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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25,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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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6 18:0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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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제4회) 25-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제5회) 26-61

 

 

 

제4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우리는 인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적들이 산동툰 마을에 달려들기전에 맞받아나가 싸울수 있도록 진지를 정하고 매개 부대들에 해당한 전투임무를 주었다. 태평구전투에서 위훈을 떨친 박격포중대의 포수들과 중기관총중대의 명사수들은 적들의 공격로로 지목되는 방향들을 타격하기 위한 사격제원까지 미리 구해놓고 나의 명령을 기다리였다.

량수령자촌하를 낀 산골길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던 적들은 산동툰 서북쪽지대를 차지하기 위하여 산으로 기여올랐다. 우리는 전방 150~200메터 계선까지 적들을 바싹 접근시킨 다음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살아남은 놈들이 퇴각하였다가 량수령자촌하를 거쳐 남쪽산릉선을 타고 다시금 기여들려고 하였으나 거기서도 길목을 지키고있던 우리의 용사들은 적들을 통쾌하게 쓸어눕히였다. 이런 공방전이 여러차례 거듭되였다.

적지휘관들은 불리한 정황을 수습해보려고 대오를 다시 정비하고있었다. 적들이 지휘소에 밀집되였을 때 박격포중대장은 사격구령을 내리였다. 포탄이 쇠소리를 내면서 연거퍼 적의 무리속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살아남은 적들은 말을 타고 녕안쪽으로 퇴각할 차비를 하였다. 우리의 박격포는 철수하는 적들을 향해 포문을 돌리였다.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여 오도가도 못하게 된 적들은 <공산군이 포까지 가지고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하면서 초연속을 헤매다가 어둠을 리용하여 뿔뿔이 달아나버리였다.

그 전투에서 우리가 박격포를 쏜 데 대한 반향이 대단하였다. 적들은 우리가 쏘련에서 원조를 받아가지고 박격포까지 메고 다닌다고 하면서 <고려홍군>이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우리는 로흑산전투에서 로획한 박격포탄을 산동툰전투에서 다소비한 다음 박격포를 땅에 묻었다.

산동툰전투에서 어떻게나 혼쌀이 났던지 그후부터 적들은 감히 우리에게 접어들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문을 꼭 닫고 성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어 적들은 우리가 써보낸 편지를 받고 식량, 기름, 신발을 비롯한 군용필수품들을 꼬박꼬박 보내주기까지 하였다.

북만땅에 다시 한번 숭전고를 울렸던 산동툰전투는 수류탄으로 뱀을 잡았던 기상천외한 고사와 더불어 나의 일생에서 그중 인상이 깊었던 전투의 하나로 추억에 남아있다.

적들은 우리의 포성앞에서 전율하였지만 인민들은 그 포성앞에서 용암처럼 끓어번지였다. 북만 중국인공산주의자들과의 공동투쟁은 이처럼 첫 시작에서부터 좋은 실적을 올리였다. 이 실적은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사이의 전투적동맹을 공고히 하여주는 믿음직한 토대로 되였다. 주보중은 그때부터 중무기의 불합리성을 두번다시 운운하지 않았다.

우리는 산동툰을 떠난 후 두구자라는 곳에 가서도 방가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북만공산주의자들과의 반일공동투쟁문제를 다시금 론의하였다. 우리의 주동적발기에 따라 북만원정대는 주보중과의 합의하에 몇개의 편대로 나뉘여 5군의 활동지역에 나가 공동투쟁을 하기로 하였다. 원정대는 5군 정치위원 호인이 활동하는 목릉지방에도 가고 평남양이 활동하는 고강에도 소부대를 보냈다.

주보중은 마창, 단산자, 옥량하, 석두하자 등지로 떠나가는 우리의 편대들에 5군의 일부 성원들을 배속시켜주었다. 이 고장들은 우리가 1차 북만원정때 손때를 묻혀가며 개량한 옥토지대였다. 우리는 이 일대의 혁명조직들에 튼튼히 발을 붙이고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였다.

