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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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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과좋아 작성일18-12-15 20:2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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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③

 

강진욱

 

푸에블로호 협상과 울진·삼척 작전 
   
앞에서 울진.삼척 사건의 3.4단계 작전이 서둘러 종결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유는 우선 울진.삼척 작전이 북-미간 푸에블로호 협상과 병행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두 사건의 종료 시점이 정확히 일치한다. 1968년 1월 23일 북이 나포한 푸에블로호 선원 82명과 시신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미국에게 인계된 날이 12월 23일이고, 12월 20일 경북 지역 을종사태가 해제된 데 24일 120명 ‘전원 소탕’으로 작전이 종료되고 25일 삼척 지역 을종사태가 해제됐다.
    
울진.삼척 작전 개시 역시 푸에블로호 협상과 병렬한다. 북-미간 푸에블로호 협상은 자그마치 26차례에 이르며, 북측 영해 침범 사실 인정 및 미국의 사과 문제를 놓고 10월 30일 24차까지 계속 공회전을 거듭하다 25차 협상에서 합의에 성공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발생 10여일 째인 1968년 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미 존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남을 기습 공격한 북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탄원”했다. 박 정권은 이후에도 미국 정부에 ‘북폭’을 요구했고, 미국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북측과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자 박 정권은 극도의 분노와 불만을 표시하면서 단독으로 보복적 군사행동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시작된 북-미 회담에서 미국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북측의 대담한 외교전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박 정권은 비밀리에 서해안 섬 지역과 동해 산악에서 북파공작요원들을 양성하며 대북 공격 기회를 획책했다. 
    
10월 10일 23차 회담에서 미국 측이 모종의 제안을 하자 북측은 “꼼수(petty strategem)” 부리지 말고 솔직히 사과하라는 입장을 견지했고, 10월 30일 24차 협상에서도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북측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바로 이날 ‘북괴 공비를 일망타진하는 작전’ 1단계인 ‘울진 사태’가 시작됐다.

 

 

( 북한이 나포한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 현재 대동강가변 전시돼 있다.)

이후 미국이 푸에블로호 협상에서 이렇다 할 묘수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 동안, 강원도 삼척 지구에 30명이 더 투입되고(‘삼척 사태’, 11월 13일 대간첩대책본부 발표)에 이어, ‘60명 소탕’이라는 대간첩대책본부의 ‘중간 전과 보고’(11월 30일)가 있었다. 
    
북미는 47일간 회담을 중지했고 12월 17일 25차 회담에서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한다. 이렇듯 미국이 북에 대해 영해 침범 시인과 사과 의지를 보이면서 북-미 협상을 종결지으려할 때 울진.삼척 작전도 서둘러 종결된 것이다. 
    
북한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북-미 간 푸에블로호 회담이 사실상 결렬됐을 때 울진·삼척 작전이 시작돼 온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미국이 다시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 채비하는 때에 맞춰 서둘러 울진.삼척 작전이 종료됐다.
    
울진.삼척 작전과 주한미군
    
이처럼 존슨행정부가 북한과의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하고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시기에, 우리는 북괴 무장공비(?)의 만행에 치를 떨며 ‘미국의 적’인 북을 성토하고 저주해야 했다. 미 국무부와 미군 당국이 북한에 대한 사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지를 놓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미국의 존슨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북한에 대한 ‘심리적 보복’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박정희 정권이 11월 30일 1.2 단계 작전으로 ‘공비’(?) 60명 전원을 소탕한데 이어, 불과 일주일 만인 12월 7일 울진과 삼척 지구에 투입된 인원 중 71명을 ‘소탕’하고 20∼25명의 잔비(殘匪)를 추격 중이며, 북괴군(?) 소위와 중위, 대위급 장교 5명이 두 차례로 나눠(2명, 3명) 생포했다고 발표하는 등 반북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선전과 선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또 사흘 뒤인 12월 10일, 미국 측이 소집한 군사정전위 제282차 회의에서 미국 측이 생포 간첩들(?)의 사진을 회담장 밖에 전시하며 북한을 몰아세우는 분위기를 연출한 것 역시 그런 선전과 선동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2월 17일, 미국은 북측에 푸에블로호 관련 ‘시인과 사과’의 해법을 제시했고, 이런 분위기에 맞춰 울진.삼척 작전도 마무리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12월 20일 갑자기 경북지역 을종사태가 해제되면서 그때까지 한창 기세를 올리던 대간첩작전이 급하게 마무리되는 수순을 밟은 것은 박 정권과 미국 또는 미 군 당국의 전략적 공조(또는 공모)를 시사한다. 
    
