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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9.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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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2-05 20: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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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9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9.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소개하며 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9.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송 영 (작가)

 

• 1903년 5월 24일 서울에서 출생.

• 1923년 염군사를, 1925년 카프를 조직하는데 참가

• 1946년 8월부터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등으로 활동.

• 1977년 1월 3일 사망.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애국의 길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지나온 경력에 곡절은 있어도 영원한 동행자로 믿고 불변의 사랑과 의리로 운명을 지켜주고 빛내여주는 한없이 은혜로운 품, 그것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이다.

 

작가 송영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절세위인들의 사랑속에 영생하고있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새 삶의 품으로

 

해방의 감격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1946년 6월 어느날이였다.

 

미제가 살판치는 남조선에서 창작의 붓을 들지 못하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있던 송영에게 하루는 뜻밖에도 평양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평양에서 찾아온 사람은 송영에게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북반부로 오고싶어 하면서도 미제와 반동들의 반공선전에 속아 북반부로 오지 못하고있는 남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 계셔서 왔다고 하는것이였다.

 

《아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저를 불러주셨단 말입니까?!》

 

송영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앞에서 높뛰는 심장의 박동을 눅잦힐수 없었다.

 

건국사업에 그토록 분망하신 만고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들까지도 안중에 두시고 친히 평양으로 불러주시다니…

 

이날 송영이 그처럼 반가운 소식에 접하고도 선뜻 믿지 못한데는 그럴만 한 사연이 있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의 청장년들을 징병과 징용에 마구 끌어내가는 한편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작하고 여기에 적지 않은 연극인들을 강압적으로 망라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송영을 불러다놓고 《대일본제국》을 위한 연극단체가 나왔는데 여기에 가입할 의사가 없는가고 물었다. 송영이 뜻밖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기가 막혀 미처 입을 열지 못하고있는데 그자는 이 단체에는 본인의 의사여하를 불문하고 조선의 연극인들은 무조건 다 망라되여야 하는것이니 목숨을 버리기가 싫거든 가입해야 한다고 을러메였다. 송영이 죽어도 가입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으나 그자는 이미 총독부에서는 그를 협회리사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상임명예직에 불과한것이니 크게 할 일도 없고 욕을 볼것도 없다고 하면서 더 의향을 묻지도 않고 그를 돌려보내는것이였다.

 

그가 본의아니게 수치스러운 직분을 받게 된 경위는 대체로 이러한것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송영은 밤새껏 잠들수 없었다.

 

그는 쓰라린 마음을 안고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송영(본명 송무현)은 1903년 5월에 서울의 어느 한 문인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문학애호가였고 아버지 역시 《강능추월》을 비롯한 신소설을 창작한 작가의 한사람이였다. 그러고보면 3대를 문학을 업으로 살아왔다고 볼수 있다.

 

송무현은 서울 보인학교를 거쳐 1917년에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박세영과 같은 학년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처음부터 창작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학소년 송영에 대하여 시인 박세영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학생시절에 송영은 특히 작문에서 우수한 모범을 보였다. 그리하여 작문교원은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나중에는 간혹 송영의 작문으로 작문시범까지 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하였다. 16살의 소년으로서 자긍할수 있었건만 그는 더없이 겸허할뿐이였다.》

 

2학년때에 송무현은 박세영, 리적효, 리호와 함께 《새 누리》라는 륜독문예습작잡지를 발간하였다.

 

당시 서울 배재고보에는 량심적인 민족주의지식인들이 적지 않게 교편을 잡고있었기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그 영향을 받아 반일적인 민족주의사상이 농후하였다.

 

《새 누리》에는 작가들의 애국적인 시, 산문들과 애국명장들의 전기들 그리고 조국산천을 례찬한 기행문들도 편집하였다.

 

《새 누리》를 발간할 때부터 송무현은 필명을 송영(宋影)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주의 그림자란 의미이다. 말하자면 그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문호가 되여보겠다는 꿈을 안고있었는데 10대의 젊은 나이치고 놀랄만 한 일이였다.

 

그때 서울 배재고보에서는 그의 선배들인 박팔양, 윤기정, 김소월, 라도향이 공부하고있었다. 그리고 후배들인 박승극, 리지용, 라웅, 김욱, 황철 등이 있었다.

 

1919년 3.1인민봉기를 계기로 송영은 동창생인 박세영 등 몇몇의 학우들과 함께 《자유신종보》라는 비밀프린트신문을 6호까지 발행하였는데 군중들속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서 일정한 작용을 한것으로 하여 퇴학처분을 받게 되였다.

 

1919년 가을 대부분의 학생들은 복교하였지만 송영은 학교로 갈수 없었다. 그것은 비밀프린트신문으로 하여 일제경찰이 그에게 《사상불온》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았으며 한편으로는 가정의 령락때문이였다.

 

그는 운송점에서 잡역으로 일하게 되였다. 로동생활은 그의 사상의식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문학수업의 원천으로 되였다.

 

그는 넘치는 열정을 다 바쳐 《구름 끝까지》와 《어부》라는 근 만매에 가까운 두편의 습작장편소설도 썼고 고리끼의 《최하층》, 고골리의 《검찰관》, 체호브의 희곡작품 등 수많은 작품들을 탐독하면서 문학수업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후 송영은 우편국의 하급사무원으로 있던중 왜놈우편국장의 민족적차별과 멸시를 참을수 없어 잉크병으로 답새기고 그길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꾜의 유리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도꾜대학 예술과 야간을 다니였다. 낮에는 고된 로동을 하고 밤에는 늦도록 공부하였으며 어떤 때는 쉬는날에도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의 이러한 생활체험은 송영의 세계관형성과 작가적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22년말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제약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하였다.