옥량하의 지하조직은 마을주변뿐아니라 멀리 동경성에까지 줄을 뻗치고있었는데 우리가 그 조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옥량하를 생각할 때면 한 중국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군 한다. 우리가 1차로 북만에 갔을 때 그 할머니는 부녀회사업에 열성을 다하고있었다. 환갑이 다된 몸으로 군복도 짓고 원정대의 뒤시중을 하느라고 밤잠도 자지 않는 로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그때 고향집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생각하였다. 할머니는 내가 하루동안만 보이지 않아도 우리 전령병들에게 <진스링(김사령)이 왜 안보이는가?>고 따져묻군 하였는데 우리가 무고하다는 말을 듣고야 밤에 잠도 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간도에서 <고려홍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장꿩 한마리와 함께 그릇에 국수사리를 얹어 가지고 두구자에서 출발을 서두르고있는 우리 부대를 찾아왔다.

 <지난해 가을에 김사령 대접을 변변히 못한것이 마음에 걸려 국수감을 해가지고 왔으니 이 로친의 성의를 받아주신다면 더없이 기쁘겠소이다.>

로인이 국수감을 전해주면서 우리 동무들에게 한 말이였다. 그 할머니가 어떻게 우리 전령병들을 구슬렸던지 국수를 좋아하는 내 식성까지 알아냈다.

나는 그날 주보중과 함께 할머니의 지성이 담긴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꿩국물에 꿩고기꾸미와 남새꾸미를 얹은 국수는 별맛이였다. 주보중은 국수를 곱빼기로 들고나서 <김사령이 어느새 북만땅에 와서 저런 중국로친까지 다 후려냈소? 나는 군중을 쟁취하는 김사령의 수완에 늘 탄복하군 하는데 이번 기회에 당신네 부대에 배속된 우리 중대들에 정치사업방법을 배워주었으면 하오.>하고 롱담 절반 진담 절반의 청탁을 하였다.

그해 9월 우리 부대가 액목지방에서 활동하고있을 때 5군정치위원 호인이 정식으로 우리에게 련합작전을 제기해왔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위하지방으로 남하하는 김책과의 사업을 위하여 그 요청을 잠간 보류해두었다. 그 후 불가피한 사정으로 하여 호인의 요청에 끝내 응해주지 못하였으나 나는 항일전쟁전기간 우리에 대한 그의 그 믿음을 늘 고맙게 추억하였다.

우리가 북만을 개척하는데서 녕안 다음으로 중시한 고장은 액목땅이였다. 액목은 우리의 발길이 별로 마치지 않은 고장이였고 중국인부대들조차 혁명바람을 불어넣으려다가 이가 들지 않아서 포기한곳이였다.

하지만 김책이 소속된 3군과의 공동투쟁을 위해서는 어차피 액목땅에 보습을 대지 않으면 안되였다. 서북쪽으로 3군의 활동지역인 위하, 주하와 린접해있고 서쪽으로는 1,2군의 활동구역과도 이웃하고있는 이 수수께끼 같은 미지의 땅은 적아가 다같이 탐내는 대지였다.

북만의 여러 무장부대들이 액목을 개척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것은 이 지방 인민들속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반공풍조때문이였다. 녕안도 반공바람이 드센 고장이였으나 이 지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액목이 이처럼 반공의 오염구역으로 된데는 이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8.1폭동과 같은 무모한 좌경적망동으로 공산주의망신을 시킨 엠엘계종파들의 책임도 있었다. 8.1폭동의 여파로 하여 액목인민들은 일제와 반동군벌들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당하였다. 그때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면 도리를 떨었다.

일제는 선무반이라는것을 파견하여 인민들과 공산주의자들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액목현 청구자밀림에서 숯구이로동을 하다가 입대한 한 총각의 체험담은 이 지방 사람들의 반공중독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응변으로 증명해준다. 일찍이 전염병 때문에 량친과 형제들을 여의고 혈혈단신이 된 그는 문전걸식으로 모진 세월을 죽지 못해 살아오다가 액목땅에까지 굴러들어와 도로공사장에서 강제로동을 하였다. 그때 총각은 공사장의 어떤 인분에게서 혁명가요를 한곡 배웠는데 그것이 그가 세상에 태여나서 처음으로 배운 노래였다.

