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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 요원에서 통일운동가가 된 박기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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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2-11 11:5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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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 요원에서 통일운동가가 된 박기식 선생,

“미국 대조선 적대시 정책 포기하고 평화협정 맺어라”

 

이정섭 기자

 

 

▲ 중앙정보부 요원에서 재미통일운동가로 한 삶을 살아 온 박기식 선생은 오늘도 자신의 몸을 조국통일에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한번밖에 주어진 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보람 된 것일까?

 

이 물음은 가치 지향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화두 일 것이다.

 

혹자는 부를, 어떤이는 명예를,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이나, 지식 정도를 생의 만족으로 알고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행복하고 보람 된 삶은 한생을 돌아보았을 볼 때 나를 위해 산 자기 중심적 생활을 찾기보다 사회와 이웃 더 나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이타적 가치를 추구 했을 때가 아닌가 한다.

 

여기 그 삶의 정형이 있다, 한 때는 나는 새도 떨어드린다는 중앙정보 요원으로 살았지만 갈라진 민족의 통일이 우선한다는 신념으로 과감히 일신의 안위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온 몸을 바쳐 조국통일을 위해 나선 재미동포 박기식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다.

 

미국 여행 중 보스턴에 거주하는 미주 통일운동의 거목 박기식 선생을 만나 보았다.

 

 

박기식 선생은 보수적으로 불리는 소위 티케이 중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구 출신으로 효성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가톨릭 재단의 학교였던 효성 초등학교 교사 대부분은 수녀들이었다고 한다. 박기식 선생은 “당시 학교는 수녀들이 많아 마치 수도원 같았지”라고 회고했다.

 

어릴 때 유난히 의협심이 강했으며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 지하운동에 참여하며 민족애를 키웠던 박기식 선생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만들어 졌던 중앙정보부 요원이 되었다.

 

박기식 선생의 임무는 당시 언론사를 드나들며 언론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를 담당하였던 탓에 고 리영희 선생과 송건호 선생 등과의 인연도 빼 놓을 수 없다.

 

 

▲ 박기식 선생은 현재 주정부에서 마련해 준 한 때는 신발 공장이었으나 노인 아파트로 개조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박기식 선생은 비록 물질적 부와 명예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조국통일에 몸 바쳐 온 자신의 삶을 결코 후회 하지 않았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중앙정보부 언론 담당 임무를 수행하며 북의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박기식 선생은 증언했다. “당시 주기적으로 언론사 간부들과 대북 영상물 또는 언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기록영화는 당시 북의 현실이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줬다. 한번은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과 함께 기록영화를 보았는데 방 사장이 김일성주석이 나오자 ‘저 독재자’하고 소리쳤지. 그것은 기관원들 보는 앞에서 자기의 충성심을 드러내려는 의도 였던 거야”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일하며 박기식 선생은 많은 고민과 번뇌에 빠지게 되었다. 온만년을 단군의 자손으로 한 핏줄을 이어 받아 온 민족이 외세에 의해 분단되어 갈갈이 찢겨져 살아야 하는데 통일을 위해 살지는 못할망정 정통성도 확보하지 못한 정권을 유지해 주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양심을 짓눌렀다. 몸과 양심을 팔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돈과 명예, 권력의 유혹을 떨치고 조국통일에 몸 바치기로 결심한 후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국적기 1호에 몸을 싣고 미국을 향했다. “중정 요원으로 나 같은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아니 나 혼자만인지도 모르지. 사실 중정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망명 온 사람들은 더러 있지만 그 사람들은 미국 정보기관에서 일을 하 곤 했지. 중정에서 취득한 국가기밀을 발설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함께 사표를 제출했어. 그리고 미국으로와 통일운동을 시작한 것이지”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그간 맺었던 인사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박기식 선생이 거론한 인물 중에는 유엔주재 한국대사로 재직했던 임창영 박사를 비롯하여 선우학원박사, 류태영 목사, 문동환 목사, 함종국 목사, 리승만 목사,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선생, 소설가 조정래, 시인 고은... 등등

 

 

▲ 박기식 선생의 작은 방에는 민족의 현대사를 기록한 책으로 가득차 이었다. 박기식 선생도 책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껴안고 살 아온 살아 있는 역사 서이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박기식 선생의 첫 방북길은 1979년 시작되었다. “1978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조선 여행을 허용했어요. 미국의 시민권자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북을 방문 할 수 있게 한 것이지”라며 조국방문 사실을 털어 놓았다.

