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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미주운동사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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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13 10:2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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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미주운동사 1

 

 

 

하용진(재미동포전국연합회 사무차장]

 


2백년전 독립 이후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이민 특히 정치이민의 피난처였다. 동서를 막론하고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한 정치망명객들이 미국에 와서 미국 헌법 중에서 자유를 보호하는 조문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런 관계로 미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은 각양각색의 정견과 정치행동일 것이다.

초기 한국이민들 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항의하면서 쓰러져가는 한국 말엽의 비통 속에서 뛰쳐나와 미국으로 이민 온 분들이 상당수가 된다. 특히 1876년 한일 수호조약 이후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이긴 후 미국과의 비밀조약인 카쓰라 - 태프트(Taft - Katsura) 조약을 맺고 적극적으로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후부터 이민이 증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이민의 수는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에 비하여 매우 적은 편이었다.

한국인의 미국(사실은 하와이였다) 이민은 1903년에 시작하여 2년 후인 1905년까지 65척의 선박으로7,226명에 달했었다.* 그 중 637명이 여자였다. 1905년에 이민이 중단된 이유는 그해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인의 외국 출입이 정지당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도착한 7,226명 중에서 1,999명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에 도착했는데 그 중에서 여자는 12명에 불과했었다.

(*미주 최초의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당시 조선 봉건 통치자들과 하와이 미국인 농장주들 사이에 임금노예로 계약된 101명의 조선인들을 실은 배가 제물포를 떠나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이민자 그룹은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왔는데 이 시기는 한일합방과 미국의 동양인제외법(Oriental Exclusion Act)이 서명된 시기이다. 이 시기 천 건에 달하는 ‘사진신부’를 통해 많은 여성들이 이민 오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미국 또는 하와이 이민은 내부적 혹은 자의적 이라기 보다 외부적 조건*의 작용이 더 강했다. 지금까지는 미국에 이민한 이유가 살기 좋은 미국에 이민했다느니, 돈벌기 위한 모험이라느니, 외유의 목적이라느니 하고 이민한 사람들의 자의적 행동에 의한 것으로 말해왔으나 사실은 반대였다.

(*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은 1882년 중국노동자들의 이민금지법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겪고 있었고 알렌과 존스-당시 인천영동교회목사-를 비롯한 국내의 미국 선교사들이 미국내 인신매매상들과 결탁하여 기아에 허덕이던 조선 민중을 하와이로 가도록 강하게 부추키고 선동하였다.)

그 때까지 수많은 중국인 이민이 하와이로 모여드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 1882년 하와이 총독정부는 중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했다. 한국인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 하와이로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민 중 상당수가 미국 본토서 요구된 철도 공사에 종사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다시 미국 본토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인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다음에는 철도공사장에서 입으로 옮길 수 없는 무자비한 노동의 수난을 당하였다. (이상 신성려 님의 하와이 이민약사 중에서)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부터 시작된 미주이민1세기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민족해방사이며 독재에 항거하고 분단된 조국을 잇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통일운동사이다. (일제하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크게 1. 미국에 위임통치를 요청하던 이승만계의 친미외교론 및 독립청원론 2. 문명화와 자아수양을 부르짖던 안창호계의 실력양성론 및 민족개조론 3. 스티븐슨 저격 등 전명운, 이재명과 대동보국회의 테러활동 4. 군사학교설립과 군사훈련을 준비했던 박용만과 독립단의 항일무장투쟁 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처음 발디딘 미국 땅에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자신의 저임금을 쪼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거나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1년 9개월 동안 7천 여명에 불과했던 재미동포들이 20만 달러 이상의 독립성금을 모았고 -당시 이들의 한달 수입이 30달러였고 생활비가 20달러 가량 되었다- 이렇게 피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부된 자금의 액수는 총 280만불에 달하는데 이는 현재의 가치로 비교했을 때 몇 백 억불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군대에 들어가 비밀문서를 해독하거나 특수교육을 받고 일본 점령지에서 첩보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해서 미주동포사회는 이민자의 힘든 삶을 사는 속에서도 조국의 자주, 민주,통일을 위한 운동들을 면면히 이어 왔다.

 

 

간추린 미주운동사 2




60년대를 넘어서면서 미소간의 군사적 대치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미국의 산업구조는 군수산업과 우주항공산업 등의 첨단과학사업에 주력케 된다. 이런 가운데 기존의 제조업부문의 생산과 소비를 담당할 계층의 필요성에 의해 미국은 1965년 이민법의 개정을 통해 이민의 문을 대폭 개방하게 된다.

