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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22,23,2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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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5 17:0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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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제1회) 22-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제2회) 23-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제3회) 24-61

 

 

 

제4권 제11장 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인민혁명군의 제2차 북만원정준비는 로흑산전투와 태평구전투를 통하여 완결되였다. 왕청과 훈춘 련대의 일부 중대들과 청년의용군으로 편성된 원정대가 인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면서 태평구를 출발한것은 1935년 6월하순이였다. 석두하자와 사도하자를 거쳐 팔인구에 도착한 원정부대는 로야령을 돌파하기 위한 어려운 산악행군의 길에 올랐다. 장사진을 이루고 흘러가는 행군종대의 대오에는 안도에서 온 독립련대의 일부 대원들도 끼여있었다.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가운데서 2차 북만원정을 회상할수 있는 인물은 당시 왕청4중대 대원이였던 오진우밖에 없는것 같다. 2차 북만원정에 참가한 전우들가운데는 한흥권, 전만송, 박태화, 김태준, 김려중, 지병학, 황정해, 현철, 리두찬, 오준옥, 전철산 등도 있었으나 그들은 이미 우리의 곁을 떠나가버리였다.

1차 북만원정당시의 로야령은 장설로 뒤덮인 설령이였으나 2차 북만원정을 떠날 때의 로야령은 일만초목에 여름빛이 짙어가던 청산록림이였다. 1934년 10월에는 설한풍을 헤치며 이 령을 넘었다면 1935년 6월에는 살을 지지는것 같은 뙤약볕과 모기떼의 성화를 받으며 이 령을 넘어야만 했다. 혹한과 폭설도 견디기 어려운 고초였지만 폭양과 땀도 만만치 않은 장애였다.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실은 군마들은 경사가 급하고 초목이 뒤엉킨 행군로를 헤치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그 마필들이 걸음을 멈추고 한자리에서 뭉갤 때마다 우리는 치도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톱으로 진대나무를 자르면서 한치한치 앞으로 전진하였다.

우리가 로야령을 넘고있을 때 관내에서는 모택동과 주덕이 인솔하는 중국로농홍군이 이중삼중으로 되는 장개석군대의 봉쇄를 돌파하면서 력사적인 2만5천리장정을 성과적으로 추진시키고있었다. 1935년 5월 30일 대도하에 당도한 홍군은 치렬한 격전끝에 로정교라고 부르는 고대철삭교를 차지하고 수만명에 달하는 장정용사들의 진군로를 열어놓았다. 5월 30일은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 석달개가 대도하는 건느려고 시도한 날이며 상해 5.30참안 10돌이 되는 날이였다. 이런 운명적인 날에 용감무쌍한 홍군결사대가 로정교를 돌파한것은 자못 큰 의의를 가지는것이였다.

귀주전역에 대한 보도에 이어 간도에 날아든 대도하도하에 대한 소식은 우리를 크게 고무해주었다. 로정교전투가 있은후 홍군은 장정로정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의 하나인 대설산과 협금산을 련속적으로 돌파하고 감숙평원에 들어섰다.

우리는 그때 장강이 범람하여 몇십만명이 죽었다거나 대만어디어디에서 지진이 일어나 몇천채의 집이 파괴되였다는 식의 비극적인 소식보다도 브류쎌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거나 모스크바에서 지하철도가 개통되였다거나 2만5천리장정을 개시한 중국홍군이 어느 지점을 통과했고 어떤 지역을 점령했다는 식의 랑만적인 소식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가 로야령을 넘은것은 장정중의 홍군이 대설산을 돌파한것과 같은 거사였다. 대부분의 원정대원들은 휴식구령이 떨어질 때마다 피곤을 이겨내지 못하여 아무데나 쓰러져 로독을 풀군 하였다. 쉴 참이면 사방에서 코를 고는 소리들이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배고픈것과의 타협이 힘든것처럼 자고싶은것과의 타협도 역시 쉽게 이루어질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원정대원들중에는 행군강도가 높다고 불평하거나 행군속도를 늦추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가 지휘관들의 구령에 따라 치차처럼 어김없이 규칙적으로 움직이였다. 우리가 사전에 정치사업을 충분히 한것만큼 그들은 북만원정의 목적도 잘 알고있었고 따라서 만난을 타개해나갈수 있는 튼튼한 정신적 준비도 갖추고있었다.

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로 될수 있는 대지는 로야령이남의 동만땅과 남만지방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인민혁명군이 자기의 발상지이고 보금자리인 동만을 떠나 유격구해산후의 첫 원정후보지를 북만으로 정하고 숨가쁘게 로야령을 톺아오르게 된 거사에는 어떤 동기가 작용하고있었는가. 그 어떤 정치군사적요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 있는 북만주로 원정대를 이끌고 갈 결심을 내리게 하였던것이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북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 련대성을 강화하고 그들과의 전면적인 협조, 협동, 협력의 길을 터놓기 위해서였다.

