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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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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과좋아 작성일19-01-30 10:4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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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④
 
박정희의 유체이탈… 울진.삼척은 별세계?
 
강진욱    


 

(①에서 다루지 않은 울진.삼척 사건의 뒷얘기와 보안사령부의 간첩조작 사례.)

박정희의 유체이탈… 울진.삼척은 별세계? 
    
삼척과 울진에 출현한 120명의 괴한들이 정말 북한 공작원이라면 이는 거의 전쟁과 다름없는 국난(國難)이다. 그랬다면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권 담당자들은 불철주야 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 박정희는 너무도 한가롭게 전국을 유람하듯 시찰을 다녔고, 그의 권력을 떠받치던 자들은 밀실에서 박 정권의 권력 연장을 위한 꿍꿍이에 여념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한가로운 권력정치 놀음과 삼척.울진 사태의 ‘이상한 동행’은 울진과 삼척에서의 공비소탕전(?)이 벌어지는 내내 계속됐다. 대간첩대책본부가 ‘중간 전과’를 발표한 11월 30일 서울시민회관에서는 ‘수출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박 대통령의 치사는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1970년 10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산업시설 현대화, 기술 개발, 경영관리 개선, 양산체제, 해외시장 개척 등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온 국민의 일치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오늘날 수출전쟁, 무역전쟁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계 각국이 수출증대를 위해 정부와 업계는 물론, 온 국민이 수출증대의 역원(役員)이 되어 줄 것”을 당부했다.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괴의 도발’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연설은 무장 괴한들이 난동을 부리며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상황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이런 태연자약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말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북괴가 적화통일하기에는 대한민국의 국력이 너무나 커졌고, 국방력이 강화됐으며, 국민의 정신무장이 단단해졌다”며 “북괴가 전면전쟁을 도발하거나 경제건설로 이기자는 생각은 모두 자멸을 초래하고 스스로 위기를 자초해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은 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북괴 도발의 준비를 늦추자고 하는 것이 아니며, 일면 건설, 일면 전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는 것이 승리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울진.삼척 사건이 곧 정리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때도 대통령 박정희는 울진·삼척 사건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거의 유체이탈 화법이었다. 
    
그는 이날 중앙부처 장관 및 시도지사 연석회의에서 “북괴는 70년대 적화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미 행동을 개시, 영동지구에 침투한 무장공비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1단계 공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각 지방의 대간첩협의회는 보다 더 능률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해야 하겠고, 향토예비군이 가진 국방의 저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지방장관들이 그 육성 지도에 직접 앞장서라”고 덧붙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란의 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미건조함과 제3자연의 극치다. 1970년에는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니 울진.삼척 사태를 교훈삼아 잘 대비하라는 태연자약은 가히 엽기적이다.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이승복 어린이 참살 사건(12월 9일)이 조선일보 사회면에 대서특필된 12월 11일 박 대통령은 부인 육영수 씨를 대동하고 광화문 문복원(文復元) 준공식에 참석해 자신의 친필 헌판을 제막했다. 글씨가 볼품이 없어 곧 ‘바꿔치기’되는 바로 그 현판이다. 대통령은 광화문 석축과 문루 등을 20여분 동안 둘러본 뒤 “문화재위원들이 목재로 짓자는 것을 내가 콘크리트와 철근만을 쓰게 했다”며 “이 석축들은 천년은 갈 것”이라고 흐뭇해했다고 당시 신문들은 전했다. 참으로 한가롭고 여유롭지 않은가!  
    
경북 지역 을종사태가 해제된 다음날인 12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수·경인고속도로 준공식에 참석해 “오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속도로의 일부가 준공된 것을 모든 국민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달 간 계속된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 온 국민이 공포에 떠는 가운데서도 대통령은 시종일관 오불관언 초연함을 견지하고 있었다.

 

 

(1968년 12월 21일 경인·경수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1단계) 개통식에서 샴페인을 고속도로 바닥에 뿌리며 기뻐하는 박정희 대통령. 울진.삼척 작전 완료를 기뻐한 것일까?)

