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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박정희 미화론자들, 색깔로 시비할 자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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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1-16 15:5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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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연재> 5

 

박정희 미화론자들, 색깔로 시비할 자격 없다.

 

 

김성곤의 소원, "미국 내에 남아 있는 나의 좌익 경력 기록을 없애라"

미국에 남아 잇는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제 3공화국의 또 한 사람의 실력자가 바로 김성곤이다.


김성곤은 65년 한일 기본조약 조인에 따라 일본이 제공하게 된 무상원조 3억불과 유상 2억불, 차관 1억 불의 분배 과정에서 1억5천 만불을 넘겨 받아 쌍용양회를 설립했다.


한일회담은 한일 간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거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식민치 통치를 통해 한국민에게 끼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배상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일본과 한국을 한데 묶어 강력한 반공 동맹을 수립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 아래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한일회담의 의의를 청구권 문제에서 경제협력자금 구걸 외교로 전락시켜 버렸다. 한일 회담 협정문에서 무상원조 3억 불, 유상 2억 불, 차관 1억 불을 받는 대신 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전쟁 징용자 등 모든 식민지 침략 피해자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피맺힌 자금을 수완 좋게 분배받아 일약 제 3공화국 최대의 기업가로 발돋움한 사람이 바로 김성곤이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서 제 3공화국 금권 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69년 그는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과 이른바 공화당 4인 체제를 이루어 삼선개헌안 통과의 돌격부대역을 맡았다.


 김성곤은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은폐하기 위해 역대 내무부 장관을 매수해 형님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했다. 김형욱이 중앙접보부장일 때 김성곤은 김형욱에게 중정에 비치되어 있는 그의 신상카드를 말소해 달라고 청탁했다고 한다. 김형욱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김성곤은 본격적으로 김형욱 제거 작업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한국 내에 있는 자기 경력 기록을 거의 다 없앤 후 김성곤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미국 관계기관에 남아 있는 경력 기록을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그는 나에게도 물은 일이 있다.

 

-"문 기자, 미국에 있는 내 경력 기록을 없앨 방법이 없을까?"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기록들이 국무성뿐 아니라 CIA, 군정보부등 여러 기관에 있을 텐데 그 자료를 어떻게 다 없애겠습니까? 5.16 직후에 박정희 의장도 특별 사절단을 워싱턴에 보내 국회 도서관 자료를 없애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지요.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돼 있는 것을 어떻게 없앱니까?"

 

-"없앨 수 없다? 영구히 남는다?" 그는 몹시 고민스러워 했다.

 

김성곤이 구워 삶았던 내무장관 중에 엄민영이란 이가 있다. 그 역시 경북 출신 좌익 경력자로 6.25 당시 월북했다. 그 후 처자를 이북에 놔두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가 미군 정보부대에 체포 되었고 전향해서 남쪽에서 새로 가정을 꾸몄다. 엄민영은 방첩부대 등을 거쳐 5.16 이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도쿄에 주재하기도 했고 주일 대사와 내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부임해 신임장을 제정할 때 그의 경력 때문에 한.일 간에 마찰이 빚어진 일도 있었다.


통상 호적초본만 가지고 처리하던 일본측이 유독 엄민영에게는 호적 등본을 제출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재직하던 중 북에 남겨 둔 그의 아들이 연일 북한 방송에 출현해 아버지를 부르는 사태가 생겼다.

 

"아버지, 저 00 입니다. 민족의 통일을 앞당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 속히 북으로 오십시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엄민영은 일본 게이오 병원에서 갑자기 숨을 거둔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장병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이 일본으로, 미국으로, 떠도는 낭인 신세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71년 10월 일어난 이른바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파동' 때문이었다.


야당이 국회에 상정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엄명에 맞서 그것을 가결 시켰다가 하루 아침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그 유명한 카이젤 수염까지 뜯기고 박정희에게 버림 받았던 것이다.

 

71년 국내에는 '실미도 특수군 난동사건' , '광주 대단지 폭동', '한진 빌딩 노동자 난입사건', '기동경찰 총기난사 사건', '무장공비 마을 점거'등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야당측은 이에 책임을 물어 오치성 장관 해임안을 제출했는데 당시 공화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성곤씨 등의 4인방은 이것을 기회로 오치성을 해임시켜 버리기로 작정했던 거이다.

 

그 이유는 오치성이 내무부 장관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찰 간부 2백 20명을 권고 해임 시키고 시장, 군수, 구청장, 도청의 국.과장 등 2백 4명을 인사이동 시켰는데 이는 4인 체제의 밑받탕을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오치성이 이 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 박정희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조직의 골격이고 선거시 집권자의 손발이 돼야 할 내무. 경찰, 관료가 공화당 4인방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꼴을 두고볼 박정희가 아니었다.

 

김성곤 등 4인방은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10월 2일 야당의 주장에 편승해 오치성 해임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고, 대노한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항명 주동자들을 색출해 엄중 조치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김성곤 길재호 등 주동자 전원은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그야말로 개처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의 권위에 도전했던 4인 체제는 이로서 끝장이 났다. 박정희는 그의 권력을 넘보는 2인다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당에는 박정희 아닌 실세는 결코 등장하지 못했다. 완전한 박정희 친정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그것은 유신체제의 전주곡이었다.


