정체불명의 녀인을 에워싸고 검문을 들이대고있었다.

웬 녀자냐고 내가 묻자 나어린 보초는 <사령관동지, 수상한 녀자입니다.>하고 무슨 큼직한 고위급특무라도 잡은것 같은 기세로 우쭐해서 대답하였다. 보초는 그 녀자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고있었다.

젊은 중국녀인은 사색이 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나는 그 녀자의 몸수색까지 하려드는 보초병을 엄하게 꾸짖고나서 명령하였다.

 <보초동무, 부인이 몸을 녹일수 있도록 방으로 들여보내시오.>

녀인은 방안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조심스레 떨고있었다.

나는 중국말로 그 녀자를 안심시키였다.

 <부인, 무서워말고 몸을 푹 녹이시오. 어린 보초병이 잘못 보고 좀 하대한것 같은데 량해하시오.>

나는 녀인에게 차를 권하고나서 그가 몸을 녹일수 있게 화로불도 가까이에 밀어놓았다.

 <부인이 어떻게 보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고장 사람들이 <고려홍군>이라고 부르는 인민혁명군입니다. 부인은 <고려홍군>이란 말을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좀 들어보았습니다.>

녀인은 고개를 숙인채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리 <고려홍군>은 일본사람들이 소문을 내돌리고있는것처럼 인민의 생명재산을 침해하는 <비적>의 무리가 아닙니다. 우리 혁명군은 항일구국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의 무장력입니다. 우리는 조중 량국을 침해한 일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싸울뿐이지 인민들의 생명재산은 털끝만치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인도 마음을 푹 놓는것이 좋겠습니다.>

녀인은 감사의 표식으로 두손을 합장하였다. 그러나 그 표정에서는 아직도 불안과 공포, 반신반의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되고있었다.

나는 부인이 긴장을 풀 때까지 말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부인이 위만군병사를 데리고 다닌다고 해서 죄를 묻거나 처벌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어떻게 되여 병사의 호위를 받고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묻지도 않겠습니다. 인민을 해치지 않고 혁명군을 해치지 않는 이상에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지나가는 길손들을 모욕하고 학대하겠습니까. 우리도 주인장의 량해를 얻어가지고 이 집에 잠간 들려 피곤을 풀던 손님들이니 다른 생각일랑 말고 불이나 뜨뜻하게 쪼이다가 가시오.>

녀인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그으며 조심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나를 바라보던 그 녀자의 눈에 문득 경악에 가까운 빛이 어리였다. 녀인은 두손을 가슴에 포개여얹고 안타깝게 입술을 감빨고있었다.

 <왜 그럽니까? 아직도 내 말이 채 믿어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사실은 대장님의 얼굴이…전 대장님이 본래부터 인자한분이라는걸…>

녀인은 맥락이 닿지 않는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또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 호송병을 심문하던 오백룡이 범잡은 포수상으로 문가에 나타나서 중국 귀부인이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조선말로 넌지시 보고하였다.

 <장군님, 호소병의 말에 의하면 저 녀자는 위만군 12련대장의 안해라고 합니다. 큰 고기가 저절로 그물에 걸려든셈이지요.>

 <백룡동무, 너무 우쭐해서 그러지 마오. 큰 고기인가 작은 고기인가 하는건 이제 두고봐야지.>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사실 나는 위만군련대장의 부인이라는 말에 퍼그나 놀랐다. 련대장이라면 간단한 자리가 아니였다. 위만군의 군사등급으로서는 우로부터 네번째이고 밑으로부터는 13개나 되는 사닥다리를 톺아 올라야 따낼수 있는 벼슬이였다. 위만군 1개 련대의 관할구역이 몇개 현을 포괄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것을 총찰하는 지휘관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가 하는것은 더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을것이다. 그 당시 액목현에는 교하에 본부를 둔 위만군 혼성 제9려단산하의 12보 병련대가 주둔하고있었다.

적군와해를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과제로 내세우고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위만군련대장의 부인을 만나게 된것은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물론 련대장의 안해라고 하여 조금도 낯색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러니 부인, 위만군련대장의 안해라고 해서 우리가 무슨 큰 형벌이라도 내릴줄 알았습니까?>

녀인은 몹시 민망스러워 하는 낯빛으로 손을 비비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제가 잘못보지 않았는지…대장님, 실례이지만 성함을 김성주라고 하지 않는지?…>

이 뜻밖의 질문을 받고 이번에는 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간도에서 수백리 떨어진 북만땅에서 우연히 만난 위만군련대장의 안해가 내 아명을 알고있다면 그것은 벌써 무심히 스쳐지날수 없는 비상사건이다. 어데서 본적도 없고 만난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귀부인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수 있단 말인가. 놀라움과 동시에 그 수수께끼를 파헤치고싶은 호기심이 부쩍 동하였다.