대통령은 더 이상 무장공비(?)는 출현하지 않을 것이고, 이미 투입된 이들은 삼엄한 포위망에 갇혀 있으며, 이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으로 작전이 종료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증좌 아닌가? 울진.삼척 작전은 나흘 뒤 종료된다.
 
동해지구의 공비는 완전 섬멸의 단계에 들어갔다. 지난 20일 경북 울진(蔚珍), 양양(英陽), 봉화(奉化) 지구의 을종(乙種)사태를 해제한 대간첩대책본부는 25일 자정을 기하여 강원도 삼척(三陟), 정선(旌善), 영월(寧越) 지구의 을종사태를 해제함으로써, 공비 침투 51일 만에 을종사태의 전면해제 …… (『경향신문』「을종(乙種)사태 전면 해제」1968년 12월 25일)

왜 장교들만 생포되고 자수했을까?
    
울진과 삼척에 침투한 무장공비(?)는 10월 30일과 11월 1일, 11월 2일 모두 세 차례로 나눠 15명 단위 8개조 총 120명이 투입된 것으로 돼 있고, 이 중 체포 또는 자수자 7명을 제외한 113명 전원이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가 우왕좌왕하다 모두 사살되는 정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자수 또는 생포자는 모두 소위나 중위 또는 대위 등 장교들이라고 대간첩대책본부는 밝혔다. 왜 장교들만 생포되고 자수했을까? 이들은 15명 단위의 각 조 조장 또는 분대장이 있을 것이다. 왜 이들만 살아남고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사살됐을까?
    
이들은 각 단계별로 새로 작전이 시작된 직후 체포됐거나 자수했다. 이들 ‘생포 장교’(?)들은 아군 작전에 매우 협조적이라고 어느 신문은 전했다. ‘생포 장교 5명’ 중 가장 먼저 붙잡힌 2명은 정동춘(鄭東春)과 고등운(高登雲)으로 각각 24살과 26살이며 소위와 중위라 했다. 
    
그런데 작전 개시 일주일여 만인 11월 9일 생포됐다던 정동춘의 생포 경위는 11월 16일에야 신문에 실렸고, 고등운의 생포 경위는 아예 공개되지 않았다. 정동춘의 수상한 체포 경위를 보자.

울진·삼척 지구에 침입한 무장공비 가운데 최초로 생포된 정동춘(23. 북괴군 소위)은 지난 9일 오후 5시반 경 삼척군 OO읍 속칭 OO골에서 용감한 주민들의 릴레이식 신고를 받은 경찰과 향토예비군에게 사로잡혔다. 주인 김 씨가 나가 없는 사이에 집에 찾아들어 온 정은 김 씨 부인 양(梁) 모 여인이 작전 중인 군인으로 알고 “추운데 수고한다”고 말하면서 방문을 열어주었으나, 들어오지 않고 차례로 방문을 열어 아이들이 있는 것만 확인한 뒤에야 부엌으로 들어와 부뚜막에 걸터앉았는데 김 씨의 딸이 마침 물 길러 가는 것을 보자 “연락하러 가는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 신고하지 마시고 같이 이야기나 합시다”면서 불안한 듯 연신 두리번거리는 정의 수상한 거동에서 순간적으로 공비임을 알아차린 양 여인은 빨래를 거둬 오겠다면서 슬그머니 집을 빠져 나와 한 집 건너 10m 떨어진 반장 집에 연락, 반장 집에선 이장 집으로 뛰어가 경찰.향군 합동수색대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향토예비군 삼척 대대의 박중근(朴重根 .37.예비역 상사) 씨와 이종칠(李鍾七.28) 씨 .. 등 7명의 합동수색대는 막 저녁밥을 들려던 숟가락을 내던지고 정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포위했다. 이 때 정은 물을 길어 온 딸로부터 물 한 그릇을 얻어먹으며 “너의 엄마가 신고하러 간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방안에 있어 집중 사격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수색대원들이 생포하기로 마음먹고 “너는 완전 포위됐다. 순순히 나와라”고 소리치자 정은 엉거주춤 반쯤 손을 들고 부엌문을 나섰다... 이때가 오후 3시반 경.. 주머니 속에는 먹다 남은 삶은 옥수수 한 줌 가량이 있었으며, 무기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동아일보』「정동춘 체포 경위 – ‘포위’ 고함치자 체념하고 두 손 들어」1968년 11월 16일)

