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6. 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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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3-05 12:4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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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6. 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6. 작가 김상훈 - 한생 통일을 불러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5. 한생 통일을 불러
∙ 1919년 7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출생.
∙ 1943년 10월에 원산철도공장에서 로동.
∙ 1946년 현대일보사에서 활동.
∙ 1950년 7월 의용군으로 입대.
∙ 1962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활동.
∙ 1987년 8월 30일 사망.
∙ 조국통일상수상자.
《조선은 하나다!》
나의 말은 한평생
이 한마디뿐이다
…
이 말 웨치며 싸우리라!
불에도 뛰여들고 물에도 뛰여들고
적의 교수대에도 기꺼이 오르리라
내 통일의 원쑤들과 싸우다 죽으면
땅우에 흩어진 살점 하나하나
붉게 뿌려진 피방울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높이 웨칠것이다
《조선은 하나다!》라고
(김상훈의 시 《한마디 말》중에서)
항 거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인간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고향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이런 무서운 질책이 밤에도 날아오고 낮에도 날아오고 벽에서도 날아오고 천정에서도 날아오고 땅에서도 날아오른다.》(김상훈의 글중에서)
거대한 산발들이 병풍처럼 둘러막힌 산골농촌마을인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거멓게 썩어든 두터운 벼짚이영을 인 초가집들이 산기슭에 다닥다닥하니 붙은 골안에 이르니 농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괴물같이 큰 기와집이 눈앞에 막아나섰다.
넓다란 마당에 들어선 어린 김상훈은 겁기어린 눈동자로 옆에 서있는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동네적으로 비단을 걸치고 하얀 쌀밥을 먹는 집은 바로 이 집뿐이였다.
피죽도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해가는 동네사람들과는 하늘과 땅차이를 둔 이 지주집에서 자기에게 흰쌀밥과 고운 옷을 준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모자가 대문안에 들어서자 《허, 인제야 왔나?》하는 힐난의 목소리와 함께 큰아버지벌이 되는 김채환이 비단저고리를 걸치고 토방마루에 나섰다.
어머니는 죄스러운 자세로 황급히 허리를 조아리며 떠듬거렸다.
《저- 어, 정작 아이를 떼놓자고 생각하니…》
《물론 제 새끼와 떨어지자니 가슴이 아프겠지. 허나 임자네 집이야 벼룩이도 먹여살리기 힘든 형편이 아닌가. 저애를 우리 집안에 들여보내면 호강스럽게 자라고 또 우리 상산 김씨가문의 종가집 장손이 될텐데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데 있겠나.》
…
이렇게 되여 김상훈은 여섯살 나던 해인 1925년 친부모들과 헤여져 고향마을의 지주인 김채환의 양아들로 되였다.
그는 1919년 7월 거창군 가조면에서 아버지 김채완, 어머니 권태성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집은 얼마 되지 않는 토지를 자작으로 경작하였는데 소가 없고 로력이 부족해서 해마다 생활이 쪼들리군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 한해 밭에서 살며 피땀을 묻어왔건만 언제 한번 배부른 날이 없었다.
김상훈은 태여나서부터 무명낳이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눈에 익혀왔으며 걸음마를 떼면서부터는 어머니의 치마폭을 잡고 이삭줏기에 따라다니군 하였다.
갈수록 설익은 조롱박처럼 초들초들 말라들어가는 집안살림에 지칠대로 지친 아버지는 노상 술독에 빠져 살았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래도 조선독립이라는 기대를 안고 아버지는 얼마 안되는 가산을 팔아 독립군들의 뒤바라지를 했었다.
그런데 독립군은 독립은커녕 왜놈들과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초야의 무주고혼으로 되거나 산산이 흩어지고말았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거의 타락한 인생길을 걸었다. 사는것을 귀찮게 여기는데 습관이 되였으며 걸핏하면 화를 내군 하였다.
쪼들리며 말라들어가는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어머니는 상훈을 위해서는 모든것을 다 바쳐왔다.
그렇게 온갖 정을 깡그리 쏟아가며 키워가는 아들인데 갑자기 종가집에서 양자로 삼겠다고 하니 애틋하고 정결한 모성애는 무참히 란도질당하는듯 했다.
후날 알게 된 일이지만 김채환도 김상훈과 마찬가지로 자식없는 큰집에 양아들로 입양한 몸이였다. 종손이 되여 대를 잇기는 하였으나 정작 자기 대에 와서 자식을 보지 못해 마음고생을 많이 한 그였다.
