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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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8-09-05 11:0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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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3〉
동상이 전하는 《자력갱생》, 《계속혁신》의 전통
《천리마가 있어 오늘의 만리마시대가 있다》
김숙미기자

천리마시대를 내달린 조선인민의 영웅적기개를 상징하는 천리마동상(준공당시)
강선을 찾으신 주석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편지》를 추켜든 로동자와 녀성농민을 등에 업으며 날개를 펼치고 하늘높이 질풍같이 날아오르는 천리마.
평양의 모란봉기슭 만수대에 우뚝 솟은 천리마동상은 1950〜60년대 전쟁의 후과를 가시고 짧은 기간에 사회주의공업국가를 일떠세우는 눈부신 기적을 창조한 천리마기수들의 투쟁정신을 오늘도 전하고있다.
천리마대고조시대를 상징하는 기념탑을 세울데 대한 과업이 제시된것은 1959년 강선의 로동계급이 추켜든 천리마운동의 봉화가 전국에 타번지고있던 시기였다.
3년간의 전후인민경제복구사업이 기본적으로 끝난 후인 1956년 12월 당중앙위워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주석님께서 제시하신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로동계급은 사회주의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강선제강소(당시) 로동자들이 추켜든 천리마운동의 봉화가 전국에 타번져갔다.
12월 28일 강선제강소를 찾으신 주석님께서 다음해 강선에서 1만t의 강재만 더 생산하여주면 나라가 허리를 편다고 절절하게 호소하시였다.
강선의 로동계급은 주석님의 호소를 심장으로 새겨안고 매달 해방전보다 평균 10배, 최고 12배이상의 강편을 밀어냈으며 마침내 6만t능력의 분괴압연기에서 12만t의 강재를 뽑아내였다.
강선의 집단적혁신은 전국의 공장과 농장들에 일반화되였다. 조선의 근로자들은 전후 전례없는 생산적앙양을 일으켜 5개년계획(1957〜61년)을 기한전에 완수하였으며 1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회주의공업화의 기초를 쌓고 자립적민족경제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1957〜70년에 이르는 공업화의 전기간에 걸쳐 공업생산이 해마다 평균 19.1%의 높은 속도로 장성하였다.
그것은 반만년민족사에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거창한 창조와 변혁의 시대였다.
1959년 4월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모란봉 경상골의 청년공원건설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만수대언덕에 천리마시대를 상징하는 기념탑을 하나 세워야겠다고, 동상은 말같은것을 형상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천리마시대를 내달린 조선인민의 영웅적기개를 시위하는 시대의 기념비, 천리마동상. 그러나 그 제작과정은 초안창작으로부터 순탄치 않았다.