정동춘 자신이 연신 ‘신고’ 타령을 했다는 말이다. 어서 나를 좀 신고하라고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양 모 여인에게 ‘신고하지 말고 얘기나 하자’ 해 놓고, 그 이야기를 듣고 양 모 씨가 집을 나간 뒤에도 한가롭게 엉덩이를 붙이고 양 씨의 딸과 노닥거리다 체포되는 꼴이란! 또 잡힐 때는 무기도 없었다 한다. 그렇다면 정동춘은 처음부터 생포될 것을 전제로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정이 민가에 내려와 신고 타령을 하기 전의 행적 역시 그는 생포될 임무(?)를 띠고 투입됐음을 시사한다.  

 

공비 정[동춘]은 지난달 29일 조장 김 모가 지휘하는 15인조 공비와 함께 배편으로 O일 밤에 동해안 모처에 상륙했었다. 그 후 무엇 때문에 왔으며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고 지휘자 지시대로만 움직였다. 상륙한 후 OO지구 산 일대를 헤매면서 영하의 추위 속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태백산맥을 끼고 경북 OO지구까지 이른 것이 O일. 산에서 이틀 밤을 보내다 공비소탕작전을 벌인 군·경·향군에 걸려들었다. 아군의 추격을 받은 공비들은 점점 깊은 산으로 쫓겨 들어갔다. 정은 비행기에서 ‘귀순하라’는 비라를 주워보았다. ...김신조가 자수하여 편히 지내고 있다는 다른 비라도 보았다. 정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 다른 대원의 눈이 두려워 눈치를 보다 O일 밤늦게 대열에서 낙오했다. 변소에 가는 척 하면서 일행에서 빠져나온 정은 무작정 뛰었다. 혼자서 산을 헤맨 것이 5일간. 8일 밤 눈과 비가 내려 옷이 흠뻑 젖었다. 추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지고 있던 총을 땅에 묻고 산을 내려왔다.(『경향신문』「공비 2명 생포 - 비라 보고 투항 결심 - 북괴 124부대 소속 장교 정동춘·고등운」1968년 11월 16일)

 

북한의 특수부대 장교(소위)라는 자의 행적이 너무 신참 이등병 같지 않은가? 무슨 장교가 작전 개요조차 모른 채 이리저리 따라만 다닐까? 이 엄동설한에 ‘남조선 해방구’(?)를 건설하겠다는 자들이 월동장비나 무기도 변변찮은 오합지졸들이었을까? 북은 이런 자들을 해안으로 침투시킨(?) 뒤 영하의 날씨 속에 굶주림 시달리며 산 속을 헤매게 만들었을까? 
    
위 기사를 보면, 우리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라고 알고 있는 사건은 박정희 정권 담당자들이 1967년 내내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봉쇄 후 섬멸 작전’ 즉, 포위망 속에서 적(?)을 토끼몰이 하듯 일망타진하는 작전이었다는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특수부대원 120명 중 인솔자들만 일찌감치 산을 내려와 자수하고, 나머지는 토끼몰이 당하듯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죽어가는 작전! 120명 중 113명 사망에 7명 생포 또는 자수로 끝나는 ‘일망타진 쇼’를 벌인 것이 북한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유이다. 
    
대간첩대책본부가 11월 9일 생포됐다는 정동춘에 대한 정보를 11월 15일에야 공개해 16일자 신문에 실리게 하고, 그것도 언제 어디서 잡혔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는지 O란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17일 정동춘과 고등운 둘을 데리고 서울 시내 나들이에 나섰다.