동만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 령솔자, 주창자의 대부분이 조선사람들이였던것처럼 북부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개척한 주동인물들의 대부분도 다름아닌 조선사람들이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북만의 유격운동을 개척하는데서도 선구적이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주보중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동북혁명을 위해 바친 조선사람들의 로고와 업적을 격찬하였다.

 <1930년 당시 동북 각 지방의 현당위원회 비서들과 구당위원회 비서들은 대부분 조선동지들이였소. 연변의 여러 현들은 말할것도 없고 녕안, 발리, 탕원, 요하, 보청, 호림, 의란 등 북만 여러 현의 당위원회 비서들과 현당위원들도 거의나 조선족간부들이였단 말이요.>

항일혁명이 최후단계에 돌입하고있던 어느 해 봄날 나와 함께 아무르강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하바롭스크주변의 북밀영모래터를 산책하던 그는 항일련군시절의 공동투쟁의 나날을 감회 깊이 돌이켜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조선동지들의 업적을 떼놓고서는 항일련군의 발전력사도 운운할수가 없소. 2군의 90%이상이 조선사람들이라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고… 1군, 3군, 4군, 6군, 7군의 시초를 열어놓은 주인공들도 리홍광, 리동광, 최용건, 김책, 허형식, 리학만과 같은 조선동지들이 아니겠소. 로위와 양정우가 희생된 다음부터는 김일성사령이 여러해동안 2군은 물론, 1군까지 통솔하면서 항일전쟁을 령도해 오고있는데…동북혁명의 주인들인 우리로서는 사실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싶은 때가 많소. 우리는 항일전쟁이 끝난 다음 동북땅에 조선족출신렬사들의 기념비를 꼭 건립하려고 결심하였소.>

주보중은 항일전쟁이 끝난 후 실지로 길림성당위원회를 통하여 길림과 연변 지구에 조선족출신렬사들의 기념비를 세울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조선사람들은 북만주지방에 가서도 일만관헌들과 토착지주들에 의해 우마와 같은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송료평원을 비롯한 일망무제의 대평원들과 황무지들로 이어진 남북만의 광야는 년산 수천만톤의 알곡소출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대곡창지대였지만 여기서도 조선의 가난한 교포들과 개척민들은 사시장철 식의주걱정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전직후 어느 간소한 연회석상에서 나는 리영호가 어린시절 북만에서 체험했던 기아를 회고하며 눈물을 짓던 광경을 목격한적이 있다. 리영호네 일가가 오인반인가, 삼차구인가, 요하에서 살 때였다고 하니 아마 1915년 전후였다고 생각된다. 절량의 고통에 시달리던 그들은 양배추줄기로 한해 가을을 연명하였다고 한다. 그 변변치 못한 음식도 처음에는 꿀처럼 달았다는것이다. 그러나 사흘을 내처 먹고 나니 구역질이 나기 시작하였다. 어린 영호는 부모들의 눈을 피해가며 그 ??한 음식물을 무릎아래에 모조리 뱉아버리고 죽물만 마시군 하였는데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더라고 하였다.

그 시절의 리영호는 가난덕으로 바지도 쌀포대로 해입었다. 복판에 <白米>(백미)라는 남색글자가 큼직하게 찍혀져있는 포대였는데 안팎의 고려가 없이 재단을 아무렇게나 한탓으로 그 두 글자는 바지를 만든 다음에도 오른쪽가랭이바깥에 그대로 남게 되였다. 그렇지만 어린 영호는 그것을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그 글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그것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 어떤 신비한 표적처럼 감수하면서 눈에 익혀두기까지 하였다. 괴이한 글자가 찍힌 단벌바지를 매일같이 입고 다니면서도 불쌍한 영호는 그 글자가 말해주는 흰쌀밥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채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것은 북만주교포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빈궁의 일단이다.

일찍이 리돈화도 잡지<개벽>에 <남만주행>이라는 글을 쓰면서 만주에 가보니 마적들이 득실거리고 그 행패가 심하더라고 하였지만 북만은 동만이나 남만보다 마적들의 행악질도 더 우심하였다. 그것은 <토벌대>를 끌고 무시로 달려드는 일본군이나 위만군에 못지 않은 우환거리였다. 북만의 호적들은 살인을 식은죽먹기로 하였다. 비수와 단총으로 무장한 수백명의 호적들이 갈가마귀떼처럼 달려들어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할 때마다 우리 교포들은 공포와 불안에 쫓겨 부단히 거주지를 옮기였다. 호적들은 돈을 위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인질로 끌어가군 하였다. 깊은 산속에 사람들을 끌고 가서는 귀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하나씩 잘라 인질의 집에 보내면서 이것이 당신네 아들의 귀다, 아무아무날까지 돈을 얼마만큼 가져오지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죽이겠다는 식으로 협박장을 보내군 하였다. 그런 협박장을 받은 집들에서는 억울한대로 가산을 다 털어서 아들을 구원하지 않을수 없었다. 호적들이 요구한 돈을 보내주지 않을 경우 인질로 잡혀간 사람들은 대체로 시체가 되여 집으로 돌아왔다.

