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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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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과좋아 작성일19-01-30 10:4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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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①
 
강진욱    


 

이승복 군 동상 철거 논란의 허실
    
12월 9일은 이 나라 분단의 역사에 또 하나의 큰 상처를 남긴 날이다. 50년 전 이날 ‘이승복 어린이’가 살해됐고, 이후 우리 국민들의 반북적대감은 한 층 더 커졌다. 1970년대 내내 전국 각지 초등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나이 어린 학생들은 해마다 열리는 반공웅변대회에 나가 ‘북괴’를 규탄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어린이’를 본받자며 목청을 돋워야 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 ‘이승복 동상’의 위세는 조금씩 저하됐지만,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구가하는 지금도 ‘이승복 참살 사건’은 남북 간 화해와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반북적대의 닻’으로 박혀 있다. 
    
이런 가운데 이승복 동상 철거 논란이 불거졌다. 노옥희 울산시 교육감이 11월 5일 간부회의에서 “시대에 맞지 않고 사실 관계도 맞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른 시일 안에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울산 지역 보수단체들은 11월 8일 교육청을 찾아가 “1968년 12월 이승복이 공비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은 2006년 11월 대법원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고 주장하며, 이승복 동상 수호 결의를 다지고 있다. 
    
바로 다음날인 11월 9일,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역사적 사실과 상호존중, 역사적 기록들은 교육감이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사태를 수습했다. 대단히 정치적인 수사법을 사용해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얼핏 보면, 2006년 11월 대법원이 “이승복이 공비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을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확인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은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의 진위 논란을 ‘적당히’ 봉합했을 뿐이다.(이 오보 논란에 대해서는 정운현 총리 비서실장이 2014년 12월에 쓴 <이승복 기사 오보 논쟁, 역사 속에 묻히나> 글 참조. https://ppss.kr/archives/37530) 중요한 것은 조선일보가 이승복 군의 말을 조작했냐 안 했냐는 것이 아니라 - 이는  언론 또는 기자의 윤리 문제일 뿐이다 - 이승복 군을 살해한 자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울산 태화초등학교에 있는 이승복 동상

▲살해된 이승복 군 가족

‘울진.삼척 사건’의 아이콘 이.승.복.
    
강원도 평창군에 살던 이승복 군이 살해된 때는 1968년 11월 1일부터 12월 23일까지 약 두 달 동안 벌어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종반으로 접어들 즈음이었다. 4단계로 나눠 진행된 작전 중 3단계 작전이 마무리 될 즈음인 12월 9일 밤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이 군의 집에 쳐들어와 이 군과 이 군의 어머니 및 남.여 동생을 살해했다.(※이 군은 당시 9살. 아버지와 형 승관(15)군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이후 40년간 정신질환을 앓다 2014년 사망했다.)
    
이승복 군 참살 소식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 달인 12월 10일 방송과 11일 자 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좌:조선일보/우:중앙일보 - 이승복 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고 내용은 조선일보에만 실렸고, 훗날 이 발언의 진위 논란에 휘말리게 된다.)

울진.삼척 사건에 대해 국가기록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한은 대남공작이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이래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지하조직 및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민중봉기를 획책하여 전쟁도발의 구실을 모색하고 지하조직의 사기신장과 직간접 지원으로 이탈을 방지하고자 ... 북한은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무자비한 테러 및 파괴활동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상적 중립층의 확대와 당국에 대한 협력을 저지하며, 전후방 동시전투 식의 모택동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군경부대의 분산과 병력소모 및 피로를 촉진시키고, 위조지폐의 대량사용으로 남한의 경제 질서를 혼란시키고자 기도하였다. ...

