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의 선구자 박기식 재미동포연합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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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30 14:2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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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의 선구자 박기식 재미동포연합회 고문
편집국
재미동포연합회의 고문이신 86세의 박기식 선생께서 최근 남쪽 조국을 방문하시고 자주민보와 인터뷰를 하셨다. 선생은 1972년에 도미하셨다. 선생은 반평생을 보스톤에 사시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일이라면 불편한 몸으로 천리가 멀다 않고 달려가시고 큰 일이 있으면 뭔가 도울 일이 있는지 찾으신다. 선생은 진정 실천하는 통일운동가이시다.
선생은 남과 북이 다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이며 우리 조국에 대해 서로가 잘 아는 것이 통일운동의 시작이라고 늘 말씀하신다. 그 실천으로 1979년 몸소 북조국을 방문하셨고 지금도 자유롭게 남과 북을 다시시며 통일 운동에 힘을 실어주신다.
이렇게 통일만이 우리민족이 살 길이라는 신념으로 사시는 선생은 박근혜도 통일을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하라고 일갈하셨다. 또한, 선생은 통일이 우리 조국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건강, 장수, 그리고 천당까지 보장하는 길이라 하시며 선생이 누리는 참행복의 비결을 말씀해주셨다. 이에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재미동포 박기식 선생 "장수. 천당. 애국은 통일운동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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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놀부식 대박 통일론 안돼" | ||||||||||||||||||
이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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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북도 하나의 조국으로 삼고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특혜(?)를 안고 사는 통일애국인사 박기식 선생은 기자와의 대화을 통해 '건강과 장수' '천당을 가기 위해' '애국을 위해'서라면 꼭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세대에 민족 최대의 비극인 분단을 끝장내고 공동번영의 통일조국을 후대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는 재미동포 박기식 선생과의 대화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박기식 선생은 한창 일할 나이인 43살인 1971년 관직을 버리고 보따리를 쌌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치가 물이 오른 시대였다.
1972년 4월 19일 미국 시민권을 가진 가족의 초청으로 한국국적기 1호인 대한항공 미국행에 몸을 실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이민정책 중 민족 쿼터제가 달라지면서 선생의 이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박기식 선생은 생활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박선생은 "내가 도착한 곳은 보스톤이었어요 생활을 하기 위해 막노동과 운전 기사를 했지요.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요"라고 회고했다.
박기식 선생이 민족과 통일, 조국 남쪽에 대한 민주화 운동은 어떤 계기로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박선생은 "내가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임창영 박사를 알게 되면서 부터였어요.(참고로 임창영 박사는 1930년 도미한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4.19혁명이후 수립된 민주당 정부에서 주 유엔대사를 역임했으며 5.16쿠데타로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미주동포사회의 원로다)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 선생이 일본 동경에서 납치됐는데 임창영박사가 김대중 구명운동을 하면서 선우학원 박사, 김상돈 선생 등과 함께 하버드 대학 집회에 연사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임창영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제가 운동을 시작한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임창영박사와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가지고 미주에서 돈벌이는 외면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서도 마음은 콩밭(민족. 통일운동)에 가 있는 거지. 당시 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 안되지요. 노길남 박사만해도 그 이후 세대이고 지창보 선생 같은 분이 지금도 현존해 계시는 분이구"라며 기억하면서 당시 진보적 언론들도 하나하나 기억해 냈다.
박기식 선생은 북부 조국을 처음 방문한 시기가 1979년였다면서 "당시 (미국에는) 민족과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운동을 하다보니 소문이 났고 북에서도 내 이름을 알아 1979년 초대장을 보내왔지요. 그래서 처음으로 방북하게 되었어요"라며 첫 방북 경위를 설명했다.
처음 방북하면서 미국과 조선의 경제적 차이에 실망한 점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잣대로만 한 사회를 평가하려 하는데 이는 잘 못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선생은 이어 "여기(한국) 풍토가 개인적으로도 닭싸움 하듯 살아요. 아까도 버스 타고 오는데 어느 여자분이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 "시끄럽다"고 고함을 치는데 원. 여기 잘산다는 것 옛날에는 메데인 유에스에이라고 하면 다 좋아했는데, 지금은 미국 물건 가져오면 다 버릴거야. 지금 미국에 유통되는 물건 거의다가 메데인 차이나야. 지금 미국의 소시민들은 명품이라는 것 찾지 않거든 그런데 여기(한국) 사람들이 명품찾지. 이게 사실은...빈부격차인데 빈부 격차라는 것은 인간적 관계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라며 깊은 숨을 쉬었다.
통일운동에 나선다는 것이 고난과 시련의 벽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것인데 지금까지 통일운동을 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후회는 없는지 여쭈어 보았다.
이유는 "통일운동을 하다 보면 정신력이 집중돼 다른 생각이 찾아 들 수 없고, 예수의어록 중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것이 중요한 부분인데 동포를 따뜻이 맞이해주는 것이 이를 실천 할 수 있는 길이며, 통일은 애국의 종착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정책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박근혜(대통령)가 저쪽(북)에갔었잖아요. 거기 가서 칙사대접 받았지요. 하여튼 거기(북)가서는 좋은 소리도 많이하고 좋은 글귀도 많이 남겼지요. (직접 박대통령이 쓴 글을 본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들은 소리가 있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수사적인 말이든... (북을)가보니까 대접을 잘해 주니까. 하여튼 뭐 좋은 소리는 입에 발린 소리는 다 한거야. 내가 볼 때는 알만큼은 다 안다(북의 현실) 이거야.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하고 대담을 몇 시간 했잖아. 그러면 박근혜가 심기일전해서 통일대박이다 말만 할게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야지, 대박이라는 말은 원래 흥부전에서 나오는 말이야. 놀부가 흥부의 대박 따라하다가 봉변을 당하게 되는데 자기 할일은 않고 대박만 바라다가는 완전 놀부 꼴 나는게지. 흥부는 형님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잘해보려 하는데 놀부는 어떻게든 해꼬지 할려고 했잖아."라며 박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놀부식 대박론이라고 비꼬았다.
박기식 선생은 끝으로 "오늘 우리의 결론은 통일으로 가야 된다는 거야. 남북이 적대와 대결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서로가 도와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지. 분단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잖아요. 통일위해 사는 것이 개인에게는 보람 있는 삶이고 또 역사 요구에 당당히 부응하는 것 아닌가요. 통일을 이루어 우리 민족이 결코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세계에보여 주어야 해요."라며 말을 맺었다.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기백으로 통일운동의 길을 당당히 걷고 있는 노투사를 보자니 부끄러움이 앞섰다.
재미동포전국연합 고문으로 동포 통일운동의 지주가 되어 남북을 오가며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 선생이 부디 건강해 통일조국의 영광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출처: 자주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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