그후 총각은 임가구근처의 어느 농가에서 계절로동을 하였다. 하루는 마을의 어떤 집에서 결혼잔치가 있었다. 총각도 주인들을 따라 그 잔칫집에 가서 신랑신부를 축하해주고 주례의 요구에 따라 노래를 한곡 불렀다. 도로공사장에서 배워둔 바로 그 혁명가요였다. 그런데 그 한곡의 노래 때문에 잔칫집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식자가 있는 동네의 한 유지가 그 혁명가요를 듣고 총각을 공산당이라고 몰아주었던것이다. 유지는 총각을 고용한 중농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임자, 품팔이군을 두겠으면 똑똑한 사람을 둘것이지 하필이면 왜 공산공처를 한다는 그 잘난 공산당을 두는가?>고 하였다. 면박을 당한 중농은 그날로 집에서 총각을 쫓아냈다. 비극은 총각이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혁명가요를 부르면서도 그것이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노래라는것을 전혀 감촉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무식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무식의 탓이 아니라 반공풍조의 탓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토비들이나 마적들이 한 짓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역선전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원정대가 액목을 개척하기로 결심할것은 솔직히 말하여 모험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경박호를 건너 액목땅에 첫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주민들로부터 심한 랭대를 받았다. 액목지방의 동쪽관문이라고 할수 있는 그 부락은 중국사람들만 사는 아담한 마을이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대다수의 부락사람들은 <홍호자>가 왔다고 하면서 아이들까지 데리고 인가에서 달아나버리였다. 마을에는 로약자들만 남았는데 그들도 집에 숨어서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부락에서 얼마쯤 떨어진 수림속에 천막을 치고 대원들을 휴식시킨 다음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소학교에 가보니 교직원, 학생들도 다 숨어버리고 없었다. 이것은 액목땅에 불길을 지펴보겠다고 불원천리 찾아온 동만손님들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랭혹한 대접이였다.

나는 학교마당에 풍금을 내다놓고 그 풍금을 타면서 청년의용군중대 대원들과 함께 <소무가>와 양귀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동무들은 한족민요에서도 명창이였다. 이 두노래는 중국의 근로민중이 특별히 애창하는 명곡들이였다. <소무가>는 개가 길림시절에 배운 애국가요였는데 원명은 <소무목양>이다.

소무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충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실제인물이였다. 한나라 왕의 사신으로 북쪽의 흉노족들에게로 갔었는데 흉노족들은 그를 인질로 잡아놓고 저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수양이 새끼를 낳을 때까지는 돌아가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소무는 19년간이나 흉노족들속에 갇히워 있었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소무가>는 중국인민의 애국주의적사상감정을 잘 반영하고있는 노래였다.

우리가 풍금을 타면서 <소무가>와 양귀비의 노래를 부르자 숨어있던 소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먼저 호기심과 놀라움을 안고 우리곁에 모여왔다. 그리고는 내가 치는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 다음에는 교원들과 동네어른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고려홍군>이 중국노래를 류창하게 부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였겠지만 우리가 그 노래를 부르는데서 그들은 홍군과 자기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막연한 공통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렇게도 원정대를 랭대하던 사람들이 우리를 친절과 선망의 눈길로 대하게 되였다.

도망갔던 마을사람들이 운동장에 다 모이자 나는 중국말로 반일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까지 듣고서야 마을사람들은 우리에게 결을 주었다. 그들은 <고려홍군>은 비적도 아니고 마적도 아니다, <고려홍군>은 진짜 애국적인 혁명군이며 신사멋쟁이군대라고 하면서 우리 부대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소무가>를 가지고 북만땅의 중국사람들을 감화시켰다고 말할수 있다.

이때의 일을 통해 나는 문학과 음악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각성시키는데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실제로 체험하였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을 혁명의 무기로 중시하는 리유가 그때의 체험에 근거를 두었다고도 볼수 있다.

2차 북만원정당시 경박호반의 그 중국인부락에서 겪은 체험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나는 해방후 <소무가>의 가사를 찾으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 얼마전에야 우리 일군들의 도움으로 중국말 원문으로 된 가사를 입수하였다.