박정희 정권이 12월 7일 71명 소탕에 20∼25명 잔비 도주 중이라고 해 놓고 12월 20일 ‘96명 완전 소탕’ 운운하며 서둘러 작전 종료를 선언한 것은, 푸에블로호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12월 17일) 뒤 한-미 정부 및 군 당국 사이에 모종의 협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울진·삼척 사건의 시작과 종결이 북한과 미국 사이의 푸에블로호 협상과 동시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옥주간(hell week)] 12월 12일부터 시작된 가혹행위(brutality)가 날로 심해졌다. 우리는 얻어맞고, 채였다. 그들은 널빤지로 우리를 때렸으며, 오금에 막대기를 낀 채 무릎을 꿇리고 막대기 끝에 올라섰다 내렸다 했다. 12월 19일 갑자기 체벌이 중단됐다.(Abruptly, the punishment ended on December 19.(<미국의 역사>(United States History)(http://www.u-s-history.com/pages/h1869.html)

 

미국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12월 19일 갑자기 중단된 이유는 바로 그즈음 미국과 북한 사이에 포로 석방에 대한 최종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북한에 나름의 ‘사과 해법’을 제시하고 북측이 이를 수락한 때가 바로 12월 17일 열린 제25차 회담에서였다. 포로로 잡은 미군들을 놀려대고 괴롭히던 북한 병사들은 더 이상 미군들에게 가혹행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나포 직후 손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

 

 

(포로 신세인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울진·삼척 사건과 미군이 개입 또는 관여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지만 방증 자료는 있다. <Investigation of Korean - Americans> 라는 제목의 리포트가 그것이다.(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 10월 31일 작성한 이 리포트는 총 400여 쪽 분량의 방대한 자료로 2차 세계대전과 조선의 해방, 분단과 6.25 전쟁 시기로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미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이 리포트는 57쪽에서 울진·삼척 사건에 대해 1968년 “11월, 8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게릴라 부대가 남한 해안에 상륙했다”며 “미국과 한국 정부가 이들을 소탕하는데 몇 주가 걸렸다”고 서술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함께 작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이 보고서가 유일하다.

작전 종료 발표 당일 유공자 환영 ‘자화자찬’
    
울진.삼척 작전을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함께 펼쳤다는 지적은, 이 작전이 북-미 간 푸에블로호 협상과 병행했으며, 이 협상 일정에 맞춰 작전을 서둘러 마무리했다는 사실에도 부합한다. 그렇게 한-미가 짝짜꿍이 돼 벌인 작전이 성료(?)됐다면 응당 대대적인 환영식을 마련했을 것이다. 
    
실제로 경북 지역 을종사태 해제를 발표한 12월 20일 서울시민회관에서는 ‘대간첩작전 향토예비군 유공자 환영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어떻게 작전이 종료되는 날 이런 거창한 환영대회가 열릴 수 있을까? 이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귀환에 맞춰 ‘북의 남침(?) 전쟁’을 방불케 했던 어마어마한 군사작전이 대성공을 거뒀다는 거창한 쇼가 필요했을 것이고 , 이런 예정된 일정에 따라 군 작전을 서둘러 종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간첩작전원호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일권 총리가 주재한 환영식에는 정부요인과 외국 사절 및 3천여 명의 서울 예비군 및 시민들 참석했고, 공비 소탕에 나섰던 67명의 향토예비군들에게 보국훈장(9명)과 보국포장(12명), 대통령 표창(4명), 국무총리표창(5명)이 수여됐다. 이밖에 29명의 예비군이 내무, 국방장관과 중앙정보부장 원호처장의 표창과 부상, 기념품을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는 또 친일시인 모윤숙(毛允淑)이 애국시민들의 공적을 찬송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표창을 받은 예비군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를 베풀었다.
    
이처럼, 외국사절들까지 불러 예비군 유공자 표창식을 거행하는 일은 최소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해야 열 수 있는 행사이다. 경북 지역에 을종사태를 해제하는 것 역시 작전을 종료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서둘러 군 작전을 종료하고 재빨리 피날레를 멋있게 장식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곧바로 ‘상상을 초월하는 전과’에 대한 선전이 시작됐다.