북만은 결코 <왕도락토>도 아니였고 <오족협화>의 세계도 아니였다. 그 땅을 지배하는것은 오직 범람하는 사회악과 약육강식의 법칙뿐이였다. 조선민족은 이 고장에 와서도 일본의 고관들과 군벌들, 재벌들, 은행가들, 장사치들의 리익을 위해 봉사하는 머슴군으로 되고 부림소로 되였다. 이 저주로운 현실은 북만지방의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일찍부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항일구국전선에 떨쳐나서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간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북만에서도 조선의 선각자들은 일찍부터 공산주의운동을 주동적으로 개척하였다. 글깨나 아는 사람, 두뇌가 명석한 사람, 가수성이 민감한 조선사람들치고 공산주의운동에 뛰여 들지 않은 인물이란 거의 없었다. 똑똑한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공산주의를 유일한 신앙으로 삼고 타도 일제와 타도 지주, 자본가를 부르짖으며 혁명운동에 투신하였다.

북만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들은 1930년대초부터 일제를 힘으로 타승하기 위한 무력항쟁준비를 하였다. 보청현에서는 최용건의 지도하에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망라한 훈련반이라는것이 조직되여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위한 기초축성작업을 개시하였다. 명칭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이 훈련반은 장차 혁명군의 골간으로 될 청년들을 정치, 군사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사관학교였다. 내가 다닌 화성의숙에서와 마찬가지로 력사공부도 하고 전술학습도 하고 사격훈련도 하였다. 훈련반은 모두 10개의 중대로 편성되여있었는데 사령 겸 총참모장직은 최용건이 담당하고 정치위원직은 반직우(본명 김진우)가 맡고있었다.

 <천리행군>의 저자인 <비준수염> 김룡화도 이 훈련반에 망라되여 중대장을 하였다. 그에게 <비준수염>이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우리 나라에서 반미대전이 끝난 1950년대중엽이였다고 생각된다. 사회주의기초건설의 개시와 함께 우리 인민의 생활 양식에서는 몇가지의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두드러진것은 수염쟁이들과 긴머리패들, 까까중이머리들,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자취를 감춘것이였다.

나라가 바지를 어떻게 입고 머리를 어떻게 깎고 수염을 어떻게 밀라는 법령을 채택하지도 않았건만 인민의 생활에서는 이처럼 놀라운 변화들이 스스로 일어났다.

그런데 인민군병기창 창장인 항일투사 김룡화소장만은 유독 옛모습 그대로 안창호식코수염을 그냥 버젓이 기르고 다니였다. 몇몇 전우들이 그에게 수염을 밀어버리라고 권유하였다. 처자들과 상급일군들까지 달라붙어 열심히 <함화>를 들이댔지만 마이동풍이였다. 그는 오히려 아침마다 거울앞에 서서 더 극성스레 수염을 다스리군 하였다.

어느날 김룡화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수상님, 수상님께서는 저의 이 코수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멋있는 걸작품이라고 생각하오. 코수염이 없어야 김룡화가 아무리 잘난 사람인들 무슨 김룡화겠소. 나는 코수염이 없는 김룡화를 상상해본적이 없소.>

 <그렇다면 저의 이 수염을 비준하신단 말입니까?>

 <비준이라니, 인민이 수상한테 많은 권한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남들의 수염을 다스릴 권한까지는 주지 않았소. 결정권이야 룡화동무자신에게 달려있지. 동무가 좋다면 기르는것이고 나쁘다면 기르지 않는것이고…>

 <그러면 됐습니다. 수상님, 사실은 제 그동안 이 수염 때문에 단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어림도 없습니다.>

김룡화는 희색이 만면하여 내 방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몇 달후 그는 나를 만나러 오다가 그 코수염 때문에 내각청사를 지키던 호위군관에게 단속당하였다. 호위군관들은 외모가 거칠거나 위생문화를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내 방에 잘 들여보내지 않았다. 현관쪽에서 옥신각신이 벌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는 창문을 열었다.

 <군관동무, 웬일이요?>

 <소장동지더러 수염을 깎지 않으면 못들어간다고 했더니 그냥 <비준수염>이라고 우기십니다. 최고사관동지께서 수염을 비준해주셨다는게 사실입니까?>

호위군관은 미덥지 못한 눈길로 김룡화를 흘끔 일별하였다.

 <그런 문제라면 소장동지를 더 노엽히지 마시오. 그 수염은 불가침이요.>

그후부터 김룡화는 군대내에서 본명대신 <비준수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9살에 장가를 들고 11살에 보탑을 잡고 호주노릇을 하였으며 13살때부터는 홍범도의 련락병이 되여 수만명의 사상자를 낸 유명한 이만시격전에까지 참가한 전적으로 가진 로숙한 싸움군이였다.

