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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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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1-10 03:3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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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 거주하는 강산 씨가 9월 3일부터 11일까지 25년 만에 북녘 땅을 밟은 후 여행기를 써서 발표하였다. 북 바로 알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필자와의 협의 아래 그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 편집국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0

 

학교와 사회는 똑같은 곳 (25년 전의 여중학교 방문)

 

새벽 4시 넘어 내가 잠이 깨면 대부분 동시에 일어나신 노길남 박사님은 컴퓨터 앞에 앉아 민족통신에 기사를 올리거나 어제 올린 기사를 살펴보는데 오늘은 내가 조금 늦게 일어나면서 바로  기침이 콜록콜록 나온다.  같은 방에 묵으면서 방 안에서는 나를 위하여 절대로 금연을 하기로 하셨는데 잠깐 일에 열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담뱃불을 붙이신 모양이다.  아이구 미안하다시며 얼른 담뱃불을 끄고는 창문을 여신다.  평소 일할 때는 줄담배를 태우신다는데 그래도 나 때문에 많이 줄이게 되었다고 내가 편하도록 말씀하신다.  나도 왠만하면 그냥 편안하게 태우시라고 하면 되겠지만 담배연기를 마시고 나면 당장 목에 담이 차고, 조금 심하면 감기가 걸리거나 기관지염을 앓게까지 된 전력이 있어 나와 띠동갑이 되는 대선배님이지만 어쩔수 없어 담배를 자제해주실 것을 부탁드린 것이었다.

 

 나와 같이 한 방에 묵지 않고 따로 방을 얻었으면 박사님은 더 편안하게 지내셨겠지만 북에서 머무는 동안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사실 나로서는 그 바람에 북을 62번째 방문한 통일운동의 대선배와 같이 지내게 되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것이 많았고, 필요한 사항을 미리 알려주셨는가하면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질문할 수 있어 이번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의 이번 여행의 목적은 유명한 건물이나 관광지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여행은 이미 25년 전에 방문했을 때 충분히 보았으니 이번엔 북부조국의 제도와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되도록이면 깊이 공부해보려 한 것이니만큼 노 박사님이 민족통신 기자로서 여기저기 취재를 하는 곳에 나 또한 함께 동행하여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며 답을 구했다.   한편 때로는 내가 방문하기를 원한 곳을 찾게 되어 노 박사님이 그것을 취재하기도 하였으니 이번 여행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도 미리 세수하고 준비했다가 어김없이 6시가 되자 호텔을 나와 아침 산책을 나선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약간의 새벽안개가 남아 있지만 참 좋은 날씨다.  먼저 대동강으로 향하여 전날과는 반대로 남쪽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입구에는 여전히 어제처럼 수많은 여성들이 아침체조를 하는가하면 그냥 열심히 걷는 사람들도 많다.  저멀리 양각도호텔이 마침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안개속에서 드러나면서 물그림자를 비춘다.  주로 남한에서 북을 방문하면 저 호텔에서 묵게 된다고 하는데 수십 층 높이의 엄청나게 큰 현대식 건물로 보인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을 하러 나온 평양 시민들

 

 

 

 

 

 

 

 

이쪽에도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강가의 움푹하니 패인 곳엔 특별히 고기가 잘 물리는 곳인지 진을 치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데 그 모습들이 아주 진지하다.  저 강태공들은 우리보다 한참 더 일찍 날이 새기 전부터 이곳 낚시터로 달려나왔으리라.   일출에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아 사진으로 남긴다.  좀 더 걸으니 따로 줄낚시를 하는 어른이 8개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입질을 기다리고 있어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입질이 온다.  역시 이 분은 낚시 경험이 많으신지 놓치지 않고 입질이 세게 올 때 줄을 탁 채어서는 슬슬 잡아당기니 작은 손바닥만한 붕어 한 마리가 올라온다.  