지난 11월 2일 밤 무장공비가 울진 지구에 첫 침투 이래 대간첩작전이 거둔 전과는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12월 24일 현재 공비 사살 106, 생포 5, 자수 2명 등 도합 113명을 소탕.. 하루 2.2명 이상을 잡은 셈.. 이는 1.21사태의 1일 2.5명 사살과 맞먹는 것으로서 산악 지대의 게릴라 섬멸 작전으로서는 과거 전사에 비하더라도 기록적인 戰果(전과)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작전을 통하여 군.경.민(軍.警.民)의 완전 입체적 협동의 우수성을 보인 것 .. 향토예비군의 탁월한 기능을 발휘.. 향토예비군이 조직된 이래 이번 첫 작전은 하나의 테스트라 할 수 있었던 .. 예상 이상의 작전을 수행.. 百萬大軍(백만대군)의 자신을 갖게 된 것 ..[인용](『경향신문』「을종(乙種)사태 전면 해제」 1968년 12월 25일)

장장 두 달 간 계속된 괴기스러운 참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화자찬이 눈에 거슬린다. ‘하루 2.2명 사살 전과’와 ‘각하’의 명령으로 1968년 4월 급조된 향토예비군의 ‘놀라운 성과’! 무려 120명에 달하는 ‘무장공비’(?)가 침입했다며 온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한 이유는 바로 ‘군.경.민(軍.警.民)의 완전 입체적 협동’ 즉, 국민적 단결력을 높이고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12월 25일 자 신문이 ‘을종사태 전면해제’를 밝혔지만 12월 28일에도 공비 잔당을 소탕했다는 보도가 있고, 이후에도 여러 날 작전이 이어졌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간첩대책본부는 채 끝나지도 않은 작전이 다 끝난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말이다. 연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을 내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울진·삼척 사건과 ‘브라운 각서’의 상관성
    
울진.삼척 사건은 미국을 위한 작전만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을 위한 작전이기도 했다. 이 사건과 박 정권과의 상관성,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 정권에게 ‘북의 남침 작전’이 필요했음을 의심하는 근거는 ‘브라운 각서’다. 브라운 각서란 1966년 3월 7일 주한미국대사 W. G. 브라운이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에게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 파병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며 건넨 문서로,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든 더 많은 군비 및 군 장비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미국을 졸라댔다. 
    
특히 1967-1968년 기간에 박정희 정권은 ‘북괴 위협론’을 과장하고 심지어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을 조장하면서까지 미국으로부터 예산과 장비를 얻어내려 했고, 미국은 이런 박 정권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국군 파월에 따른 미 측의 14개 보장조건(「브라운」각서)이행을 검토 중인 한·미 공동상무작업 반은 ... [이행] 평가기준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심각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양국정부에 제출할 1차 보고서를 금년 안으로 작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67년 11월] 30일 한 외무부당국자는 “보고서 작성을 위한 합동회의가 금주 안으로 열릴 예정이었으나 무기 연기되었다”고 ... 지난 [1967년] 9월 5일 구성된 한·미 공동실무작업 반은 당초 9월말에 1차 보고서를 양국정부에 제출키로 했었으나 미 측은 보장조건의 총체적인 이행도를 96%라고 주장한 반면 한국 측은 국군장비현대화는 40·7%, 대간첩작전능력 개선은 2·7%라고 미 측의 주장과는 현격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 (「브라운각서 이행 평가기준 싸고 한·미 견해 상반 -보고서 연내 작성 난망」『중앙일보』1967.11.30)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 한미 간 이행 진척도에서 첨예한 견해차를 보이는 부문이 바로 대간첩장비 분야였다. 박 정권은 ‘대간첩장비가 모자라 북괴 간첩이 한국과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1967년 내내 대간첩작전대책본부를 마련한다, 대간첩대책 비상회의를 연다하며 부산을 떨었다. 그러면서 1968년이 되면 북괴 무장 유격대가 떼로 몰려올 것이라는 예언을 밥 먹듯 했고, 이런 예언을 실현하기라도 하듯, 1968년 초와 말에 1.21 사건과 울진.삼척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울진·삼척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인 1968년 11월 15일 국내 신문들은 “울진·삼척 지역을 통한 대량 무장공비 침투를 계기로 해상방어 태세 강화를 위해 추가적인 대간첩작전 장비 도입을 위한 대미 교섭을 진행 중”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경향신문』「해군 장비 강화 교섭」1968년 11월 15일) 
    
일과성이 아니었다. 이틀 전인 11월 13일에도 정일권 국무총리가 포터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대간첩작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울진·삼척 사태 해결을 제쳐놓고, 이들의 침투를 막지 못한 이유가 해안 경비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필요한 장비를 달라고 미국을 졸라대고 있었던 것이다.
    