 

이무렵 송영은 문학을 지향하는 동료들과 함께 현실에서 어지럽게 범람하는 각종 문학류파들을 놓고 론의하면서 인민대중의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문학단체를 조직할것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1923년에 드디여 송영은 리호, 리적효 등 문학청년들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첫 프로레타리아문학단체인 염군사를 조직하였다.

 

당시 《창조》, 《페허》, 《백조》 등 출판물을 통하여 자연주의, 퇴페적랑만주의가 횡행하는 조건에서 염군사는 독자들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잡지 《염군》을 발간하였다.

 

《염군》이란 불꽃의 무리라는 뜻으로서 장차 이 땅에 휘몰아칠 프로레타리아문학운동의 불길을 일으킬 새 세대 문학인들의 의지와 신념을 표현한 명칭이였다.

 

일제경찰의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염군사는 자기의 기관지를 통하여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가을에 나온 《염군》 2호에는 송영의 단편소설 《남남대전》이 발표되였으며 1924년 초봄에 나온 3호에는 희곡 《백양화》와 단편소설 《어두운 마을》이 발표되였다.

 

그는 작품들에서 계급투쟁의 현실을 반영하였으며 매국노들의 죄행을 폭로비판하였다.

 

기관지를 통하여 송영을 비롯한 동인들은 힘차게 창작활동을 벌렸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염군》은 겨우 3회를 발간하고 페간당하고말았다.

 

1924년에 송영은 단편소설 《늘어가는 무리》를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우리 나라에서 로동계급의 투쟁을 형상한 첫 작품으로 되였다.

 

송영은 1925년 염군사, 파스큐라의 문학단체성원들인 조명희, 리기영, 한설야를 비롯한 작가들과 평론가 임성재, 리성태 등과 함께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을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송영은 카프조직의 중심인물의 한사람으로서 창작활동을 활발히 벌리는 한편 카프조직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한몸 다 바쳐 일하였다.

 

카프는 결성시기부터 리광수, 최남선, 김동인, 렴상섭 등 반동작가들의 부르죠아문학의 기만성과 반인민성을 철저히 폭로규탄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문학창조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 시기 카프문학작품들은 아직도 초기프로레타리아문학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카프조직을 새로운 단계에 적응하게 개편확대강화할 문제를 제기하였다.

 

1927년 카프조직은 총회를 열고 보다 높은 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으며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지역별로 위원들을 선거하였다.

 

송영은 개편된 카프의 서기장이 되였다. 그는 기관지 《조선문예》, 《문학창조》편집사업에도 관계하였으며 아동잡지 《별나라》편집도 맡아보았다.

 

송영은 로동계급의 투쟁을 반영한 첫 작품으로 되는 단편소설 《늘어가는 무리》를 비롯하여 단편소설 《용광로》(1925년), 《선동자》(1925년), 《석공조합대표》(1926년) 등 소설창작활동을 왕성하게 벌리였다.

 

이 시기 송영은 작품들에서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침략자와 착취자를 증오하며 그들과 싸우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특히 단편소설 《석공조합대표》는 그의 창작계렬에서뿐아니라 우리 나라 프로레타리아문학발전에 새로운 기여를 한 작품의 하나로 된다.

 

송영은 또한 정평농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중편소설 《호미를 쥐고》, 홍원농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단편소설 《군중정류》도 썼다.

 

그는 정평농민들의 투쟁소식을 듣고 지체없이 현지로 가던 도중 고원역에서 경찰에게 단속되였다. 경찰은 그를 체포억류하였다가 서울로 되돌려보냈으나 그는 다시 정평으로 가서 투쟁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취재하고 중편소설을 창작하였던것이다.

 

이 시기 송영은 단편소설 《옷자락은 기발같이》(1929년), 《쫓겨가신 선생님》(1930년), 《새로 들어온 야학생》(1931년), 《을밀대》(1931년) 등 아동문학작품들을 적지 않게 창작하여 프로레타리아아동문학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송영은 리기영, 한설야 등과 더불어 반동적부르죠아문학의 본질을 폭로하는 평론활동도 줄기차게 벌리였다.

 

그는 수필 《선풍칠 순간》에 이어 평론 《1931년의 조선문단개관》을 《조선일보》 1931년 12월 17일부에 집필발표하였다. 이 평론은 량주동, 정인섭이 1931년을 《프로문학의 부진의 해》라고 중상야유한것을 반박하여 쓴것이다.

 

송영은 이 글에서 부르죠아문단의 반동성을 폭로하면서 1931년은 카프문학운동이 상승하고 성장하여온 해였다는것을 힘있게 론증하였다.

 

송영은 평론에서 최남선의 정체를 찍어서 발가놓았다.

 

당시 카프에는 전문평론가들이 별로 없는 조건에서 작가들이 여기에 직접 참가하였는바 리기영은 리광수, 김동인을, 한설야는 렴상섭, 김화산을 그리고 윤기정은 권구환을, 송영은 량주동, 정인섭을 상대로 하여 투쟁하였다.

 

송영이 쓴 평론 《1931년의 조선문단개관》이 발표되자 너무도 명백한 사실앞에서 부르죠아문단은 어쩔수 없이 입을 다물고말았다.

 

1920년대말부터 송영은 소설과 아동문학, 평론을 쓰는 한편 희곡을 주로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우수한 희곡작품들을 창작하여 두각을 나타내였다. 《호신술》(1928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1929년), 《신임리사장》(1934년), 《황금산》(1937년), 《김삿갓》(1938년)은 해방전 그의 희곡작품들중에서 주목되는것들이다.