보청의 훈련반은 처음에 순수한 조선청년들로만 조직되였다. 조선독립을 이룩하려면 조선사람들끼리 부대를 무어야지 이국인이 끼여들면 대오를 운영하는데서 잡음이 날수 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나니 그렇게 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수한 조선인구성은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련합에 난관을 조성할수 있고 또 중국인민들로부터 고립될수 있다는 목소리들이 점차 크게 울리여 훈련반조직을 주관한 사람들은 대렬속에 2명의 중국청년을 받아들이는데 이르렀다. 그런데 이 2명의 중국청년이 훈련도중 변절하여 적들에게 훈련반의 비밀을 고스란히 제공하였다.

훈련반은 검거선풍을 피해 보청으로부터 300리가량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새롭게 교사를 건립하였으나 거기서도 적들의 <토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해산되였다.

요하로 활동기지를 옮긴 최용건은 박진우, 황계홍, 김룡화, 김지명 등의 전우들과 함께 삼의툰소학교에서 70명 정도의 청년들로 훈련반을 다시 조직하고 훈련생들중에서 정치군사적으로 잘 준비된 정수분자들을 선발하여 주구청산, 군정간부호위, 무장공작을 기본사명으로 하는 적색특무대(일명 적색테로단)를 조직하였다. 후날 최용건은 그들을 골간으로 하여 요하공농유격대를 조직하였다.

탕원과 요하에서의 유격대조직을 전후로 하여 녕안, 밀산, 발리, 주하, 위하에서도 김책, 허형식, 리학만, 김해산 등이 이끄는 무장대오들이 련이어 태여나 어려운 항일장정을 시작하였다.

김해산과 리광림이 주보중과 함께 5군의 기초를 닦아놓은 사람들이라면 김책, 허형식은 장수건, 조상지와 함께 3군을 건설한 로장들이며 최용건, 리학만, 리영호, 안영, 최일 등은 리연록과 함께 4군과 7군을 조직하는데서 기수의 역할을 수행한 큰 공로자들이였다.

남쪽의 로야령으로부터 북쪽의 아무르강까지, 등쪽의 우쑤리강으로부터 서쪽의 대흥안령에 이르기까지 수십만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 북만의 광활한 판도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군가가 울리지 않은 고장이란 거의 없었다.

김책이 할빈동부와 동북부지방을 포괄하는 빈강일대를 중심무대로 하여 유격활동을 지도하고있을 때 최용건과 리학만은 완달산줄기를 근거지로 삼고 적의 집단부락들과 후방기지들을 들이치는 끊임없는 습격전을 전개하고있었다.

1930년대 후반기 허형식 김책, 마덕산과의 련합으로 서북원정대를 조직한 다음 익측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들과의 련계를 지을 목적밑에 해륜을 비롯한 여러 현들에 진출하여 이 지대들을 과감하게 개척하였다. 강건은 로령산줄기에 활동기지를 두고 목단강 좌우연안의 산악들과 개활지대들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적들을 맵시있게 족치였다. 애젊은 지휘관이였지만 총명한 두뇌와 지칠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있던 그는 전도가 촉망되는 군사지휘관으로 빨리 발전하였다.

북만지방의 유격운동을 심화발전시키는데서 간도출신 투사들이 준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고 말할수 있다. 동만에서 실천투쟁을 통하여 충분히 검열되고 단련된 김책, 한홍권, 박길송, 안영, 최일, 전창철 등의 투사들은 북만에 가서도 적극적인 조직자, 선전자, 지도자가 되여 항일전쟁의 어려운 돌격로를 헤쳐나갔다.

북만지방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동만혁명의 전반적발전과정을 항상 깊은 관심속에 주시하여 왔으며 동만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 련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꾸준하게 노력하여왔다. 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동만에 대한 소식을 정상적으로 입수하였다.

북만사람들에게 간도소식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여준 사람은 주보중이였다. 녕안에 활동기지를 두고 왕청에 자주 드나들던 주보중휘하의 5군 통신원들과 2군에서 5군, 3군, 4군, 7군, 6군, 8군, 9군 등 북만의 여러 부대들에 파견되여간 투사들도 동만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다.

길동국지도부(길동성위)도 동만을 소개하는 중요한 선전쎈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북만의 전우들은 바로 이 길동국을 통하여 동만지방에서 발간되던 적색계의 출판물들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같은 비밀문건들까지 입수하였다.

당시의 길동국은 동만과 남만을 북만에 련결시켜주고 북만을 동만과 남만에 련결시켜주는 교환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리영호도 요하현당에서 선전부장으로 일할 때 길동국에 갔다가 거기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정식으로 배포받았다고 한다. 그가 돌아가서 전우들에게 길동국을 통하여 수집한 동만의 자료들을 다 소개하였다. 그는 항일전쟁 때 그 문건원본을 분실한데 대해 몹시 아수해하였다.