 <참, 액목땅에 와서 아명을 들으니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나는 김성주이기도 하고 김일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어떻게 나를 압니까?>

련대장의 안해는 모닥불이라도 뒤집어쓴것처럼 얼굴을 붉히였다. 나는 부인의 얼굴에서 말하고는 싶어하면서도 터놓기 주저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성주선생님이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저는 거기서 녀자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선생님을 알고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거 반갑습니다.>

얼굴을 쳐들고 처음으로 나를 쳐다볼 때 녀인의 눈동자에 비끼던 그 생동한 열정의 빛이 무엇을 뜻하는것이였는지 나는 비로소 리해하였다. 어쨌든 액목과 같은 백사지에서 길림시절의 녀자중학교 학생을 만난다는것은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길림이라는 그 한마디의 말은 불현듯 내 가슴속에서 향수에 가까운 짜릿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를 몇해동안 비끄러매두었던 그 도시에 깊은 정을 두고있었다.

부인은 내 얼굴에 피여오르는 옛 시절의 추억을 읽자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주선생님도 길회선철도부설반대 깜빠니야가 벌어지던 1928년 가을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 가을에 길림은 얼마나 들끓었습니까. 잘 믿어지시지 않겠지만 저도 그때는 학생시위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성의회마당에서 성주선생님의 연설을 듣던 일이 눈앞에 선합니다. …>

지난날 시위대렬에서 구호를 웨치던 길림녀자중학교 학생, 그러나 오늘은 여우털외투로 몸을 감싸고 호송병의 호위를 받으며 친정집나들이를 다니는 련대장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였다.

나는 심한 격세의 느낌을 받으며 련대장의 안해를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어제까지 반일을 하던 녀성이 오늘은 친일의 렬차에 오른것이다. 무엇이 이 녀자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였다. 자기 민족의 운명에 대한 절망으로 하여 생겨난 타락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길림시절을 회고하는 그 녀성의 절절한 표정으로 보고 그의 마음속에 반일을 하던 그 전날에 대한 미련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그는 우리앞에서 눈물로 자신을 회개했고 수치를 무릅쓰고 녀학생시절을 추억하였다. 이 녀자가 무엇 때문에 나를 보는 순간 그리도 놀라고 전율을 일으켰겠는가. 그것은 량심앞에서 느낀 공포였을것이다.

 <성주선생님, 왜 말씀이 없으세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선생님이 연설을 하실 때 주먹을 들고 호응했던 그 소녀가 글쎄…이렇게 군복을 입고 고생하는 성주선생님을 보니…감개무량하고…저는 부끄럽습니다.>

부인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였다.

 <부인, 진정하시오. 자기를 너무 비하하면 안됩니다. 그런 절망, 그런 자포자기의 세계에 빠지기에는 시국이 너무도 준엄합니다. 안팎의 정세는 조국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중화의 모든 아들딸들과 지성인들을 항일구국의 광장으로 부르고있습니다. 련대장의 안해가 되였다고 해서 항일을 못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녀인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면 저의 처지에서도 항일을 할수 있는 출로가 있단 말입니까?>

 <있지요. 부인이 남편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그가 혁명군을 <토벌>하지 않게만 하여도 그것은 곧 항일을 위해 공헌하는것으로 됩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위만군련대장이면 작지 않은 벼슬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벼슬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자기가 중국사람이라는것을 잊지 않는데 있습니다.>

 <저의 남편도 련대장이기는 하지만 그 노릇을 하고싶어 하는것은 아닙니다. 그이도 민족적량심만은 깊이 간직하고있습니다. 그러니 성주선생님 말씀대로 남편을 잘 설복해서 유격대 <토벌>에 부하들을 내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련대장이 친일로부터 반일로 방향전환을 한다는것은 그 수하의 부하들도 애국의 길을 걷는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 부인과 부인 남편되는 분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나는 지난날 간도에서 위만군장교로 복무하던 사람들이 친일로부터 항일로 방향전환을 한 사실들에 대하여 이것저것 소개하면서 녀인에게 신심을 주었다.

