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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기자의 '내가 본 박정희'<연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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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0-19 11:3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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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 박정희가 추방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증언'  
 

- " 박정희와 황태성 3번 만났다 " -

 

 

 

황태성 사건 추적하다 추방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5.16 직후 박정희는 미국 내에 남아있는 자신의 좌익 경력 근거를 없애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5.16 직후 박정희가 보낸 한 특별팀이 워싱턴에 왔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미국통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 팀의 임무는 미국 국회 도서관 등지에 소장돼 있는 박정희의 과거 좌익 경력수록 자료들을 없애 버리는 것. 그러나 신문자료 같은 것은 빌린 다음 안 돌려 주면 된다지만 마이크로 필름으로 소장돼 있는 자료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팀은 도서관의 모든 신문 자료들이 마이크로 필름으로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국에 왔다가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63년 8월 3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다음날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로써 5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9월 23일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언급했다. "여순반란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다. 박정희 씨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라는 것이었다. 이 '박정희 사상 논쟁"은 이른바 '황태성 사건'이 폭로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대구 10.1 폭동 때 피살됨)의 절친한 친구로서 대구 10.1 폭동 때 경북도인민위원회 선전 부장을 지냈다. 그는 이후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다가 5.16이 발발하자 박정희와의 비밀 회담을 위해 61년 9월 남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황태성을 체포한 후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 하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미국 정보 당국이 황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박정희는 사건 발생 후 거의 2년이 돼 가는 63년 9월까지도 그것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 시켰다. 시중에는 62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황태성이 깊숙히 관여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63년 9월25일 야당측은 이 사건을 폭로 했다. 중앙 정보부는 이틀 뒤에 어쩔 수 없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그의 공화당 창당 관여설을 전면 부인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때가 돼서야 비로소 황태성 사건에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63년 8월 강문봉 장군이 내게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해주었다.

 

"미국 정보기관 G2의 비밀 정보원 출신이며 CIA 요원으로 한국에 주재하면서 '황태성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래리 베이커라는 사람이 박정희에 의해 추방돼 지금 자기 고향인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강 장군은 과거 육군 정보국장 시절의 자기 동료들을 통해 그같은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래리는 주한 미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 창설을 주도한 후 주한 유엔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한국군의 대부'라 불리는 하우스먼 밑에 있던 사람인데 CIA 비노출 요원으로서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가장해 한국에서 일했다고 했다. 5.16 후 외교관 추방 1호가 주한 미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 문정관이라면 민간인으로서는 래리가 추방 1호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황태성 사건에 달라 붙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곧 래리 베이커에게 연락을 취했다.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를 마나러 오라고 했다. 네브라스카까지 가기가 너무 멀어 인터뷰를 서면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63년 8월 27일 질문서를 보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인 9월 13일 나는 래리 베이커로부터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답변서를 받았다.

 

그는 답변서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은 물론 박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서재에서 36년 전 래리 베이커가 보내온 답변서를 찾아내 다시 읽어 보았다. 래리 베이커의 미국적 시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귀중한 자료로 생각되었다.

 

나의 질문서와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Q) 질문서

 

1. 5.16 세력들이 공산권 제도를 모방해서 정부기구를 개조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이같은 행태에 대해 논평해 달라.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그들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3. 한국 중앙 정보부는 대공 정보 활동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4. 귀하는 군사 정권하에서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5. 귀하는 미국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잇는가. 또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A)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문명자 기자에게.

 

오레곤 주 변두리에 있는 나의 목장을 한 친구가 사겠다고 해서 그 목장의 장비목록을 정리하고 소 마리 수를 헤아리느라 두 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는 우편을 포함해서 외부 접촉을 하기가 어려워 63년 8월 27일 귀하의 서신에 대한 회답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먼저 귀하의 질문에 대해 귀하가 원하는 만큼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나는 법치주의가 확립된 미국에 돌아와 있어 안전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폭로하면 정부가 법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하는 한국에 남아있는 나의 한국 친구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내가 우려하는 점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반도호텔 602호실에서 박정희-황태성 회동

 