 

당시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예술이 없었다. 하여 1920~1930년은 프로레타리아연극의 개화기, 전성기였다.

 

송영의 희곡작품들은 어느것이나 다 신랄한 풍자로서 특징적이다.

 

희곡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는 착취사회현실을 폭로비판하고 규탄한 송영의 극문학의 대표적작품이다.

 

작품은 파국적인 경제공황이 세계 자본주의나라를 휩쓸던 1920년대말을 시대적배경으로 하여 애국자의 탈을 쓰고 사리사욕과 리기적목적을 추구하고있는 한 자본가의 정체를 예리한 풍자의 불길로써 신랄하게 조소하고 타매한 작품이다.

 

무대는 어느 도시의 방직공장 사장실이다. 예속자본가인 사장은 경제공황에서 벗어나보려는 자기의 책동에 제 심복인 지배인과 잡지사 주필, 기생 등을 끌어들인다.

 

풍자대상인 이 사장은 큰 자본가들이 련이어 파산당하는 경제공황에서 살아나 많은 돈벌이를 해보려고 《국산장려》라는 간판을 내들고 그것을 선전하려고 획책한다.

 

그는 《국산장려》라는 말을 선전하면서 인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기 공장의 제품을 팔아먹으려고 꾀한다.

 

먼저 기생들을 청해다가 자기 공장에서 짠 천으로 옷을 지어 입혀서 어디로 불려가든지 《자작자급의 정신》을 말하라고 하면서 운동비를 쥐여준다. 한나산잡지사 주필을 불러서는 다 같은 피줄인데 계급투쟁을 하지 말자고 선전하면서 선전비용 천여원을 찔러준다.

 

사장은 이처럼 제놈의 오그랑수를 위해서는 돈을 물쓰듯 하면서도 로동자들에게 내줄 얼마 안되는 임금마저 잘라먹고 내주려 하지 않는다.

 

사장의 이러한 잔꾀가 실현되기도 전에 수십명의 로동자들이 항의하러 밀려들며 신문사의 기자들과 기생들도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바람에 질겁하여 전화도 면회도 일체 거절하라고 악을 쓰면서 당황망조하는데서 작품이 끝난다.

 

작품은 일제에게 아부굴종하면서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는 착취계급의 반인민적본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하고 로동계급의 혁명적진출에 의한 착취제도의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고있는것으로 하여 해방전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남았다.

 

그의 작품이 담고있는 사상적내용과 사실주의적수법, 주인공들의 성격적특질이 뚜렷한 대사, 해학과 풍자를 통한 성격형상 등은 해방전 우리 나라 희곡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수 있다.

 

또한 송영은 시인 박세영과 함께 신인육성사업을 맡아 김북원, 리원우, 신고송, 안룡만, 남궁만, 남응손, 장승한, 송순일 등 당시의 신인청년작가들을 키워냄으로써 후날 우리 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4년 일제는 카프를 없애버리려는 계획밑에 사건을 조작하여 2차검거를 하였다. 송영은 리기영, 한설야 등 수많은 카프성원들과 함께 전주감옥에서 령어생활을 하게 되였다.

 

두차례의 검거선풍으로 하여 카프는 비참하게도 1935년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가 카프를 강제로 해산시키였지만 조선문학의 견결한 지향정신과 애국애족의 터전에서 싹트고 자라온 그 명맥은 도저히 끊어버릴수 없었다.

 

합법적인 카프의 간판이 내려진 뒤에도 송영, 리기영, 한설야를 비롯한 핵심적인 전위작가들은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송영은 리기영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고 무장투쟁을 힘차게 벌리고있다는 감격스러운 소식을 듣고 크나큰 흥분에 휩싸였다.

 

송영은 일제의 적극적이고 로골적인 비호를 받고있는 문인보국회를 비롯한 친일어용문학과 맞서 붓을 들고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에게 항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희곡 《유훈》(2막)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내용의 가극 《금화의 피리》를 창작발표하였다.

 

그리고 일제침략자들을 폭로풍자한 풍자극 《전엉터리》를 창작하였다.

 

참으로 송영은 해방전 문학작품을 통하여 당대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주장하였으며 무산계급의 선각자를 전형으로 내세우고 사회주의적리상을 제기한 선진적작가의 한사람이였다. …

 

그런데 이러한 자기가 일제의 강압으로 친일단체의 무슨 리사로 되였다는것이 정말 억울하고 통분하기 이를데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신문에 공개장이라도 써내여 세상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싶었지만 놈들의 보복때문에 선뜻 그럴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인 자신이 얼마나 역겨운지 몰랐다.

 

이런 고달픔과 괴로움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는 어서빨리 나라가 해방되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8.15를 맞았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였고 미군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눈앞은 또다시 캄캄해지기만 하였다. 서울에서는 어느덧 적지 않은 작가, 예술인들이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 38°선을 넘어가고있었지만 송영은 욕된 경력때문에 그렇게도 할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랐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친일파들을 숙청하는데 북에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일부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면 금시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

 

그러던 어느날 깊어가는 번민으로 가슴을 태우던 그가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의 부르심을 받는 꿈같은 행운을 지니게 되였으니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컸으랴.

 

그날 송영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아버님, 저는 북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일본놈들의 연극단체에 들었던것을 걱정한것은 공연한것이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민족적량심이 있는 사람이면 과거경력은 개의치 않고 누구나 기꺼이 받아주신다고 합니다.》

 

《과시 품이 넓으신분이시구나! 그럼 떠나거라. 북에 가서도 네 량심껏 일한다면야 누가 나무람하겠느냐. 아무쪼록 장군님을 받들어 좋은 글을 쓰거라.》

 

며칠후 송영은 몇몇의 작가들과 함께 평양을 향해 떠났다.

