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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 월북시인 김상훈의 장남이 쓴 아버지에 대한 추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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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11 18: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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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시인 김상훈의 장남이 쓴 아버지에 대한 추억 1

 

 

 

유석종 목사(재미)

2015-07-11

 

   

 

▲김상훈 작가

 

 

지난 5월 29일 연세대학교 연문홀에서 "근현대 한국의 지성과 연세"라는 주제로 연희 100년, 광복 7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학술회의에서 정인보, 김상훈, 김일출, 조병옥, 이춘호, 최규남 등 연세출신 6인의 활동과 업적이 조명되었는데, 이중 김상훈은 6.25동란시 북행길에 올라 1987년 췌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37년간 북녘조국에서 작가로서, 시인으로서, 한학자로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이와는 별도로 연세대학 발행 <인문과학> 학술지 2015년 봄호에는 김상훈 특집논문이 3편 실렸다.

 

   김상훈 시인은 1919년 경남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에서 김채완의 둘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백부인 광복지사 김채환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늦게 가조초등학교를 졸업, 서울중동중학교에 진학했으며, 1941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인은 1944년 징용에 끌려가 원산철도공장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고, 협동당 별동대 일로 왜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8.15 광복으로 출옥한 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작품발표를 본격적으로 하였고, 광복기 전위시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주의 노선이 문제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용산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김상훈 시인은 빨찌산에 지원하여 1951년 5월 적의 포사격에 다리를 다쳐 후방에 이송될 때까지 전사로서, 기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유격지도처에서 제대한 후 시인은 조쏘출판사에 배치되어 잡지 <조쏘친선> 과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그처럼 동란 때 북행길에 올라 <조쏘친선> 기자로 일하던 류희정을 만나 결혼을 하여 슬하에 6남매를 두게 되었다. 미망인 류희정은 1990년부터 지금까지 25년간 <현대조선문학선집> 편찬인으로 일하고 있다.

 

   김상훈 시인은 광복기에 시집 <전위시인집>, <대열>, <가족>과 <역대중국시선>, <푸쉬킨 시집>을 냈고, 북녘에서는 <풍요선집>, <력대시선집>, <가요집>, <리규보작품집>, <중국고전시선>을 펴냈고 유고시집 <흙>을 남겼다. 금년 초에는 미망인의 노력으로 김상훈 작품집 <통일을 불러>(327쪽)가 평양에서 출판되었다.

 

   한편 남녘 땅에서는 2003년 경남/부산지역 문학회 주선으로 그의 고향인 거창 가조온천단지 시비공원에 김상훈 시비가 건립되어 그의 문학적 자산과 실천적 삶을 기리게 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김상훈 시 전집>(337쪽)과 <김상훈 시 연구>(650쪽)가 발행되었다.

 

   김상훈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민족의 고난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 영혼의 외침이 들려오고,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염원하는 뜨거운 피가 그 속에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조선은 하나다! 나의 말은 한 평생 이 한마디뿐이다. 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하리라. 하나의 조국을 찾기 위해 사노라고..."

 

   최근 김상훈의 장남 김종설이 아버지를 기억하며 <통일신보>에 게재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5회에 걸쳐 여기에 전재한다.

 

 

<통일신보> 수 기 

 

 

아버지에 대한 추억 (1)

 

 

김 종 설(작가 김상훈의 맏아들)

 

 

제 아비의 얼굴도 못 본채 어른이 되여버린 손자와

손자가 너무도 제 아비를 닮아

자꾸만 마음이 저릿해오는 늙은 할머니가

마당가에 함께 서서 철새를 보고있다

 

달은 뉘엿뉘엿 산머리에 걸앉는데도

철새들은 날아와 어느 강가에 내리려는지

날개를 쭈욱 펴며 매돌아본다

 

철새의 등에 실려 흘러간 세월은

일흔번의 겨울이요, 일흔번의 봄인데

남북의 길은 하늘에만 열려있어

할머니와 손자는 땅이 서럽다

 

오늘도 귀전에는 말이 많아

권세를 물쓰듯 하는 무리들은

저희들만 통일을 가져온다고

떠돌이 엿장수처럼 웨쳐대고있지만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를 이루듯

한곬으로 모아야 할 만백성의 마음은

여전히 가시줄에 얽매여있어

 

혈육의 몸부림을 겹겹이 싸안고

할머니와 손자가 철새를 보고있다

 

