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 (본사 상임고문, 재미통일연구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외교부 수장이었던 송민순 장관은 2월 20일 고별 기자회견에서 자기는 한국 근대사의 질곡의 원인인 분단이라는 비정상 상태를 정상화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29일의 이임식에서는 자기문제해결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나라는 남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서 외교부 직원들에게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 써야한다’고 역설했다. 친미사대를 금과옥조로 신봉해온 대한민국에서 외교수장이 이와 같이 자주와 통일을 강조한 것은 실로 건국 6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처음 확인된 원칙이다. 이 원칙은 1991년 12월 13일 남북 간에 채택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서 재확인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끝에 나온 6.15 공동선언도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자고 했다. 또 2007년 10월 4일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도 남과 북은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이렇듯 ‘자주’는 이미 몇 십 년에 걸쳐 남북 간에 거듭 확인된 원칙이다.
그러나 ‘자주’라는 원칙에 합의는 했지만 남한은 한미동맹관계, 특히 주한미군의 존재 때문에, 자주적인 자세를 선명하게 취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남북관계의 실질적 발전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2005년 7월 및 9월의 제 4차 북핵6자회담에서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이 회담에서도 미국은 주변국들의 가세를 얻어 압력만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한국은 압력보다는 협상으로 북핵 포기를 실현시킨다는 입장을 취해 중국 및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9.19공동선언을 이끌어내는데 능동적 역할을 했다. 9.19. 공동성명은 단지 북한핵문제를 해결하고 북미, 북일 관계를 정상화할 뿐 아니라 한반도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어 통일의 길을 트고 아울러 동북아 지역안보협력체제 실현까지 모색하는 포괄적 합의였다. 그것은 분명 한국이 모처럼 거둔 자주외교의 성과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3월 11일 외교통상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외교부가 지난 기간에 한 것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불만이 좀 있다’면서 ‘6자회담과 미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외교부는 제 역할을 못했다’고 타박했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불만이 혹 6자회담에서 모처럼 시도한 자주외교로 미일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통일을 지향해야할 한국의 지도자로서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이 대통령은 민족적 역사관이 불투명하고 통일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없는 것 같다. 그가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삼는 7천5백만 전 민족이 아니라 고작 휴전선 이남의 좁은 땅에 사는 인구 4천8백만의 남한이다. 그가 실현하겠다는 선진화도 남한 땅에만 국한된 개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남북문제도 이념보다는 실용의 잣대로 풀어야 한다며 통일부를 없애고 외교부를 통해 대외문제의 일환으로 남북관계를 다루고자 했다. 비록 국민의 반대로 통일부가 존치는 됐지만 이미 많이 거세되고 풀이 죽은 기구가 돼버렸다. 더욱 해괴한 것은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안보를 보다 튼튼히 해야 통일의 기반이 다져진다는 그의 주장이다. 그것은 한반도를 분단하고 통일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고의로 외면하는 궤변이다.
이 대통령은 또한 지난 8년간 남북 간에 어렵사리 쌓아올린 화해협력의 실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긍정적인 평가를 한 적이 없다. 아마도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면서 올린 대북협력실적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클린턴 정부가 포용정책으로 대북관계를 정상화 직전까지 진척시켰는데도 부시가 그 성과를 전면부정하고 해묵은 대북압살정책으로 회귀했다가 결국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협상으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쩔쩔매고 있는 선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통일은 남과 북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추진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 대통령은 굴욕적인 한미동맹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자주적인 자세로 통일의 길을 꾸준히 닦아가기를 바란다.
[출처: 통일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