북만의 전우들가운데서 우리에 대한 선전을 제일 적극적으로 한 사람은 김책과 최용건이였다. 그들은 인민혁명군대원들과 로동자, 농민들에게 우리가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서 내세운 총로선이 무엇이고 전략전술이 무엇이며 당면임무가 무엇인가를 정열적으로 해설해주었으며 우리의 전투성과와 도덕적풍모를 따라배울데 대하여 항상 강조하였다.

 <동만지방의 혁명투쟁은 지금 김일성대장의 지략에 따라 전진한다고 한다. 김대장은 젊은 지도자인데 민중의 총애를 받고있다고 한다. 지도자의 결핍을 느끼고있는 백의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품을 내여 한번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성사시킬수 있겠는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은 최용건이 요하유격대를 조직할 때 대원들앞에서 한말이다. 그는 나에게 편지를 네번이나 써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전달할 사명을 띠고 북만을 떠난 최용건의 련락원들은 한명도 나한테까지 와 닿지 못하고 중도에서 모두 희생되였다. 그들중 한사람만이 혈로를 헤치고 우리 부대의 황동구역인 돈화근처에까지 기적적으로 와 닿았는데 그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희생되였다. 만일 그가 적들에게 잡히지 않고 하루나 이틀만 견지하였더라면 나를 만나보았을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였더라면 나와 최용건과의 상봉은 1941년이 아니라 벌써 1930년대중기에 우리의 활동지역인 간도나 남북만 어느 지점에서 실현되였을것이다.

나는 1941년에 하바롭스크에서 김책과 최용건을 만나보고 몹시 놀랐다. 그들이 나의 생활경위와 가정래력까지 구체적으로 다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 두 사람은 지어 나의 볼에 있는 보조개와 덧이가 일본밀정들이 10년이상이나 찾아 헤매는 일확천금의 목표물이라는것과 나의 목에 수만원의 현상금이 걸려있다는것까지도 다 알고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잘 알고있는것처럼 우리도 물론 북만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하여 다방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김책이 내가 길림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손정도목사의 후원을 많이 받는데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면 나는 김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허헌의 방조를 많이 받은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혁명가들의 일생이니만치 그들의 경력이나 행로 가운데는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는 감동적인 사연들과 기상천외한 일화들이 많았다. 그 사연들이 담고있는 내용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과 공로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일수록 더 다채롭고 풍부하였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자들이나 건달군들한테야 무슨 들을만한 이야기 거리들이 있겠는가.

한번은 우리 부대의 어떤 통신원이 북만에 갔다가 7군군장 리학만이 11살이 다될 때까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전우들을 웃긴 일이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 앙천대소하였다. 엉터리도 분수가 있지 11살이면 장가도 갈 그런 나이인데 젖을 먹다니, 이것은 날조다, 꽝포다 하고 대원들은 통신원을 막 공격하였다. 나도 물론 통신원이 들려준 이야기를 과장된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후날 하바롭스크의 북밀영에서 리학만의 친조카인 리영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동무의 삼촌이 11살이 될 때까지 형수의 젖을 먹으면서 자랐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고 물었다.

리영호는 사실이라고 대답하였다.

 <형수의 젖을 먹었다면 영호동무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는 소리인데 그 덩지가 큰 삼촌이 동무가 먹을것까지 다 착취한게 아니요?>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리영호는 황황히 삼촌을 두둔하였다.

 <천만에요. 내가 그런 착취를 당할리 있습니까. 삼촌이 먹은것은 한쪽 젖뿐이였습니다. 나머지 한쪽은 내가 차지했으니까요.>

 <그것 보시오. 동무는 50%의 식량을 착취당했단 말이요. 2,8제도 아니고 3,7제도 아닌 그런 략탈을 당하고서도 삼촌을 두둔하다니.>

리영호는 나의 롱을 들으면서 눈물이 나게 웃어댔다.

 <나는 한쪽 젖만으로도 충분했답니다. 우리 어머니의 젖량이 아주 풍족했던것 같습니다. 나를 낳자 젖이 불어나서 내가 먹고 남은것은 그냥 짜버리군 했으니까요. 젖을 손으로 짜자면 아프기도 하고 또 끝까지 짜내지도 못하기에 하루는 할머니가 학만삼촌을 보고 우리 어머니의 젖을 좀 빨아주라고 분부했답니다. 삼촌은 분부대로 젖을 빨았습니다. 처음에는 빠는 족족 뱉아버리군 했는데 언제였던지 장난삼아 한모금 삼키고나서는 아주머니 젖도 어머니의 젖처럼 맛이 있구나 하면서 우리 어머니의 젖을 매일같이 빨아먹군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삼촌의 비위가 참말 보통이 아니구만.>

 <네, 성격이 아주 특이했지요. 석송이가 먹을 젖을 네가 다 먹으면 어쩌니 하고 할머니가 걱정하면 삼촌은 그러길래 한 켠 젖만 먹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군 했답니다. 석송이란 내 아명이였습니다. 내 나이 두살인가 세살 잡히던 해부터 삼촌은 젖을 뗐습니다. 그러나 내가 젖을 먹을 때면 우리 어머니앞에 앉아 늘 군침을 삼키군 했습니다.>

리영호는 그날 삼촌에 대한 일화들을 몇가지 더 소개하였다.

