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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6. 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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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3-13 01:2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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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6. 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6. 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5. 한생 통일을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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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7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출생.

∙ 1943년 10월에 원산철도공장에서 로동.

∙ 1946년 현대일보사에서 활동.

∙ 1950년 7월 의용군으로 입대.

∙ 1962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활동.

∙ 1987년 8월 30일 사망.

∙ 조국통일상수상자.

 

 

                             《조선은 하나다!》

                             나의 말은 한평생

                             이 한마디뿐이다

 

                             …

                             이 말 웨치며 싸우리라!

                             불에도 뛰여들고 물에도 뛰여들고

                             적의 교수대에도 기꺼이 오르리라

 

                             내 통일의 원쑤들과 싸우다 죽으면

                             땅우에 흩어진 살점 하나하나

                             붉게 뿌려진 피방울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높이 웨칠것이다

                            《조선은 하나다!》라고

(김상훈의 시 《한마디 말》중에서)

 


 

고마워라, 내 안겨사는 어버이품이여

 

조국의 해방과 함께 그가 처음으로 신문지면에서 뵈옵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품! 고마운 공화국의 품에 안겨 김상훈이 보낸 나날들은 그의 인생에서 더없이 참된 삶, 만복을 누린 나날들이였다.

이 땅을 위하여 헌신하자! 누구나 다 평등하게 사는 사회, 누구나 다 나라의 주인된 고마운 인민의 세상을 위하여 힘껏 일하자!

1958년말 김상훈은 사회주의건설의 거세찬 열풍으로 들끓고있는 생산현장에 나갈것을 자원하였다.

복구건설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있는 락원기계공장(당시)으로 탄원한 그는 재단직장에서 단야공으로 로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로동은 그대로 시와 노래였으며 웃음이고 생활이였다.

약동하는 시대의 흐름속에 발걸음 뒤질세라, 변천되는 조국의 모습앞에 자신이 초라해질세라 김상훈은 달리고 또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기의 인생에서 더없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였다.

1958년 6월 어버이수령님께서 전쟁의 흔적이 채 가셔지지 않은 락원기계공장을 찾아주시였던것이다.

나라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찾아주신 수령님을 공장에서 만나뵙게 된 락원의 로동계급은 끝없는 환희와 격정으로 가슴을 들먹이였다.

해방후 《서울신문》에 실린 수령님의 젊으신 영상을 뵈옵고 그이를 민족의 수령으로, 운명의 구세주로 심장에 새겨안았던 김상훈이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소음이 진동하는 공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신 후 로동자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마주하시고 대형굴착기를 만들기만 하면 당이 안타까워하는 문제가 풀린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생산방도까지 의논해주시였다.

로동계급의 기름묻은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고 그들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며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인자하신 모습, 활달하고 소탈하신 그이의 환하신 모습앞에 김상훈은 목이 꽉 메여오고 심장은 흥분으로 세차게 고동치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만세!》

언제 어떻게 터쳐나온 격정인지 알수 없었다.

만세의 우렁찬 함성에 답례하시는 그이의 영상은 천하를 밝게 비치며 온 겨레를 한품에 따뜻이 안아주시는 민족의 어버이의 영상이였다.

그날 밤 김상훈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부드러운 압록강바람이 강변을 거니는 그를 포근히 감싸고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수령님에 대한 생각에 자신을 진정할수 없었다.

하늘가에 떠있는 수천수만의 별들은 무엇이라 표현할수 없는 격정과 흥분에 젖어있는 그를 조용히 지켜보고있었다.

고요를 가볍게 건드리는 강바람조차 깊은 감명속에 잠긴 그를 깨우기 저어했다.

예지와 슬기가 빛나는 안광, 정열과 자신심이 넘쳐나시는 표정, 한없이 자애로우신 미소…

첫눈에 만사람들의 온넋을 끌어당기시는 절세위인의 존귀하신 영상을 그리며 그는 펜을 들었다.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하면은

                                    흐리던 날씨도 밝아옵니다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하면

                                    차갑던 누리도 더워집니다

 

                                    …

(김상훈의 시 《수령님생각》중에서)

 

심장을 높뛰게 하고 뇌리를 진감하는 격동적인 서정은 김상훈에게 가슴벅찬 시적세계를 안겨주었으며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한 공민으로서, 백두산절세위인의 숨결과 넋을 시시각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으로서 매혹과 숭배의 격정을 터치게 하였다.