무장공비들은 11월 3일 새벽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하였다. 내용인 즉 이날 아침 무장공비 30여명이 산간마을인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고 북한을 찬양하는가 하는, 이에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이다. 또 신고할 경우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노동당, 여성동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 모두를 소탕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 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지를 시험해본 것이었다. 토벌작전에서 국군은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23 / 밑줄은 인용자 강조. 이하 동일)

 

이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글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연구위원이 <대비정규전사>제2집(국방부.1997), <건군50년사>(서울인쇄, 1998), <국방사>제3집(국방부, 1990),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국방군사연구소, 1995) 등을 참조해 정의한 것이라 한다.      이북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이 다 그렇듯 울진.삼척 사건 역시 이 나라의 분단체제를 지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특정 집단(군부)’의 일방적 주장에 의해 정의되고 구전되면서 정설이 되고 역사적 사실이 돼 버렸다.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나 사건의 정의를 살피고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너무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런 사건들의 진상이 무엇일까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묻는 것 자체가 이 땅의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승복 어린이 참사를 포함하는 울진.삼척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누구도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북 최정예 특수부대 120명 남침’? 
    
우선, 북한이 최정예 특수부대원 120명을 남파했다는 주장이 사실일까? 북한의 최정예병 120명이, 처음에는 30명 씩 두 번, 그리고 다시 60명이 남침해 장장 2달 동안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분탕질을 쳤다면 그것은 북한이 남한과 남한을 떠받치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그랬다면 남한과 미국은 즉각 곧바로 38선을 넘어가 평양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그랬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남한과 미국은 ‘북괴 공비’(?) 120명을 일망타진하는 선에서 깔끔하게 작전을 마무리했다. 짐짓 자제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 이들 120명이 정말 북에서 내려왔을까?  
    
당시 북한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형편이나 됐을까? 울진.삼척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북한은 미 첩보함 푸에블로 승무원 82명의 미국 송환 문제를 놓고 10달째 미국과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 해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나포됐을 때 미국은 원산 앞바다로 핵추진 항공모함을 보냈고, 오키나와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전폭기 수백 대에 발진 대기 명령을 내리면서 북한 침공을 공언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 본토와 일본, 오키나와, 한국 등 태평양지역 주둔 미군이 일제히 비상대기체계에 들어갔고 일본 자위대까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이처럼 일촉즉발의 위험한 국면 끝에 협상이 시작돼 10달째에 접어든 상황에서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개시하는 위험한 행위를 했을까?
    
그렇게 여기는 이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울진.삼척에 북괴 무장 게릴라들이 떼로 나타났다고 선전하면서도 사실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제2의 6.25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박 정권이 시종일관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이들은 박 대통령이 두려움을 모르는 지도자이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박 정권이 1967-1968년 2년 동안 수시로 38선 부근에서 대북 도발을 일삼았고, 미국 존슨 정권은 박 정권이 무모한 행동이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노심초사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전쟁에 준하는 국난(?)을 당해서도 저들이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건이 불시에 당한 도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 정권은 1967년 내내 ‘북괴 무장공비의 1968년 대량 남침’을 떠벌렸고, 특히 1967년 8월부터 ‘봉쇄.섬멸 작전’을 공언했다. 1968년이 되면 북한 무장 유격대가 대량으로 남파될 것이고 이들을 봉쇄해 섬멸할 것임을 일찌감치 공언해 왔다는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예언하고 준비한 사건이 바로 (1.21 청와대 기습 작전과) 울진.삼척 작전이다.

‘인민유격대 해방구 건설’?
    
북한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촉발하려 한 것은 아니고, 강원도 산골에 과거 빨치산 시절에 전개했던 것과 같은 유격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종의 ‘해방구’ 건설론이다. 전쟁을 하러 내려온 것이 아니니 정규전 식으로 떠는 보복전쟁으로 대응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그럴듯한 해명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한 국가기록원 해설에 등장하는 말들이 그것이다. “지하조직 및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민중봉기를 획책”  “모택동 전술” “위조지폐의 대량사용”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고 북한을 찬양”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 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지를 시험해본 것” ...   
    
당시 무장공비(?)로 생포됐다는 자들도 중앙정보부가 마련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정동춘(鄭東春.당시 24세)과 고등운(高登雲.당시 26세)은 “부락민을 포섭, 군사정보망을 창설하고 정보가치가 있는 대상자를 선정, 대동 월북할 목적을 띠고 남파됐다”고 말했고([울진-삼척공비사건] 특수훈련 받은 120명 침입『조선일보』1998.9.27), 자수 공비(?) 조응택(趙應擇. 당시 24세)은 경북 영덕군에 들어가 소수 부락을 점령, 부락민을 혁명분자로 포섭하고 군사정보망을 창설할 것과 특히 게릴라전을 펼 기지 확보에 노력하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떠벌렸다(「“자유가 몸시 그리워서...” 자수 공비 조응택」『경향신문』1968.12.14). 
    