나는 리학만의 인간상에 완전히 매혹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된 몸이였다. 나와 리영호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졌던 1940년대는 북만의 항일대오에서 많은 사람들이 황야의 고혼으로 사라진뒤였다.

지난날 북만의 여러 항일련군부대에서 싸웠던 안영은 북만주의 산야에 묻고 온 전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며 눈물을 흘리였다.

하지만 우리가 태평구전투를 치르고 로야령을 넘고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 중 대부분은 살아서 북만의 광야와 산발들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맹호와 같이 무서운 기세로 적들을 쓸어 눕히고있었다. 바로 북만의 그 전우들이 우리와의 상면을 그처럼 절절하게 갈구하고 있었던것이다. 우리와의 협력을 위하여 뿐아니라 국제당과의 관계,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 중국인민과의 관계,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에게는 해명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많았고 풀어야 할 고충들도 많았다.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 하소연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우리가 동만에서 <민생단>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었다면 그들은 북만에서 그들대로의 문제 때문에 남모르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두번째 북만행을 다그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우리가 북만의 전우들에게서 바란것은 오직 하나 동족의 정뿐이였다. 반<민생단>소동은 사랑과 믿음의 륜리만이 지배하던 간도의 유격구들을 인정의 불모지로 만들어버리였다. 우리는 그 불모지에서 몇해동안 인정에 주림을 느끼며 그것을 오아시스처럼 그리던 사람들이였다. 로야령이 아무리 험준하다고 하여도 북만의 벗들을 향해 구름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정을 막을수는 없었다.

우리가 제2차 북만원정을 조직하게 된 또하나의 목적은 1차 북만원정을 통하여 이미 그 시초를 열어놓은 북만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적동맹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그들과의 공동투쟁을 더 잘하려는데 있었다. 반제반전을 지향하는 진보적인류와 사회주의력량의 진출앞에서 당황망조한 제국주의자들은 1930년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자주력량을 반대하는 국제적련합을 강화하고있었다. 인류를 세계대전의 참화속에 몰아넣을 운명을 타고난 히틀러독일과 무쏠리니의 이딸리아, 일본은 반공적이며 반평화적인 동맹의 결성을 서둘러댔다.

이러한 정세에서 항일혁명을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부합되게 발전시키려면 각국 공산주의자들, 특히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국제적련대성을 강화하는것이 초미의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수 없었다. 만주 각 지방의 항일련군부대들이 페쇄적이며 고립적인 활동방식에서 벗어나 서로의 련계를 강화하고 련합된 힘으로 적을 타승하라는것은 국제당의 일관된 요구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동부방에 조직된 여러 군의 력량은 고르롭지 못하였다. 지휘관들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각 군의 전투력과 준비정도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매개 군들은 익측에 있는 군들과의 련계가 없이 대체로 고정된 지역에 틀고 앉아 고군독전하고 있었다. 이런 분산성은 만주전역에 할거하는 유격부대들의 힘을 정황과 군사정치정세의 변화에 맞게 종합적으로 리용할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장차 매개 지역에서 페쇄적이고 고립적인 활동을 하고있는 유격부대들이 적들에게 각개격파당할수 있는 약점을 내포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실정에서 동만과 남북만에 존재하던 유격부대들은 다른 지방 유격부대들과의 련계를 모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주의 모든 유격부대들앞에는 고정된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들에서 한정된 지역을 보위하며 고립무원하게 활동하던 종전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지원하면서 군사정치활동을 보다 폭넓고 대담하게 전개할 전투적과업이 제기되였다. 이런 전략적과업을 수행함이 없이는 만주지방의 유격운동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끌어올릴수도 없었고 통일적으로 심화발전시킬수도 없었다.

반<민생단>투쟁과정을 통하여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사이에는 공동투쟁에 제동을 걸수 있는 불화와 불신이 조성되였다. 우리가 북만에 가서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을 잘하면 이런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깨끗이 가셔질수 있었다.

부대를 데리고 북만에 가서 몇 달동안 싸움을 하며 돌아다니느라면 모스크바에 간 위증민과 윤병도도 국제당의 결론을 받아가지고 돌아오게 될것이였다. 위증민과 윤병도를 만나는것은 우리가 설정했던 제2차 북만원정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였다.