나는 그때 너무도 기쁜 나머지 80객이라는것도 잊고 <소무가>를 불렀다. 80객이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잘 불렀겠는가. 목이 막혀 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멀리 구름너머로 아득히 사라진 청춘시절의 감회가 새롭게 솟아올랐고 우리가 고난속에서 개척한 북만의 대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샘처럼 북받쳐올랐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어려운 공동투쟁의 길을 개척하던 나날이 그리워질 때마다 나는 풍금으로 이 노래를 종종 타보군 한다. 휘파람으로 불 때도 있지만 20~30대처럼 생신한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아래에 소무가의 가사를 적는다.

蘇武牧羊

1.蘇武 留胡節不辱 雪地又?天

 匈朝十九年 渴飮雪 饑?? 牧羊北海邊

 心存漢社稷 ?蕩尤未還 歷盡難中難

 心如鐵石堅 夜坐塞上時 聞茄聲入耳 痛心酸

2.蘇武 留胡節不辱 轉眼北風吹

 雁?漢關飛 白髮娘 望兒歸 紅?守空?

三更同入夢 兩地誰夢誰 任海沽石爛

 大節不少? 寧?匈奴 驚心破膽 拱服漢德威

 

소무목양

1.소무는 호지에 잡혀있어도

 절개를 욕되게 하지 않았네

 눈과 얼음 덮인 흉노땅에서 19년

 목마르면 눈을 먹고

 배고프면 요털을 삼키며

 북해변에서 양을 몰았네

 마음은 한나라에 가있으나

 늙도록 몸은 돌아가지 못했네

 모지 고생 겪을수록

 마음은 철석으로 굳어져

 변강의 밤 때로 피리소리 들으면

 가슴은 아프고 쓰리였네

2.소무는 호지에 잡혀있어도

 절개를 욕되게 하지 않았네

 어느덧 북풍은 불어

 기러기떼 한나라로 날아가건만

 백발의 어머니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꽃나이 안해는 홀로 빈방을 지키네

 삼경이면 다 함께 꿈을 꾸련만

 누가 누구의 꿈을 꾸었는가

 바다가 마르고 돌이 썩는다 해도

 큰절개는 조금도 굽히지 않아

 흉노들도 놀라서 그 위덕에 탄복하였네

 

 액목에 갔을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삼과송이라는곳에서 전주 김씨로인을 만나던 일이다. 륙과송이라는 말이 6대의 소나무라는 말이라면 삼과송이란 말은 3대의 소나무라는 뜻이다. 우리는 삼과송에 있을 때 현성에서 얼마 멀지 않은 어떤 지주집에 지휘부를 정하였다. 그 지주집에서 500메터쯤 떨어진곳에는 몸집이 자그마한 령감이 뙈기논을 부치며 살고있었다. 전령병이 알아본데 의하면 그 로인은 조선사람 같은데 조선말은 하지 않고 잘할줄도 모르는 중국말을 하면서 중국사람으로 행세하며 산다고 하였다.

어느날 저녁 나는 그 로인의 집에 마실을 갔다. 통성해보니 틀림없는 조선사람이였고 본관도 나와 같은 전주 김씨였다. 홍범도를 따라다니면서 청산리전투에까지 참가한 로인이였는데 그 전투가 있은 다음 부대가 흩어지게 되자 액목땅에 와서 로친을 얻어가지고 은거생활을 한다고 하였다. 내가 전주 김씨라는것을 알게 되자 로인은 만리타향에 와서 동성동본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부인을 시켜 발방아로 벼를 찧어 흰쌀밥을 해주었다. 북만땅에 간후 처음으로 먹어보는 흰쌀밥이였다.

 <우리도 처음엔 뜻이 대단하였네. 홍범도장군휘하에서 봉오골대첩을 치를 때만 해도 조선독립이 당장 되는것 같더구만. 그마적에는 꿈을 꾸어도 독립문밑으로 해서 한양성으로 입성하는 꿈만 꾸었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초야의 모래알이나 막돌 같은 신세가 되여 하는 일도 없이 주름살만 늘어가니 기막힌 일이 아닌가. 이 늙은것한테 락이 있다면 한족세상이나 다름없는 북만주 한끝에서 장마철에 별을 보듯 조선동포를 만나는 때일걸세. 아무쪼록 김장군부대가 간도로 돌아가지 않고 액목땅에 그대로 영주하면 얼마나 좋겠나.>

로인은 이런 말을 하면 한숨을 무겁게 몰아쉬였다.