김상훈은 양자로 큰집에 들어온 해부터 시작하여 6년간을 고향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자 양아버지는 그에게 한문공부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원래부터 남다른 영민성과 감수성을 지닌 김상훈은 훈장이 배워주는 내용을 인차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이군 하였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벌써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뗐다.
하지만 김상훈의 마음은 도저히 밝아지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소리없이 닥쳐온 부귀를 누리는 어린 그의 마음에서는 항상 친부모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큰집에 옮겨온지 얼마후 친아버지인 김채완은 그만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박복한 운명을 타고난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때없이 담너머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있는 람루한 녀인, 그가 다름아닌 자기의 친어머니 권태성이라는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무엇때문에 양가집과 생가집, 양부모와 친부모들의 차이가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양가집 주인들은 비단옷을 입고 머슴을 부리며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데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들은 가난을 명줄로 안고 태여난것만 같았다.
자기 주위에서 배회하는 불공평한 인간세상의 비밀을 제손으로 해득하고싶은 마음은 가야산의 봉우리처럼 높아만 갔다.
그는 진정한 공부를 하고싶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서당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며 불합리한 이 사회를 투시하는 눈을 가지고싶었다.
《저도 중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싶습니다. 수락해주십시오.》
며칠동안을 벼르고 벼르다가 큰마음 먹고 꺼낸 말이였다.
《남들이 신학문, 신학문 하니까 너도 그게 그렇게 좋아보이느냐? 그건 다 부질없는짓이야. 집에 있으면 먹고 입고 사는것이 하나 걱정없는데 뭣때문에 객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고생을 사서 한단 말이냐. 그런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말아.》
대번에 그의 요구를 묵살해버린 김채환은 신학문은 진짜 공부가 아니며 한문을 익혀야 옳은 공부로 된다고 력설하였다.
김상훈은 자기의 요구가 수락될 때까지 일체 식음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덜된 놈의 자식, 그래 이 애비의 요구가 그렇게도 마뜩지 않느냐?》
김채환은 노발대발하며 김상훈의 처사를 꾸짖었다.
그러나 김상훈은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두문불출하며 절식하는 그의 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상훈의 방에 김채환이 들어왔다.
《네 소원이 정 그렇다니 학교에는 보내주겠다.》
김상훈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그가 내놓은 조건이란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장가를 가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문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그의 속심은 장가를 보내서 종가집안의 대를 잇게 할 자식을 보자는데 있었다.
그 조건은 김상훈에게 있어서 너무도 아름찬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벌써 자기를 울타리처럼 둘러막은 높은 산발너머로 달리고있었다. 이렇게 되여 그는 16살이 되는 해인 1935년에 북상면에서 사는 녀성과 결혼을 하게 되였다.
김상훈은 1936년초에 드디여 자기를 둘러막고있던 울타리에서 해방되였다.
김상훈은 그해 4월 서울에 있는 어느 한 사립중등학교 시험을 치르었다.
시험장에서 그는 또다시 나라잃은 민족의 수치를 절감하게 되였다. 모든 시험은 조선말이 아니라 일본어로 치르게 된것이였다.
김상훈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산골에서 한자공부만을 해온 그에게 일본어란 너무도 생소한것이 아닐수 없었다. 시험은 치나마나 락선이였으며 그렇게 되면 또 집게같은 양아버지의 손아귀로 다시 들어가야만 했다.
바로 오늘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한 그였다. 시험지만을 들여다보며 길게 한숨을 토해내던 그는 피뜩 떠오르는 생각에 펜을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드디여 그의 펜은 시험지우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펜을 떼였을 때 시험지우에는 한시형식인 4언시가 적혀있었다.
그런데 결김에 써놓은 한시가 그의 입학시험지에 합격도장을 새기게 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교 교장은 김상훈의 4언시를 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나이에 4언시로 재치있고 의미가 깊은 시를 쓴것을 보면 분명 천성적인 재능을 타고난것이 틀림없소. 난 이 수험생을 입학시키면 앞으로 훌륭한 학생이 되리라고 믿소.》
이렇게 되여 김상훈은 사립중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는 5년간의 재학기간에 력사, 문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의 학문적시야만 트인것이 아니라 세계관에서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삼천리강토는 바로 제땅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남의 땅이였으며 조선사람은 제 말과 글, 이름마저 빼앗기고 살아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짊어진 너무도 비참한 민족이였다.
