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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기자의 '내가 본 박정희'<연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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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0-14 19:0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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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기자의 '내가 본 박정희'<연재>3 

 

1장 - 미 정보기관은 5.16을 지원했다.

 

 

 

펄 벅 여사가 지어 준 내 이름 쥬리 문

 

결국 남편은 특파원 임기 만료에 따라 귀국하려고 이삿짐까지 다 싸 놓았다가 회사로부터 밀린 월급 받는 것도 포기하고 미국에 정치망명 했다. 5.16 주동자들이 합헌 정권을 총칼로 뒤엎은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데다, 그들의 사상전력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로써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했는데, 이 때 그의 신원보증인이 돼 준 이가 바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였다. 펄 벅 여사는 우리 부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신 분이다.

 

내가 펄 벅 여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1960년이었다. 당시 펄 벅 여사의 단편소설 [빅 웨이브]를 미.일 합작으로 영화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작은 도에이 영화사에서 맡고 있었다. 감독은 다니엘스키라는 헝가리 출신 감독이었다.
촬영은 주로 규슈의 경치 좋은 해변가에서 진행되었다. 펄 벅 여사는 통역 겸 수행비서를 필요로 했는데, 그에게 나를 추천한 이는 사와다 미키 여사였다. 그는 한.일 회담에서 일본측 수석대표를 맡았던 사와다 렌조 전 유엔대사의 부인이다.

 

미키여사는 미쓰비시 기업의 창설자이자 초대 사장 이와사키의 장녀였다. 그녀는 당시 흔치 않던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크리스천이기도 했다. 그녀의 딸인 사와다 에미는 나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미키 여사는 종전 이후 유산으로 물려받은 오이소(일본의 유명한 별장지) 별장에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차렸다. 그 같은 일을 하게 된 배경을 물었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패전 후 맥아더 점령군이 미쓰비시를 차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이소 별장도 차압당했다. 그것은 사유재산이니 돌려 달라는 운동을 하느라 내가 살고 있던 요코하마에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까지 기차로 자주 왔다갔다했다. 한 번은 요코하마 역에서 내리려는데 내 머리 위 선반의 짐보따리 뒤에서 웬 아이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짐 사이에서 흑인 혼혈아가 하나 튀어 나왔다. 차장이 와서 '당신 애냐' 고 묻는데 고운 눈길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있던 술취한 남자는 아예 '흑인놈이나 붙어먹고 잘한다'는 식으로 쏘아 붙였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나 가련했다. 나는 '저건 내 짐도 아니고 내 아이도 아니지만 저 애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 후, 그런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찾은 오이소 별장을 고아원으로 만들었다."

 

 미키 여사의 소개로 펄 벅 여사를 처음 만나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소는 도쿄의 제국호텔이었다. 펄 벅 여사는 나에게 "지금은 바쁘니 내일 아침 8시에 만나서 아침 같이 먹으며 얘기하자"고 했다. 그녀는 나를 시험해 볼 요량인 것 같았다.

 

나는 오전 7시 55분에 펄 벅 여사 호텔 방문 앞에 가서 섰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2분 전에 벨을 눌렀다. "예에스" 하는 높은 톤의 소녀 같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미스 문은 매우 정확하군요."

 

펄 벅 여사는 식사에다 커피가지 모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는 내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하는 듯 했다. 자신의 스케쥴도 설명하고 영화에 출연할 일본 여성들의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다는 등 여러가지 얘기를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가 "규슈(九洲)의 영화 제작 현장에 함께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합격인 모양이다' 싶었다.

 

내가 펄 벅 여사의 통역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은사인 숙명중고녀 문남식 교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그 분은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을 모아 하와이 교포 출신인 한동삼 선생에게 영어회화 개인교습을 받도록 했다. 숙명고녀에 진학한 후 한동삼 선생은 필자에게 "소질이 있다"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다. 내가 일본에 유학와서 미국인들과 별다른 불편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덕분이었다.

 

 내가 펄 벅 여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모시고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식민지로, 전쟁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펄 벅 여사를 모시고 규슈에 다녀왓다. 그런데 영화제작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인 주연 여배우가 "감독인 다니엘스키가 나를 강간하려 했다"면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당사자인 다니엘스키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배우가 기자들을 만나 그렇게 떠들어 대니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여배우는 당시 그다지 유명한 배우는 아니었는데, 그 같은 스캔들로 화제의 초점이 되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빅 웨이브'였다. 극성스러운 기자들 때문에 펄 벅 여사는 호텔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병중에 있던 남편 워시가 위독하다는 전갈까지 믹국에서 날아왔다. 여사가 급히 미국에 다녀와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하네다 공항까지 펄 벅 여사를 배웅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놓을테니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가깥분 간호 잘 하시고요."

 

-"그래주면 고맙겠어."

 

나는 펄 벅 여사의 영화 제작 일을 성심껏 도우면서 한국 방문 약속을 받아낸 바 있었다.

