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노벨 ‘평화상’이 어떻게 워싱턴의 베네수엘라 전쟁 추진을 가속화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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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12-01 20:4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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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노벨 ‘평화상’이 어떻게 워싱턴의 베네수엘라 전쟁 추진을 가속화했는가
송영애 미주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응원한 야수적인 시오니스트를 시상함으로써, 노벨상은 다시 한 번 서구 제국주의의 도구임이 드러났다.
저자 및 출처: 하미드 다바시(Hamid Dabashi), 미국 뉴욕 콜롬비아 대학 교수. 이란학, 비교문학, 세계영화, 탈식민지 이론 연구 및 강의/ 중동의 눈(Middle east eye) 2025년 11dnjf 25일자 칼럼.
번역: 송영애 미주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
원문제목: How the Nobel 'Peace Prize' helped propel Washington's war drive in Venezuela
원문출처: https://www.middleeasteye.net/opinion/venezuela-machado-world-dismantle-nobel-prize

베네수엘라 극우반동 야당 지도자이자 202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지난 11월 5일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메리카 비즈니스 포럼에 화상 회의로 참석하고 있다 [출처: 중동의눈(Middle east eye) / 마르코 벨로, Reuter)
친미·친이스라엘 성향의 베네수엘라 야권 인사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2025년 10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직후,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은밀하고 공개적인 군사적 공격을 노골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CIA에 베네수엘라 내 비밀 공작을 지시했다. 10월 말에는 미 해군 군함들이 베네수엘라 인근 카리브해에 배치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11월 13일까지 트럼프는 군사적 선택지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이후 미국은 정권교체 압박을 다시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실체조차 불분명한’ 카르텔 데 로스 솔레스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이를 고위 정부 인사들이 이끌고 있다고 주장했다. 항공모함을 해당 지역에 배치하고, 베네수엘라 정부를 겨냥한 “새로운 단계”의 작전을 개시했는데, 여기에는 초법적 살해까지 포함돼 있다.
우연일까? 아마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2013년부터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이끄는 현 베네수엘라 정부는 자국의 방대한 천연자원을 노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오랫동안 저항해 왔다. 또한 워싱턴의 역내 개입을 비난하고,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규탄하며, 서구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적 전선에 동조해 왔다.
이번에 노벨위원회가 선택한 마차도는 유럽 파시즘에 깊이 경도된 베네수엘라 정치인이자, 열성적인 집단학살 옹호 시오니스트이며, 트럼프의 라틴아메리카 ‘재정복’ 을 열렬히 응원하는 인물이다.
마차도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높여온 선동가이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신의 조국을 공격하고 자원을 약탈하도록 부추기는 운동을 주도해 왔다. 또한, 집단학살적 시오니스트들이 흔히 그렇듯, 극단적 이슬람혐오자라는 보고도 있다.
이는 이란 출신의 두 저명한 해외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와 나르게스 모하마디 사례에서 입증된 바처럼, 이 두 인사는 노벨상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변화의 주체였지만, 수상 이후에는 조국인 이란을 공격하는 가장 반동적인 제국주의 세력의 대변인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과연 ‘선의의 힘’인가?
러시아, 중국, 이란, 베네수엘라의 정권들이 인류에게 신의 선물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 나라들 역시 여러 내부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이 도대체 무슨 목적을 갖는 것인가? 수상자들을 서방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키는 것 말고 무엇이 남는가? 도대체 어떤 권위인가.
마차도를 기린 노벨위원회의 결정은 ‘평화상’이라는 이름 자체를 넘어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전범 헨리 키신저에게 주었던 평화상은, 훨씬 이전부터 이미 신뢰를 잃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미제국주의와 군사주의의 기능으로 전락했다.
이번 노벨위원회의 추태를 넘어서, 이 제도의 역사 자체를 되짚으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과연 더 이상 이들의 결정을—최선의 기준이 아니라 최악의 기준을 보여주는 지표로서조차—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현재 노벨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쓸모없거나, 오히려 스캔들에 가까운 상이 되었다. 작은 유럽 집단이 과장된 세계적 영향력을 갖도록 착각하게 만드는 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이 허구를 계속 유지하다가 반복해서 실망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다. 노벨상이라는 전체적인 연출은, 유럽이 실제로는 갖고 있지 않은 도덕적·과학적 권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장치일 뿐이다.