녀인은 오늘 성주선생을 만나게 된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복이다, 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되는바가 많다. 선생이 오늘 나에게 길림시절의 넋을 되찾아주고 우리 부부를 재생의 길로 인도해준셈이다, 내 평생 이 은헤를 잊지 않겠다고 하면서 중화민족의 딸답게 살겠다는 결의를 다지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만든 선전물과 송경령, 장내기 등이 상해에서 발표한 항일구국 6대강령도 보여주었다. 1차 북만원정때 녕안에 있던 주보중의 산막에서 오평이 보여준 바로 그 6대강령이였다.

련대장의 안해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품속을 뒤지더니 흰 종이에 싼 물건을 내앞에 내놓았다. 그것은 중국지페였다. 아편을 팔아 마련한 돈이라면서 군자금으로 써달라고 하는것이였다.

우리는 그의 성의가 고마웠으나 받을수가 없었다.

 <그 돈은 도로 간수하시오. 나는 오늘 잃었던 반일학우를 다시 얻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재산을 받은것 같습니다.>

련대장의 안해는 그 말을 듣고 또 울었다.

우리는 헤여지기전에 저녁상을 푸짐히 차리여 위만군련대장의 부인에게 대접하였다. 그 녀인이 지주집을 떠나가면서 나에게 대준 성명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요행 남아있는것은 <지>라는 성뿐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녀자의 이름을 잊어버리였다.

얼마후 우리는 위만군련대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당신들은 세상에 더없이 고귀한 사람들이다, 나의 안해의 생명을 보호해주고 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여 애국의 길을 걷게 한 당신들을 나는 결초보은의 각오를 가지고 도와줄 결심이다, 이러루한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였는데 필치가 아주 비장하였다. 그 련대장의 이름도 <장> 무엇이라고 하였는데 기억이 삭막하다.

그 후 우리는 음력설준비를 하느라고 액목현성근처에 군수관을 파견하였다. 그는 언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설음식준비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들을 구입하느라고 시가지에까지 들어갔다가 과업을 채 수행하지 못한채 현경찰에 붙잡히였다. 이 소문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위만군련대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련대장은 경찰서에 인민혁명군은 군대가 관계하는것만큼 군수관을 넘겨달라고 하였다.

처음에 군수관은 위만군련대장이 자기를 데리고 가서 죽일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련대장은 안해를 시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군수관을 귀빈으로 환대해주었다. 그는 김사령부대가 자기 안해를 잘 도와주어 감사하다고 하면서 앞으로 어떤 정황에 놓이든지 당신들을 <토벌>하지 않겠다, 목숨을 걸고 담보하는것이니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당신네 부대를 만나면 공중에 대고 총을 세방 쏘겠으니 그럴 때에는 우리 부대인줄 알고 못본척하고 지나가라, 내 죽더라도 김사령의 은혜만은 잊을수 없다, 김사령한테 충심으로 되는 나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군수관에게 말한대로 위만군련대장은 그 후 우리와의 약속을 잘 지켰다.

우리가 삼과송부락에 머물고있던 그 당시 관지부락쪽에는 일본군대가 주둔하고있었고 액목현쪽에는 위만군련대가 주둔하고있었다. 두 부대가 다 <토벌>을 다니기는 하였지만 12련대장이 지휘하는 위만군련대는 우리 부대와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교전을 피하군하였다. 우리도 일본군대만 골라가면서 쏘았다.

그 당시 일본군과 위만군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의 하나는 철갑모였다. 철갑모를 쓰면 일본군이고 안 쓰면 위만군이라는것이 빨찌산의 어느 부대에서나 다 통하는 공식이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위만군까지 철갑모를 쓰고 전투장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철갑모를 쓴 사람은 일본군으로 알고 무조건 쏠 테니 유격대와 싸우지 않으려거든 철갑모를 벗으라고 하였다. 그런 경고를 받은 다음부터 위만군은 우리한테 접근하면 철갑모를 벗고 자기네가 만주군이라는것을 알리였다.

빨찌산은 철갑모를 쓴자들이 대렬앞에 있으면 앞을 치고 뒤에 있으면 뒤를 치군 하였다. 일본군은 <빨찌산이 신통히도 우리만을 골라 친다.>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위만군이 <토벌>에 나올 때 오발 등의 방법으로 빨찌산들에게 신호를 보낼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약속도 곧잘 지키였다. 오발도 못할 때에는 수십명씩, 수백명식 한데 모여서서 <지지가가>, <지지가가>하고 떠들어대는 방법으로 자기네 위치를 알려주군 하였다.