나라를 찾으려고 화승대를 메고 나섰던 청운의 뜻이 늙은이의 얼굴에 사정없이 그려지고 있는 주름살과 함께 덧없이 스러진다고 생각하니 나도 역시 처량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나는 저 로인의 초지를 헛되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 젊은이들이 어떤 곤난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말고 필승불패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였다.

전주 김씨로인한테는 한쪽 귀가 없었다. 식사가 끝난 다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로인에게 한쪽 귀가 왜 없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로인은 목단강에 나가 얼음구멍을 내고 강도낚시질을 하다가 그렇게 되였노라고 하면서 허구프게 웃었다. 큰 잉어 한마리를 낚아가지고 덥석 끌어안았는데 그 잉어가 요동을 치면서 언귀를 후려치는 바람에 그런 몰골이 되였다고 하였다. 나는 로인이 당한 그 봉변을 두고 심심한?동정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삼과송마을에 한주일가량 머무르고있는 동안 매일밤 로인네 집에 찾아가 홍범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속을 터놓고 보니 액목사람들도 간도사람들처럼 반일사상이 강하였다. 그들이 반공에 오염된것은 조직의 인도를 받지 못한탓이였다. 우리는 군중과의 사업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청구자의 4호부락 백가장 류영생과도 친교를 맺었고 나중에는 지휘부도 그 집에 정하였다.

류영생은 인민들에게 부담도 주지 않고 밤이면 우등불두리에 모여앉아 오락회도 하고 녀대원, 남대원의 구별이 없이 한데 어울려 춤도 추고 학습도 하는 우리 부대를 보고 별난 군대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그때까지 보아온 군대라는 것은 무슨 간판을 가졌든지간에 다 백성들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질만 하는 그런 무리들이였다. 그런데 간도에서 왔다는 이 <고려홍군>은 백성들의 물도 길어주고 마당도 쓸어주고 아이들의 머리도 깎아주고 상하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이상한 군대라고 온 동네가 수군거리였다.

어느날 밤중에 우리는 류영생백가장한테서 6호부락에 주둔하고있는 일본수비대와 위만군이 4호부락쪽으로 밀려올 준비를 하고있다는 불길한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 통보를 받고 전부대에 취침구령을 내리였다. 대원들은 취침시간도 되기전에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백가장은 그것을 보고 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다른 군대라면 다 적들을 피해 삼십륙계 줄행랑을 치겠는데 이 <고려홍군>이라는 사람들은 달아날 준비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을에 늘어 붙어서 잠잘 궁리부터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요지경 같은 군대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마을에 당장적군이 쳐들어오는것 같아 온밤 자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들락날락하였다.

나는 백가장을 옆에 끌어다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백가장님, 우리 군대가 마을을 철통같이 지키고있으니 백가장님은 너무 심려하지 말고 폭 쉬십시오.>

 <아니, 초저녁부터 이불밑에 들어간 군대가 마을을 어떻게 철통같이 지킨다는겁니까?>

백가장은 여전히 불안을 털지 못하고 갈팡거리였다.

 <보초들이 있지 않습니까. <고려홍군>은 허풍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밤은 푹 쉬셔도 일없습니다. 그대신 래일아침 우리가 떠나간 다음 적들에게 찾아가서 <고려홍군>이 마을에 왔다갔다고 신고해주십시오. 백가장님이 본대로 다 이야기하십시오.>

 <신고라니요. 나는 <고려홍군>같이 훌륭한 군대를 고발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백가장님, 내가 진심으로 부탁하는것이니 거절하지 말고 부탁대로 해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길이고 백가장님이 살길이고 동네가 살길입니다. 이제 두고 보면 그 까닭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백가장으로 하여금 경찰에 <고려홍군>의 움직임을 그대로 신고하게 한것은 집단부락안에 배겨있는 적들을 밖으로 끌어내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다음날아침 우리는 4호부락에서 철수하여 액목행도로를 따라 행군하였다. 행군도중 1개 중대의 무력은 서남릉선에 매복시키였다. 류영생백가장의 신고를 받은 적들은 수백명의 <토벌대>를 내몰아 행군중에 있는 우리 주력부대를 사나운 기세로 추격하였다.