 

 

 

 

인근에 여학생 넷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노 박사님이 다가간다.  중학생들인데 모두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라 아침 산책을 나왔다고 한다.  각자의 옷차림도 다양해서 오늘 학교에 안가느냐고 물어보니 이미 방학이 끝나서 개학을 했기 때문에 학교가는 날이라면서 이제 곧 집에 가서 아침 먹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8시에 등교한단다.   그 중 한 학생에게 이담에 커서 무슨 일을 하고싶은가하고 물어보니 교원이 되고싶다고 한다.   이곳 북부조국에서 교원이 된다면 참 보람있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  나라에서도 교원들을 귀하게 대접하기에 전날 전국에서 수많은 교육자들을 평양으로 초대하여 대회를 갖고는 옥류관에서 점심을 들게 하는 풍경을 보았지 않은가?  하긴 이곳에서 는 어떤 직업이라해도 모두 인민을 위해서 복무하는 것이니 그 일이 귀하고 보람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대동강에 새벽산보를 나온 여중학생들

 

나도 젊은 시절에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 길을 걷다가  한국에서 편히 공부를 계속하며 살 수 없어 이민자가 되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미국에 살면서 아무런 보수 없이 몇 년 동안 주말마다 한글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쳐보았으니 아예 선생님이 되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래 남한에서 후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더라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분명히 좋은 선생님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선생님으로 평생 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한때 교직을 잃은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렇게 된 선생님들 가운데 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내 어렸을 적의 친구들 가운데 몇몇은  아직도 교직에 있으면서 지금은 교장선생님이 되어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 또한 두 갈래 갈림길에서 다른 한 길을 선택했으면 이렇게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내게 남은 시간을 나름대로 더 보람있게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리라.  바로 오래 전에 내 삶의 목표로 세웠던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나의 남은 삶을 보람있게 사는 것이리라. 

 

여학생들과 헤어지고는 생각해보니 이번 방문에 따로 학교를 방문할 계획이 없는 것이 참 아쉽다.  그래 내가 25년 전 평양축전에 참여한 미주 지역의 동포들과 함께 평양 시내의 한 여자중학교를 방문한 것이 떠오르고 그 기억을 더듬어서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여기서 나눌까 한다.  

 

25년 전 평양의 한 여자중학교의 수업 모습

 

그날 우리들은 몇몇 교실에 들러 수업을 참관하였는데 한 교실에서 우리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꽃다운 여학생들이 예쁜 공연복으로 갈아입고는 가야금과 손풍금 등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노래를 불러주었고 또한 율동도 보여주었다.  그 학생들이 전문적으로 음악이나 율동을 전공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누구든지 악기 하나쯤은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예능교육을 하기에 그 공연은 어쩌면 정식으로 무대에 올려지는 최상급의 공연과는 달리 북에서는 아주 평범한 공연이었는데 그런데도 나무랄데 없이 완벽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엔 ‘고향의 봄’ 노래를 서로 분단된 남북 동포들이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아쉬워하는 깊은 마음을 담아 울먹이며 불러주어서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었다.   

 

 

89년 평양축전때 우리를 위해 공연한 평양의 여중학생들

 

공연 후에 우리들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아주 예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른 한 여학생에게 나중에 공부를 마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 학생은 자신은 농촌으로 가서 농삿일을 하겠다고 겸손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농사를 짓고 싶으냐고 하였더니 우리 인민들에게 필요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 농촌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라.  평양이라는 북한의 수도에서 나고 자라서 좋은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머리도 좋고 노래도 잘하는 예쁜 여학생이 자신은 학교를 졸업하면  살기도 편하고 모든 인민들이 살고싶어하리라고 우리가 여기는 평양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조국의 식량생산을 위해서 농촌으로 가서 일하겠다고 할 때 그 사회 자체가 무엇을 중요시 여기며, 학교에서 후세들을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교육하고 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런 똑똑한 학생이라면 무엇을 해도 평양에서 할 일이 있을텐데 무엇하러 고생이 되는 농촌으로 가려고 할까하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 북부조국의 학생들은 내가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라를 위하여 어떤 보람된 일을 하면서 봉사하는가를 삶의 가장 귀중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 학생이 당시의 11년 의무교육을 마치고 농업대학으로 진학하였을 수도 있고 전문학교를 거쳤거나 아니면 바로 농촌으로 원하던대로 가게 되어 일하게 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때쯤엔 북부조국이 제 2의 고난의 행군 시기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학생의 농촌행은 아주 옳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 싶다.   무엇보다 식량이 부족하여 온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 학생은 일선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여 인민을 배부르게 할 수 있을지를 고심하며 온갖 노력을 다했으리라.  