 

정동춘과 고등운은 ...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활짝 웃었다. 이들은 소공동에 있는 대중탕과 이발소 등에서 말끔히 단장하고 S백화점에서 겨울샤쓰를 사 입었다. 이발관에서 정은 머리 스타일을 묻는 이발사에게 “남한동무들 처럼 해달라”고 대답했다...(“자유가 뭔지 알았다”『중앙일보』1968.11.18)

 

위 둘은 또 11월 2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을 때려잡겠다”며 허세를 부렸다.(대한뉴스 703호-북괴의 흉계는 이렇다. https://www.youtube.com/watch?v=0B5eJIi5k4g) 유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이 울진·삼척 작전전의 중간 전과를 발표하는 자리는 이들로 인해 더욱 빛나 보였다.
    
2단계 작전에서는 30명이 추가 투입된 뒤 장교(?) 3명이 체포됐다. 이형수(李亨洙. 24. 중위. 11월 27일 삼척지구 생포.) 김광춘(金光春. 25. 소위. 삼척지구 생포.) 김정명(金正明. 27. 소위. 11월 28일 삼척 북방에서 생포)(『동아일보』「무장공비 또 3명 생포 - 모두 71명 소탕. 잔비 20여명 추산」1968년 12월 7일) 
    
류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은 추가로 생포된 3명 역시 ‘북괴 124군부대 소속’이라며     3명의 자백을 통해 울진과 삼척 지구에 투입된 무장대원의 규모와 이들의 활동 상태가 모두 파악되었다고 밝혔다. 붙잡힌 자들을 통해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의 진상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면, 이들 다섯 명은 이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앞서 추리한 대로, 자신들이 인솔하던 부대원들을 정해진 지점까지 데려다 놓고 대열에서 이탈한 뒤 ‘생포되는 임무’를 수행했음에 틀림없다. 
    
12월 7일과 16일 두 명의 장교가 자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역시 ‘북괴 124군부대’ 소속으로 계급은 둘 다 중위, 이름은 조응택(趙應擇. 24)과 김익풍(金益豊. 27)이었다. 둘 다 ‘삼척 북방’에서 아군 OO부대에 자수했으며, 그 소식은 각각 12월 14일과 12월 20일 일반에 공개됐다. 
    
조응택은 11월 29일 본대로부터 낙오한 뒤 일주일간 산 속을 헤매다 12월 6일 저녁 7시 경 산을 내려와 자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문은 그가 자수자 1호라고 전했다.(경향신문 1968.12.14)

 

 

(조응택이 중앙정보부 기자회견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모습. 경향신문 제공. 이 사진이 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에 있을까?)

김익풍의 자수 소식은 12월 20일 대간첩대책본부는 경북 울진과 영양, 봉화 등지에 내려진 을종사태 해제를 발표할 때 알려졌다. 대간첩대책본부는 나흘 전인 12월 16일 강원도 삼척 북방 지역에서 잔비 1명이 작전 중이던 향토예비군 수색대에 자수했다고 밝힌 것이다. 
    
대간첩대책본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김익풍은 11월 8일 울진 지역에서 아군의 헬리콥터 사격을 받을 때 이탈, 아군 작전 부대의 포위망 속을 헤매다 12월 16일 하산, 삼척 지역의 독립가옥을 찾아 주인에게 ‘자수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경향신문』「울진(蔚珍). 영양(英陽). 봉화(奉化) 등 3지역 을종사태 해제」1968년 12월 20일) 11월 8일 대열에서 이탈한 뒤 12월 16일 하산해 자수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어떻게 엄동설한에 강원도 산 속에서 한 달을 버텼을까? 
    
앞서 11월 9일 생포됐다는 ‘정동춘 소위‘(?) 역시 대열에서 이탈한 뒤 5일간을 산속에서 헤매다 자수를 결심하고 산을 내려온 날이 8일 밤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다. ‘김익풍 중위’와 ‘정동춘 소위’는 같은 날 아군의 헬리콥터 공격을 신호로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다. 신문이 전한 ‘김익풍 중위‘(?)의 자수 당시 행적과 정황을 보자. 