리동훈씨
난항한 초안창작
《그당시 전국에서 모여온 조각가들은 기껏해서 30〜40여명안팎에 지나지 않았으며 년령과 학력도 격차가 심하여 이런 력량으로 통일적인 집체창작이 실현될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천리마동상건립을 위한 조각창작단에 망라되여 직접 조각을 한 리동훈씨(86살, 인민예술가, 전 만수대창작사 공훈조각창작단 조각가)는 천리마동상건립의 첫 시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조각창작단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조각분과 조각가들과 전국각지에서 소환해온 조각가, 대학생들이 망라되였다.
리동훈씨에 의하면 창작집단을 책임진 오성삼단장과 초안창작을 맡았던 전종각, 조원석씨를 비롯한 핵심조각가들은 전쟁전에 미술대학에 다니다가 전쟁때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전선에서 싸운 제대병사들이였다. 주석님의 명령에 따라 외국류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다수 20대의 조각가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거나 재학중인 새 세대들이였다고 한다.
《기념비제작을 위한 건물도 없었으며 초보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수령님만 계시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이고 신념 하나뿐이였다.》(리동훈씨)
당초 조각가들이 제작한 초안은 로동자, 농민, 지식인이 각각 한필씩 세필의 말을 타고 내달리는 모습을 형상한것이였다. 기념비라는것은 사방 어디서 보나 륜곽이 뚜렷해야 하는데 초안은 말을 세필로 하니 륜곽이 뚜렷하지 못하는것이 결함이였다.
1959년 11월 17일 천리마동상초안을 지도하여주신 주석님께서는 말을 세필로 하지 말고 한필로 하고 각계각층 군중을 대표하여 남자와 녀자가 탄것으로 하면 좋겠다고 형상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다음해 2월 주석님께서는 조각가들이 3가지 안으로 다시 만든 초안들을 보아주시며 그중에서 로동자, 농민을 태운 천리마가 구름을 박차고 달리는 안이 좋을것 같다고 하시면서 그 초안을 기본으로 하여 천리마동상을 완성할수 있도록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조각창작에는 삼지연대기념비 《진격의 나팔수》, 주체사상탑 3인군상을 비롯한 대기념비적작품을 창작하는데 크게 기여한것으로 알려지는 공로있는 조각가 로익화씨(79살, 인민예술가, 만수대창작사 공훈조각창작단)도 참가하였다. 당시 대학생이였던 그는 천리마동상창작에 대한 주석님의 령도를 가슴뜨겁게 회억한다.
《세계력사를 보면 기마동상이 많다. 거기에는 주로 왕들이나 전설적영웅들이나 탔지 일반인민들이 탄것은 없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천리마 기마동상에 천대받고 압박받던 우리 인민이 타도록 해주시였다.》

로익화씨
혁신과 비약의 비결
하지만 막상 조작에 착수하려 해도 그당시 큰 기념비조각을 할만한 창작실도 자재와 기술설비도 갖춘것이 없었다.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의 불길이 온 나라에 타오르는 벅찬 그 시기, 모든것이 부족한 속에서 방대한 계획을 수행하여 혁신과 비약을 이룩할수 있었던 비결은 집단적혁신의 힘이였다.
천리마동상창작에서도 역시 천리마운동의 《자력갱생》, 《계속혁신》의 정신으로 난관을 뚫고나갔다.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저앉거나 물러설 생각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리동훈씨는 말한다.
창작단은 당시 만경대구역에 남아있던 변전소자리에 판을 벌리고 창작전투를 시작하였다.
리동훈씨에 의하면 천리마동상현장조립때 축대와 동상을 련결하는 골조시공을 앞두고 공법을 토의하는 과정에 경험있는 외국기술자들의 기술적방조를 받을 생각으로 문제를 상정시켜보았더니 그들은 직승기 두대를 띄워서 골조를 들어올리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 시공을 맡았던 한 연공이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발휘하여 직승기가 아니라 통나무버팀대에 활차를 고정시켜 그것으로 골조를 조립하는 공법을 창안도입함으로써 천리마동상의 시공을 성공적으로 보장하였다. 이처럼 천리마동상창조과정은 곧 자력갱생의 영웅을 키워내는 대학으로 되였다.》
그리하여 1961년 우리 나라 첫 기념비적건축물인 천리마동상이 솟아오르게 되였다. 사람들은 우리 조각가들자체의 힘으로 동상을 창조해낸데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당시 천리마동상은 평양시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였다. 시내의 그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천리마동상은 증산과제투쟁에 떨쳐나선 인민들을 위훈창조에로 더욱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이때 조각창작단을 모체로 하여 꾸려진것이 바로 우리 나라 최고의 미술창작기지인 만수대창작사이다.
강력한 창작집단이 꾸려짐으로써 이후 만수대대기념비(1972년), 주체사상탑(1982년)을 비롯한 수많은 기념비적창조물들이 곳곳에 일떠서게 되였다.
오늘 조선에서는 새로운 시대어 《만리마속도창조》의 구호드높이 사상최강이라고 하는 경제제재도 아랑곳없이 사회주의강국건설에서 놀라운 기적들이 창조되고있다.
《천리마가 있기때문에 오늘의 만리마시대도 있다. 오늘과 래일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분분초초 새로운 기적이 창조되는 오늘의 만리마시대는 김정은원수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펼쳐지고있다.》(로익화씨)
[출처;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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