이것은 그의 격정만이 아니였다.

보람찬 로동의 희열을 함께 나누던 정든 공장사람들, 이 나라 모든 인민들의 심정이였으며 환희의 웨침이였다.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뵈옵고 그이에 대한 매혹과 신뢰로 가슴을 세차게 들먹이던 김상훈은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수령칭송의 노래를 부를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하기에 그는 1965년에 창작한 서정시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드리는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심장에 아로새긴 노래가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노래가 있어

                                    영원히 변함없는 한마음으로

                                    인민들은 수령님을 노래합니다

 

                                    …

 

                                    천만년이 천번을 거듭 흘러서

                                    들과 바다가 바뀌고

                                    모래알이 자라 큰 산이 될 때까지

                                    이 노래는 끝없이 울릴것입니다

                                    태양과 함께 영원할것입니다

 

… 어버이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 그날 김상훈은 안해와 함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상훈이 새 가정을 이룬것은 10여년전이였다. 야전병원에서 퇴원한 그가 조쏘출판사(당시)에 배치되여 잡지를 편집하는 부서에서 한창 사업하던 1953년 가을 어느날이였다.

창밖에서는 어둠이 어슬렁어슬렁 찾아들었지만 김상훈은 시간의 흐름을 잊고 편집사업에 몰두하였다.

온 신경이 원고의 글줄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호흡하던 그는 가볍게 문두드리는 소리도 감촉하지 못했다.

다시금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려서야 김상훈은 미심결에 눈길을 들었다.

반쯤 열려져있는 문밖에는 체소하고 영민하게 생긴 녀인이 서있었다. 출판사에서 여러번 보아 낯익은 얼굴이였다.

《동무가 어떻게? …》

녀인은 대답대신 주춤거리며 손에 든 원고부터 내밀었다.

그제서야 김상훈은 그가 원고편집때문에 왔다는것을 짐작했다.

이것이 그들의 첫 인연이였다.

그후 김상훈은 그 녀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였다. 그도 자기처럼 가슴속에 너무도 큰 상처를 안고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저도 모르는 아픔이 흉벽을 허비였다.

27살의 젊은 녀성인 류희정의 고향은 군사분계선너머로 보이는 경기도 파주군(당시)이였다.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 출판사에서 일하고있었다. 미군의 폭격에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후퇴의 혼잡속에서 큰딸만 데리고 북으로 들어온 그는 남쪽에 있는 친척에게 맡기고 온 막내딸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있었다.

남녘에 있는 자식들과 상봉할 그날만을 그려보는 두사람의 마음은 한줄기로 이어져 새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이렇게 결혼한 그들은 30여년간을 함께 살았다.

류희정은 결혼기념으로 자기 딸의 손목을 잡고 전등알 한알을 사왔다.

김상훈은 그것을 소중한 물건처럼 여겼다. 비록 집은 반토굴이였지만 가정을 밝은 빛으로 감싸안아주는 전등알은 장차 자기 가정의 창창한 앞날을 예언해주는것만 같았던것이다.

그는 즉시 전쟁시기부터 내내 쓰고 다니던 털모자를 전등밑에 놓았다.

그것이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랴 하는 심정에서였다.

그들의 가정은 행복하였다. 비록 가슴속에 아픈 상처를 안고있었지만 그 아픔이 한순간에 가셔질 그날을 위해 서로가 한마음한뜻이 되여 나라를 위한 일에 모든것을 다했다. …

《여보, 난 오늘 뵈온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심장에 간직하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그이를 받드는 전사로 살겠소.》

김상훈은 안해에게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류희정도 남편의 손을 꼭 잡으며 《저도 더 많은 부속품들을 깎아서 우리 수령님의 복구건설구상을 힘껏 받들겠어요.》라고 화답했다.

김상훈에게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사는 날과 달의 흐름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가 공장에 탄원하여온 첫해 마가을이였다. 때는 김장철이라 가정마다 김치담그기에 손이 드바쁜 시기였다.

김상훈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는 그의 가정에 많은 배추를 공급하였다.