 

김은 15일 밤 10시쯤 이 마을 권모 씨(33) 집 아랫방 문을 흔들었으나 문이 걸려 열리지 않자 다시 웃방 문을 흔들었다. 역시 이 문도 잠겨 있어 열리지 않자 “주인 계십니까” “날이 추워서 몸을 녹여 가야겠으니 문을 좀 열어주시오”라고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애걸, 권 씨 아버지 권 모 노인(68)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여는 순간 권 씨 부인 최 모 씨(25)가 무장공비임을 직감, 장남(2)을 업고 3백m 가량 떨어져 있는 경찰 및 예비군 초소에 신고했다. 신고를 한 최 씨는 김 모씨(34) 등 10[명]의 예비군과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예비군을 바깥에 잠복케 하고 방에 다시 들어가 권 노인과 옆방에서 콩을 볶아 먹고 있는 김 몰래 장녀 혁화(4) 양을 데리고 나왔다. 이 때 잠복 초소에 근무 중이던 유동순(柳同順) 순경(44)과 10명의 예비군이 위협 발사를 하고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겁에 질린 공비 김은 반응이 없었다. 다시 유 순경 등이 벽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유 순경은 “나오면 산다” “너희 동료인 고등운 등도 지금 살아 있으니 안심하고 나오라”고 거듭 설득했다. 거의 2시간 반 동안이나 승강이를 벌인 끝에 공비 김은 문을 열어 제치고 양팔을 들고 자수해 나왔다.(『경향신문』「울진(蔚珍). 영양(英陽). 봉화(奉化) 등 3지역 을종사태 해제」1968년 12월 20일)

 

대간첩작전본부의 발표대로라면, ‘김익풍 중위’(?)는 10월30일∼11월 2일 사이에 울진 지구에 투입됐다 8일 대열에서 이탈했고, 무려 5주일 동안 아군의 포위망 속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다 12월 16일 하산, 자수했다는 말이다. 아군의 포위망 속에서 5주 동안 이리저리 쫓겨 다닌 것을 포함, 작전에 투입된 지 한 달 보름 동안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는 11월 8일 자신이 이끌던 무리를 풀어놓고 대열에서 빠져 나온 뒤 어느 안가에 있다 12월 15일 자수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 틀림없다. 
    
12월 23일 오전 9시 중앙정보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생포 공비’(?)들이 보여준 언동 역시 초짜 연극쟁이들이 억지로 대본을 읊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고 작위적이었다. ‘북한 특수부대 전사 김익풍 중위’도 마찬가지이다.

 

삼척·울진 지구에 침투했다가 자수한 공비 김익풍(金益豊. 27. 중위. 124군 부대 정치부 소대장)과 생포 공비 김광춘(金光春. 25. 124군부대), 김정명(金正明. 27. 소위 124군부대), 이형수(李亨洙. 24. 상위. 124군부대) 등 4명의 기자회견이 23일 상오 9시 중앙정보부에서 열렸다. 이날 회견에서 金(김) 등 4명은 한결같이 “살인마 김일성 도당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서겠다”고 맹세했다. 오른팔에 총상을 입어 붕대를 감고 나온 김정명은 총상을 입고 쓰러진 후 국군병원에서 따뜻한 겨레의 피로(수혈) 살아났다고 울먹였다. 이들은 남침 후 저지른 양민학살이 모두 소위 사회안전성 정찰국장 김정태(43)의 지시로 저지른 것이라고 폭로하고 “내 동생같은 어린이들까지 무참히 살해한 동료들의 만행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후, 착잡한 심정에 빠진 듯 고개를 한동안 숙이고 있었다.[(『경향신문』「북괴공비 계속 남파 획책 - 자수 생포한 4명 기자회견서 폭로」 1968년 12월 23일)

 

어느 신문 기자가 보기에도 그의 행동이 어딘가 어색하고 수상쩍었는지 가십란에서 그의 행동을 자세히 묘사했다.