(작가 김상훈의 시 <철새>에서)

 

 

*     *

 

나는 나의 아버지 김상훈의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솔직하게 알려달라는 재미동포전국련합회 사무국장 이 선생의 청탁을 받고 이 글을 쓴다. 미흡한 점이 많은 이 글을 인터네트에 태워 보내면서 아직 아버지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주시는 재미동포여러분과 남녘동포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행복이란 무엇일가? 아마도 이 이야기는 서글픈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1954년 경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이 갓 끝난 그때 평양시 고평면 내리 지금의 칠골사적지 부근에 조쏘출판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스물일곱의 작고 영민하게 생긴 여인이 원고결제를 받으려고 편집국장방에 들어갔다. 국장은 여인과는 대조되게 키가 크고 잘 생긴 사람이었다.

 

“고향이 어디요?”

“남반부입니다.”

“가족이 함께 후퇴했소?”

“딸만 데리고…”

“나도 거기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소. 자식들도 있고…》”

저녁해가 희미하게 토굴집창가를 비쳐주고있었다.

“만약 우리가 통일되는 그날까지만 함께 살수 있다면…”

 

슬픈 언약이였다. 이렇게 만난 부부가 30년이 넘게 함께 살았다.

 

이 아기의 키가 더 자라면 그땐 되려나

문지방에 닿으면 설마 되겠지

중문에 가지런하면 그때야 되고야말겠지

 

키돋움도 하게 하고 키낮춤도 하게 하며

안타깝게 기다리며 자래운 이 아들이

맙소서, 서른고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꿈이 허사인 줄 누군들 모르랴만

그래도 잊고 지내는 밤들이 있을가봐

꿈에라도 오라고 빌면서 잠드는 통일입니다

 

이렇게 함께 산 부부가 행복했을가? 나는 행복하였다고 단언한다.

 

보통 윤리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부부가 어떻게 행복하였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무슨 자격으로? 나는 이 시에서 아버지의 가슴을 그리도 아프게 하면서 훌쩍 서른살을 넘기던 자식, 지금은 60살을 넘어서는 작가 김상훈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행복하였다. 어머니(류희정)의 말에 의하면 토굴집의 그날밤 어머니는 딸의 손목을 잡고 언약기념으로 전구 한 알을 샀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전구 밑에 혹시 떨어져도 깨지지 말라고 전쟁시기에 내내 쓰고 다닌 까자크식 털모자를 놓아두었다고 한다.

 

예순일곱에 생을 마친 사람에게 있어서 지방에서의 2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길지 않은 공간이다. 바로 이 2년을 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북으로 간 작가 김상훈의 불우한 인생”, “전위시인 김상훈이 붓을 꺾이다”라고 수십 년을 두고 비방하는 것은 너무함을 지나서 유치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럼 먼저 그 유치함의 끝을 헤쳐본다.

 

1958년부터 1959년 사이에 있은 일이다. 내가 55년생이니까 세살부터 네살때 이야기다. 그때 우리 집은 남신의 주어방에 있었고 아버지는 락원기계공장 공기함마공이었다. 김장철에 지금처럼 배추를 실어다준 것이 아니고 밭에서 나누어주었는데 우리 집만은 아버지가 어린 내 어깨에까지 배추통을 얹어주었다. 처음에는 동심에 콩콩 뛰던 나였지만 그 많은 배추를 언제면 다 나를지, 눈물이 맺히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토방에 걸터앉아 쓸쓸히 한숨을 내쉬는 외로운 풍경이었다.

 

내 기억엔 그 이후에도 평생을 두고 못 하나 박아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숙명여대 가사과 중퇴생인 어머니도 아마 그때 대학에서는 배워보지도 못한 가사일에 부닥친 것이 확실했다. 바로 그럴 때 우리 집만 쏙 빼놓을 것 같던 그 아저씨들이 그 많은 배추를 다 캐서 지고들 들어섰다.

 

거짓말 같지만 그때 당황하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세네살 때 일인데도 왜서인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날 개를 잡았다. 엄밀히 말하면 개가 아니라 좀 큰 강아지였다. 아저씨들은 밤 깊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고 아버지는 시를 읊었다. 나는 몰래 부엌에 나가 가마뚜껑을 열었는데 가마안에는 하얀 개대가리만 있었다.

 

살점은 별로 없어도 따스했다.

