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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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12-06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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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단에 춤을 춥시다.》
이 말은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주체37(1948)년 4월에 있은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했던 김규식선생이 한 말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김규식선생은 1880년 12월 28일 경상북도 울진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5살때에 신학문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요구에 의해 당시 서울에 와있던 미국선교사 언더우드1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보노오크대학과 프린스톤대학원을 졸업하고 25살 나던 해인 1905년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 서울그리스도교청년회 총무를 거쳐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중학교 교감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경력은 그의 머리속에 숭미, 외세의존사상이 자리잡게 하였다. 그가 주체8(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의 명의로 프랑스에서 빠리강화회의에 참가한 렬강수뇌자들을 상대로 독립청원운동을 벌린것은 바로 이때문이였다.
선생은 상해림정 외무총장, 중경림정 부주석으로 있다가 주체34(1945)년 11월 23일 남조선에 왔다.
귀국후 선생의 반공대결의식과 숭미사대는 더욱 굳어졌다. 그는 언더우드2세가 하지의 정보담당 정치고문인것으로 하여 하지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이 과정에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국가를 세울수 있다는 숭미사대주의에 깊이 빠졌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의 자리도 사퇴하고 미제가 조작한 남조선《민주의원》부의장, 《좌우합작위원회》우익측 주석, 《과도립법의원》의장을 력임하면서 애국적민주세력을 분렬와해시키는 음모까지 꾸미는 등 미국의 장단에 춤을 추었다.
그러던 선생은 자기들이 미국의 장단에 춤추며 《좌우합작》극을 벌려 만들어낸 남조선《과도립법의원》과 남조선《과도정부》라는것이 《미군정》통치를 미화분식하기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더우기 려운형선생에 대한 암살과 1947년 9월 조선문제의 유엔상정을 통하여 미국의 흉심을 똑똑히 간파하게 되였다.
《이제껏 우리가 미국에 속은것이 분하다》, 《이제 더는 미국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을것이다》, 《조선사람의 일은 조선사람에게 맡기는것이 좋겠다》…
갈 길 몰라 방황하며 번뇌와 고민으로 련일 몸부림치던 그때 선생의 가슴을 벅차게 한것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내놓으신 북남협상방안이였다.
남조선에서 강행하려는 미제의 《단독정부》조작음모를 짓부시고 조선인민 자신의 손으로 통일적중앙정부를 세우자는 방안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분렬의 위기에서 구원할수 있는 결정적인 구국대책이였다.
하기에 선생은 민족자주적인 립장에서 통일정부를 세울데 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북남협상방안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주체36(1947)년 12월 20일에는 민족자주련맹을 결성하였다.
그후 위대한 주석님께서 보내주신 특별초청장을 받아안은 선생은 공산주의에 대한 몰리해로 반공의 길을 걸어온 자신에게서 한가닥 남아있는 민족적량심과 애국애족의 마음을 귀중히 여기시고 련공합작의 손길을 보내주시는 주석님의 은정을 가슴에 새기고 북행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장기간의 반공죄과때문에 평양에 가기만 하면 억류당할것이다》, 《김규식선생을 초대대통령으로 밀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더라도 김규식선생만은 북행을 중지하라》고 줴쳐대며 선생의 북행길을 가로막아보려고 책동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주체37(1948)년 4월 21일 온갖 요설과 강권, 회유기만을 단호히 물리치고 북행길에 올랐다.
이것은 한생을 몸담아온 종전의 숭미반공자세에서 과감히 벗어나 련북련공, 민족자주의 립장에로 방향을 바꾼 인생전환의 계기였다.
련석회의의 나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뵙고 새 조국건설로 들끓는 평양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김규식선생은 주석님께서 펴시는 정치야말로 자기 인민의 힘을 믿는 정치, 진정으로 나라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정치임을 페부로 절감하였다. 특히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이 서로 단합하는 길만이 우리 인민을 영원히 자주적이며 존엄있는 민족으로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똑똑히 알게 되였다.
하기에 위대한 주석님을 모신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웨쳤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하겠습니다. 어제 모란봉극장에서 본 우리 장단에 맞추어 추는 우리 춤이 제일 좋았습니다. 〈좌우합작〉은 미국사람의 장단에 추는 춤이였습니다. 이제는 남의 장단에 춤출것이 아니라 우리 장단에 춤을 춥시다.》
이것은 더는 미국의 장단에 놀지 않으며 오직 위대한 김일성주석님만을 믿고 민족자주의 길로 나가려는 그의 심장의 맹세였다.
그후 서울에 나간 선생은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의 온갖 회유와 끊임없는 압력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련북련공, 자주통일을 위하여 힘껏 싸웠으며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고령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주석님의 품을 찾아 다시 북행길에 올랐다.
주석님께서는 김규식선생을 민족적량심과 의리가 있는 애국인사로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전시의 어려운 속에서도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전문의료일군들을 붙여주시고 귀한 보약재들과 식료품까지 보내주시였다.
이렇듯 주석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받아오던 김규식선생은 불치의 병으로 주체39(1950)년 1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그의 애국업적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를 애국지사, 애국렬사로 영생의 언덕에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반세기가 훨씬 넘은 오늘에도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는 김규식선생의 한생은 우리 겨레의 가슴마다에 귀중한 력사의 철리를 새겨주고있다.
우리 민족, 우리의것이 제일이라는것,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밑에 온 겨레가 굳게 단합하여 투쟁할 때 조국의 통일도 통일강성대국도 이룩할수 있으며 그 길에서 민족성원 개개인의 삶도 빛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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