 

중앙정보부에서 열린 자수 및 생포된 무장공비 4명의 기자회견 …… 기자들 질문에 그들은 침착히들 이야기 …… 특히 김익풍은 군 작업복 위 포케트에 넣어 두었던 자수 당시의 비라까지 꺼내어 높이 쳐들곤 “이것 보십시오. 김일성이가 기만행위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하며 기자들에게 보이기까지 …… 이어 이형수(李亨洙)는 “저는 스물 세 살입니다. 나면서부터 김일성이에게 속아 살아왔습니다. 북한 동포들과 124군부대 동료들이 더 이상 속지 말 것을 몇 번이고 당부하고 싶습니다”고 되풀이 …… (『동아일보』 <휴지통> 1968년 12월 23일)

 

한편, 이렇게 떠들썩하게 공비(?) 기자회견이 열린 날은 바로 북이 나포해 간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 선원 82명과 시신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미국에 인계된 날이었다. 이 기자회견이 없었다면, 이날 신문과 방송은 세계 최강국이요 대한민국의 상국인 미국 군인들이 11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 풀려나는 소식을 대서특필했을 것이다. 이는 30년 뒤 정주영 이라는 인물이 소떼를 몰고 38선을 넘어가는 것만큼이나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기사감이었지만, ‘공비 쇼’에 의해 그 세계사적 의미는 반감됐다. 박정희 정권은 혹시 미국의 굴욕을 함께 느끼며 상국의 체면을 생각해 이날 기자회견을 연 것일까? 아니면 미국이 시켜서 그랬을까?

 

 

(1968년 12월 23일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판문점을 통해 미군에 인계되는 모습.)

고급 지휘관 면죄부… 형식적 처벌 
    
이런 엄청난 안보 공백 사태에 대한 책임자를 처벌하는 과정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 전두환 시절 자행된 국가조작 테러사건들이 하나같이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정말로 북한 특수부대원 120명이 쳐들어 왔다면, 당시 전후방 및 해안 부대 지휘관 수 십 명이 줄줄이 관직삭탈됐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진 장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012년 2월 북한 인민군 병사 하나가 38선을 뚫고 내려와 남한 군부대 문을 두드리는 소위 ‘노크 귀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인민군 병사가 내려온 길목을 지키던 부대의 사단장부터 말단 지휘관까지 줄줄이 목이 달아난 예가 있다. 장군만 무려 5명이 보직 해임됐고, 이들 다섯 명이 달고 있던 별의 수가 아홉이어서 북한 인민군 1명이 남한의 ‘별 9개를 날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소위 민주화 시대 이후 정권에서도 이랬을진대, 병영국가나 다름없었던 1968년 당시 무려 120명에 달하는 북한 특수요원들이 남파됐다면, 그 침투로가 해안이든 내륙이든 이들의 이동 경로에 있던 부대 지휘관 수 십 명이 문책을 당했을 것이고, 날아간 별자리만 수 십 개에 달했어야 한다. 
    
그런데 울진·삼척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문책을 당한 군인들은 모두 하급 장교들과 일반 병사들뿐이었고, 대부분 근무태만 근무지 이탈이 죄목이었다. 1969년 2월 8일 비공개 육군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12명의 형량을 보면, 모두 중령 이하이고, 계급이 낮을수록 형량이 높았다. ▲대대장 = 김병진 중령(37) 3년, 안영근(安榮根) 중령(42) 2년 ▲중대장 = 강사덕(姜思德) 대위(35) 10년 이진휴(李震休) 대위(39) 7년 ▲소대장 = 김광일(金廣一) 중위(23) 15년, 이석훈(李錫勳) 소위(28) 10년 ▲하사관 김남출(金南出) 하사(26) 3년, 원일만 중사(41) 1년 ▲ 병사 조종철(趙鍾喆) 병장(23) 2년, 양창호(梁昌孝) 상병(22) 2년, 문무림(文茂林) 일병(22) 사형, 김복수(金福洙) 일병(19) 사형.
   