사건 당시 17살로 실제로 공비(?)들을 목격한 김옥순 씨 역시 통일부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증언도 비슷하다. 김 씨는 “평상복을 입은 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인구조사’를 왔다며 마을 주민들을 한 집에 모아 놓고 수첩의 김일성 사진을 보여주며 교육을 시키려했다”며 갑자기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 박정희가 좋으냐 김일성이 좋으냐고 묻고, 박정희가 좋다고 말한 사람들을 총살했다”고 밝혔다. 또 무서워 ‘북한이 좋다’고 대답한 자기 또래 10대 남자 둘에게 인민군복을 입혀 데리고 갔다고 덧붙였다. 통일부 다큐 제작진은 이들 두 청년의 생사 여부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8bZE2LrriME
    
아무튼 위 기록이나 증언은 하나같이 북이 마치 울진.삼척 지구에 해방구를 건설해 유격투쟁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특공대를 내려 보냈다는 인상을 주지만, ‘공비’(?)라는 자들이 한 짓거리는 해방구를 건설하는 이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 “노동당. 여성동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 ...” 자수 공비(?) 조응택도 기자회견에서 “민간인의 신고열이 높으니 보는대로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학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떠들었다. “해방구를 건설하라”와 “남녀노소를 보는대로 학살하라”는 자가당착이고 자기모순이다.   
    
정말 북의 게릴라들이 남한 땅에서 소위 ‘해방구’를 건설하려 했다면, 이렇게 수 십 명씩 떼로 나타나 총칼을 들이대며 ‘김일성 찬양’을 외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렇게 외치다말고 갑자기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웃.기.는. 얘기다. 
    
일제 말기와 해방정국에서 반외세 투쟁의 한 축이었던 ‘빨치산’과 ‘해방구’에 대해 초보적인 지식이라도 갖고 있는 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이들은 그저 ‘우리는 해방구를 건설하려고 북에서 내려온 간첩들이야!’ ‘북괴가 얼마나 잔인한 지 보여주마!’ ‘그러니 빨리 경찰서에 신고해!’라고 쇼를 벌인 것이 아닐까?
    
이들이 ‘북괴(?) 무장공비’였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한다는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해설에서 그 의문을 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무장공비들은 군복·신사복·노동복 등의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채 주민들을 집합시켜서 북한 책자를 배포,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 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하였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0181&cid=46628&categoryId=46628)
    
소위 ‘무장공비’로 알려진 이들의 차림은 신사복과 작업복, 군복이 뒤섞여 있었다. 앞서 언급한 김옥순 씨도 통일부 다큐멘터리 증언에서 “평상복을 입은 공비들”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분명 ‘간첩’ 흉내를 내며 ‘북괴의 잔인함’을 연출함으로써, 울진.삼척 사건을 ‘북괴 무장공비에 의한’(?) 사건으로 각인하기 위한 공작팀이었을 것이다. 
 
120명 침투, 전원 소탕?... 민방위훈련했나
    
또 ‘최정예’라던 북한의 특수부대원 120명이 내려와 7명이 생포되거나 자수하고, 나머지 113명이 전원 몰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국방부의 어떤 연구원이 썼다는 국가기록원의 해설을 다시 보자.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1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신사복·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무장공비들은 1차로 2개조 30명이 1968년 10월 30일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에 침투하였다. 그리고 2차로 2개조 30명도 11월 1일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으며, 3차로 4개조 60명이 11월 2일 삼척 원덕면 월촌리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다.』

10월 30일과 31일 30명씩 두 번, 11월 2일 60명 등 사흘에 걸쳐 해안을 통해 상륙했다는 120명의 최정예 인민군 유격대가 투입됐는데, 11월 2일 민가에 공비 몇 명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우리 군.경.예비군들이 삽시간에 포위망을 구축해 120명 중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모조리 소탕했을까? 예비군훈련이나 민방위훈련이라면 모를까 실전에서는 이런 전과(戰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정말 우리 군이 그렇게 완벽한 작전을 펼쳤을까? 그렇지 않았다. 사건 당시 제1야전군 작전참모였던 이재전 씨(1979년 박정희 시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차장)는 “몇 명이 상륙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작전이 시작됐다”고 회고한다. 2003년 오마이뉴스 김당 기자가 정리한 글이다.