장련대장은 우리에게 후방물자도 적지 않게 보내주었다. 그는 이따금씩 마차에 돼지고기와 언교즈를 가득 싣고 <토벌>을 간다고 하면서 주둔지역을 떠나서는 부하들을 시켜 우리 부대와의 접선장소에 가져다놓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빨찌산도 없는 왕청같은곳에 부대를 데리고 가서 몇시간씩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병영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우리 부대가 관지부근의 어느 마을에 주둔해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지휘관들 몇 명이 나한테 몰려와 설명절을 앞둔 대원들의 기분상태를 보고한 다음 부락에 나가서 메밀이나 감자가루를 구해다가 명절날 국수라도 누를수 있게끔 식량공작을 하게 승인해달라고 제기하였다.

나는 인민들에게 끼칠 부담을 고려하여 그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뿐아니라 얼마후에는 부대에 철수명령까지 내리였다. 그때 그 마을인민들은 김사령부대와 함께 설을 쇠게 되였다고 하면서 명절준비를 굉장히 하였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부대의 명절음식 때문에 마음사람들의 몇 달분 농량이 거덜날수 있었다.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급작스레 떠난것도 그때문이였다. 인민들의 리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그 명분 때문에 정작 철수를 단행하기는 하였으나 대원들은 그때 사실 한사람처럼 볼이 부어있었다.

황니하자막바지에 거처를 옮긴 원정대는 목재소로동자들이 사용하던 산전막을 손질하고 거기서 설명절을 쇠였다. 명절이라고 하였지만 우리모두에게 차례진것은 한사람당 한그릇밖에 안되는 좁쌀밥뿐이였다. 대원들이 그 밥을 먹고 냠냠해할 때 위만군련대장이 보내준 돼지고기와 교즈가 도착하여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우리와의 친교가 깊어지게 되자 그 련대장은 나중에 원정대앞으로 무기도 보내주고 정보자료까지 제공해주었다. 한 녀인에게 비껴진 우리의 진정은 이처럼 진폭이 큰 결초보은의 메아리를 가져왔다. 위만군련대장은 만주국이 자기에게 준 련대장모자를 그냥 쓰고있으면서도 과감한 련공실천으로 력사와 인민 앞에서 장공속죄하였다.

위만군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하층병사대중을 전취하는데 기본을 두면서 중하층장교들과 일부 량심적인 상층장교들가지도 전취하여 극소수의 악질장교들을 고립시키고 타격할데 대한 적군와해방침은 그 련대장과의 사업에서도 크게 은을 낸셈이였다.

이것은 예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소득이였다. 우리와 단 한차례의 접촉도 해보지 않은 련대장이 자기 안해의 교양을 받고 반혁명의 하수인으로부터 련공애국인사로 전환된것이다. 그러고보면 길림녀자중학교 출신의 련대장부인이 남편의 개심을 위해 적극적인 사상전을 벌린것 같다. 그 녀자가 아주 훌륭한 녀자였다.

위만군련대장은 얼마 후 화전지방으로 이동되였다. 나는 그를 위증민에게 인게하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오래도록 련대장의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1941년에 와서야 화전에서 위증민의 활동을 보좌하던 곽지산을 통하여 한토막의 소식을 들을수 있게 되였다.

곽지산은 화전에 있는 위만군 12련대와 13련대가 조만간 열하쪽으로 조동되게 되였다는것과 그 두 련대의 련대장들이 열하로 이동하기전에 항일혁명군에 편입할 의사를 표명해왔다는것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화전에는 그 당시 두 련대를 동시에 수용할만한 부대도 없었고 두 련대장의 용단을 두고 책임적인 답변을 할수 있는 간부들도 없었다. 곽지산이 우리를 찾아온것은 그 대답을 받아가기 위해서였다. 위증민이 전사한 다음부터 2군소속의 군정간부들은 부대의 활동에서 제기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처리와 관련된 결론을 우리한테서 받아가군 하였다.

나는 위만군이 열하로 조동되여가기전에 그들을 조속히 의거시킬데 대한 긴급한 임무를 주어 곽지산을 회전으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간이 늦은 탓으로 두 련대를 의거시키기 위한 거사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련대장은 화전에 있을 때 양가성을 가진 새 련대장에게 자기 련대를 인계하였다. 그는 후임련대장에게 부대를 인계하면서 반일의 길을 걷도록 교양하였으며 린접부대였던 13련대장에게도 친분관계를 리용하여 반일혁명을 도와나서도록 권고하였다.

그 후 나는 열하쪽으로 조동된 위만군 제12련대와 13련대의 후일담과 관련된 자료는 어데서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대일작전시의 위만군의 붕괴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 그 부대들이 결정적인 시기에 일제에 반기를 들고 나선것을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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