 

송영이 선택한 북행길, 그것은 욕된 경력때문에 늘 위구와 불안속에 살던 그가 만시름을 놓고 안길수 있는 넓고 따사로운 사랑의 품으로 찾아간 행복의 길이였다.

 

 

행복은 꽃피여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속에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송영은 1946년 8월 어느날 뜻밖의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송선생, 기뻐하십시오. 김일성장군님께서 선생에게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의 중책을 맡겨주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선생에 대한 기대가 크십니다. 우리 나라 연극예술을 더욱 발전시켜 새 민주조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할것이라고 믿고계십니다.》

 

일군의 말에 송영은 너무도 감격이 커 무엇이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고맙고 눈물이 날뿐이였다. 이처럼 크나큰 신임을 베풀어주는 품이라면 자신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기고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창작에 한생을 바치고싶었다.

 

환희에 넘친 그의 결의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서울에 있던 그의 부모와 가족들을 무사히 평양에 데려오게 하고 친어버이사랑으로 살림살이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주시는 한량없는 사랑과 은정을 받아안고 더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어느날 송영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저는 흥남지구에 내려가겠습니다. 현실체험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네가 생각을 잘한것 같다. 현실을 모르고서야 작품을 못 쓰지. 연극인동맹위원장이라 해서 꼭 평양에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지. 내려가서 숙식조건이 여의치 않거든 알려라. 우리 식구도 다 함께 가서 지내게. …》

 

아버지도 어떻게 하나 좋은 작품을 써서 어버이수령님의 믿음과 기대에 보답하려는 송영의 결심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송영은 곧 현지에 내려갔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새 조국을 부강번영하는 락원으로 꽃피우기 위해 근로자들이 헌신적인 로력투쟁을 벌리는 들끓는 현실은 그에게 전에 없던 창작의욕과 열정을 북돋아주었다. 이렇게 되여 두편의 희곡 《인민은 조국을 지킨다》와 《나란히 선 두 집》이 창작발표되였는데 그것은 8.15경축 문예경연에서 입선작품으로 평가되였으며 책으로도 출판되고 무대에서도 공연되였다.

 

작가는 기뻤다. 작품을 써내고도 그것을 실은 잡지의 발매를 금지당했던 가슴쓰린 지난날을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몰랐다.

 

희곡 《나란히 선 두 집》은 해방후 로동계급속에서 일어난 사상의식개변과정을 기본문제로 내세우고 이것을 원군사업을 비롯한 제반 주요사회사업과의 유기적인 통일속에서 생동한 생활적화폭으로 해명한 작품이다.

 

작품은 그 어떤 커다란 생활적사건이나 특이한 정황들을 설정함이 없이 보통 가정생활의 테두리안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생활일화들과 세부들로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엮어나가면서 극성을 실감있게 조성하고 인물들의 개성적특징을 생동하게 보여주었다.

 

송영은 이밖에도 자기의 풍부한 풍자극창작경험을 살리고 더욱 발전시켜 희곡 《금산군수》와 같은 희극적양상의 작품들도 창작하였다.

 

희곡 《금산군수》는 해방후 남조선사회의 부패상과 괴뢰정권의 허위성을 보여주면서 남조선반동관료배들의 반인민적성격과 사기협잡행위, 추악한 종말을 희극적으로 타매한 작품이다.

 

작품은 민주국민당이 추천한 백가와 리승만매국역도가 직접 임명한 리가가 한날한시에 금산군에 나타나 저마끔 군수자리를 타고앉으려고 개싸움을 벌리는 과정을 기본줄거리로 하고있다.

 

백가놈은 해방전에는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 복무하였고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벼슬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괴뢰정부에 뢰물을 찔러바친 후 금산군수의 벼슬을 산 인물로서 사고방식에서 봉건통치배들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세계에서 헤매이는 우둔한자이다.

 

리가놈은 매판자본가의 아들로서 미국놈들을 등에 업고 돈으로 출세의 길에 올라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놈은 백가와는 달리 숭미사대주의사상과 황금만능을 철저히 신봉하는 자본주의적산아로서 사대매국노의 전형이다.

 

작품은 두놈이 한방에 앉아서 서로 자기가 진짜군수라고 우겨대며 상대방의 더러운 경력과 무능력을 들추어 비방중상하는 장면과 농민들앞에서는 저마끔 자기가 진짜 군수라며 허세를 부리다가도 유격대앞에서는 서로 진짜군수가 아니라고 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강한 극적대조를 통하여 놈들의 추악한 몰골을 적라라하게 폭로하고있다.

 

송영은 여러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진하여 현실속에 들어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써내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새 민주조국건설에 창작으로 이바지하려는 그의 작가적량심을 보았고 순결한 애국충정을 보았다.

 

송영의 창작은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계속되였다.

 

미제에 의하여 전쟁이 일어나자 송영은 종군작가로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송영은 종군작가들과 함께 포연탄우를 헤치며 수많은 인민군용사들을 찾아다니였다.

 

송영은 가렬처절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영웅적군대와 인민의 투쟁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열렬한 조국수호정신과 미제에 대한 증오심이 차넘치는 작품들을 적극 창작하였다.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1952년)는 원쑤들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고 하신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나의 고지운동의 선두에 선 공화국영웅 한계렬과 그의 소대원들의 영웅적투쟁을 형상한 작품이다.

