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5]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2.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 > 북녘 소식

본문 바로가기

본회는 동포들의 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돕고자 북녘 매체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 글들이 본회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님을 공지합니다 

북녘 소식

북녘 | [연재15]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2.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8-12 08:40 댓글0건

본문

[연재15]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2.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

편집국



undefined



몇해 전에 창작된 전인광 북녘 작가의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이 지금 북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소설은 타이의 어느 한 산간벽촌에서 일어난 두 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살해사건을 파해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첫 서두에 이렇게 씌여져 있다.

《나는 죽더라도 증명할것입니다. 력사가 증명하고 내가 증명합니다. 이 력사를 지워버려서는 안됩니다.》 - 한 조선녀성의 증언중에서 -

 

<조선의 오늘>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4. 15문학창작단의 작가들을 비롯하여 나라의 관록있는 작가들이 《하나의 조일관계력사론문》《바늘끝도 안들어가게 구성이 째인 작품》《이렇게도 쓸수 있겠구나 하는 창작적묘리를 깨우쳐준 소설》이라고 평가하는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은 작가의 피타는 사색과 탐구불같은 열정과 높은 창작적기량에 의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라고 밝혔다.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네덩이의 얼음>을 연재한다.




(제 15 회)

제 3 장

2.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

 

사다께를 도꾜대학으로 보낸 후 무라야마는 그가 가져온 《일본군성노예제를 재판하는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문건을 펼쳤다.

작년 이 법정이 열리던 당시 그 역시 도꾜에 있었다.

그때는 무라야마가 범죄조사국에 있던 때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민간단체들이 모여 주관하는 이 재판을 그는 보도를 통해 들었다.

사실 그 재판이 그가 대외문제국으로 승진된 후 맡게 된 이 중대사건의 시작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문건에는 일본군성노예문제의 발생과 그 구체적인 실태 그리고 작년말에 열렸던 도꾜법정의 경과가 사다께다운 면밀한 분석으로 기록되여있었다.

사다께는 문건에서 먼저 이 도꾜민간법정이 열리게 된 동기와 그 진행과정을 요약하여 밝혀놓았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신문과 라지오, TV를 통하여 적극 소개되자 1991년 8월 남조선의 김학순녀성이 제일 처음으로 자신이 성노예로 끌려가 당한 피해사실을 고발하면서 도꾜지방법원에 배상을 요구해나섰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생존해있는 피해녀성들이 지난날 일본군성노예생활을 강요당했다는 수치감으로 수십년세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피해사실들과 목격자료들을 련속 공개하였으며 성노예행위에 관여한적있는 구일본군복무자들까지도 이 문제에 대한 공개증언에 나섰다.

일본정부는 이 명백한 사실앞에서 더 발뺌을 할수 없게 되자 1993년 8월 4일 고노관방장관의 담화를 통하여 일본군의 성노예행위가 정부의 묵인 또는 관여하에 군부가 직접 벌린 행위였다는것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불충분하게나마 그 조사보고를 발표하였다.

일본의 우익이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리 없었다.

일본회의를 비롯한 극우익단체들은 큰일이나 난듯이 그것이 일부 민간업자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지 당국과 군부가 개입한 조직적범죄라는 말은 타당치 않다고 들고일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시기까지는 력대적으로 녀성들에 대한 강간, 강제매춘과 같은 성폭행이 위법으로 정립되여있지 않았으며 그러한 법규도 없었다고 주장해나섰다.

일본당국의 이런 주장은 저들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간에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벌린 성노예행위를 합리화하고 그 법적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 극히 온당치 못한 처사였다.

이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와 세계의 량심적인 법률가, 학자들과 인사들이 일본당국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전시기에도 녀성들에 대한 성폭행을 위법으로, 범죄로 규정한 많은 전시법규, 국제인도법규와 관습들이 있었다는것을 확증해나섰다.