도대체 누가, 어떤 권위로, 낡은 소수의 유럽 엘리트들이 전 세계를 향해 과학과 사상, 인권의 기준이 무엇인지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정했는가?
그들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그들의 인종주의적이고 백인우월주의적이며 자기만족적인 과대망상에 더 이상 아무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물리학·화학·경제학을 관장하는 왕립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생리학·의학을 담당하는 카롤린스카 연구소, 문학을 담당하는 스웨덴 한림원, 그리고 평화를 담당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이들이 바로 이러한 상 뒤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권위 있고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들의 오랜 시간에 걸친 추문과 물의의 결정들은 이미 신뢰를 완전히 훼손해왔다. 1918년, 그들은 독가스 발명으로 악명 높은 프리츠 하버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했다. 1926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암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덴마크 의사 요하네스 피비거에게 노벨 의학상을 주었다. 1949년에는 로보토미 수술을 고안한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에게 같은 상을 수여했다. 2008년에는 스웨덴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의 자금 지원을 받은 연구로, 아스트라제네카 출신 인사 두 명이 포함된 심사위원회가 하랄트 추어 하우젠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여했다.
이런 사례는 끝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장폴 사르트르에게 문학상을 주었을 때, 그가 “꺼져라”고 말하며 수상을 거부한 것이 과연 놀랄 일인가?
노벨상들의 기원부터 생각해 보자. 이 상들은 1896년에 사망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1888년, 형의 사망 이후 실수로 발표된 조기 부고 기사에서 자신의 발명들 때문에 “죽음의 상인(merchant of death)”으로 묘사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보다 긍정적인 유산을 남기려 했다.
그의 진짜 유산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발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우리는 지금 기만당하고 있다.
이 환상을 해체해야 한다.
세계는 노벨상을 해체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이처럼 수상한 인물들의 행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세계적 보편성을 가장하고 있는 모든 유럽 제도들의 근본적 결함에 있다.
이 낡은 제도들은 과학과 기술 분야까지 포함해 그 어떤 영역에서도 더 이상 기준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며, 전면적으로 신뢰를 박탈당하고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인류가 노벨상이 오랫동안 인정하고 보상해 왔던 재앙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급진적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세계는 이런 무의미한 상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대안적인 상은 필요 없다
이집트, 인도, 중국, 이란, 멕시코 어디에도 새로운 대안 상을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류 전체는, 이스라엘이라는 요새화된 주둔 국가를 지지하는 유럽의 폭력배들 앞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작은 함선 하나에 몸을 싣고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그 부유선단과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오늘의 세계에는 축하할 것도, 상을 줄 것도, 기릴 것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가자를 보라. 그곳이 바로 오늘날 인류의 총합이다. 우리의 과학과 기술, 우리의 인문주의, 우리의 평화에 대한 외침이 낳은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서 무엇을 기리고, 무엇을 상으로 줄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인류는 이 유럽 부족주의적 연극을 당장이라도 끝장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평화상을 수여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같은 기관은, 그 창립자의 이름과 “죽음의 상인”이라는 명성을 그대로 잇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철저히 유럽 내부의 지방적 사건일 뿐이며, 지금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난 서구의 야만성 아래 놓인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는, 특히 “평화”나 심지어 과학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의 선언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전혀 없다.
노벨상이라는 이 거대한 연출 전체는, 끊임없는 야만 속에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과학적·문화적·인도주의적 위장술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이 체제 안에서 노벨상이 누구에게 무엇이든 상을 선사하게하는 그 메커니즘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 상은 이미 오래전에 의미를 상실했으며, 특히 문학상과 평화상 부문에서의 많은 선택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다.
노벨상은 데이르 야신 학살의 책임자인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자 메나헴 베긴, 그리고 악명 높은 이슬람 혐오자 아웅산 수치 같은 인물들을 선택했다.
노벨상은 보편성을 가장하면서 서구의 세계적 패권을 떠받드는 유럽의 제도일 뿐이며 그 그 가식은 반드시 퇴출되어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깊은 도덕적·실존적 위기에 빠져 있다. 노벨상은 이 위기를 치유하는 해법이 아니라, 바로 그 위기의 증상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상을 주는 일을 멈춰야 한다. 대신 서구 군사주의가 그 세력을 더욱 넓히며, 베네수엘라를 향해까지 돌진하는 가운데, 가자와 수단,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애도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애도를 끝내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떤 영예를 수여할 도덕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출처 통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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