 

1막에서는 주인공 한계렬의 숭고한 사상정신세계와 함께 자기들이 받은 소막전고지점령임무를 기어이 수행하려는 한계렬소대전투원들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며 2막에서는 전투장면을 통하여 인민군전사들의 대중적영웅주의와 주인공의 장렬한 최후를 보여주고있다.

 

작품에서 주인공 한계렬은 위대한 수령님과 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지닌 참된 당원, 혁명전사로 형상되여있다.

 

종군행군길에서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해 2월 군부대지휘관들의 초청을 받은 송영과 박세영은 기분이 좋아서 군단지휘부로 들어가는데 정문보초가 서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시인다운 성격적기질의 소유자인 박세영은 《우린 종군작가들이야.》라고 하면서 정지함이 없이 그냥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애어린 전사인 보초병은 규정대로 《종군작가라도 섯! 서지 않으면 쏜다.》라고 웨치면서 불쑥 앞에 총까지 내대는것이였다. 그러자 당황해난 시인이 펄쩍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서며 《아이구나, 오발할라. 설테니 그 총구를 좀 치워줘. 으쓸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초병은 이 수상스러운, 군사규정도 잘 모르는 불법침입자인 로군관들앞에서 총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해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박세영이 오른손주먹을 쳐들어 씩씩하게 흔들며 《승리의 5월》을 부르기 시작했다.

 

 

장하고나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새 세기를 창조하는 승리의 주인

 

그제야 앞에 서있는 체소하나 패기있어보이는 시인이 다름아닌 《애국가》의 작사자라는것을 알아차린 보초병은 《알겠습니다. 〈애국가〉의 시인 박세영동지! 어서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보초병앞을 힘찬 걸음걸이로 통과하여 들어간 시인은 저만쯤에 가서 아직 들어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있는 송영을 돌아보며 골려주듯 말하였다.

 

《난 먼저 들어갑니다. 중좌동지.》

 

그러자 이번에는 송영이 보초병앞으로 한발 나서며 조용히 물었다.

 

《자네, 아니 보초병동무. 혹시 〈황금산〉이라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있나?》

 

희곡작가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전사의 입에서는 《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를 쓰신 송영선생님, 군단장동지랑 기다리십니다. 들어가십시오.》라는 환성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나왔다.

 

이리하여 무사히 보초소를 통과한 두 작가는 이날 밤의 명절경축연회에 뜻깊게 참가할수 있었다.

 

일화적인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있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전쟁시기 송영은 싸우는 고지에서 《모두다 전선》, 《그가 사랑하는 노래》, 《나의 고지》,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강화도》 등 많은 극문학작품들을 창작하여 군대와 인민을 전쟁승리를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조국해방전쟁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투쟁으로 승리하자 송영은 1953년 항일혁명투쟁전적지조사단의 한 성원으로서 유격근거지, 밀영지, 전투장 등 82개 장소를 답사하였고 항일무장투쟁참가자, 연고자, 현지주민 700여명을 만나보았다.

 

백두의 천고밀림을 헤치며 근 7 000Km의 기나긴 로정을 편답하면서 그는 해방전 말로만 전해듣던 백두의 피어린 자욱을 심장에 새겨안았으며 크나큰 감격과 흥분에 넘쳐 불과 두달기간내에 답사기행문집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를 집필완성하였다.

 

제목에서부터 알수 있는바와 같이 송영은 이 글을 통하여 조종의 산 백두산은 혁명의 성산으로 영원히 높이 솟아 빛나리라는것, 다시말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항일혁명투사들의 불멸의 위훈은 천추만대와 더불어 길이 빛날것이라는것을 생동한 력사적자료와 사실들을 통하여 격조높이 토로하였다.

 

그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전체 동포형제자매들이여! 청년학생, 작가, 예술인들이여! 우리들은 소리높이 세상에 자랑하자! 영웅적항일민족해방투쟁의 혁명전통과 고귀한 정신을 계승한 로동당시대에 사는 긍지와 감격과 행복을! 오, 이 감격이여- 이 무한대의 행복이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사화산이던 백두산에서 분출한 〈광복혁명〉의 용암은 2천만동포의 주목을 끌었다. 항일혁명의 불길이 미쳐간 곳곳을 돌아본 작가 송영은 자기의 답사기행문집에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는 표제를 붙였다. 그 표제가 말하듯이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때로부터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이는 광복의 활화산, 혁명의 성산으로 되였다.》

 

이렇게 극작가인 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의 발자취가 깃들어있는 혁명전적지편답의 길에 나섰으며 어디서나 백두산을 우러르는 경건한 마음으로 혁명전통교양주제의 도서를 훌륭히 써냈다는것은 찬양할만 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송영은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조직전개된 항일혁명투쟁력사와 투사들의 모습을 실화나 기행문만으로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형상하여 보여주려고 하였다. 더우기 취재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투의 불길속에서도 친히 수많은 노래와 희곡들을 창작하시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몹시 감동되여 자기의 창작활동도 전투로 되여야 한다는 불같은 창작적충동을 받아안게 되였다. 하여 그는 짧은 기간에 희곡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일명 《애국자》), 영화문학 《밀림아 이야기하라》, 가극대본 《밀림아 이야기하라》, 희곡 《불사조》, 중편소설 《나는 다시 강을 건너간다》, 희곡 《나는 다시 강을 건너간다》 등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이 시기는 그가 작품창작에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열정의 나날이였으며 창작활동에서의 전성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혁명전통주제의 첫 작품인 희곡 《애국자》를 창작할때 능력있는 극작가인 그가 2년 반이라는 기간에 5차례에 걸쳐 구성수정작업을 진행한것만 보아도 작품의 성과적완성을 위하여 얼마나 깊은 탐구와 많은 품을 들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1956년 7월 10일 창작일지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2막 2장을 네번째 다시 썼다. 김명희의 대사중에서 이런것을 썼다. (최구장에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직접 총들고 싸우는것보다 더 어려웁고 중요합니다.〉라는 대사를 쓰면서 나의 창작사업에서도 직접 이런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번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직접 유격투쟁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 이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한다는것은 쓰기 어려웁고 더 책임이 무거워진다.〉고. 나는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불사조같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송영이 창작한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마다에는 이처럼 그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다.