처음에는 몇 명이 상륙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작전이 시작됐다. 지금은 군 현대화 계획의 시행으로 육군 항공에 헬기가 많아 고도의 기동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군에는 겨우 다섯 대의 병력 수송용 헬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를 이용, 마찬가지로 당시 하나뿐인 제1공수 특전단 요원을 공중투입해 적을 분산시키는 전술로 작전을 시작했다. ... 당시만 해도 공수특전부대는 비밀부대라고 해 미군도 우리 측에 외부에 공개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헬기를 동원한 공중강습 작전은 성과를 보았다. ...당시만 해도 육군은 전방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던 터라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해 작전은 시일을 끌게 됐다. ... 우선 군 후방 지역 경계 책임을 지고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사단장 이세규(李世圭) 준장에게 작전 준비 지시를 내렸다. ...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즉 적은 못 잡고 아군의 희생만 속출 ... 그뿐 아니라 한동안 지나니까 적이 나타날 때마다 병력 건제(建制)를 무시하고 축차(逐次) [차례로] 투입을 해 하나도 자기 건제 대대를 갖는 대대가 없이 돼 버렸다. 그리고 부대를 장기판 주무르듯이 무계획적으로 기동시켜 모두 지치는 바람에 어느 대대장은 대원들에게 업혀 다니는 식의 웃지 못할 형편이 돼 버렸다.(「제1화 온고지신 (31)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오마이뉴스 2003.5.19 https://blog.naver.com/liskangel/140021406614
     
우왕좌왕하며 대간첩작전에 임했고, 사단이니 연대니 대대니 하는 부대 편제를 유지하지 못한 상태로, 즉 분대와 소대 단위로 쪼개 병력을 투입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엉성하게 작전을 펴고도 북한의 최정예병 120명 전원을 소탕했다? 해안에서 수 십 km나 떨어진 산골 오지에 투입된 ‘120명 전원 소탕’이라는 전과가 나오려면 - 민방위훈련이나 예비군훈련처럼- 30명씩 두 번, 다음엔 60명을 작전에 투입할 때마다 각 조장 또는 교관이 조원들을 포위망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거나, 아니면 각 조별로 특정 지역에 주둔한 상태에서 군.경.예비군이 포위망을 구축한 다음, 이들을 세 차례에 걸쳐 풀어놓아야 한다. 
    
실제로 120명 전원이 조원들은 조장의 인솔 아래 아군과 경찰 및 예비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 추위와 굶주림 속에 산 속을 헤매다, 그것도 비무장 상태로 살상을 당한 정황이 포착됐다. 
  
[인용]지난달[10월] 29일 조장 김 모가 지휘하는 15인조 공비와 함께 배편으로 O일 밤에 동해안 모처에 상륙했었다. 그 후 무엇 때문에 왔으며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고 지휘자 지시대로만 움직였다. 상륙한 후 OO지구 산 일대를 헤매면서 영하의 추위 속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태백산맥을 끼고 경북 OO지구까지 이른 것이 O일. 산에서 이틀 밤을 보내다 공비소탕작전을 벌인 군·경·향군에 걸려들었다. 아군의 추격을 받은 공비들은 점점 깊은 산으로 쫓겨 들어갔다. …… [인용](『경향신문』「‘공비 2명 생포 - 비라 보고 투항 결심 - 북괴 124부대 소속 장교 정동춘·고등운」1968년 11월 16일)

대간첩대책본부는 11월 5일 오후 “지난 2일 밤 동해안인 경북 울진군 북면에 30명 내외로 추산되는 북괴 무장공비가 불법 침입, 양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 [강조]군·경과 예비군이 이들을 포위, 섬멸작전을 펴고 있다[강조]”고 발표했다. 
    
