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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간추린 미주 운동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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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0-18 11:2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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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글이 통일맞이 나성포럼의 사무국장으로 있던 2002년 10월 재미청년연대 결성을 위한 회의에서 발표한 글로 미서부지역운동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 글의 1970~80년대 초 부분은 고 홍동근 목사님께서 서거하시기 두어 달 전 만난 자리에서 구술해 주신 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주동포의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발자취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판단되어 전문을 연재로 게재한다. 편집국

 


 

<연재> 간추린 미주 운동사 6

 

 

하용진(재미동포전국연합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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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보수세력내 권력재편에 의해 근 30년에 걸친 군정이 종식되고 김영삼의 ‘문민정권’이 들어선다. 초기의 개혁적 조치는 진보진영을 당황케 하면서 일시 전선의 분열을 몰고 오기도 했다. 거기다 결성이후 줄곧 극심한 탄압을 받아오던 범민련운동의 전술과 (통일운동의)대중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통일운동의 위세가 꺽이면서 미주의 운동조직도 서서히 침체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청협은 1월 범청학련 의장단회의(베를린)와 재일동포청년학생 통일대행진 및 범민족대회(8월, 동경)에 참가하여 해외연대의 강화에 주력한다.

 

그러나 대중화에 대한 정체와 재생산구조를 확보하지 못한 청협은 4월 상임위에서 해체를 결정한다. (상항 애청이 해체됨으로서 협의체로서의 청협은 94년 초에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청협 차원의 사업, 활동은 이후 민청으로 이관 ,전담하게 된다.)

 

93년 하반기 미국의 북핵사찰 위협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팀스피리트훈련 반대 운동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오던 민청은 노동상담소, 공동체와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회의(이하 평화회의)를 구성한다. 한때 이 회의를 통해 LA Times의 북한 폭격을 정당화하는 여론조사에 항의해 공동시위를 벌여 LA Times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 평화회의가 주도가 되어 94년 5월 한반도평화대회( Korea Peace Conference)가 나성에서 미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어 한반도평화를 위한 캠페인들을 전국적 차원에서 근 1년 동안에 걸쳐 전개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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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김주석의 서거와 조문파동에 의해 김영삼 정권 하에서의 남북관계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을 넘게 되며 이후 문민정부아래서의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은 전례 없이 가혹해져 가고 ‘북핵사찰’ 빌미로 한 백척간두의 위기상황이 한반도를 휩쓸었지만 제네바합의를 통해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게 된다.

 

한편 이 당시 미주운동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곧 ‘광주항쟁 최후의 망명자’ 윤한봉이 국내로 귀국했다. 자신의 귀국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윤한봉은 이미 비, 반합법운동(국보법상)을 지양하면서 한청, 한겨레 중심의 범민련 미주본부를 해체하고 통일운동을 전면 포기한바 있었다. 그리고 윤한봉은 귀국 후에도 한청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 운영형태와 통일운동 포기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내부에서 제기되면서 한호석, 정기열, 최관호, 한익수를 비롯한 한청, 한겨레 핵심의 절대다수가 한청, 한겨레를 탈퇴하게 된다. 이들은 곧 뉴욕 통련을 비롯해 필라델피아, 워싱턴디시, 시카코 등지를 기반으로 한, 통일운동을 일대 강령으로 하는 협의체(동포회의)를 거쳐 98년에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미주운동과 국내운동과의 연대, 교류도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해 가는데 민청과 뉴욕의 1.5~2세의 청년들이 Korea Education & Exposure Program(KEEP)을 구성하여 조국방문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95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여름기간 조국을 방문하고 있는 KEEP은 한국의 역사와 진보적 통일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국내 진보단체 방문, 우리문화 배우기, 농촌봉사활동, 그리고 범민족 대회 참가 등 활발한 연대, 교육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KEEP의 창립과 활동은 미주 한인들의 통일운동과 동포사회 권익운동에 있어 1․5세~2세들의 확대 재생산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계기로 평가되어진다.