법률적근거로 그들은 1899년 네데를란드의 헤그 제1차 세계평화대회에서 채택된 전시법규와 관습에 관한 협약(이 협약을 제2협약이라고 한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1907년 헤그에서 진행된 제2차 세계평화대회에서 헤그제2협약을 재확인하여 《륙전법규와 관습에 관한 협약과 부속규칙》을 채택한 헤그제4협약을 지적하였다.

이 헤그제4협약은 1907년 10월 18일에 조인되고 1910년 1월 26일에 효력을 발생하였다.

일본은 1911년 12월 13일에 이 협약을 비준함으로써 협약의 참가국으로 되였다. 따라서 일본은 협약의 모든 조항들을 준수할 법적의무를 지니게 되였다.

1945년 뉴른베르그국제군사재판소는 《1907년 헤그제4협약의 부속규칙은 적어도 1939년경에 국제관습법의 지위를 획득한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정하였다.

헤그제4협약의 부속규칙 46조에는 《종교적신념과 례식뿐아니라 가정의 명예와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재산은 존중되여야 하며 개인의 재산은 몰수 할수 없다.》고 하였으며 기본규칙 3조에서는 《서술된 규칙과 규정을 위반한 교전당사자는 필요하다면 배상할 책임을 진다. 교전당사자는 그 군대의 부분을 구성하는 인원에 의해 감행된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하였다.

46조에 녀성성폭력과 관계되는 표현으로 가정의 명예와 권리존중과 개인의 생명존중 두가지 규정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인의 생명존중이라는 표현은 살인금지라는 표현의 뜻과 일치하므로 달리 더 론할 필요가 없다.

1998년 로마에서 규정된 국제재판소규정에는 당시까지 존재한 여러가지 조약규범들에 규제되여있던 가정의 명예, 권리보호, 강제매춘금지 등 여러가지 표현들을 종합체계화하여 강간, 강제매춘, 살인이라는 표현으로 고착시켰다.

이처럼 1907년 헤그제4협약이 밝힌 가정의 명예와 권리존중, 개인의 생명존중이라는 표현은 강간과 살인금지를 명백하게 표현한것이다.

때문에 이 협약은 일본군의 잔악한 성노예행위를 단죄하는 법적기준으로 되는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 인도네시아 쟈까르따에서 진행된 군사법정은 바로 이 협약에 근거하여 인류전쟁사에서 성폭행범죄자들을 기소, 심리하고 유죄를 선고한 첫 법정이였다.

법정은 네데를란드녀성 35명을 직접 성노예로 만든 일본군인과 군속 13명을 법정에 기소심리하고 장교 7명과 군속 4명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그중 한명을 사형에 처하였다.

이것은 일본군의 성노예행위가 철저히 범죄행위로 된다는것을 보여준 실례였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성노예문제가 처음으로 론의된것은 1992년 3월에 진행된 제48차회의였다.

회의에서 일본변호사 도쯔까 에쯔로는 일제가 조선강점시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어다 혹사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일본군성노예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토론에서 일본군성노예행위는 명백히 인도에 관한 죄, 성노예죄라고 단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중재기관설치를 제기하였다.

이 시기 일본 효고현 모또오까의원과 쥬오대학교수 요시미 요시아끼도 일본군성노예문제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2000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의 기간에 일본 도꾜에서 《일본군성노예제를 재판하는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이 진행 되였다.

1990년대초까지 일본군성노예주범들을 비롯한 범죄자들의 처벌문제와 일본의 책임문제는 론의조차 없었다.

1980년대말~1990년대초에 일본군성노예문제의 진상이 다소나마 밝혀지고 그 범죄성이 확증되여감에 따라 범죄자처벌과 국가책임문제가 제기되였다.

각국 녀성인권단체들은 20세기 전반기에 감행된 일본군성노예범죄를 다음세기에 넘기지 말자는 일념에서 법정설립에 적극 달라붙었다.

실행위원회와 각국 녀성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하여 판사단 법률고문 3명, 국제검사 2명, 전문가증인단 8명이 선출되였으며 3차에 걸쳐 실행위원회 검사들의 회의를 진행하였다.