로야령을 넘을 때 위만군의 반변사병들로 편성된 훈춘련대소속의 중대동무들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 산악행군에 숙달되지 못한 그들은 행군을 시작한 후 첫 2시간사이에 벌써 녹초가 되였다. 나의 명령에 따라 왕청련대의 장룡산이 그 3개 중대를 맡아가지고 반변사병출신 대원들의 행군을 거들어주었다. 전각루와 삼차구사이에서 떼목로동을 많이 해온 그는 워낙 힘이 장사였다. 장룡산의 치도가 한번씩 번쩍할 때면 잡관목이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 그는 두세사람몫의 총과 배낭을 혼자 메고서도 가파로운 령길을 씽씽 톱아 올라 갔다.

 <동무들, 이 령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을 가는것이 좋겠소. 두다리사이에 있는 <생원님>도 일찌감치 뚝 떼버리구요.>

그는 이런 롱질까지 해가며 동료들을 고무해주었다.

우리는 간난신고를 다하여 로야령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7월에야 산동툰부근에서 주보중의 처를 겨우 찾아냈다. 어제날의 수녕중심현위 군사책이였던 그의 어깨에는 항일련군 5군군장이라는 새로운 직함이 묵직하게 얹혀있었다. 여러달전만해도 지팽이를 짚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리를 맞아주던 주보중이 이번에는 지팽이를 던지고 밀영으로부터 10리나 떨어진 로천구라는 곳에까지 달려나와 나를 포옹하였다.

 <그동안 내 부상자리는 깨끗이 완치되였소. 동만원정대가 떠나간 다음 우리는 군을 새롭게 내왔소. 녕안땅에서는 그후부터 당조직과 대중단체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있소. 이건 다 김사령의 원정대가 지난해에 우리를 잘 도와준 덕이요.>

주보중은 우리가 묻기도 전에 흥분된 어조로 녕안실태를 단숨에 쭉 내리엮었다.

 <주형의 부상자리가 다 나았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오. 지나간 수개월은 마치도 주형을 위해서 흘러간것 같구만. 5군 군장으로까지 취임하였다니 축하할 일이 얼마나 많이 생겼나 말이요.>

나는 주보중을 이런 식으로 축하해주고 나서 평남양의 안부를 물었다. 북만땅을 밟고 보니 한해전에 싸움속에서 맺었던 정이 새삼스럽게 북받쳐올랐다. 한두달밖에 사귀지 않은 그 감때사나운 무인의 인상이 어린 시절의 죽마고우처럼 내 기억속에 듬직이 자리를 잡고있는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였다.

우리는 5군의 숙영지에 도착하기 바쁘게 공동행동문제를 가지고 주보중과 의견을 나누었는데 여기서 약간한 마찰이 생기였다. 주보중이 훈춘련대의 련대장인 후국충에게 동만원정대의 행동방향을 지령식으로 내리먹이려 한것이 동기가 되여 쌍방간의 대화가 얼마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던것이다. 그 당시 5군 정치위원이였던 호인은 부대를 데리고 목릉일대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주보중의 요구는 동만원정대가 목릉에 가서 호인을 도와 싸우다가 오하림지구에 진출하여 그곳을 장악해달라는것이였다.

그닥 어려운 부탁도 아니였는데 자존심이 강한 후국충은 단마디로 그것을 거절해버리였다. 아마 그 부탁이 부탁으로 들리지 않고 지시로 느껴졌던 모양이였다. 안길과 김려중도 그와 견해를 같이하였다. 우리에겐 우리대로의 원정목적이 있고 밟아야 할 로정도 따로 있는데 이래라저래라 할수 있는가, 5군은 5군이고 2군은 2군이다라고 하면서 막 골을 내였다. 그들이 그렇게 골을 내는것은 우리가 아니였다. 우리는 2군을 대표하여 북만에 온것만큼 공동투쟁을 한다고 하여 남의 지휘봉에 따라 무턱대고 움직일수는 없었다.

주보중은 빨찌산이 포나 충기관총과 같은 중무기를 가지고 다니는것은 유격전의 특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을 모험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긍정하면서도 중무기가 유격전에 적합한가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것은 좀 두고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원래 우리는 항일전쟁을 시작할 때 유격대가 사용하게 될 기본무기는 경무기로 되여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바가 있다. 그런데 태평구전투에서 박격포를 쏘아보고 그 위력을 가늠하게 된 다음부터는 유격전이라고 하여 중무기를 덮어놓고 쓰지 않을 필요가 없다는것과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는 중무기를 적절히 쓰는것이 큰 은을 낼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실지로 쏘련의 빨찌산들은 공민전쟁때 포나 막심중기를 사용한 전례를 가지고있었다. 부분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중국의 일부 유격대원들도 그 무렵에는 포를 리용하였다.

동만원정대가 포와 중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대하여 주보중이 모험이라고 한것은 지나치다고 볼수도 있었다.