어른베개통보다도 더 크고 실한 배추들을 받은 그들은 공장일을 끝낸 다음 지게에 배추통들을 차곡차곡 쌓고 날랐다.

그러나 그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였다. 전쟁시기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던 김상훈이나 녀성인 류희정의 힘에도 한계가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절반도 채 나르지 못하고 모두 토방에 털썩 앉았다.

그들이 다리쉼을 하고있는데 대문쪽에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작업반원들이였는데 모두들 등에 배추들을 한짐씩 지고 곧장 그의 집마당으로 들어서는것이였다.

《상훈선생! 벌써 기운이 진했나?》

나이지숙한 작업반장의 석쉼한 목소리였다.

《아, 우리가 날라주겠다는데 고집을 부리더니…》

인심후한 목소리들이 무겁던 집안공기를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퇴근길에 김상훈이 받은 배추들을 한짐씩 지고 왔던것이다.

후더운 인정세계앞에 그들부부는 목이 꽉 메여오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남조선에서는 도저히 바랄수도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하루일에 지친 그들이지만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나선것이였다.

다음날에는 이웃 아낙네들이 갓 이사온 평양집인 김상훈네의 김장담그기를 도와주었다.

별식이 생겨도 집대문을 두드리고 집안에 경사가 생겨도 손을 잡아끌군 하는것이 바로 동네사람들이였고 작업반사람들이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평양집이 있었으며 평양집은 그들의 다심어린 인정세계속에 아담하게 서있었다.

이웃들의 후더운 인심에 안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오히려 그들켠에서 나무라면서 질책하군 하였다.

《공부개나 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속통이 좁쌀같나? 심장이 있으면 저 용광로처럼 뜨거워야지!》

《원, 별소릴 다하십니다. 우리야 한가정이 아니나요!》

한가정! 남에서 살 때에는 언어적관념이나 한집안울타리안에서만 존재하던 단어였다. 하지만 북에서는 그것이 동네와 직장, 온 나라에 파급되여 실생활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시대어로 되고있었다.

생활은 김상훈으로 하여금 서로가 화목한 대가정을 이루고 진심으로 돕고 이끌어주는 공화국의 현실에서 아름다운 인간들이 사는 세상,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사회주의의 본태를 심장으로 절감하게 하였다.

하기에 김상훈은 락원기계공장에서 생산로동을 하면서 시초 《단야공의 노래》, 장편수기 《인민복수자들》(1, 2권), 시 《안해의 기대앞에서》 등 수십편의 시들과 작품들을 창작발표하여 사회주의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을 적극 고무추동하였다.

 

                                           …

 

                                           공기함마의 가쁜 숨결은

                                           한시각도 멎지 않았건만

                                           상기 밤중인줄 알았는데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

                                           완성공들의 성급한 재촉에

 

                                           …

 

                                           당이 가리키는 한길을 따라

                                           이렇게 싸우는 밤은 좋구나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신이 나누나

 

                                           가열로야 달아라

                                           함마야 소리쳐라

                                           신나게 한바탕 더 두드리자

                                           우렁우렁 이 기계가 굴러나가

                                           조합벌의 새싹이 파랗게 자라도록

(김상훈의 시 《이 함마소리 전야에 울리라!》중에서)

 

현실에서 매일 매 시각 받아안는 모든 체험들은 그에게 풍만한 창작적령감과 서정세계를 안겨주었다.

김상훈은 자기가 안긴 품에 대한 고마움이 커갈수록 보답의 마음을 더욱 굳혔다.

그는 보람찬 로동생활을 하는 속에서도 우리 나라 한시집과 민요집을 수집편찬하고 번역할 큰 계획을 세웠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지지하고 적극 떠밀어준것은 어머니조국이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희망과 소원을 깊이 헤아려 1962년초 그를 평양으로 소환하여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사업하도록 하여주었다.

앞날에 대한 희열을 안고 가족들과 함께 평양에 올라오는 그들을 기다린것은 보통강변에 새로 일떠선 아빠트였다.

서재까지 있는 새 집에는 가정생활에 필요한 살림도구와 가구들이 그쯘하게 차려져있었다.

이날 김상훈은 밤이 깊도록 한마디의 말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곁에 다가온 안해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전쟁때 상한 부상자리가 또 도지는게 아니세요?》

김상훈은 안해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난 행복한 사람이요.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이렇게 작가가 되였으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이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굽은 물기에 젖어 흐려져있었다.