제1차회의는 2000년 3월 30일부터 4월 2일까지 중국《위안부》연구중심의 주최로 상해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에서는 기소장작성문제, 법정일정과 형식, 재정문제를 토의하고 법정헌장초안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제2차회의는 2000년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진행되였다.

실행위원회성원들, 국제검사단, 법률고문, 피해국검사들 총 4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요하게 토의된 문제가 기소대상문제였다.

여기에서 기본론의에 오른것은 일본《천황》히로히또였다.

일본에서 《천황》은 《만세일계》의 후예로서 《현신인》이고 신성한 존재이며 《아버지로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처벌되지 않는다.》는 근거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처벌하지 않은 문제가 심중히 론의되였다.

일본의 우익계반동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전범자들을 처벌하는 도꾜 극동국제재판에도 히로히또는 기소되지 않았는데 시민법정이 《천황》을 기소하고 유죄를 선고하려 하는것은 일본에 대한 적대시태도의 표현이며 일본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인 반대립장을 표시하였다.

일본《천황》 히로히또를 첫째 기소대상으로 하여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이 법정의 첫 발기단체인 일본의 《전쟁과 녀성에 대한 폭력반대일본모임》을 비롯하여 국제검사단 법률고문들, 각국 검사단들이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그 근거와 론거를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첫째로, 히로히또가 일본의 최고대표자, 집권자로서 그의 공무상지위로 보아 일본군성노예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둘째로, 군통수권자로서 군이 저지른 죄행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대하여 일치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결과 히로히또는 첫째 기소대상으로 지명되였다.

그리고 수상, 륙군성, 해군성, 외무성, 내무성, 로동성, 경찰청책임자들과 조선과 대만, 홍콩총독들, 파견군사령관들을 기소하는데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성노예행위가 조직적으로 감행된 시기를 만주사변으로부터 15년간으로 규정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견해일치를 보았다.

이런 준비에 기초하여 《일본군성노예제를 재판하는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은 계획대로 2000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꾜의 구단 회관에서 개최되였다.

법정에는 법정판사단, 국제검사단, 변호인들, 피해 각국 검사단들과 피해녀성들, 법률고문들, 전문가증인단들, 구일본군복무자들 도합 1 000여명이 참가하였다.

또한 법정취재를 위해 많은 신문, 통신, 라지오, TV기자들이 참가하였다.

법정 첫날에 판사단의 개최선언에 이어 국제검사 패트리샤 셀레즈의 기소요지발표가 있었다.

기소요지에서는 일본군성노예행위는 정부와 군부의 전적인 강요하에 강제적으로 실시된 성노예제로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관한 죄에 해당된다는데 대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론증하였다.

그리고 성노예범죄자들을 모두 찾아내여 이미 죽었건 현재 살아있건 관계없이 해당한 형벌을 선고하여야 하며 일본정부는 구일본군의 성노예범죄에 대하여 국가적인 책임을 지고 사죄배상해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검사들의 론거에 련이어 피해자녀성들의 사실증언이 진행되였으며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중국, 필리핀, 네데를란드, 인도네시아, 동부띠모르 등 여러 나라들의 기소장발표가 있었다.

넷째 날에는 가해자인 전 일본군인 두명이 증언에 나왔다.

증언에 나선 전 일본군인들은 피해녀성들에게 머리숙여 사죄의 뜻을 표시하면서 자신들이 위안소에 다니게 된 당시의 심정에 대하여 솔직히 토로하였다.

그들은 오늘 죽지 않으면 래일이라도 죽을것이 뻔한 일인데 사내로 태여나 녀성과 한번 교제나 하여보자는 생각으로 위안소에 다녔다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심정이 당시 일본군병사들의 일반적심리였다고 하면서 죽음을 앞둔 처지에서 녀성들을 희롱하는것을 운명에 대한 비관과 불우한 처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기회로 여기고 짬만 있으면 위안소에 찾아가고 녀성들을 찾아헤매였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절망적인 상태에서 녀성들에게 마구 달려들어 성적강탈을 하였으며 조금만 마음에 거슬려도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면서 이것은 병사들의 인간적본심에서 나온것이 아니며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제국의 침략적야망이 가져다준 결과라고 하였다.