 

희곡 《애국자》는 압록강대안의 한 마을에서 구장노릇을 하면서 장군님께서 주신 임무를 수행한 항일유격대공작원의 이야기였다. 조직의 비밀이 생명보다 귀중하기에 구장노릇을 해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을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터놓고 말하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일제의 주구》라는 갖은 비난과 저주를 받아 가면서도 한가슴에 묵새기고 끝내 임무를 빛나게 수행하는 주인공,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가 손색없는 하나의 극작품이였다.

 

송영은 일찌기 느껴본적 없는 창작적열정을 안고 붓을 달리고달려 1956년 9월에 장막희곡 《애국자》를 완성하였다.

 

무대에 오른 작품은 반향이 컸다. 그것이 다시 가극으로 각색되였을 때 파문은 더욱 컸다.

 

이때 그 창작성과를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어느날 극장에 몸소 나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곁에 앉혀주신 송영의 손을 내내 잡으신채 참으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근래에 드문 좋은 작품이라고 하시며 그때에 촌장이나 구장을 한 공작원들은 자신의 본심을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었으며 빨찌산에서도 자신과 몇몇 정치일군들밖에는 몰랐으니까 빨찌산에게도 잡혀 죽을수 있었다고, 그러니 누구한테 말하겠는가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많은 근로자들에게 보여주는것이 좋겠다고 이르시였다.

 

송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몇번이나 손수건을 꺼냈는지 모른다. 위대한 수령님께 작품을 보여드린것만도 최고의 영광인데 이처럼 높은 평가와 배려를 받아안으니 형언 못할 감격과 고마움이 가슴에 사무쳐와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베푸시는 어버이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작품에 인민상을 수여하는것과 함께 송영에게 그동안 문학창작에서 거둔 특출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인민상계관인의 영예를 안겨주도록 하시였다.

 

그날 동료작가들이 그를 축하해주고 수많은 관중과 독자들이 그에게 축하의 편지를 보내여왔다.

 

송영의 환희와 행복은 이를데 없었다. 작가에게 있어서 자기의 작품으로 수령께 기쁨을 드리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것보다 더 큰 영광, 더 큰 행복이 어데 있으랴!

 

인민을 위해 마음껏 창작할수 있는 품으로 불러주신분도, 좋은 작품을 쓸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시고 소재까지 찾을수 있게 하여주신분도 수령님이신데 그이께서는 그 모든 공로와 영예를 작가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시니 이 하해같은 사랑과 은혜에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그저 가슴속으로 다함없는 경모와 감사의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릴뿐이였다. 그후 1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72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를 내용과 형식, 형상에서 남아있는 부족점들과 결함들을 완전히 극복하고 5대혁명가극의 하나로 훌륭히 완성하도록 크나큰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송영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을 비롯하여 영웅성과 혁명성으로 충만된 현실을 작가로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실지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으며 영웅적문학예술을 창조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받아 안은 영광도 지니였다.

 

이 과정에 그는 영웅적인 우리 군대와 인민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하고 그들의 사상감정을 담은 문학 역시 영웅적인 문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였으며 그 신념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가 이렇듯 높은 창작적지향을 안게 된데는 남다른 사연도 있다.

 

전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배려에 의하여 우리 나라 문화대표단 성원으로 윁남, 인도네시아 등지의 외국을 여러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세계인민들의 절대적인 흠모와 칭송, 영웅적조선인민에 대한 열렬한 존경의 감정을 절감하군 하였다.

 

《대회 3일째 되는 날 나의 즉흥시랑송이 끝나자 전체 참가자들이 모두 일어나 〈인터나쇼날〉을 부르고 이어 조선말로 〈조선〉, 〈조선〉 하는 웨침이 터져나왔다. 조선사람으로서 사회제도가 다른 인도네시아에 가서 인도네시아사람들이 조선말로 웨치는 〈조선〉이란 소리를 들을 때 그 감회를 무어라 표현할수가 없었다. 나는 진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된 자랑을 여기에서 더욱 크게 그리고 떳떳하게 느끼였다. 그것은 몇천만리 먼 이국땅에서 왔다 해서 의례삼아 부르는 환호성이 아니라 일제억압시절에도 굴하지 않았고 더우기 미제국주의자들의 오만한 침략을 물리친 영웅조선에 대한 례찬이요, 환영이였기때문인것이다. 그래서 나도 너무나 기뻐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이것은 1959년 인도네시아인민문화련맹 제1차 전국대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대표로 참가했던 송영이 자기가 느낀 심정을 적은 《인도네시아기행》의 한 대목이다.

 

또한 송영은 어버이수령님의 높은 평가를 받은 한 직물공장 녀지배인을 원형으로 한 영화문학 《두 지배인》(1962년)을 창작하여 작가로서 벅찬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력사물창작에도 관심을 넣어 희곡 《박연암》, 영화문학 《흥부전》(1962년),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영웅적인 4.19인민봉기를 반영한 희곡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1960년) 등도 창작하였다.