 

이런 따스함이 불우함이라면 할 말이 없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우리 나라 고전시가문학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한시집과 민요집을 수집편찬 및 번역할 큰 계획을 세웠다.

 

그때부터 나의 유년시절은 하얀 대님을 가쯘히 맨 할아버지들 속에서 흘러갔다. 노인들이 항상 우리 집 안방을 빙 둘러 차지하고 한시도 베끼고 헌책배접도 하면서 “공자왈 맹자왈” 하고 있었다.

 

기능공들보다 세 배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래도 듬직해보이는구나

내가 두드려 만든 탑식기중기 회전축이여

 

모다소리 가볍게 울리면 너는 와야줄 세차게 감아

우리의 보람처럼 소소리높이 벽체를, 아름다운 창문을

웃음과 노래가 꽃밭으로 피어날

인민들의 행복을 담아 올리겠구나

 

뚜렷이 가슴에 안겨온다

블로크를 매달고 더 높이, 더 높이 올리라고

손짓하는 조립공의 모습이 성수가 나서 스위치를 넣으며

보조개에 우물짓는 운전공처녀가

자손대대로 복 누리고 살 새집받는 행복한 얼굴들이

 

그때 락원기계공장에서 아버지가 단야공의 이름으로 써서 발표한 시의 한구절이다. 이외에도 많은 시가 노동자신문을 비롯한 수많은 출판물들에 발표되였는데 저작권이 없었다느니, 여기서 도대체 시비질을 끝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밝혀둔다. 우리 나라에는 설사 그가 죄를 진 사람이래도 저작권을 빼앗는 법이 없다. 아버지에게는 그때 작가동맹 맹적이 없었던 것이다. 맹적을 가지자면 두사람의 보증이 필요한데 남조선에 고향을 둔 아버지에겐 그때 자기를 전위시인이라고 추어올리던 사람들밖에 보증해줄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증을 서주지 않았다.

 

이유인즉은 아버지가 해방직후 남조선에서 발표한 시 때문이었다. “나는 불우한 식민지조선의 지주집 자식, 해방과 함께 어버이를 잃었으니, 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손잡고 저 항쟁의 거리 환희의 거리로 달려나갈 수는 없느뇨”하는 내용의 시가 문제라는것이다.

 

자기들도 물론 왜정때 사각모자를 쓰고 공부한 부자집 자식임은 부인하지 못하지만 공개적으로 지주집 자식이라고는 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사실 나의 아버지는 지주의 아들이 아니었다. 아버지-그러니까 나의 친할아버지는 독립군에 희망을 두고 따라다니다가 가산도 거덜내고 인생도 망친 채 술과 함께 어느 추운날 영영 얼어버린 불쌍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나의 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잘사는 남편의 종가집에 양자로 빼앗긴 불우한 여인이였다.

 

썩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왜 그때 사실을 밝히지 않았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오랜 버릇대로 두 손가락으로 코날을 자꾸 만지면서 장성한 아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나 자신도 구태여 그것을 까밝히기가 싫었다. 물론 나는 철이 들면서 나라도 내 나라가 아닌 빼앗긴 식민지이고 가족도 내 가족이 아닌 서러운 입양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양가집에서 친아들이 태어난 후였다. 내가 비단이불을 덮고 호의호식할 때 담너머에서 구슬피 울던 어인이 제 어머니였다는것을 알게 된 내 마음이 어땠겠니! 이건 아마 부러울게 없는 지주집 아들이 혈혈단신 공산주의자가 된 동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학문과 봉건의 질곡같은 서당도 다 집어던지고 서울에 올라가 공부도 하고 사회주의 서적도 읽고 감옥에도 잡혀가고, 그러다가도 어쩌다 고향에 내려가면 소소리높은 양가집 대문 위엔 〈공산주의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무서운 글자가 써있었다. 곡성이 터져나오는 대문 안에선 양어머니가 빨갱이자식놈이건 헌털뱅이도 보기 싫다며 내 어릴적 입던 옷가지들을 마구 내던졌는데 주섬주섬 집어보면 그속엔 엿가락도 있고 꽁꽁 싼 돈도 있었다. 난 그걸 야멸차게 끊어버릴 힘이 없었다. 더구나 자식이 밭은 양가집에서 나를 일찍 장가보내어 거기엔(남조선) 네 형과 누나들-내 자식이 다섯이나 있다.”

 

아버지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데 잔등이 자꾸만 가늘게 떨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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