 

박기식 선생은 이어 “평양에 도착하니 남과 북이 다르다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어. 아 사물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같지 않겠나. 중정 시절에도 북의 현실을 동영상을 통해 보아서 많이 놀라지는 않았지 북을 전혀 몰랐던 일반인들과는 달랐어. 어느 정도는 북의 현실을 알고 있었으니까.”라고 첫 방문 소감을 말했다.

 

박기식 선생은 남과북, 일본을 오가며 남북 해외 동포들의 통일 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까닭으로 남측 정부로부터 입국을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박기식 선생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과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조국 반쪽 남측 정부가 시리도록 아팠고 반드시 민족의 수난과 고난, 아픔을 씻어 낼 각오를 가졌다.

 

 

▲ 박기식 선생은 비록 물질적 부와 권력, 명예를 포기하며 양심을 따라 조국통일에 몸 바쳐 온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올해 88세인 박기식 선생이 조국통일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박기식 선생에게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 된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잠시 숙연해지더니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는데 내가 무슨 한 일이 있겠는가. 다만 남과북 해외 동포들이 나를 통일의 지렛대로 삼아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면서 “항일독립운동 시기부터 그렇지 않았습니까?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모아 조국 해방을 이루는데 힘써야 한다고요. 그런데 나는 가진 것이 한국 정부에서 정보부 요원으로 일하다 통일 운동에 뛰어 들었으니 그 약력과 이력, 그리고 나를 통일에 이용 할 수 있다면 이용하라는 것이었지요.”라고 말하며 자신은 몸밖에 조국에 내 놓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박기식 선생은 “분단 되기 전 우리 조국은 부산에서 기차를 타면 중국 심양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일제로부터 해방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결국 외세에 의해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맞았다. 나는 작은 힘이지만 우리민족의 끊어진 동맥과 핏줄이 이어지길 바란다는 일념으로 살았고 여생도 그렇게 살 것”이라고 다짐하듯 강조했다.

 

지난해 한국정부가 일본과 성노예 문제에 대한 합의에 대해서는 자신의 친적의 사례를 들며 터무니 없는 일이라며 한국정부가 국민들의 의견을 들어 ‘원천 무효를 선언’하고 재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월 6일 북이 단행한 4차 수소탄 시험과 2월 7일 쏘아 올린 인공위성로켓 발사에 대해서는 “인공위성 발사나 핵 시험은 자주권을 가진 나라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라면서 “세상에서 핵무기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유일하게 사용한 나라 그리고 지속적으로 핵 개발을 하고 있는 미국은 되고 조선이 가지면 안 된다는 논리는 형평성과 당위성을 가지지 못한 비상식적인 억지다. 인공지구위성 역시 같은 날 러시아에서도 인공위성 로켓을 쏘아 올렸는데 왜 조선의 인공위성 로켓만 문제를 삼느냐. 이는 국제주의적 원칙도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기식 선생은 “미국의 기다리는 전략, 대북 제재와 봉쇄는 조선을 더욱 군사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며 “미국은 이제 실효성도 없고 평화와 안정에 역행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과 제재와 봉쇄로 맞설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관 되게 촉구하고 국제 사회가 동의하는 한반도에서의 평화협정 체결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미국 자신에게도 조선이 위협국이 아니라 평화의 동반자가 되게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박기식 선생은 오는 3월 결혼 60주년과 함께 88세 축하연을 인근 한인 교회에서 연다면서 이날 축하연은 초등학교 제자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장해 온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조지아대 박한식 명예 교수를 초빙하여 강연을 할 계획이라고 귀뜸 해 주었다.

 

한생을 구비 구비 문경세제 같은 삶의 영길  넘어 오며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주통일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오 온 박기식 선생은 “이제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았어. 생을 마감하기 전에 조국이 통일 되어야 하는데...”라는 말과 함께 기자의 손을 잡으며 “이 기자 통일은 곧 올 거야 그렇지”라고 신심에 찬 목소리를 가슴에 남겼다.

 

[출처: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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