 

작가는 우산장에서 희곡 《박연암》을 쓰던중 남조선에서 일어난 영웅적인민봉기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라지오에서 시시각각으로 울려나오는 격동적인 소식은 작가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게 하였다.

 

그는 떨리는 붓끝으로 자기의 창작일기에 이렇게 썼다.

 

《4월 13일, 희곡 〈박연암〉을 완성하는것도 물론 중요하고 의의가 크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시시각각으로 발전되고있는 남조선정세의 크나큰 격랑속에서 어떻게 몇백년전 이야기를 쓰고 앉아있기만 하겠는가.》

 

연극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의 첫 공연이 6월 3일 진행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당시 창작가, 예술인들의 조국통일념원이 얼마나 절절했는가를 잘 알수 있다.

 

전투적인 인민항쟁의 대합창이 울리는 속에 막이 오르면 피빛같은 화염이 활화산의 봉우리에서 터져오르고 화염속에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는 획이 굵고 힘찬 글발이 날아오른다.

 

치욕적이며 반인민적인 3.15선거를 계기로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쌓여있는 마산시의 가난한 수공업자 최재춘의 집으로 17살 난 그의 조카 김주렬소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온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항쟁의 격류속에 뛰여들었던 김주렬소년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며 숨도 채 지기 전에 바다물속에 던져진다. 그리하여 수만명의 마산시민들은 김주렬소년의 복수를 웨치며 노도와 같이 일떠서고 남조선 각지에서도 반미자주화투쟁이 과감히 벌어지는 속에서 괴뢰도당이 어린 김주렬의 시체마저 내주지 않아 사진만 놓고 장례식을 하게 된다. 오빠의 사진을 쓸어만지며 목메여 우는 16살 소녀 김주옥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이 비통한 사연을 어찌 참고 견딜수 있겠는가. 이제 더는 참을수가 없다. 한탄만 하던 최재춘로인도 분연히 일어나 자기 조카 김주렬을 죽인 살인경관의 권총을 빼앗아 그놈을 쏘아눕히고 자기도 총에 맞아 쓰러지며 복수를 부르짖는다.

 

최재춘의 아들 최승원을 선두로 한 항쟁군중의 기세에 겁을 먹고 대사관안에 몰려든 미제살인귀들은 허수아비괴뢰를 갈아치우는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놈들의 잔꾀에 속지 않고 손에 무장을 잡은 인민의 항쟁기세가 더욱 고조될 때 막이 내린다.

 

작품은 이처럼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여 마산에서부터 발단된 4.19인민봉기의 전모를 보여주면서 남조선인민들이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미제국주의의 남조선강점과 그에 아부굴종하는 사대매국무리들의 썩은 정치에 있다는것을 명백히 밝히고 반미자주화투쟁의 불가피성을 확증하였다.

 

우리 민족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형상을 창조하는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작가적의무로 간직한 그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수령님의 업적을 칭송한 희곡 《보천보의 홰불》(1967년)을 창작하는데서 핵심적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을 처음으로 형상한 희곡 《푸른 소나무》(1968년)창작에도 기본성원으로 참가하여 혁명연극창조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들을 창작하여 근로자들에 대한 혁명교양에 이바지한 송영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연극 《불사조》를 지도해주시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연극 《불사조》를 보아주시고 정말 작품을 잘 썼다고, 이렇게 좋은 연극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어야 한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의 말씀을 해주시며 거듭거듭 자기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던 그날의 감격을 잊을수 없었다.

 

그는 혁명전통주제의 작품을 더 많이 창작할데 대하여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창작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였으며 그 과정에 우리 나라에서의 첫 인민상계관인(1959년)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이처럼 송영은 창작의 전기간 우리 혁명의 주요행정과 사변들에 언제나 열렬하게 호응하여 사상예술성이 높은 다양한 형태와 주제의 작품들을 적극 창작함으로써 자기의 창작활동이 곧 혁명승리에 이바지하는 투쟁으로 되게 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아동문학으로부터 성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로부터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단막희곡으로부터 장막희곡, 영화문학과 가극대본, 시와 가사는 물론 수필, 수기, 단상, 기행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종류와 형태를 포괄하는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푸시는 정치적신임은 날로 더욱 깊어져 그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문예총중앙위원, 국립연극극장(오늘의 국립연극단) 총장 등 책임적인 여러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수령님의 위대성을 직접 체험하는 행운을 지니였다.

 

이처럼 송영은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공민으로서 영광의 최절정에서 살아온 행복자였다.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시여

 

한생을 창작으로 불태우던 송영은 뜻밖에도 엄중한 과오를 범하게 되였다.

 

이 사실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몹시 가슴아파하시며 그가 하루빨리 자기의 잘못을 고치도록 도와줄데 대하여 은정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하해같은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창작을 다그치던 송영은 병으로 74살에 마무리짓지 못한 유고를 남긴채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얼어붙었던 대지에서도 새싹이 움트는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죽었던 인간을 소생시키는 사랑의 전설은 오직 이 땅에서만 있을수 있는 이야기로 전해지고있다.

 

어느날 송영과 같이 일했고 그의 아들 송명수와 군사복무를 같이하였던 한 신인작가가 송영의 집에 들린적이 있었다.

 

작가는 송영에 대한 깊은 회억을 더듬다가 아들에게 아버지산소를 어디에다 썼는가, 비석을 어떻게 세웠는가고 물었다.

 

송명수는 아무 응대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는데 아무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것이였다.

 

그 말에 다소 놀란 작가는 한 제자의 의무로, 옛 전우의 자격으로 《아직까지 아무 비석도 만들어 세워드리지 않다니? 도대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하고 안타까이 말했다.

 

그러자 명수는 갈린듯 한 음성으로 말하는것이였다.