 

"저하고 하신 약속 잊지 않으셨죠? 한국 가시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많다는데?"

 

"오히려 일본에 공산당이 많지, 한국에는 없습니다."

 

펄 벅 여사가 떠난 후 나는 우선 다니엘스키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기자들 앞에서 사실을 밝히게 했다. 아울러 기자들에게 주연 여배우의 의도를 설명해서 그녀가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검찰총장을 지낸 한 거물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의 메이지대학 동창생의 아버지였다. 대학시절 그의 집에 놀러가면 친딸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곤 했다. 그는 평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매번 그 때문에 고생했다. 서울 집에서 간혹 인삼을 보내오면 나는 생강, 대추를 넣고 달여서 그에게 갖다 주곤 했다.

 

"조선 인삼 안 먹어 보셨지요? 술 깨는 데는 조선 인삼이 최곱니다. 냉장고에 넣어 두시고 꿀타서 마셔 보세요."

 

그는 내 말대로 했더니 정말 술 먹은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고 좋더라면서 "분짱(문양)이 내 딸이다"며 고마워 했다.

 

전직 검찰총장이 나서니까 일이 상당히 수월하게 풀렸다. 그는 일본 영화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오카와 히로시(도에이 영화사 사장)를 만나 "자기가 유명하게 되려고 이런 근거 없는 일을 벌이는 것은 미.일 관계에 좋지 않다. 그 여배우 좀 잘 타일러 달라"고 부탁했다.
오카와의 "알겠습니다" 하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나 버렸다.

 

2주일 후 펄 벅 여사가 돌아왔을 때 모든 문제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영화 제작도 순탄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펄 벅 여사는 무척 고마워하며 나를 자신의 양딸로 삼겠다고 했다. 쥬리(Julie)라는 미국 이름도 그 때 그녀가 지어 준 것이었다.

 

"미국 이름이 꼭 필요한가요?"

 

-"미국에 와서 활동하게 되면 미국 이름이 필요해. 내가 지어주는 대로 하렴."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백악관 동료 기자들은 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지은 이름이니 아름다울 수 박에 없을 것이다. 한가지 문제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 동료 기자들이나 미국 정계 인사들까지도 '문'이라는 내 성을 들었다 하면 "무니(Mooni-통일교도)하고 관계 있는가?" 라고 묻는 바람에 일일히 해명하기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4.19 이후인 1960년 10월 나는 마침내 펄 벅 여사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했다. 펄 벅 여사는 이화여대와 경기여고, 숙명여고에 들러 한국의 미래 여성 지도자들을 위해 감동적인 강연을 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 (The Living Reed)를 출간했다.
필자가 61년 미국에 온 후에도 펄 벅과의 교류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벅스 카운티에 있는 350에이커 정도 되는 농장에서 살고 있었다. 서재가 널찍하고 마당에서 농구까지 할 수 있는 넉넉한 저택이었다.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편이었다. 첫 남편과는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사별했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 장애인 아들이 있었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 의사는 "부부간에 혈액형이 맞지 않아 장애아가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다. 내가 결혼을 앞두고 최동현 특파원과 함께 펄 벅 여사를 찾아 갔을 때도 그녀는 조용히 "피 검사, 해봤니?" 하면서 걱정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5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필자의 아이들도 펄 벅 여사를 좋아해서 "그랜드 마더 가자"고 졸라대곤 했다. 한번은 펄 벅 여사가 나의 아이들을 위해 미국식 비프를 준비해 놓았는데 아이들이 "그랜드 마더, 밥 줘요" 하고 때를 썼다. 펄 벅은 물었다.

 

"밥? 그게 뭐야?"

 

나는 웃으며 가지고 간 쌀을 보여 주고 밥을 앉혔다. 그러나 펄 벅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앉혀 놓은 밥이 다 타 버려 결국 밥은 먹지 못했다.

 

백악관 앞 5.16 반대 시위자들 - 장리욱 신병현 최경록 강문봉 오세응

 

미국에 망명한 후 남편은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한편으론 워싱턴에 있는 한국 학생, 지식인, 예비역 장성 등 5.16에 반대하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백악관 앞에서 반대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에 5.16을 인정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 위해서였다.

 

이 때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5.16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 박사,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 신병현, 국회 사무처장을 지낸 김문봉 박사, 최경록, 강문봉, 김응수 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씨 등이 있다. 강영훈 씨는 5.16 직후에는 시골에 있어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강영훈씨는 5.16 당시 육군사관학교장 이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하는 등 5.16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와 처남 매부지간인 김응수 장군( 전 제 6군단장), 장면 정권 하에서 육군 참모 총장을 역임한 최경록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 장군은 5.16 당시 대구 소재 2군사령부 사령관이었는데 자기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 최경록은 [조선일보]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끝내 5.16을 반대했다. 이들 세 사람은 5.16이 기정 사실화된 후 미국측의 배려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이들은 사실상 미국이 키운 사람들이었다.