나는 팽팽해진 분위기를 늦굴 목적으로 모두들 공동행동에 대한 구상을 더 무르익힌 다음에 다시 모여 앉아 량자가 다 접수할수 있는 대책안을 짜보자고 제기하였다. 주보중은 나의 제의를 흔연히 받아들이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는 북만부대들과의 련합작전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안을 연구하면서도 행군에 지친 원정대성원들의 휴식을 보장해줄수 있는 얼마간의 여유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

산동툰은 100여호의 농가들로 이루어진 중국인부락이였다. 산동툰이란 지명은 산동지방사람들이 모여사는 부락이라는데서 유래된것이였다. 적들은 이 부락을 봉쇄하느라고 마을로부터 15리 떨어진곳에 200~300명가략의 <토벌대>를 상주시키고있었다. 나는 산동툰에 가있을 때 녕안현당 서기와도 련계를 가지고 산동툰당조직과도 련계를 가지였다.

내가 산동툰부락에서 리연록군장을 만난것이 바로 이 무렵이였다. 그때 우리는 어떤 지주집에 거처를 정하고있었다. 집주인은 지주였지만 마음씨가 무던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손님들은 모두 그 집 일을 한가지라도 더 해주지 못해 애를 썼다.

어느날 우리는 집주인을 도와 밀가을을 하다가 밭에서 비를 만났다. 베여놓은 밀이 비에 젖지 않도록 낟가리를 잘 가려놓은 다음 숙소에 돌아오자 류한흥이 오늘은 날씨도 구질구질한데 점심이나 먹고 휴식하자고 하면서 여러가지 료리를 손수 만들어 푸짐한 음식상을 마련해주는것이였다. 나는 리연록이네 부대가 왕청에 와있을 때부터 류한흥이 뛰여난 음식솜씨를 가지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류한홍과 같은 중학출신의 지식분자가 전문료리사들도 깜짝 놀라게 할 음식솜씨를 가지고있다는것은 정말로 희한한 일이였다. 그는 료리솜씨도 대단하였지만 술도 잘 마시였다. 우리가 한잔을 하면 석잔쯤 마시는 대주가였다. 우리는 그가 만든 료리를 안주로 술도 마시고 밀제비국도 먹었다. 안주맛이 좋아서 그랬던지 그날은 나도 술을 몇잔 마시였다.

우리가 밀제비국을 한창 먹고있을 때 밖에서 갑자기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나가보니 밀북데기앞에 뱀들이 수십마리나 너부려져있는것이 보이였다. 집주인이 복뱀이라고 하면서 기르던 뱀들이였는데 수류탄벼락을 맞고 일시에 무리죽음을 당한것이다. 집주인은 뱀들이 집안에까지 들어와 밥상밑으로 기여다녀도 가만 내버려두었다. 그 지방에서는 뱀을 일종의 수호신처럼 여기는 미신적인 풍습이 있었다.

그날 마당에서 문전보초를 선것은 우리 부대에 배속되여 북만까지 따라온 청년의용군대원들이였다. 그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고있을 때 비가 멎고 해가 비치였다. 그러자 낟가리속에 움츠리고있던 뱀들이 북데기속에서 대가리를 내밀었다. 이곳 사람들이 뱀을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있다는것을 알리 없었던 우리 보초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앞뒤를 가릴 사이도 없이 무작정 수류탄을 뽑아 들고 뱀의 무리를 향해 던지였던것이다.

집주인 내외는 죽은 뱀들을 보고 몹시 상심해야 하였다. 그들은 불길한 재액의 조짐이라도 생긴것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주보중과 류한흥이 좋은 말로 위로하였으나 그들은 불안을 가시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식사도 채 하지 못하고 부득불 그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35년 7월하순 동만에서 <고려홍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백명의 위만군과 경찰대로 편성된 혼성기마대가 장마구름처럼 산동툰으로 모여들었다. 어림짐작으로 가늠해보아도 몇백명 실히 될것 같았다.

그 당시 5군의 주력은 목릉과 녕안현 서북방에 나가 있었다.

4군 군부의 병력도 얼마 안되였다. 수적으로는 적이 우리보다 2배 정도 우세한 셈이였다.

싸울것인가, 피할것인가?

주보중과 류한흥은 나의 의향을 물었다.

나는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4군, 5군과 우리와의 련합작전은 이처럼 탁상앞에서가 아니라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드는 적기마부대의 산개대형앞에서 가볍게 타결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강한 적은 피하고 약한 적만 치라는 <피실격허>가 옛성현들의 가르침이고 또 유격활동의 규범이기는 하였으나 그 적용에서 반드시 일률적일수 없었다. 북만에서 우리의 위력을 한번 과시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설정한 북만원정의 목적을 달성하는데서도 필수불가결한것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모든 정황과 지형조건으로 보아도 승산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한 협의끝에 곧 접전을 벌리기로 결정하고 전투행동을 개시하였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25 17:07:37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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