 

《우리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에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다음 비석을 요란하게 세우느라고 그러지 말라, 사람들이 보고 웃는다, 내 할 일을 다 못하고 가지만 그래도 변변치 않은 내 작품들이 후에라도 살아남는다면 그것이 내 비석을 대신할게다라고 했던거요. 그런데 아들인 내가 도리를 지킨다고 비석이나 화강석으로 크게 세워드린다고 해서 아버지가 더 커지는것도 아니며 또 아버지자신이 그렇게 하는것을 바라지도 않소. 그래서…》

 

《명수동무!》

 

작가는 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가는 로작가들이 사망하게 되면 봉분앞에 비석을 다 세워주는데 송영의 묘소에는 아무 비석도 세워져있지 않고 표말 하나만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면서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고 간 로작가의 일이 마음에 걸렸으며 그를 속으로 못내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겨우 생각했다는노릇이 희곡창작사에 있던 몇몇 극작가들과 함께 다음해 청명날에 송영의 묘에 비석이라도 맞춤하게 하나 세워주자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계획은 실천에 옮겨질수가 없게 되였다.

 

바로 그해 초겨울 어느날 저녁, 그 작가의 집에 송명수와 그의 누이 송정수가 불쑥 나타났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이렇게 둘이 함께 우리 집에 다… 어서 들어오시오.》

 

작가는 반기며 그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방에 들어서는 그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여있었다.

 

자리에 앉을념도 하지 않고 송명수는 《옛 전우에게 한가지 기쁜 소식을 전하고싶어서 누님과 같이 왔소. 이번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과 배려를 받아안고…》 하고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송영선생이?!》

 

《얼마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국렬사릉에 새로 안치할 렬사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보아주시다가 문득 일군들에게 왜 여기에 송영이 없는가고 하시면서 공로있는 오랜 작가인데 꼭 애국렬사릉에 령구를 옮겨다가 잘 안치하도록 하라고 뜨겁게 말씀하셨다는게 아니겠소.》

《송영선생을? 애국렬사릉에?!》

 

작가의 입에서는 놀라운 탄성이 울려나왔다.

 

송정수가 목메인 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꼭 꿈을 꾸는것만 같았어요. 자식들도 비석 하나 세워드릴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는데… 글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이름마저 점점 희미해져가는 우리 아버지를 잊지 않으시고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해주셨으니…

 

묘지에 누워계실 우리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랴 하고 생각하니 그저 눈물만 자꾸…》

 

송정수는 또다시 젖어드는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송명수도 두눈을 슴벅이며 감동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별로 한 일도 없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그 기억은 어느 소설에 있는것처럼 그 어떤 두뇌의 기억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의 기억이라고 생각하오. 우리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두터운 믿음과 각별한 배려에 대를 이어 충정으로 보답하자고 하오.》

 

《송동무, 나는 그런것도 모르고 얼마후에 몇몇 작가들과 함께 송영선생의 비석을 세워드리려고 했댔소. 우리가 기껏 궁리해보았다는노릇이 고작 그게 다였는데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낼수 있는 그런 어버이의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를 애국렬사릉에 보내주시고 인민의 사랑속에 영생하도록 해주셨구려.》

 

1986년 9월 추석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전화를 거시여 전날에 준공된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감회깊은 회고의 말씀을 하시다가 렬사릉에 오랜 작가였던 송영이 안치되였다는 보고를 들으시고 송영을 넣었으면 좋습니다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국의 량심을 지니고 자기의 생애를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창작활동으로 빛내인 송영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게 하여주시고 생전에 력임한 직무들도 많건만 그가 가장 귀중히 여기였던 필생의 직분을 그의 이름과 함께 후세에 길이 전해주시려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발을 새겨넣게 하여주시였다.

 

 

송영선생

작가

1903년 5월 24일생

1977년 1월 3일 서거

 

세상을 떠난지도 근 10년세월이 흘러 동료작가들은 물론 그의 친자식들까지도 기억이 희미해지고있던 그때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적으나마 기여한 그를 잊지 않으시고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시였으니 정녕 절세위인들의 그 사랑은 한번 정을 주고 믿음을 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고 품어주는 영원한 삶의 품인것이다.

 

하기에 그 사랑, 그 은정속에 작가 송영이 누구나 오를수 없는 애국렬사릉의 높은 언덕에 올랐을 때 그의 자녀들과 친지들은 오열을 터뜨리며 심장의 목소리를 합쳐 서정시 《어머니》를 목메여 합창하였다.

 

그대는 어머니!

피도 숨결도 다 나누어주고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 안아주며

바람도 비도 죽음까지도

다 막아나서주는 우리들의 어머니

준엄한 싸움길에 하나의 전사 뒤떨어져도

천리길 만리길을 다시 달려가

붉은기에 휩싸안아 대오에 세워주는

영원한 삶의 품! 혁명의 어머니!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작가와 그의 작품을 잊지 않으시고 회고하시며 내세워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을 만들 때에 카프작가편에 송영을 형상하도록 하여주시였으며 《현대조선문학선집》(1930년대 희곡선)에는 그 시기 그가 창작한 대표적작품들을 수록하도록 은정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생의 길에서 잘못은 범했어도 그의 애국적량심을 귀중히 여기시여 행복과 영광의 절정에 높이 세워주신 은혜로운 그 품!

 

백두산위인들께서 기억해주시며 조국과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작가로 내세워주신 재능있는 극작가, 해학과 유모아의 명수였던 송영은 오늘도 영생의 언덕에서 사람들에게 고귀한 철리를 말없이 가르쳐주고있다.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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