이런 식으로 30명씩 두 차례, 다시 60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남으로 내려와 일망타진됐다면, 우리 군.경 및 예비군이 - 무려 4만 명에 이른다 - 저들이 내려 올 것을 미리 알고 철통같은 포위망을 구축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포위망 속으로 쏙 들어와 안겼다는 말이다. 남과 북이 미리 손발을 맞췄을까?  

박정희와 김형욱의 수상한 강원도 나들이
    
이처럼 수상하고 해괴한 울진.삼척 사건(작전)은 놀랍게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강원도 나들이와 함께 시작됐다. 1968년 10월 30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동부전선 OO사단을 방문해 대간첩작전 상황을 살피고 장병들을 격려했고(『동아일보』「대간첩작전 시찰 - 김 중앙정보부장」1968년 10월 31일), 이날 새벽 무장공비(?) 30명(또는 60명)이 울진과 삼척으로 통하는 해안에 상륙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31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대관령에 있는 고령(高嶺) 시범목장을 시찰했고, 오후에는 삼척군 북평읍에서 열린 쌍용양회 동해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10월 30일 김형욱 중정 부장의 동부전선 OO사단 방분과 다음날 대통령의 대관령 방문으로 강원도 일대는 경계가 강화됐을 것이다. 해안과 내륙 경계가 삼엄하게 펼쳐진 가운데 무장공비(?)들이 떼거지로, 우리 해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해안으로 상륙했을까? 박정희 정권은 1967년 11∼12월 ‘해안경비를 강화한다’ ‘미제 구축함을 들여온다’ 하며 연일 해안 경비 강화 태세를 역설한 터여서 이런 의구심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4단계 작전... 30명씩 120명 ‘투입’ 
    
그렇게 시작된 작전은 총 4단계, 단계별로 약 2주씩 두 달 동안 전개됐다. 처음 30명을 투입하는 - 또는 4개 지구에 투입된 인원들 중 1개 지구 30명을 먼저 풀어 놓는 - 작전 1단계. 바로 ‘울진사태’였다.
   
『조선일보』는 11월 6일 자 1면 오른쪽 상단에「울진에 대규모 무장공비 - 대간첩대책본부 발표」라는 2단 통 제목을 뽑았다. 부제는「2일 밤 30명 내외 침투, 만행 - 군경이 포위 셋 사살, 아측(我側) 희생 넷」. 
    
작전 개시 2주 만인 11월 13일 유근창(柳根昌) 대간첩대책본부장은 다시 ‘삼척 사태’를 발표한다. 처음 울진 지역에 투입된 30명 가운데 28명이 군·경 및 향토예비군의 포위망에 갇혀 우왕좌왕하며 죽어가는 때, 삼척 지구에 - 포위망 속으로 - 30명이 투입됐다는 말이다. ‘울진·삼척 사건’ 2단계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1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유 본부장은 “동해안 지구에 침투한 공비는 울진 지구의 2개조로 된 30여명 외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삼척 지구에 침입한 30여명 등 총 4개조 60명 쯤 된다”고 밝혔다.(『조선일보』「동해안 침투 공비 삼척에도 30명 - 울진사태와 거의 같은 시기에」1968년 11월 14일)
    
『동아일보』는 유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의 말을 인용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했다. 이들의 수는 “15명 1조로 된 총 4개 조에 약 60명 가량이며, 이들은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각각 2개조 씩, 해상을 통해 침투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대간첩대책본부는 지난 3일 첫 발표 때 침투 공비의 세력이 30명가량이라고 발표”했다고 덧붙였다. 
    