 

강문봉 장군은 자유당 시절 육군 정보국장과 작전 국장을 역임하고 5.16 무렵에는 중장으로 예편해 있었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미국에 유학와 있었다.
신병현씨는 민주당 정권 때 워싱턴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나와 있었는데, 5.16 발발 이후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특히, 신병현 참사관의 부인까지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 유학생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현 한나라당 의원)과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오세응은 워싱턴 지역 한국 학생회장이자 워싱턴 지역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 였다. 한광년은 불행히도 청년 시절의 신념으로 초지일관 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 해임해 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 그가 특히 신경을 썼던 주미대사직에는 당시 하버드 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사실, 정일권과 강문봉은 군부의 권력 암투 속에 56년 1월 발생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 대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정일권과 강문봉은 살아났는데, 그것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일권이 밴플리트에게 한국 처녀들을 계속 상납하는 등 채홍사 노릇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박정희는 이 같은 정일권의 대미 인맥을 자신의 방패로 활용하려 했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 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 사람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우선 남편 최동현 부터가 정일권의 하버드 시절 그의 영어 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영어 선생과 학생이 데모 대장과 진압대장으로 만난 셈이었다. 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 출신으로 현역 시절부터 형님동생 해 온 사이였다. 그런 그가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 반대 시위를 하러 다니니 정일권이 닥달할 만도 했다. 그 때마다 강문봉은 "골프 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는데 마침 최경록이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 갔어요" 하는 식의 변명으로 곤란한 자리를 모면하곤 했다.

 

나는 열심히 이 시위를 취재해 [조선일보]에 송고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의 논조가 살아 있어서 백악관 시위 기사들이 간간히 실리곤 했다.
심지어 나는 펄 벅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까지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박정희 군사 쿠데타 세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두 통을 작성해 하나는 백악관에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사로 보냈다. "힘으로 독재하는 정권은 오래 못 간다. 국민이 깨야 한다"는 등의 원문이 그대로 [조선일보]에 실렸다. 조선일보사가 펄 벅 여사의 친필 편지를 잘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펄 벅 여사가 편지를 냈을 때 케네디는 캐나다에 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인들이 우리 두 사람을 얼마나 바보같이 봤을까 싶다.
케네디는 죽기 전 마지막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에 흥분한 나는 "박정희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단정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케네디가 결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케네디의 이상, 정의감, 프론티어 정신. 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을 30대 초반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 차례로가기미 정보 기관은 5.16을 지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5.16 당시 미국인들의 행적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매구르더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5.16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마샬 그린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일이 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 갔어요. 모두 기회주의자요. 내가 쿠데타 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 대통령의 답변은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며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군사 쿠데타와 같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 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 수녀원으로 이동시킨 사람이 다름아닌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지만 계통은 정보라인 이었다. 박정희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다. 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장면이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 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면으로 하여금 미 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가도록 한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나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 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사실은 미국측이 장면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징표로 해석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측근에 따르면, 위컴은 5.16 직후 그 살벌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서울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연평도에서 주재하며 목회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 신부를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 군사 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 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미국인 신부는 여자 문제로 정보기관에 약점이 잡혀 있던 상태였다.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 프레이저 청문회장 방청석에 그 신부가 나타난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청문회를 방청하던 시노트 신부(74년 한국에서 목회중 인혁당 사형수 처형에 항의하다 박 정권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교단의 신부)는 흥분해서 "당장 저 빤질빤질한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 역시 머리까지 빨개졌었다. 두 사람이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성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 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겉으로는 주한 미 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내 합헌 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 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지지만 믿고 자기 진영의 규합을 이루지 못한 장면 정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미 행정부가 상당히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무성은 부산 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다. 4.19 혁명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미국은 오랜 숙원사업인 환율 현실화,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을 조속히 이루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할 수 잇는데까지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5.16 이후 미 국부성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세력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말한 것을 놓고 볼 때, 미국측은 5.16 쿠데타 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 될 경우 성공한 군부 인사들과의 협력의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워싱턴에서 5.16 군정 승인 문제, 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무얼 버거), 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 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16 이후 이 사건을 미국민들에게 어떻게 홍보하는가 하는 문제는 케네디 행정부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미 행정부가 4.19 혁명을 지지했던 기억이 미국민들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장 정권이 약하기 때문에 교체돼야 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더구나 케네디를 지지해 준 스펠만 대주교 같은 인물은 장면 박사를 강력히 지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납득 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 내의 사태 진전을 현지 보고 하는 방식으로 미국민들에게 5.16을 알렸다. 국무성 관리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고, 케네디 자신은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63년 11월 케네디 암살 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케네디의 시신은 장례식장인 국회의사당으로 가기 전까지 백악관 이스트룸에 있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은 시신이 떠나기 전날 밤 시신 앞에서 마지막으로 추도식을 가졌다. 냉정한 기자들도 하나 둘 끝내 울음을 떠뜨렸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기자 회견에 한없이 감동하고 있던 나 역시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떠난 케네디의 죽음을 한없이 애도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0-14 19:13:2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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