 

94년 12월에는 뉴욕 통련과 범민련 재미본부 사이 전국조직체에 대한 논의가 한때 진행되기도 했고 뉴욕 통련 주최의 통일심포지움이 뉴욕에서 개최, 미 서부지역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미 동-서부 교류와 연대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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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원년으로 설정한 분단반세기, 95년에 들어서 민청은 재일한청(김양국 학생위 위원장)과 조청(백일수 정치부장, 허영호 조선대학 학생회장)의 대표들을 초청한 가운데 <해외청년학생평화통일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이 심포지움은 미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해외의 청년학생들이 공식적 만남을 가진 것으로 해외청년학생들의 역할을 공유하는 속에서 연대를 폭넓게 하고 교류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재일동포들의 통일운동과 삶은 미주청년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기도 했다.

 

95년은 우리민족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시련이기도 했다. 여름 북은 최악의 홍수를 겪으며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국제사회를 비롯 각 지역과 단체들이 북녘동포돕기 캠페인을 전개해 간다.

 

나성의 경우 노동상담소, 공동체, 민청 등이 ‘ 북녘어린이돕기’ 캠페인을 전개해 2~3년에 걸쳐 모금활동 등의 대중실천들을 하게 된다.

 

한편 90년대 중반 미 경제가 침체를 거듭하고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자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보수세력들은 그 탓을 이민자들에게 돌리고 불법체류자를 비롯한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법안(Affirmative Action, 불체자 의료, 교육 금지, 영주권자 월페어 삭감 등)들이 연이어 상정되기 시작한다.

 

이에 나성에서는 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미국의 진보적 단체와의 연대를 다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기도 했다.

 

이 시련의 과정에서 미주의 동포들은 이전 공화당 일색의 지지를 뒤엎고 민주당으로 선회하는 정치적 대변화를 가져오고 시민권신청을 비롯 미주류사회와 동포사회의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의식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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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법과 노동법을 전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악하고 연세대사건을 비롯 학생, 통일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하던 김영삼정권이 IMF의 국난을 뒤집어쓴 채 물러가고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98년 오랜 정치적 탄압을 겪어왔던 김대중이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통일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은 일말의 기대를 안고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준비하게 된다.

 

민족민주운동전선의 재편과 분할 속에 범민련운동의 대중성을 비판하며 출범했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이 그간의 대중추수적 활동을 자아비판하며 조직지도부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하고 그런 가운데 침체를 거듭하던 범민련이 조국통일운동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통일운동이 전선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를 마련하며 제 2의 통일운동 전성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그간의 정체적 상태에서 미주운동조직도 수많은 시련의 시기를 거친다.

 

출범초기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었던 범민련 재미본부의 경우 축소를 거듭하며 연명을 유지해 가는 상태로 전락했고 미주청년문화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가장 활발히 문화운동을 펼쳐왔던 민중문화연구소의 후신, 우리문화공동체가 해체되었다.

 

그 외 80년대 말부터 상공인조직으로 줄곧 세를 확보하며 활동을 해왔던 한민족연구회도 거의 활동중단상태에 머물렀고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미주통일운동을 이끌었던 통협도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결성에 맞추어 발전적 해체의 길을 가게 된다.

 

90년대 중반 상항 애청의 해체로 홀로 청년통일운동의 맥을 이어오던 민청도 1.5세, 2세 중심의 사업방향이 난관에 부딪치고 재생산구조확보의 실패로 정체상태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외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뉴욕의 기청, 우리문화찾기회 해체를 비롯해 각 지역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이 해체되고 활동의 축소가 거듭되어 가는 속에서 그나마 뉴욕, 워싱턴디시(우리문화나눔터가 이 시기에 조직)의 동부 일부와 서부의 나성지역만이 미주운동의 불씨를 남겨놓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2000년에 다시금 불꽃을 일으키며 맹렬히 타오르게 된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0-18 11:33:0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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