뒤이어 법정기간에 《일본<천황> 히로히또의 책임》, 《일본제국군대의 구조》, 《전시녀성에 대한 폭력》, 《일본의 전쟁과 국가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전문가증인들이 출연하여 증언하였다.

특히 일본의 《전쟁과 녀성에 대한 폭력반대일본모임》 네트워크단체는 기소문에서 《천황》 히로히또의 책임을 립증하는 증거자료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국제범죄행위에 대한 국가의 법적책임과 개인의 형사적처벌이 서로 련관 되여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어느 한편의 책임추궁이 다른편의 책임리행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국제범죄를 철저히 청산하려면 국가의 법적책임추궁과 범행자들에 대한 형사적처벌이 별개로 엄격히 진행되여야 한다. …

재판부는 일본군성노예제의 심각성과 엄중성, 각 피해국가들에서 제기한 방대한 기소문과 각국 검사들의 사리정연한 론거, 증언에 나선 피해녀성들의 일치한 요구에 따라 일본《천황》 히로히또와 수상 도죠 히데끼를 비롯한 지명기소된 모든 범죄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일본정부는 전쟁법규와 국제인도법의 요구에 따라 구일본군의 성노예범죄에 대한 법적책임을 인정하고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는것을 법정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언하였다.

《일본군성노예제를 재판하는 2000년 도꾜녀성국제전범법정》은 이렇게 도꾜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던 일본《천황》 히로히또를 기소심리하고 그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인류앞에 저지른 전범죄는 죽어서도 결산을 받는다는 심각한 력사의 교훈을 확증하였다. …

사다께는 2000년 도꾜법정의 설립과정을 이렇게 개략적으로 밝힌 다음 일본군성노예문제와 관련해 새로 확증한 자료들을 몇가지 첨부했는데 그자신의 구체적인 분석을 안받침하여 적은 자료들로서 무라야마의 눈길을 끌었다.

사다께는 먼저 일본군성노예문제는 외적으로 보면 만주사변직후부터 패망에 이르는 전기간 일본군이 조선의 20만에 달하는 녀성들을 전장에 끌고 다니며 성적으로 강탈한 행위이지만 그 본질을 파들어가보면 그것은 당시 제국의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철저한 실현과정이였다고 썼다.

《<합병>한 조선을 민족으로서 말살하고 조선반도를 확실한 일본의 내지로 만드는것의 필요성을 두고 <한일합병>직후인 1910년 9월 8일 일본정부가 작성한 비밀문서 <교화의견서>에는 다음과 같이 밝혀져있습니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조선민족의 동화란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본민족의 언어, 풍습, 습관 등을 채용, 습득하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일본민족의 충군애국정신을 체득시키는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그 언어, 풍습, 습관 등 외적방면이 채용되고 습득되는것으로 결코 동화되였다고 말할수 없으며 동화의 본체는 차라리 내적인 방 면인 정신적측면에 있다는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내지에 있어서 인구증가는 해마다 50만명선을 넘어선다.

이 비률로 인구가 계속 증가한다면 70~80년을 넘지 않아서 일본의 주민수는 현재의 배로 증가할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수의 동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도저히 내지에 모두를 수용할수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그들 대부분을 다른 곳에 이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부싸할린이나 대만 같은 곳은 토지가 좁을뿐아니라 그 기후풍토도 일본민족에게 적당치 않다.

그렇다면 조선이외에 다른 적당한 곳이 없다는것은 명백하다.

조선은 일본국의 중요한 식민지가 되여 주민들을 왕성하게 그 땅에 이주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민족은 여러 종류의 방면에서 생활난의 압박을 받아 마침내는 현재 프랑스에서 보는것 같은 인구의 증식을 인공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산출하는 등 비극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될것이다.