김상훈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 안겨 작가로서 참된 삶을 마음껏 누려가게 된 자랑과 긍지로 가슴을 들먹이며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문학으로 고마운 사회주의조국을 받드는 길에 헌신할 일념으로 순간순간을 살아온 김상훈이였기에 그는 자기 육신의 아픔보다 창작을 두고 더 고민하고 안타까와 하였다.

어느해인가 한시들을 번역편집하던 김상훈은 그만 창작실에 쓰러졌다.

지나친 과로에 좌골신경통까지 겹쳐들어 운신을 할수 없는 몸이 되였던것이다. 일군들은 그를 평양의학대학병원(당시)으로 후송하였다.

비록 침상에 매인 몸이 되였지만 김상훈은 손에서 일을 놓을수 없었다.

일군들과 문단의 지우들, 의사와 간호원들이 만류했지만 김상훈은 그때마다 《난 문학을 떠나서는 못사는 사람이요. 받아안은 은정이 하늘같은데 내 살아생전에 고마운 내 조국의 은덕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할게 아니요.》라고 하면서 창작의 붓을 멈추지 않았다.

오직 축복받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와 행복감을 가슴에 안고 헌신의 일념으로 사는 불같은 사람이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병이 걱정되여 신경계통을 비롯한 여러가지 병치료에 효과가 좋은 종달온천이 있는 달천영예군인료양소에서 치료받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병을 완치하게 된 김상훈은 다시금 문단에 서게 되였으며 그후 자기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면서도 맡은 일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온 육신을 보답의 초불로 불태웠다.

안아주고 키워준 고마운 품이 있어 김상훈은 우리 나라 고전문학을 번역소개하는 사업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생의 말년까지 《우리 나라 한시이야기》, 시집 《한시선집》(1, 2), 시집 《풍요선집》, 시집 《력대시선집》, 시집 《가요집》(1, 2), 시집 《리규보작품집》(1, 2) 등을 번역편찬하여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나라의 고전문학연구사업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제 아비의 얼굴도 못 본채 어른이

                               되여버린 손자와

                             손자가 너무도 제 아비를 닮아

                               자꾸만 마음이

                             저릿해오는 늙은 할머니가

                             마당가에 함께 서서 철새를 보고있다

 

                             …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를 이루듯

                             한곬으로 모아야 할 만백성의 마음은

                             여전히 가시줄에 얽매여있어

 

                             혈육의 몸부림을 겹겹히 싸안고

                             할머니와 손자가 철새를 보고있다

(김상훈의 시 《철새》중에서)

 

김상훈의 생은 통일을 바라고 통일을 노래한 인생이였다고 할수 있다.

공화국북반부에서 땅의 주인이 되여 풍년로적가리를 하늘높이 쌓아놓고 농악소리를 울려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볼 때도 그렇고 황금이삭 물결치는 협동벌의 전야에 서있을 때도 언제나 고향을 잊지 못한 향토시인이였다.

북과 남의 온 겨레가 서로 얼싸안는 통일의 그날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 안겨 진정한 땅의 주인이 되여 허리가 늘씬하도록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는것이 그의 소원이기도 했다.

그러한 김상훈이였기에 1971년에는 어버이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통일의 구성으로 우러르며 수령님의 품에 안기고싶어하는 남조선농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념원을 노래한 서정시 《흙》을 창작하였다.

 

                           …

 

                           이른봄철이나 늦은가을날에

                           수령님께서 뜻밖에 마을에 들리시여

                           늙은이는 백발숙여 절을 하옵고

                           철부지 어린것은 손길에 매달리며

                           거리와 집집마다 자랑이 넘치고

 

                           온 산천이 눈부시게 밝아올

                           그 가슴 저리도록 황홀한 순간을

                           농토와 농군들이 함께 꿈꾸나이다

 

                           …

 

                           가없는 하늘같이 넓고 크시고

                           밝은 봄날같이 인자하시고

                           아무리 간고한 싸움속에서도

                           다함없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자애로운 어버이 김일성원수님

 

                           수령님의 품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남쪽땅의 한줌의 흙과

                           그속에 스며있는 저희들의 맹세를

                           저희들을 보시는듯

                           보시옵소서!