유 본부장은 이 공비들이 지난 2일 밤 거의 같은 시각에 동해안을 통해 같은 방향으로 침투, 2개조 씩 울진과 삼척으로 분산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의 전과로는 절반가량이 사살됐고, 잔비 역시 전의를 잃은 채 조직이 와해돼 아군 포위망 속에서 분산 도주 중이라고 설명했다고 신문은 전했다.(『동아일보』「공비(共匪) 침투 규모 약 60명 - 임(任) 국방, 작전지역 시찰 후 발표」1968년 11월 13일) 
    
대간첩대책본부는 어떻게 작전 대상 총원이 60명가량이고, 그 절반가량이 사실됐다고 발표할 수 있었을까? 이는 대간첩대책본부가 차례차례 투입되는 인원수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30명에 이어 다시 투입된 30명 등 총 60명은 정확히 한 달 만에 모두 소탕된다. 투입 인원과 소탕 인원이 단계별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실전에서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1월] 29일 오후 유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은 울진·삼척 지역에 불법 침투한 북괴 무장공비 소탕전의 전과를 중간발표, 지난 4주일 동안 군경 및 향토예비군 합동수색대가 사살한 공비는 58명, 생포 2명으로 이날 오후 6시 현재 총 60명이 소탕됐고, …… 유 본부장은 이로써 이번에 불법 침투한 적의 주력은 거의 섬멸됐으나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조직이 와해된 일부 공비 잔당이 분산 도주 중에 있거나 .. 이번 작전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고 밝혔다. 당초 침투 공비를 60명 선이라고 발표했던 대책본부는 이날 도주 중인 잔당의 수를 밝히지는 않았다.』(『동아일보』「공비(共匪) 소탕 총 60명 – 아군 33명 전사. 민간인 16명 희생 : 중간전과 발표」 1968년 11월 30일 / 밑줄은 필자 강조)

 

위 기사를 작성한 기자도 공비 수가 30명에서 60명으로 늘어난데 대해 나름 의문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60명이 투입돼 전원이 소탕됐다면 누군가 이들은 군.경.예비군들이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 속으로 투입했거나 이미 구축된 포위망 속에 갇혀 있다 방출된 것이 틀림없다. 모든 작전이 포위망 속에서 시작돼 포위망 속에서 끝났다면, 사살 또는 체포된 이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무장공비일 수 없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려 있는 ‘울진.삼척사건 공비 압송’ 사진. 혀를 있는대로 내밀면서 장난치듯 잡혀가는 ‘공비’(?)의 모습이 준전시 작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3.4단계 작전은 서둘러 마무리
    
11월 한 달 동안 2단계까지 투입 또는 방출된 인원 60명 전원이 소탕되자 다시 30명이 투입 또는 방출된다. 3단계 작전. 공비(?) 투입과 토벌이 정해진 일정에 맞춰 차근차근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3단계 작전부터 일정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2단계 작전이 완료되고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전과 발표가 있었다.
    
동아일보는 12월 7일 자에서 유근창 대간첩대책본부장의 말을 인용, 이때까지 울진과 삼척 지구에 투입된 인원 중 71명을 ‘소탕’하고 20∼25명의 잔비(殘匪)가 도주 중이라고 밝혔다.(『동아일보』「무장공비 또 3명 생포 - 모두 71명 소탕. 잔비 20여명 추산」1968년 12월 7일)
    
유 본부장의 다음 발표는 12월 20일, 경북지역 을종사태 해제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유 본부장의 이 마지막 회견은 3단계 작전의 종료를 알렸을 뿐, 4단계 작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3단계 작전부터 일정이 빨라지기 시작해 모든 작전을 서둘러 마무리한 정황이다. 다만, 4단계 작전이 있었음을 추정하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울진.삼척 사태에 투입된 인원이 120명이기 때문이다.
    
유 본부장은 12월 20일 “해당 지역에 대한 공비소탕작전이 매듭지어진 때문”이라고 밝히고, 이날 오전까지 사살 89명, 생포 5명, 자수 2명 등 모두 96명을 소탕했다고 발표했다. 약 2주 전인 12월 7일 “울진과 삼척 지구에 투입된 인원 중 71명을 ‘소탕’하고 20∼25명의 잔비(殘匪)가 도주 중”이라고 밝힐 때의 총원 96명과 일치한다. 그렇게 발표한지 2주일 만에 잔비들까지 합쳐 96명 모두를 소탕했다고 다시 발표한 것이다. 이렇듯 ‘투입’과 ‘산출’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는 것은 공비(?)를 투입하는 쪽과 이들을 소탕하는 쪽이 하나일 때 즉, 같은 편일 때나 가능한 일이다. (②에서 계속)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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