1. 공산권 제도를 모방에서 정부기구를 개조한 박 정권의 행태에 대한 논평 및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그들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 또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을 통제하는 현 정권의 구조는 전부 공산주의 행정구조에 따라 조직되었슴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행정기구의 개편 결과 61년 5월 이후 한국의 각 부처와 군에는 지휘계통과 관계없이 군사위원장(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할 자격을 가진 자가 한두 명씩 끼어 있습니다. 공산권 통제 기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중 명령계통은 사실상 정치위원 제도임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 계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로서 국립경찰 경감과 총경 자리에 위관급 장교들을 대거 부임 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는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관이 군사위원장에게 불리한 사항을 보고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실을 군사 위원장이나 그의 측근자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근무하는 이상태 중령이 또 다른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63년 3월에서 4월까지 본인이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체포, 구속되어 있는 동안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해임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후임인 김재춘 부장은 중앙정보부 숙정이란 명목으로 인사 개혁을 했습니다. 이 중령은 그 때 김재춘 부장이 데리고 온 다섯명의 상급자 밑에 있었지만 사실상 조사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박정희 의장과 직접 연락할 수 있었으며 그 때 일어난 중앙 정보부의 대전환 속에서도 그런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논평하고 싶습니다. 5.16 이후 군사혁명위원회(이하 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결성 됐을 때 그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단일한 조직 같았으나 실제로는 여러 그룹을 대표한 것이었고, 중요한 결정을 할때는 토론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이 군사위원회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비밀계획에 따라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금년(63년) 2월, 박은 김윤근 소장과 동료들을 군사위원회에서 몰아냈습니다. 게다가 김종필이 갑자기 국외로 나가게 됨에 따라 군사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박정희의 노골적인 1인 독재를 위장하는 도구가 돼 버렸습니다.

 

미국 대사 사무엘 D 버거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김종필이 군사위원회 내의 반대파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수많은 조처를 취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대규모의 증권파동을 대담하게 일으키고 박정희가 행한 화폐개혁의 진정한 의도가 밝혀지자 버거 대사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화폐 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장기계획의 첫 조처임이 명백했습니다. 침략적인 공산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런 조처는 한국을 급속히 공산화 시키는 수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박정희와 김종필이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군사위원회로부터 축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 대사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경향에 반대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던 것입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득세한 후 한국에는 수많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국 국민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다시 맺으려고 2년 전에 북한에서 장관급 공산주의자가 남하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파업 담당자, 연락원, 정치 선동가 등등 여러가지 임무를 띤 북한 첩자가 한국에 침투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그같은 이북 첩자들은 대부분 이남에 사는 친척이나 친지와 먼저 접촉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국 국민들은 대부분 고민하다가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그들을 고발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정전 이후 북한이 각료급 공산주의자를 남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61년 9월 얼마 전까지 이북에서 차관으로 일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사람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황태성입니다.

 

그가 온 다음 두 달 동안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습니다. 602호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 방 바로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24시간 감시하는 장소였습니다. 본인은 이 세 번 모임에서 그들이 무엇을 논의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박정희는 다른 '애국적인 한국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황을 투옥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후 61년 10월 경찰에서 황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그 사실을 발표하기도 전에 중앙정보부가 황을 가로채 가지고 비밀리에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황에게 사형이 언도 되었으나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62년 5월 이남의 공산주의 죄수들은 모두 대구 형무소로 집결되었는데 이 중 황태성만은 62년 7월 말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현재 황은 서대문 형무소 귀빈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이상으로 귀하의 처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했다고 봅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 추방됐다."

 

3. 한국 중앙정보부는 대공 정보활동 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 중앙정보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지향인사들과 친미 인사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 오랫동안 산 미국인으로 CIA가 이 부패하고 악질적인 야수를 열렬히 지지하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CIA는 남베트남에서 부패한 고 딘 누 비밀경찰과 특별부대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특히 한국에서 CIA의 사업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예산만 가지고는 자금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금 출처를 마련하고 있는데 자유당 추종자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업쇼는 능률적 방식으로 자금을 염출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미국 대사와 전 미8군 사령관 메로이 장군의 협력을 얻어 미군 잉여 자재판매업을 독점하고 있고, 심지어 미군 쓰레기 처분까지 맡고 있습니다. 미군 택시 운영권도 아무런 경쟁입찰도 없이 따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버거 대사와 멜로이 장군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62년 6월 미국 대사가 현실에 눈을 뜰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중앙정보부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을 통해서 새로운 자금 출처를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장사를 하려거나 한국에 투자할 일본인들로부터 자금을 짜내는 것입니다. 김종락은 새나라 자동차 공장과 의암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에서 자금을 염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국 증권파동은 주로 한국 중앙정보부 자금 조달을 위해 생긴 사건임은 물론입니다. 이런 파문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는 현재도 증권시장을 이용해서 중앙정보부와 간부들의 개인 치부를 위해 계속 자금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4. 귀하는 군사 정권에게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 되었다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 한국에서 내가 추방된 이유에는 의심스러운 측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추방은 나에게도 고역이었지만 가족에게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실상 망명객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여겨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봅니다.
체포 됐을 때 나는 한미간의 우호통상항해 조약에 보장된 바대로 공개재판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인 공개재판에서는 저명한 한국인들이 당한 것과 같은 부정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정권은 공개 재판을 하지 않고 나를 추방한 것입니다.