그 결과 일본민족의 발전력은 저지되고 따라서 민족적원기는 점차 쇠퇴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될것이다. 철두철미 조선은 일본민족이 발전해야 할 식민지로서 경영되고 조선민족은 일본민족에 대하여 종속적위치에 두는것이 필요하다. 조선민족을 철저히 교화하여 제국의 순량한 신민이 되게 하여야 한다. >

조선민족을 민족으로서 점차 사멸, 동화시켜 일본민족에 흡수해버리는것, 우의 의견서에서 보다싶이 당시 제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의 총적인 목적은 이러한것으로서 이후 본격화된 창씨개명… 등과 함께 20만의 조선녀성들을 위안부로 끌어간것 역시 이 정책의 중요한 연장선우에 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당시 전장의 총폭탄과 학대속에서 성노예 한명이 하루에 30~50명의 병사들을 치러야 했던 그 비참한 치욕과 특히 일본의 패망당시 자행된 잔인한 집단학살속에서 10대, 20대 처녀들 대부분이 참혹하게 죽었으며 살아돌아온 얼마 안되는 녀자들도 기능상 자식을 낳을수 없게 되였습니다.

군부가 아직 공개하지 않고있는 자료에 의하면 1938년부터 1942년까지의 조선인성노예중 30~40프로가 죽었으며 다시 그만한 수의 성노예가 새로 보충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죽고 보충된 수를 합치면 실로 방대한 수자가 됩니다.

이런 순환이 몇차례만 이어졌다면, 당시 조선인구 2천만중에 남성들과 어린 소녀, 중년녀성, 할머니들을 제외한 젊은 산아기능녀성의 말살이 20만씩 몇차례만 더 계속됐다면 조선민족은 멸살의 위기를 벗어날수 없었을것이라는것이 이번에 구체적인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제가 얻게 된 결론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던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라 국호와 외교권이 완전히 말살된 일본국의 한 지역으로 <합병>되여있은만큼 전대미문의 이런 정책을 누구도 조사하거나 항의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조건에서 이 조선족말살정책은 아마 성노예, 창씨개명, 궁성요배, 동조동근의 물결속에 큰 흔적없이 조용히 그 성과의 끝을 맺었을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965년 제7차 <한일회담>에 참가한 일본측 수석대표 다까스끼 싱이찌가 했던 말을 다시금 여기에 인용하게 됩니다.

<20년쯤 조선을 더 가지고있었더라면 좋았을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 가옥, 산림 등을 모두 그냥 두고 왔다.

창씨개명만 해도 그것은 <한국>사람을 동화해서 일본사람과 같이 취급하려고 취해진 조치였으며 나쁜것이였다고만 할수 없다. >》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9-08-12 08:46:12 새 소식에서 복사 됨]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Japan Should Atone for its Past Crimes for Its Future
Korea: In the Era of Peace, Dissolve the UN Command, A Relic…
[연재2] <내 마음의 교향곡>음악과 더불어 영생하는 김일성주석
북 조평통, 지난 정권과 다를 바 없는 배신행위, 진상공개장 발표
[아침햇살36]경제공격을 자행하는 일본의 숨겨진 의도①
엘에이, 정전66년에 종전과 평화협정체결 촉구 집회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계를 구원할 조선
최근게시물
[동영상 연재]< 조국광복을 위하여10>
문정부는 사람정부로 부활 좀 하세요
미사일 얻어맞아도 “괜찮다”..궁색한 미국의 처지
[연재21]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3. 량심인 미쯔오
북의 인기 개발품들, 지능치솔 외 3
[기행]문 동해명승 칠보산을 찾아서
북, 탐욕의 광기가 무모해지는 근원은
북,《특정실종자》?! 드러난 진실은
북, 미군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은 무엇을 시사해주는가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8월 18일(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8월 18일(일)
조선의 여성들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Copyright ⓒ 2000-2019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