 

진실하고 소박한 정서적형상으로 김상훈은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따르는 남조선농민들과 자기의 사상감정을 깊이있게 반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고향은 비단 추억의 대상만이 아니였다. 조상의 무덤과 두고 온 혈육들과 자식들, 잊을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고향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이였으며 한생 안고 산 마음속상처였다. 한지맥으로 잇닿아 자동차길로 몇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그 길, 꿈속에서조차 발목이 시도록 걸어보던 그 고향길을 그는 수십여년동안 찾아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향은 분렬의 비극을 안고 몸부림치는 이 나라의 강토였으며 처자들에 대한 그리움은 자기의 혈육들을 찾고 부르며 통일, 통일을 목놓아부르는 겨레의 웨침이였다.

외세가 없는 고향땅, 서로가 얼싸안고 온 민족이 모여 통일잔치 벌릴 그날은 과연 언제일가?

어느해 일요일, 이날 열두살 난 맏아들 김종설은 집안의 구석들을 뒤지다가 당반우에 놓인 낡은 고리짝을 발견하였다.

동심으로부터 오는 호기심에 헤쳐보니 그속에는 뜻밖에도 이전에 전혀 본적이 없는 옷가지, 집식구들에게는 전혀 필요없는 새옷들이 차곡하니 들어있었다.

《아버지, 이건 무슨 옷들이나요?》

서재에서 책을 보던 김상훈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그었다.

《종설아, 이건 남쪽에 있는 네 형님들과 누나들의 옷이란다.》

아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까지 남조선에 자기의 이복형제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그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훈은 창가로 다가가 흐릿한 눈길로 멀리 남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두고 온 자식들의 얼굴이 그의 흉곽에 아프게 비껴들어왔다.

《아버지, 그럼 형님과 누나들은 거기서 뭘 하나요?》

아들의 물음앞에 김상훈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어린 자식들과 헤여진지도 이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소식 한장 나누어보지 못한 그들이였다.

살아나 있는지? … 살아있으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가슴을 저미며 눈앞에 얼른거리는 자식들의 얼굴들을 그려보는 그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리고있었다.

《종철, 종식, 종국, 경애, 경숙.》

행복넘친 이 집안이 터지도록 한구들 모여앉아 함께 웃을 그날은 과연 언제인지? …

북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를 바라보며 《아버지!-》 하고 목메여 웨칠 다섯 자식들의 눈물젖은 모습은 김상훈의 한생에 영원히 지우지 못한 상처였다.

《속가슴 타는것이 밤초불 그뿐이며 피울음 우는것이 산접동새 그뿐이더냐.》 하며 장밤 눈물을 흘리던 날들은 또 그 얼마였던가.

 

                                      벌써 열해가 지나갔다

                                      내가 손에 총을 잡고

                                      집을 나서던 그날 아침엔

                                      너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아빠 안녕히!》를 해보였지

 

                                      …

                                      마름집이나 큰집의

                                      멍텅구리같은 아이녀석들이

                                      혹 너를 아버지가 없다고 놀려주거든

                                      너는 고개를 더 번쩍 쳐들고

                                      북쪽하늘을 바라보아라

                                      …

(김상훈의 시 《아버지의 부탁》중에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통일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렇듯 그의 시는 통일을 노래했고 목이 쉬도록 통일을 불러왔다. 침략자 미제와 반통일분자들을 저주하면서도, 통일없이 지나는 섣달그믐날밤에 분렬의 아픔으로 피울음을 토하면서도…

그의 시는 사람들을 울리군 하였다.

고향을 남쪽에 둔 사람만이 아니라 이 나라에 생을 둔 모든 사람들의 가슴굽을 허비고 통일의 아침을 기원하며 눈물을 흘리게 한다.

워낙 인정이 많고 다감하며 유모아까지 풍부한 김상훈은 자기의 시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한감을 느끼며 시의 양상을 밝게 하려고 애를 쓰기까지 했다.

 

                                     새 빛이 터져나와

                                     하늘땅이 다시 열려

                                     산도 절로 물도 절로

                                     뭉게구름 기쁨이는

                                     삼천리 이 강산에

                                     통일의 날 오거들랑

 

                                     강강수월래로

                                     두레춤을 추어보자

                                     …

(김상훈의 시 《강강수월래》중에서)

김상훈은 이 시에서 조국통일의 념원을 밝은 웃음으로 펴보이려고 하였다.