김상훈은 1944년에 쓴 시 《종다리》에서 사랑하는 친어머니와 고향땅에서 비참한 삶을 연명해나가는 농민들의 고달픔, 봄은 왔건만 제땅이 없어 봄을 맞지 못하는 우리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종다리의 울음소리에 비유하여 노래하였다.
배움의 나날과 함께 김상훈의 두눈은 틔워져 나라를 빼앗긴 설음은 날이 갈수록 커갔으며 그에 대한 항거의식도 대나무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쌓이고쌓였던 울분은 그가 중등학교 3학년때에 처음으로 폭발하였다.
학교측에서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조선어과목을 전면적으로 페지하는 조치를 취했던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상훈은 동창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조직할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흥분으로 인한 항거로밖엔 달리 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걸음이라 총칼을 휘두르는 일제경찰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당면하게는 학교에 있는 악질친일교원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투쟁은 처음부터 흐지부지되고말았다. 조직자인 김상훈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여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고문과 악행을 당해야 하는 류치장생활은 김상훈의 마음속에 자란 반일의식과 계급의식을 한계단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온 나라가 감옥으로 전변되여 모든 조선사람들이 죄인취급을 당해야 하는 현실, 수난당한 민족의 아픔이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식민지민족의 아들로 태여난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식민지민족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제 나라를 되찾지 못하는것은 최대의 죄악이다!
일제에 대한 항거의식은 그의 모든 세포와 피줄마다에 그대로 흘러들었으며 반일성전에 나설 의지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10일만에 석방되여 나왔으나 학교에서는 그에게 무기정학을 주었다.
그러나 반년후에는 해제되여 김상훈은 마침내 중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1940년 4월 서울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후 그의 반일정신은 더욱 굳어져갔으며 항거의 목소리로 울려나왔다.
당시 우리 인민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더욱 악랄해져 학생들은 문학공부도 제대로 할수 없었고 군사교련과 검도 등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야 했다.
김상훈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맑스주의서적들을 적지 않게 탐독하게 되였으며 그 과정에 투쟁의 길에 나설 결심을 품게 되였다.
어느해 그는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부모처자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헤여진 양부모들과 안해, 자식들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걸음은 구름을 탄듯 했다.
《아버지!-》 하며 달려와 안길 귀여운 자식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양가집에 이른 그는 그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여느때는 두팔을 벌리며 반기는 양부모들처럼 항상 열려있던 대문이 오늘은 입을 꾹 다문채 차거운 랭기를 풍기고있었다.
대문에 붙인 《공산주의자는 들어오지 말라!》라는 표어가 서슬푸르게 쏘아보고있었다.
방금전까지 흥분되였던 김상훈의 가슴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
집뜰안에서는 김채환의 분기어린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 가난뱅이를 집에 데려와 호의호식시켜주었는데 뭐 이젠 이 애비를 반대하는 빨갱이가 돼서 나타나?! … 오늘부터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나한테는 너같은 불효한 자식은 필요없다, 없어.》
김씨의 통곡소리도 들렸다. 제 자식처럼 품에 안고 키워온 상훈의 행동에 대한 장탄식이였다.
그렇듯 애틋한 정을 부어온 김상훈이 자기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어긋난 모습으로 나타난것이였다.
아버지를 보겠다고 모지름쓰는 맏아들의 손목을 꼭 잡은 안해의 울음소리도 귀청을 찌르고있었다.
한참후에 대문이 열리더니 눈물범벅이 된 양어머니 김씨가 매정스러운 눈초리로 김상훈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아들을 위해 남모르는 정을 부어주던 그 따스한 인정미와 애정은 간 곳 없고 얼음장처럼 차거운 표정이였다.
《빨갱이자식놈의것은 헌털뱅이도 다 보기 싫다!》
그러면서 그는 김상훈이 어릴 때부터 입던 옷가지들을 마구 내던졌다.
《더는 보고싶지 않으니 이걸 가지고 썩 사라지거라.》
식칼로 두부모를 자르듯 차거운 말을 남긴 김씨는 대문을 쾅하니 닫아버렸다.
김상훈은 발치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양가집에서 살아온 나날들이 화폭처럼 안겨들었다. 그와 함께 담너머에서 자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짓던 녀인, 친어머니의 처량한 모습도 비껴들었다.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줏는 그의 눈가에는 비통함이 어려있었다.