이렇게 되여 북만원정대는 액목진출후 처음으로 되는 유인매복전을 하게 되였다.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 일본군수비대(헌병대라고도 함.)는 한놈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되였다. 인민혁명군의 탄막에서 가까스로 생명을 보존한 한명의 수비대원만이 살아서 비행기의 구조를 받았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착륙도중 사고로 풍비박산이 되는 바람에 그놈마저 <천당>으로 갔다고 한다. 우리 나라 답사단이 액목땅을 찾아갔던 1959년까지도 청구자 6호부락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건립한 <충령비>가 그냥 남아있더라고 하였다.

우리는 1935년 12월 관지부근에서도 또 한차례의 전투를 하였다. 이 전투를 일명 류채구전투라고도 한다. 이 전투에서 우리와 맞다든 200여명의 적들은 대부분이 소멸되였다. 우리에게 쫓겨 혼비백산이 된 적장교놈이 들판에 있는 관속에 송장대신 들어가있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전투뒤에 있었던 일이다.

북만땅에서 우리가 진행한 그 수많은 교전들에 대하여 일일이 다 렬거한다는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다. 우리가 액목땅을 열심히 개척하고있던 1935년 가을에 국제당은 주보중을 통하여 2군과 5군의 협동작전을 위한 합동지휘부를 구성하였다는것과 그 합동지휘부의 정치위원 겸 위하부대 사령관으로 나를 임명하였다는 소식을 통지해주었다. 대대와 련대, 사단들에서 정치위원직도 력임한바 있는 지난날의 경력이 아마도 국제당으로 하여금 나를 2군과 5군 합동지휘부 정치위원으로 선발하게 했던것 같다.

이 임명은 내가 바라던바가 아니였다. 나는 벼슬을 바란것이 아니라 북만에서 활동하는 핵심적인 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 상봉을 더 안타깝게 갈망하였다. 그런데 결국은 합동지휘부정치위원이라는 난데없는 벼슬자리가 그 갈망을 아닌보살하게 하였다. 나에게는 원정대의 활동뿐아니라 다른 군의 정치사업까지도 돌보아야 할 막대한 부담이 들씌워졌다. 나는 그 엄청난 중책로부터 오는 일거리들을 걸머지고 남호두회의를 전후한 시기까지 북만전우들과의 상봉을 뒤로 미루고 2개 군의 정치사업을 위해서 녕안과 그 주변 현들을 바삐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뉴대를 더욱더 공고한 기초우에 올려놓을수 있었다. 그 소득은 우리가 원정을 시작할 때 예견했던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였다.

우리에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원정의 주목적가운데서도 가장 선차적인 항목으로 내세웠던 김책, 최용건과의 직접적인 상봉을 이루지 못한채 그것을 먼 장래의 일로 남겨두게 된것이였다.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나날에도 언제나 북만의 광야에서 온갖 신고를 다 참아가며 혈전을 벌리고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의 애국자들을 잊지 않았다. 상봉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그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 애틋하고 따뜻한 감정으로 자라 올랐다.

동만의 조선공산주의자들과 남북만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한자리에서 처음으로 통성을 하고 격정과 사랑에 넘친 포옹을 한것은 1914년이였다. 그 후 우리는 모두 같은 밀영에서 한가마밥을 먹으며 조국해방을 위한 결전을 준비하다가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건국의 불도가니속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20세기의 가장 극적인 년대들에 나와 함께 항일전쟁은 물론, 반미전쟁도 해보고 민주개혁과 사회주의건설의 간고한 령봉들을 꾸준하게 돌파해온 충실한 투사들이다.

지금도 북만에서 싸우던 투사들은 나와 함께 우리 식 사회주의를 빛내이기 위해 고락을 같이 나누고있다. 장장 반세기도 넘는 세월 나와 우리의 위업을 받들어 변함없는 한길을 걸어온 그 충신들에게 광망한 앞날의 행복과 더불어 깨끗하고 아름다운 추억만이 남게 되기를 바란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26 18:10:08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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