초기 하와이 이민이후 폐쇄되었던 이민은 50~60년대 전쟁고아와 국제결혼여성, 유학생과 종교재단에 의해 소수의 이민자가 유입되던 상황에서 70년대는 제2기 이민이라 불리는 본격적 이민의 새 장이 열린 것이다.

한편 국내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는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반공의 기치 하에 또다시 유신쿠데타를 자행한다. 이 무렵 전태일 열사의 항거에 고무되어 조국근대화의 미명아래 숨죽이던 노동자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학생들은 현 사회의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고 반유신, 반독재의 대열로 서서히 나서기 시작한다.

유신에 반대하여 애국민주세력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독재정권은 통혁당(68년), 인혁당(재) 사건을 비롯한 용공조작으로 애국민주화세력을 말살하고 긴급조치를 발동해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암흑세상으로 전 민중을 몰아 넣었다.

3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제거된 정치인과 유신의 횡포를 못 견딘 양심적 지식인들이 대거 확대된 이민의 길을 걸어 미주로 이동해 오게 된다. 국내가 유신에 의해 철저히 침묵을 강요받고 있을 때 이곳 미주에서는 이들의 주도로 반유신, 반독재투쟁을 외치며 조직화된다. 이는 일제하 국내의 억압상황을 피해 만주, 미주에서 독립운동의 근거를 마련한 것 같이 미주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숭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시 미주운동을 이끈 조직으로 뉴욕중심의 동부는 73년경 임창영, 노광욱, 지창보, 고원이 중심이 되어 재미민주한인협회가 결성되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76년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운동에도 주력하게 된다. 서정균의 해외한민보가 미주민련의 대변지 역할을 하였고 자매조직인 이보배가 이끄는 여성동우회가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LA중심의 미서부는 김성락, 차상달, 홍동근이 중심이 되어 73년 8월에는 조국자유수호동지회가, 74년에는 남가주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어 조국의 민주회복과 유신철폐운동을 근간으로 김대중지지와 양심수석방 등 국내정치지원운동을 전개해 갔으며 70년대 말에는 노의선, 김성락이 주도하여 조국통일촉진회가 만들어져 이북알기사업을 전개하면서 통일운동에 발길을 딛는다.

이외 홍동근, 최진환, 홍윤호가 중심이 된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와 예정웅, 문성철의 청년그룹이 결성한 4.19선양회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79년 10월에는 한인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해 김용, 육재규, 조원제 등이 한인노동연합을 결성하여 미주류 노동단체와의 연대와 국내민주화 지원활동을 전개해 나가기도 했다.

(* 71년 대통령선거 이후 해외도피 생활을 하던 김대중은 유신이 일어나자 해외에서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가는데 73년 7월 김재준 등 김대중을 지지하는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주본부를 구성한다. 한민통 미주본부는 김대중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다하였으나 친미, 반공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당시 임창영으로 대표되는 진보세력과의 대립적 양상을 띄고 있었다. 77년 6월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두 세력이 모임를 갖게 되었으나 보수세력의 일방적 회의운영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 이후 진보계는 앞서 말한 미주민련을, 보수계는 한국민주화운동연합(이는 곧 민주주의국민연합 북미주본부로 개칭)을 구성하게 된다.

이후 보수계는 별 활동 없이 지내다 82년 김대중의 제2차 미국체류기에 다시 활력을 되찾으며 82년 8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연합을 결성, 개량주의적 운동노선을 지속하다 이후 김대중을 따라 조직안의 명망가들이 잇따라 국내로 귀국하고 87년 대통령선거의 휴유증으로 퇴조의 기색을 보이다가 결국 미주운동에서 완전 퇴장하게 된다.

* 73년 한민통 미주본부가 결성된 후 김대중은 일본으로가 한민통 일본지부를 결성하던 중 박정희에 의해 납치당한다. 이후 일본 한민통은 재일동포들의 민족민주운동을 꾸준히 이끌어 오면서 77년 8월에는 북미주-일본-유럽을 연결하는 해외운동연합체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해외한민련)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미주민련이 해외한민련에 가담했으나 87년 해체되었고 일본의 한민통은 80년대 말에 한국민주통일운동연합으로 개칭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오면서 줄곧 남한정부로부터 반국가단체의 누명 하에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결성 당사자인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결국 그 누명은 벗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70년대의 미주운동은 김대중이란 명망적 정치인의 지지와 유신독재에 대응한 국내민주화운동 지원으로 특징 지워지고 운동의 주체들도 소수의 명망 지식인, 종교인의 선각자적 투쟁에 머무르고 조직운동 경험의 미비로 비대중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출처: 사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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