11월 27일 오후, 대간첩대책본부에서 열린 정부 및 국회 관계자 연석회의 주요 안건도 미군으로부터의 장비 도입을 위한 대미 접촉이었다. 이 연석회의는 국방장관 주재로 내무·건설차관 합동참모회의 의장 각 군 총장, 해병대 사령관, 대간첩대책본부장, 치안국장 등 정부 및 군 관계자와 국회 공비소탕지구 시찰 의원 등이 참석, 3시간 반에 걸쳐 열렸다.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 나서야 할 사람들이 정말 한가롭게 미군 장비 도입을 위한 대미 접촉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참석자들은 대공비작전의 전반적인 재검토를 했으며, 특히 추가 군원[군사원조] 1억 달러 중에 포함된 헬리콥터 도입, 함정 통신시설 개선, 향토예비군 무기 공급 등 대간첩작전 장비 도입이 늦어지고 있음이 지적되어 이의 빠른 도입을 위한 대미 접촉을 촉진키로 했다.(『경향신문』「대간첩대책 정부·국회 연석회의 - 추원(追援)에 포함된 장비 도입 지연」1968년 11월 28일)

11월 30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따르는 민주공화당이 당무회의를 열고 대간첩작전용 쾌속정 등을 확보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결하기도 했다. 무장공비들이(?) 떼로 나타나 울진과 삼척 일대를 휘젓고 있다고 떠벌리면서, 뒤로는 쾌속정 타령이나 모금운동 운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2월 10일에는 진필식(陳弼植) 외무차관이 래드람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북괴 도발행위 대처를 위한 대간첩 장비 도입’ 등 방위력 강화 문제를 협의했고, 군 내 퇴역 예비자들의 모임이었던 합동참모회의도 대간첩장비 현대화를 위해 한 목청 거들어야 했다.
    
이때는 바로 유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울진과 삼척 지구에 투입된 인원 중 71명을 ‘소탕’하고 20∼25명의 잔비(殘匪)가 도주 중이라고 밝힌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동아일보』「무장공비 또 3명 생포 - 모두 71명 소탕. 잔비 20여명 추산」1968년 12월 7일). 11월 30일 ‘중간 전과’를 발표에 이어, 3단계 작전이 한 창 진행 중일 때였다.  
    
이 나라 위정자들은 국난의 위기 속에서도 오로지 군 장비 현대화를 위한 추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더 열성으로 미국에 매달렸고, 마침내 미국은 헬리콥터와 소총 등 ‘대간첩장비’를 제공했다.

육군은 [1968년 12월] 12일 O대의 헬리콥터(UHID형)를 미국으로부터 인수, 편성을 끝낸 육군 헬리콥터중대(중대장 공석환(孔錫煥) 소령)에 …… 공비소탕작전을 강화시키기로 했다. 육군 헬리콥터중대는 미국에서 이미 훈련을 끝낸 조종사 OO명과 주월 100 군수 헬리콥터중대에서 귀국한 조종사들로 편성됐다. 육군은 창군 이래 최초로 헬리콥터중대를 보유하게 됐는데, 내년에 OO대의 헬기를 새로 도입, 전력을 강화시키기로 했다. …… 2차전 당시의 소화기 M1소총을 장비하고 있는 한국군의 소화기 교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결실, …… 김계원(金桂元) 육군참모총장은 12일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1차로 OOOOO 정의 M16 소총을 정식 인수한다. …… 국방부는 그동안 .. M16 소총을 한국군에 지급토록 요청해 왔으며, 이번에 1차로 도입된 M16 소총은 추가 군원 1억 달러 중 대간첩작전 강화를 위한 장비의 일부로서 들여 온 것이다.(『경향신문』「헬리콥터 타격중대 창설 - 대간첩작전 부대에는 M16 소총 공급」1968년 12월 11일)

그래서였을까, 12월 16일 오전 열린 제 71차 합동참모본부 회의 분위기는 자못 의기양양했다.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소탕에 여념이 없어야 할 유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과 각 군 관계 참모장성들이 참석한 이 회의 주요 의제는 ① 북괴 도발에 대응할 군사적 방책을 비롯 ② 연내 발족될 것으로 보이는 동해안지구통합사령부 설치에 따르는 문제 ③ 울진·삼척 지구 공비 소탕에 따르는 작전 상황의 분석 ④ 대간첩작전 장비 강화 및 해군OO경비부(警備府) 신설 ⑤ 기타 해안선 경비 강화 문제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동아일보 』「제71차 합동참모회의, 간첩 작전 장비 강화 협의」1968년 12월 16일) 
    
미국은 이처럼 남한에 대한 군 장비 현대화 지원 결정을 내린 뒤 12월 17일 북한과의 회담에서 푸에블로호 선원 송환 문제에 합의했고, 곧바로 박정희 정권은 울진·삼척 사건을 마무리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12월 20일 울진과 영양, 봉화 등 경북 지역에 내려졌던 ‘을종사태’가 해제된 것이다. 한국 정부와 군 당국의 움직임으로 미뤄볼 때 ‘울진·삼척 사건’은 - ’1.21 사건‘과 마찬가지로 - 미국에 ’브라운 각서’ 이행을 촉구하며, 한국군 현대화와 군사 원조를 늘리기 위한 ‘전술행동’이었다는 의구심을 피하기 어렵다.