 

인간이 배고플 때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며, 무엇보다 식량을 생산하는 일이 가장 값진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그 학생과 동료들이  20여년을 함께 그 어려움을 헤쳐나왔다면 그  결과 지금 북부조국이 식량을 거의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북부조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 자본주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시기에도 평양을 떠나 아주 먼 농장으로 지원해서 가서는 사서 고생을 하지만 커다란 보람을 갖고 사는 어떤  중년의 남자에 대해서도 이후에 내가 소개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방문한 농촌에 실제로 젊은이들이 아주 많았던 것으로 보아 지금도 북부조국의 농촌은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리라.  여기에 희망이 있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피폐해져만 가는 남한의 농촌과 비교가 되지 않은가?

 

우리가 그 학교에서 떠나오기 전에 교장선생님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아주 뚜렸하게 남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학교와 사회가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나 사회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모두 똑 같다 이말입니다.  학교에서 이것이 옳다고 가르치면 사회에서도 그것이 옳으니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가?  마치 남한의 학교와 사회의 다른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한 것 같았다.  이곳에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앞 글에서 북의 연극이나 예술작품에서 일어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북부조국은 이론과 실제가 서로 맞닿는 사회인 것이다.

 

 

25년 전 우리들을 위해 노래와 춤을 보여준 평양의 여중학생들

 

내가 다녔던 실업계 고등학교 시절에  졸업 몇 달 전에 먼저 취업을 했던 급우들이 학교로 찾아오면 종종 이런 말을 했다.  “학교와 사회는 다른 곳이다.  학교에서 하던대로 사회에 나가서 하면 절대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처음 그 소리를 듣고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한의 그 시절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때였으니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자면 그것에 맞춰서 살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으랴.  그러니 그때만해도 덜 오염되었던 학교와 사회는 천지 차이였고, 이왕 사회에 나왔으면 그 사회에 재빨리 적응하지 않는다면  낙오자가 되기 마련이니 거기 맞춰서 잘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에 먼저 나간 친구들의 말이었다.   

 

그런 그 시절의 학교와 사회에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어쩌면 이미 학교에서 학생들은 더 심한 경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개인주의자로 키워져 이후에 사회에 나가면 더더욱 심한 경쟁 가운데서도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는 일에 일부 똑똑한 학생들은 잘 적응하게 되리라.   그런 학생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의를 추구하지도 않고, 바른 정치에 대한 관심도 갖지 않는데다 사회의 온갖 비리와 부조리에도 눈을 감고 있다.  예전의 대학생들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래 이제는 학생들도, 근래에 학교를 졸업한 사회인들도 분단된 조국의 통일마저도 내 알바 아니라고 모른척 외면하는 것이다.  

 

대동강변 공원의 잔디밭.  고향의 강아지풀이 생각나 사진으로 남김

 

우리의 2세 교육이 자본주의에서도 가장 추악한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유지하고 그것에 부합하도록  되어지는데 이대로 둔다면 교육자체도, 인격체인 학생들도,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학생들로 이뤄지게 될 이 세상 모두도  망치게 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아무 희망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하루속히 교육도 정상을 찾아야 하고 세상 또한 1% 의 부자들과 재벌들의 세상으로부터 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지금의 제도를 바꿀 수 있을지 남부조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리라.  사방에서  매스컴을 통하여 온 민중이 신자유주의로 세뇌당하고, 또한 북한을 모략하는 선전에 끊임없이 세뇌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과감하게 진실을 추구하고 모두가 통일을 꿈꾸며 통일운동을 확산시키며 살아가는 참 민중이 되고, 행동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아래 링크에서 북부조국 방문기 19회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seattle.com/main/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11527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1-10 03:40:0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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