나는 김성곤이 중정에서 풀려나와 일본을 거쳐 미국에 왔을 때 그가 겪은 수모를 직접 들었다.

 

-"갑자기 정보부원들이 집에 들이닥치는데 하도 급해서 다락에 숨었지 그래도 꼼짝없이 끌려갔는데 그 대접이란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놈들이 내 수염을 한 올씩 한 올씩 뽑는데 미치겠더구먼."

 

그 얘기를 할 때만은 평소 술도 잘하고 노래도 자 부르는 호방한 성격의 김성곤도 분노와 공포로 말할 수 없는 심정인 듯했다.

 

"그만하면 막강한 위치에 계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하극상을 했습니까?"

 

-"3선으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3선을 밀었던거요. 김형욱이가 남산에 앉아 도청하는 줄 다 알면서도 이만섭이하고 짜고 공화당 의원총회를 열어 '이후락.김형욱이 해임 안 시키면 우리는 3선 반대한다'고 강력하게 발언하게 해서 결국 그것을 관철시켰지. 그런데 막상 3선하고 나서 보니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더구먼. 박정희가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입법부는 제맘대로 못 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겠다 싶었지."

 

김성곤은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봐야 겠다'는 정치적 야망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자기 장기인 자금 준비는 물론 사람준비도 상당하게 했다. 여야 할 것 없이 돈봉투로 정치권을 줄줄이 자기 사람으로 엮는 데 그치지 않고 '성곡재단'이라는 걸 만들어 언론계 사람들까지 포섭했으니 말이다. 오치성 사건이라는 것은 결국 그 같은 야심의 발로였던 셈이다.

 

그는 72년 10월 유신 발표 당시 미국에 있었다. 하루는 김성곤으로부터 좀 보자고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로 갔더니 그가 성명서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성명을 하나 발표하려 하는데 이만하면 될까? 좀 봐 주시오."

 

읽어보니 영락없이 유신을 고무.찬양하는 글이었다.

 

"글쎄 이런 걸 왜 해야 되는지 저는 모르겠고, 그래서 성명서가 잘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됩니까?"

 

-"허허, 유신으로 우리나라가 뒷걸음질할 것은 뻔한 일이지만 나야 한국에 벌여놓은 사업도 많고 한데 어쩌겠소. 한국에는 들어가 봐야 되겠고..."

 

김성곤은 그 성명으로 박정희가 자신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자신이 동양통신 사주를 할 때 친하게 지낸 AP, UPI 관계자들에게 그 성명서를 보냈다. 그 덕분인지 그는 소원대로 귀국했다. 


그러나 쌍용그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경제인으로서의 위상은 회복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끝내 재기하지 못한 채 폭음으로 건강을 해쳐 결국 75년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가 자신에 대한 항명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박정희 미화론자들, 색깔로 시비할 자격 없다.

 

내가 5.16 이후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유는 배해무익한 사상논쟁을 재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51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 도쿄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조차 사상대립으로 인한 민족적 비극은 계속 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메이지 대학만 해도 학생회관에 민단 계통의 재일 한국학생동맹 사무실과 총련 계통의 유학생위원회 사무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학생동맹의 상임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우리가 문만 열고 나섰다 하면 복도에서 좌우투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신탁통치 문제, 6.25 책임 문제 등등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메이지대 유학생들은 좌.우로 갈려 일본 학생들이 보든 말든 고래고래 목청을 높여가며 싸우곤 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좌익학생들은 동포이기 전에 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53년경 도쿄 신주쿠에서 우연히 제주도 출신의 한 법정대 유학생과 대화하게 됐다. 그의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제주 4.3 사건 때 우리 아버지, 형님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다. 그대로 있으면 나도 죽을 판이라서 일본으로 밀항해 왔다 이 곳에서 공부를 하려니 학비는 커녕 먹을 것도 없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총련을 알게 됐다. 거기서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관심없다.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진짜 같은 동포 아닌가."

 

개인적인 얘기를 구구하게 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실 비교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일본인들도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50년대에는 나는 별 걱정없이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러니 배고픈 고학생들의 처지를 알 리가 없었다.


당시 민단측에서는 밀항자들은 물론 재일동포들에게도 장학금은 커녕 별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반면 총련측은 동포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법정대 학생처럼 총련의 도움으로 공부한 사람들과 총련이니 민단이니, 빨갱이니 아니니 하고 싸워 봐야 무슨 민족적 이익이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은 나로 하여금 새삼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박정희의 과거 전력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그의 독재체제를 떠받친 댓가로 온갖 영화를 누렸던 자들, 유신정권과 그 연장선인 5,6공에 유착해서 언론의 정도를 포기하고 사세를 키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온 [조선일보]를 위시한 후안무치한 언론들이 나에게 '친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친북인사'라고 물고 늘어지는 [조선일보]에게 나는 우선 묻고자 한다. 63년 필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는 왜 싣지 않았는가.