베트남전쟁과 울진.삼척 사건    
    
1968년 울진.삼척 사건을 박정희 정권 - 및 주한미군 - 의 ‘전술행동’으로 의심하게 되는 정황은 또 있다. 1966년 한국군 맹호부대에 의한 ‘민안 학살’을 시작으로 1968년에는 2월 ‘퐁닛퐁넛 학살’과 3월 미군에 의한 ‘밀라이 학살’ 등 침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만행이 계속되면서 미국 정부가 이를 문제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처럼 이 해 초부터 여름과 가을을 지나는 동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이 빈발하면서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가 한국군 주월사령관 채명신(蔡命新) 에게 책임을 묻기에 이르렀다. 미군 탈영병이 늘어나고 반전운동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베트남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박정희 정권에게 큰 악재다. ‘사람 목숨 값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베트남 침략군 미군이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들고 있다.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웨스트모어랜드가 채명신에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처음 보낸 것은 퐁닛퐁넛 학살 두 달 보름 만인 1968년 4월 29일이었다.(이때는 박정희 정권이 1.21 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 대한 보복을 가해야 한다며 미국을 공박할 때였다. 미국 정부 또는 미 군 당국은 박 정권의 대북 보복 및 응징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문제삼았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전쟁범죄에 관한 주장이나 불만이 제기되었을 때 적절한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져 있습니다. 이 지시는 제네바협약의 서명국으로서 미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1968년 2월12일 꽝남성 디엔반구의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 사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 이 사건이 갖는 심각한 본질 때문에 나는 이 사건이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한겨레신문[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 (27) 민간인 학살. 2015.1.16)

채 장군은 어떻게 답변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한국군은 책임이 없다”며 “베트콩이 수시로 한국군 해병인 것처럼 위장하고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벌였다”("Viet Cong, at numerous occasions, had operated in the area, disguised in camouflaged uniforms similar to those normally worn by ROK Marine troops,")며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또 “민간인 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음모에 의해 따라 벌어진 잔인한 사건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We) conclude that the massacre was an act conspired and mercilessly (carried out) by the communists.")며 거듭 한국군의 책임을 부정했다. (※베트콩이 한국군처럼 위장하고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거짓말은, 울진.삼척 사건에 투입된 120명의 ‘북괴 무장공비’(?)는 바로 이북의 인민군으로 육성된 북파공작원들이었을 것이라는 의심과 일맥상통한다. ②에서 논했다.)      

 

 

(채명신 서신)

이처럼 한국군은 퐁닛퐁넛 학살에 대한 책임을 베트콩에게 떠넘기면서 책임을 회피한 뒤에도 계속 민간인을 학살했다. 1968년 10월22일 꽝남성 호앙쩌우 사건이 그것이다.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 6중대 1소대가 야간방어진지 구축 중 저격당하자 호앙쩌우 마을을 공격, 어린이 8명을 포함한 민간인 22명이 죽고, 어린이 11명 등 16명이 다쳤다. 한국 해병은 또 물소 13마리를 총으로 쏘아 죽였고, 주택 95채를 부쉈다. 
    
이 사건은 즉각 조사 대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서, 부도덕한 침략전쟁에 따라나서 현지 민간인을 수도 없이 학살하는 만행은 숨기고 감추고 거짓말로라도 국민들을 속여야 야 골칫거리였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몇 년이 지난 뒤에도 퐁닛퐁넛 사건과 흐앙쩌우 사건 등을 망라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이 - 또한 미국 또는 미군이 - 자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이면서까지 미국의 베트남 침략전을 계속해야 할 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1.21 사건이었고 울진.삼척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이(들) 사건을 북한 유격대의 남침 사건으로 봐야 할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는 국내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철저한 보도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외신의 보도였다. 1970년 1월10일 <뉴욕 타임스>는 ‘한국군이 수백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고, 주월미군사령부의 고위 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1971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도 중요했지만, 브라운 각서의 실행 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사이밍턴 위원회를 앞두고 나왔다는 점 때문에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닉슨 행정부도 긴장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 언론매체가 보도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고, 사이밍턴 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논의되지 않았다.(‘잠자던 진실, 30년 만에 깨어나다’, <한겨레21> 제334호, 2000년 11월15일) (④에서 계속)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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