 ‘북괴 무장간첩(?) 120명’이 해안으로 상륙해 울진과 삼척 두 곳에서 자그마치 두 달 동안 난동을 부리며 민간인들을 살해했고, 이들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우리 군인과 경찰, 예비군 수 십 명이 죽거나 다친 사건의 책임을 하급 장교와 일반 병사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혹시 이들은 군 복무 중 다른 죄를 저지르고 어차피 죗값을 치러야 할 처지에서, ‘울진·삼척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은 아닐까?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던 이들에게 울진·삼척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이 군사재판에 따르면 ‘해안 침투’는 11월 2일 밤 9시 20분과 10시 두 차례로 나눠 각각 30명 씩 모두 60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상륙한 것으로 돼 있다. 나머지 60명은 어디로 왔다는 말인지, 이들 추가 침투(?)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전체 인원이 120명이 아니라 60명이었나? 실제로 공비들의 시신이라며 공개된 이들의 수는 몇 명 되지도 않는다.

 

 

 

 

(울진.삼척 작전 당시 사살됐다는 무장공비들(?)의 시신)

고 소병민 중령의 넋을 기리며
    
울진.삼척 사건에서 우리는 또 한 명을 기억해야 한다. 고 소병민(蘇秉玟) 소령(사후 중령 추서)이 그이다.  
    
소 소령은 ‘울진 사태’로 시작해 점차 ‘울진·삼척 사태’로 확대되는 대간첩작전이 시작될 때, 충남 서산에서 벌어진 수상한 대간첩작전에 투입됐다 사망했다. 6.25전쟁 중 갑종16기 육군 소위로 임관해 각종 전투에 참가했고(1954.4.20. 충무 무공훈장 수여), 이후 보안사령부 소속 특무부대 장교(소령)로 복무하던 중이었다.
    
1968년 10월 30일과 11월 1일 울진과 삼척에 각각 30명 씩 60명의 무장 또는 비무장 괴한들이, 군·경·예비군들이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 속으로 투입됐고, 11월 1∼3일 사흘 동안, 서산을 위시한 서해안과 충청도 내륙 일대에서 또 다른 정체불명의 무장대원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대간첩작전본부는 11월 1일부터 3일까지 휴전선 및 해안선 일대에서 북괴 무장공비 11명을 사살했다고 4일 상오 발표했다. 합참본부장 유근창(柳根昌) 중장은 북괴군이 일요일인 3일 하오 중부전선 중앙분계선 남방 비무장지대 아군에게 28발의 박격포(82mm)를 쏘아 올 들어 가장 악랄하게 휴전협정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 유 장군은 중부전선 3개 지역 동부전선 11개 지역 서부해안지대인 서산 등 모두 15개 지역에 북괴 무장공비가 주말에 침투했다고 밝히고 ... 아군은 이 작전에서 603 보안분견대장 소병민 소령(39) 등 4명이 전사, 1명이 부상했다.(『경향신문』「서산 등 5개 지역 침투 공비(共匪) 11명 사살 – 사흘 동안 중부전선 박격포 공격도」1968년 11월 4일)

 

그런데 소 소령이 사망하는 작전에서 일약 스타가 된 이가 있다. 소 소령과 같은 직급의 보안부대 장교 이진삼(李珍三) 소령. 1967년 9월과 10월 육군방첩대장(윤필용 소장) 직속 609부대장(대위)으로 38선을 넘어가 인민군들을 살상하는 북파공작에 나섰고, 그보다 2년 전인 1965년에는 동아방송과 동아일보 소속 기자 등을 상대로 끔찍한 ‘내수공작’(테러)를 저지른 이다.(이 소령에 대해서는 <진실의 길>에 쓴 기무사 관련 글 참조) 
    
이 소령은 훗날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국회의원이 된 뒤 2015년 국회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을 세워 놓고 “장관은 내가 1967년 [9월] 38선을 넘어가 북한군 33명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느냐”며 자신의 북파공작 활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씨는 이런 엄청난 작전을 벌인 지 1년여 뒤, 이번에는 ‘육보안사령부 제507방첩대 대공과장’ 직함을 달고 충남 서산에서 벌어진 대간첩작전(?)에 투입됐던 모양이다.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 수상한 작전은 11월 1일 오전 7시 20분 경 서산군 성연면 성연지서에 ‘거동 수상자’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무려 세 차례나 접수되면서 시작됐다. 오전 8시 30분 경 이진삼 소령이 프로펠러 군용기 L-19기로 현지에 급파돼 보병 51 사단과 경찰을 이끌고 수색 작전을 벌인 것으로 돼 있다. 소병민 소령이 죽고 이진삼 소령이 영웅이 되는 장면을 보자.