5. 귀하는 미국 정보 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가.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 나는 한국에서 미국 정보기관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미국 정보기관은 한국정치에 개입하는 기관은 아니었습니다. 그 기관의 역할은 기술정보 부문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미국인이지만 조속한 시일 내에 자유로운 한국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래리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특종성 기사가 보도되지 않았다. 실망이 컸지만 그 무렵 내가 보낸 기사 중 상당수가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군사정권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됐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문봉 장군이 다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자유당 때 육군 정보국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 분야에 매우 밝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는데 그 사건 재판장 최석 장군이 지금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시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정일권과 백선엽, 이용문 장군등이 박정희를 구출 하느라 힘썼는데 결국 박정희는 3천여 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자신은 구제받아 문관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나는 최석 장군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강문봉 장군의 말대로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으로 있었다"라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곧 국회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들과 미군 정보자료 등을 찾아냈다. 자료 내용은 강문봉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었다. 수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나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보냈다. 필자는 그 기사의 첫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기사를 보낸 직후 국군의 날을 맞아 주미 대사관저에서 파티가 열렸다. 당시에는 정일권 후임으로 김정렬 대사가 와 있었다. 파티에 갔더니 홍성철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가 2층으로 나를 불렀다. 그 곳에는 김정렬 대사는 물론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문도상 특파원과 강문봉 장군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다른 특파원들과 내가 보는 앞에서 강문봉을 다그쳐 그에게 '박정희 남로당 군책' 발언을 번복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내 기사를 오보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나는 강문봉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강 장군, 박정희가 여순 때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얘기, 분명히 나에게 했지요?"

-"네. 했습니다."

나는 다시 설국환에게 말했다.
"미스터 설도 분명히 들었을테니 똑바로 보도하세요."

김정렬 대사가 당황해서 말했다.
-"문 기자, 내가 보증하는데 박 장군은 그런 경력이 없어요. 내 말 믿어요."

"저는 그 말씀 못 믿겠습니다."

 

내가 [한국일보] 특파원 설국환에게 "똑바로 보도하라"고 다그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잘 내는 재주꾼이었다. [한국일보]가 주최한 '이 대통령배 연날리기 대회' , '씨름대회' 따위가 모두 그의 아이디어 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연좌제 때문에 미국에 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다가 해방 후 임화와 같이 월북한 사회주의자 설의식이 바로 그의 삼촌뻘이었다.

 

설국환은 그런 곡절 때문에 자유당 시절 출국을 못하고 있다가 허정 임시 정부 때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의 후원으로 마침내 미국에 왓다. 그러나 한국일보사가 특파원 체재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다. 이 같은 형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신원상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5.16 후 서서히 박정희에게 협조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국무성에 브리핑이 있는 날이면 곧장 한국 대사관으로 가서 무슨 큰 기밀 정보라도 주는듯이 생색을 내며 정일권 대사에게 브리핑 내용을 전하곤 했다.

 

나아가 설국환은 박정희를 위해 미 국무성의 도널드 맥도널드 한국 과장에게 로비를 한다고 다녔는데 그 덕분인지 귀국 후 67년부터 코리아나관광진흥(주) 사장, 코리아 그레이 하운드 사장, 대한 여행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시절 모든 공무원들은 비행기표를 대한 여행사에서 사야 했다. 그는 유신 이후 다시 대미 로비를 한다고 나섰는데 그것이 얼마 만큼 통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 없다.

 

대사관에서 한바탕 한 후 집에 돌아왔는데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본사에다 전보로 기사를 보냈다.

"나는 캥거루 코트(인민재판)에 올라 갔다."

몇 시간 후 AP 통신의 국무성 출입기자 스펜서 데이비스를 만났는데 그가 말했다.