통일시인 김상훈은 누구보다도 더 통일을 그리워하였다. 받아안는 혜택과 믿음이 커갈수록, 세월의 년륜속에 머리에 흰서리가 한오리두오리 늘어날 때마다 가슴 섬찟하게 느껴지는것은 민족분렬의 아픔이였다.

김상훈에게 있어서 고향은 육신의 한부분이였고 조국통일은 그의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가정의 비극을 북과 남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당하는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1987년 8월말 김상훈은 침상에서 마지막숨을 내쉬고있었다.

자기가 불치의 병을 앓고있다는것을 알면서도 이미 계획했던 고전시가작품들을 번역편집하는 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그였다.

《아버님! …》

눈물을 흘리는 맏아들의 눈굽을 닦아주며 김상훈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종설아, 통일이 되면 자식들을 데리고 이 애비의 고향에 가서 큰소리로 웨치거라. <내가 상산 김씨 김상훈의 아들이다!>라구 말이다. 그리구 네 형들과 누이들도 꼭 찾아보거라. …》

마지막숨을 거두면서도 통일된 조국과 사랑하는 고향땅, 남쪽에 있는 자식들을 그려본 작가 김상훈!

그는 자기의 전 생애를 훌륭한 시들로 빛나게 장식하였다.

김상훈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 드리는 송가들인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드리는 노래》(1965년), 《2월의 송가》(1975년) 등 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다년간의 현지체험에 기초하여 시초 《단야공의 노래》(1959년), 시《안해의 기대앞에서》(1960년) 등 현실주제의 시가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시창작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우리 인민의 최대의 민족적숙원인 조국통일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는 시초 《어머니에 대한 생각》(1980년), 시 《한마디의 말》(1987년) 등 수많은 통일주제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출판을 전제로 하지 않고 부피두터운 창작수첩에 써놓은 수백편에 달하는 통일주제의 시가작품들에서는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을 뜨겁게 노래하였다.

수천수만의 전사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생전이나 사후에나 변함없이 아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 김상훈이 불치의 병으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그의 장례를 기관장으로 잘해주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수년전에 떠나간 작가를 잊지 못하시여 1991년 4월에는 그가 창작한 시들을 묶어 시집 《흙》을 출판하도록 하여주시는 한량없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하나를 주시면 열백을 주고싶어하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비록 작가는 떠나갔어도 조국통일을 위해 바친 그의 공로와 한생토록 그가 부르고부른 통일의 노래들을 높이 평가하시여 1998년 4월에는 김상훈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하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생의 은인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이제는 자식들의 기억속에서마저 삭막해졌을 김상훈의 시, 그가 조국통일을 기원하며 창작한 작품들이 하나라도 빠질세라 진주알처럼 다 찾아내여 2015년 1월에는 또다시 그의 시집 《통일을 불러》를 출판하도록 각별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정녕 떨어져서는 한순간도 살수 없는 고마운 어머니의 품, 위대한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품이 있어 김상훈의 가정은 대를 이어가면서 세상의 만복을 다 누리는 행복한 가정으로 되였다.

나라에서는 둘째아들 김종석의 문학적재능을 귀중히 여겨 그를 김형직사범대학을 졸업시켜 아버지의 대를 굳건히 이어나가도록 하여주었다.

보살펴주고 내세워주는 은혜로운 품이 있어 김종석은 두편의 장편소설과 예술영화 《평양날파람》을 창작하여 오늘은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가로 자라날수 있었다.

자식들만이 아니라 손자, 손녀들도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에서 마음껏 배우고 자기의 재능을 꽃피웠으며 오늘은 나라의 훌륭한 역군으로 자라 강성국가건설의 전성기를 열어나가며 조국통일을 앞당겨오기 위한 애국투쟁의 대오에서 청춘의 지혜와 열정을 남김없이 발휘하고있다.

김상훈은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에 안기여 우리 주체조선의 문학사에 보람찬 생의 한페지를 남기고 온 나라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가로, 온 민족이 다 아는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3-13 01:28:5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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