 

박정희는 총칼로 합헌 정부를 무너뜨린 후 민정 이양 약속을 휴짓조각으로 만들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엄청난 좌익전력을 철저히 숨기면서 오히려 정적과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처럼 거짓으로 쌓은 바벨탑 위에 군림한 박정희의 행태로 인해 그의 전력 문제는 박 정권 18년 내내 '확실한 유언비어'로 떠돌면서 대한민국의 가치체계를 혼란 시켰다.

 

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선거정국의 '단골메뉴'인 색깔론 시비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되고자 국민 앞에 나서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국민 앞에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서 지적돼야 할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 연장인 5~6공 시대에 박정희의 전력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면서 그 밑에서 영화를 누렸던 자들, 그리고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망령을 미화하고 있는 자들은 색깔론 시비를 벌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63년과 64년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는 바람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낸 기사는 번번이 조선일보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지친 나는 아이들을 좀더 키워놓고 일을 계속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64년 귀국해 [조선일보]측에 사의를 밝혔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당시 조선일보측은 김형욱으로부터 문명자 특파원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자진해서 그만둔다니 회사측에서는 내심 잘됐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쉬고 나서 다시 일하려던 나의 계획은 난관에 부닥쳤다.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 냈다는 얘기를 들은 [동아일보]의 천관우 편집국장이 대뜸 부르더니 무교동 해장국 집에서 선짓국 한 그릇을 사주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평소부터 존경하던 분과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열을 올리며 의기투합하다 보니 그분의 청을 거절 못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나는 결국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다가 [동아일보] 특파원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일본 육사 교장,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너 출세했구나"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정일권의 친일 전력에 대한 이야기 한토막을 덧붙인다. 지난 72년 나는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창생 두명이 도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그들을 만난 일이 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 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같이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 어렵사리 만난 박정희의 두 동창생은 만군 시절의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벚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 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는 증언도 했다. 나는 그들로 부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정일권의 친일행적 역시 박정희에 견주어 만만치 않다. 나는 지난 80년 당시 등소평 중국 부수상의 배려로 중국을 방문했다. 내가 등소평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9년 최초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등소평은 백악관에서 취재에 열중하고 있는 기자단들 중에서 유일한 동양 여성인 나를 발견하고 중국계가 아닌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혹시 중국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일본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왔습니까?"

 

"지도상에서 당신 나라와 동쪽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왔습니다."

 

-"아 초센(조선)?"

 

"아니오 다이한민궈(대한민국) 입니다."

 

-"아, 다이한민궈."

 

그는 죽국인은 아니지만 동양계 여성이 백악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흐뭇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백악관에서 카터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등소평은 워싱턴에서 시애틀까지 미국 전역을 순회 방문했는데 나는 그의 모든 일정을 수행했다. 등소평은 아침에 나를 보면 꼭 "식사 했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내 경험상 이 지구상에서 아침에 만나서 "밥 먹었어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밖에 없는것 같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인사가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왕 선생에게 배웠던 중국어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 순회방문 일정이 끝난 후 나는 등소평에게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그는 이를 선뜻 받아 주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다 끝냈을 때 그는 "사정이 바뀌었다"면서 "인터뷰를 기사화 하는 것을 좀 미루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바로 취재수첩을 덮으며 아무런 이의없이 그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사정이 허락하는 날까지 오늘의 인터뷰는 기사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조속한 시일내에 우리 미국 기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부탁을 선선히 받아 들였고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80년 4월 나는 미국의 저명한 여기자 17명으로 구성된 취재단의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등소평 부수상의 배려로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연변 지방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그 때 나는 하얼빈에서 타냐 김이라는 조선족 교포 여성을 만났다. 타냐 김의 시아버지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에서 혁명열사로 대우받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일제 말기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 갔다가 해방 후 중국에 돌아 왔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정일권의 만주 광명중학교 후배라고 했다. 그래서 타냐 김은 일제시대 '헌병대장 정일권'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관동군 헌병대에 있었는데 때때로 말 타고 긴 칼을 차고 용정 쪽에 내려와서 '우리 조선사람들이 황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철없는 젊은이 중에는 말 타고 칼 찬 정일권의 멋진 모습이 부러워서 관동군에 입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남편은 끝내 입대하지 않고 소련으로 도망갔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끝내 한 마디 참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61년 11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수상과 회담했다. 일본측은 수상 관저에서 박의장을 위한 칵테일 파티를 열어 주면서 박정희의 일본 육사 시절 교장을 불러다 놓았다. 이 일본인 교장은 반말 비슷한 어조로 박정희에게 "너 성공했구나"라고 해 박정희가 숙소로 돌아와 몹시 투덜댔다고 한다.

 

이 얼마나 교활한 일본인들인가. 미래의 한국 대통령 박정희에게 "어차피 너는 우리가 키워 낸 용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앞으로 일본 대사만큼은 민족교육을 받은 새 세대가 부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했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1-16 16:07:53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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