"당신이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며?"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보낸 기사가 신문에 나오려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하는데 이 친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데이비스를 다그쳤더니 그는 "국무성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외국 특파원들이 본사에 타전하는 기사들은 모두 국무성에 한 카피씩 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펜서 데이비스를 데리고 국무성의 마샬 그린 차관보 방으로 갔다. 마샬 그린은 5.16 당시 한국 대사 대리직에 있으면서 대통령 윤보선에게 "군을 출동시켜 쿠데타군을 진압하자"고 설득했던 인물이다. 나를 보자 마샬 그린은 "그런 인민재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수를 치고 나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미리 본 기사대로 나는 박정희 전력 기사 때문에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 당신들은 여순 반란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기록들을 모두 공개하면 내 기사가 오보인지 아닌지 밝혀질 것이고, 내가 더 이상 캥거루 코트에 올라갈 일도 없을 것이다."

 

퇴근 후 남편에게 국무성 사건에 대해 얘기했더니 남편은 오히려 되물었다. 
- "텔렉스 회사에서 외국 특파원들 기사를 국무성으로 넘기는 걸 아직도 몰랐단 말이오? 당신 특파원 헛 했구먼."
"그러면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민주주의는 몽땅 거짓말인가요?"

-"이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를 너무나 모르고 좌충우돌 하는 게 문제야."

사실 그랬다. 당시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실리든 안 실리든 박정희 관련 기사를 계속 본사로 보냈다. 당시 박정희 의전실에 근무하던 이 아무개가 나중에 미국에 왔는데 그로부터 " 당시 박의장이 '워싱턴 문기자가 또 뭐 또 보내온 것 없나' 하고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황태성 관련기사 김형욱에 제공하고 융자받은 방일영

 

63년 10월 9일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주일 앞둔 상황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은 황태성 사건의 의문점을 강력히 제기하고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선거 쟁점화 시켰다. 그러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10월 10일 안동행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황태성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는 "장도영계의 조웅과 모 외국기관에 근무하는 베이커가 황태성과 나에 대한 허위 사실을 조작해 유포했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10월 11일 래리 베이커는 미국에서 다음과 같은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반박문의 내용은 래리 베이커가 필자에게 보내온 답변서와 상당부분 일치하므로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지난 10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 군사정권의 박정희 의장은 자신이 최고위급 북한 간첩과 직접 만난 사실이 최근에 폭로되자 이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장도영 장군과 내가 그것을 허위조작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박의 비난은 철두철미 조작된 것이다. 그가 북한 첩자와 비밀리에 접촉한 것이 알려지면 오는 10월 15일 대선에서 당락이 좌우될 것이므로 그는 계획적으로 국민을 속이려 한 것이다. 이 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의 내용은 62년에서 63년 사이 본인이 서울에 있을 때 지극히 믿을만 하고 신빙성 있는 소식통들에게 들은 것이다. 이들 소식통 중 일부는 군사 정권의 최고 지도층에 속한다. 또한 이 정보는 세 번이나 재검토. 재확인 된 것으로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61년 9월1일 남하 직전까지 북한 정권의 무역성 부상(차관)으로 있던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30년데에 황은 박의 형과 가까운 친구였다. 황은 조사를 받을 때 자기가 박상희의 친구라고 밝힘으로써 박정희와의 관계를 교묘하게 회피했다. 박상희는 45년~48년 사이의 미군정 시기에 큰 소란(대구 폭동을 의미함-필자 주)이 있었을 때 주모자로 피살된 사람이다.
박정희는 6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서울에 있는 반도호텔에서 비밀리에 세 번이나 황을 만났다(중략)

 

지금으로부터 2주일 전 허정 민주당 대선 후보가 황태성 사건을 공개했다. 그러자 한국 중앙정보부는 황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고중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허정 후보가 이 사건을 공개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황태성을 체포한 사실을 발표 했다면 그것은 군사정권에게 굉장히 유리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2년 동안 이 사건은 국민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본인은 박 의장의 궁극적 목적을 완전무결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46년에서 48년 사이의 공산당과의 연관, 황태성 사건을 다룬 방식, 그리고 공산당식 통제 방법을 쓰고 있는 것 등은 그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이긴다면 한국의 장래가 대단히 우려스럽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0-19 11:34:37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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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설] 당의 사상을 잘 알아야 모든 사업을 주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해나갈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11월 10일(수) ​
김일성화사적표식비 제막행사 인도네시아에서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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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12월 6일(월)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12월 5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12월 5일(일) ​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12월 5일(일)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12월 4일
창조와 건설의 영재를 모시여
자멸적망동
태양의 그 미소 그립습니다
[사설] 백두산정신으로 난관을 부시며 우리식 사회주의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해나가자
주체조선의 절대병기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12월 4일(토) ​
이른새벽의 낫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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