 

소 소령은 [1968년 11월] 1일 상오 7시 충남 서산군 성연면 해변에 무장공비가 보트를 타고 상륙했다는 민간인의 첫 신고를 받고 출동한 후, 사흘이 되도록 쉬지 않고 수색작전을 지휘했다. 3일 상호 8시 5분쯤 소 소령은 “무장공비로 보이는 괴한 2명이 총을 메고 OO산 쪽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았다. 소 소령은 곧 병력을 이끌고 간첩들이 숨어들어간 산 쪽으로 추격했다. 높이 200m의 능선에 무장공비 2명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150m 밖에서 발견,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소 소령 왼편에는 보안분견대 이진삼 소령이 이끄는 병력이 능선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소 소령은 적들에 대해 사격을 하지 말라고 아군에게 명령하고 포복으로 계속 가까이 갔다. 무장공비 2명을 생포하기 위해서였다. 30m 거리를 두고 소 소령은 .. “투항하라. 아니면 사살하겠다.” 적이 항복할 기미를 보여 소 소령이 머리를 들자 공비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소 소령은 그 자리에서 .. 이 소령이 수류탄을 던져 적 2명을 모두 사살 ... (『경향신문』「공비 흉탄에 숨진 고 소병민 중령 - “투항하라” 접근하자 난사」1968년 11월 5일)

 

소 소령은 적과의 교전수칙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허망하게 죽은 무능한 군인이고, 이 소령은 순식간에 적을 제압하는 아이언맨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런 기사만으로는 소 중령의 사망 경위를 이해하기 어렵다. 한 눈에 봐도 어딘가 수상쩍은 작전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소 소령이 사망하면서 서해안 또는 내륙에서의 대간첩작전 소식이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수상한 일이다.
    
“중부전선 3개 지역 동부전선 11개 지역 서부해안지대인 서산 등 모두 15개 지역에 북괴 무장공비가 침투했고, 이 작전에서 603 보안분견대장 소 소령 등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부상”했다면, 이들 지역에 출현한 적(?)의 규모는 최소 수십 명은 돼야 하지 않을까? 
    
이후 경상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만 약 두 달 동안 대규모 간첩(?) 소탕 작전(울진.삼척 작전)이 전개됐을 뿐, 서해안 또는 내륙에서의 대간첩작전 소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대간첩대책본부장인 합동참모본부 유근창 참모장은 11월과 12월 모두 세 차례 울진.삼척 사건 전과를 공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했지만, 중.동부전선이나 서해안 지역 상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소병민 소령 사망을 기점으로 서해안 및 내륙 지역 작전은 중단 또는 종결됐다고 봐야 한다. 수 십 명의 ‘북괴 무장간첩’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일까? 
    
수상한 점이 또 있었다. 이 작전 중 사살된 ‘무장공비’(?) 한 명이 6.25 때 용산 내무서장과 경인지구 인민군 군사후원회장을 지낸 임관재(任寬宰.44)라는 보도였다. 당시 신문은 “임은 빨갱이로 서울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6.25 때 북괴의 서울 침공으로 출감, 용산 내무서장까지 지냈다. 이렇게 6.25 때 부역하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했음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고 썼다. 
    
6.25 때 용산내무서장까지 지낸 인민군이, 1968년 남한을 유린할(?) 무장 공작원으로 남파되면서 자신의 과거 경력을 기록한 신분증이라도 갖고 왔다는 말인가? 사살된 적의 신원이 이렇게 빨리 드러날 수 있을까? 이 나라 북파공작과 내수공작(테러)의 명수인 이진삼 씨가 활약한 이 사건이 정말 ‘북괴 무장공비의 침입’이었을까? (끝)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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