갑자기 손에 딱딱한것들이 잡혔다.
의문과 호기심이 엇갈린 심정으로 그는 그것들을 헤쳐보았다.
어떤 옷가지사이에는 엿가락들이 들어있었고 또 다른 옷가지에는 종이로 꽁꽁 싼 돈도 있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며 모질게 이 아들을 욕질해야 하는 심정, 지금껏 키워온 자식을 한순간에 내버려야 하는 양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허나 무엇때문에 이 아들이 걷는 길을 리해하지 못하는가.
그래 한사람의 부귀와 안락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고 나의 친부모들과 같이 한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의 멍에를 벗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세우려고 일제에게 항거한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김상훈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돌렸다.
잘못했다는 단 한마디의 말로 사죄하고 다시 대문에 들어서면 이전의 생활을 되찾을수 있는 그였다.
하지만 그의 눈가에는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어려왔고 불합리한 이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은 세차게 굽이치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1947년 5월에 쓴 시 《어머니》에서 그날의 자기 심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
천사람이 무어라고 해도
제가 걷는 길은 바릅니다
과일밭에 돌팔매를 던지든 제일망정
젖가슴에서 받은 봄볕같이 따스한 사랑을
인민의 가슴속에 골고루 전해주는
그런 동무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어머니들이 흙속에 들어가시고
입술과 더운 가슴이 모두 없어지면
흙을 움켜쥐고 어머니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의 흙을 사랑하는것이
어머니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식민지나라들에 대한 수탈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인민들은 극도의 기아와 빈궁속에 허덕이였으며 청년들에게는 징병령이 내리고 학생들에게는 《학도병제》가 실시되여 수많은 사람들이 징용과 보국대로 끌려나갔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하고있던 김상훈에게도 《학도병령장》이 떨어졌다.
그러나 침략자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수 없었던 그는 날마다 찾아와 성화를 먹이며 위협해나서는 경찰들의 눈길을 피해 경기도와 강원도일대로 피신하여 다녔다.
하지만 쌍심지를 켜고 미쳐날뛰는 일본경찰들의 마수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는 학도병기피자라는 죄아닌 죄로 하여 2주일동안이나 각종 기합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1943년 10월 김상훈은 《징용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몸으로 원산철도공장에 끌려가 선반공, 주물공으로 일했다.
일은 힘들고 고되였지만 김상훈은 로동자들에게서 강의한 의지와 기질, 투지를 배웠다.
그는 로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과정에 백두산에서 강도 일제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안기시는 불세출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과 그이께서 이끄시는 항일빨찌산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흠모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안게 되였다.
그러던 1944년 여름 전문학교동창생이 그를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들은 너무도 반가워 서로 마주잡은 손을 놓을줄 몰랐다.
이날 동창생은 김상훈에게 일제를 반대하는 비밀결사조직에 가입하고싶은 생각이 없는가고 은근히 물었다.
김상훈은 그의 요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병을 구실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이라는 반일지하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에는 징병, 학도병, 징용을 기피하여 숨어다니던 사람들이 망라되였다.
모두가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치솟는 격분을 안고 그놈들과 결사의 항전을 벌릴 큰뜻을 품고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옳은 로선과 주장이 없었다. 그들은 경기도와 강원도사이에 있는 백운산에 별동대까지 조직하여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었지만 적들과 싸워본 경험도 없었으며 가지고있는 무장장비란 고작해서 낡은 보총과 화승총 몇자루, 참대창이 전부였다. 오직 욕망과 의기만이 충만된 조직이였다.
조선민족해방협동단에서는 자기들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옳바른 투쟁로선과 방도를 찾기 위해 모색하다가 마침내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후날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들이 파견한 대표는 조국이 해방되는 그날까지 조선인민혁명군과 련락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별동대는 변절자의 밀고로 비밀이 탄로되여 일제군경들의 《토벌》로 완전히 파괴되였으며 대원들은 적과의 싸움에서 희생되거나 피신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상훈은 조선민족해방협동단과 별동대사이에 련락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철도공장에서 일을 하고있는데 몇명의 사복쟁이들이 나타났다.
《네가 로스께인가?》
워낙 키가 남보다 크고 코날선이 뚜렷하며 두눈이 억실억실하게 생긴 미남형인 김상훈을 별동대에서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
아마 변절자가 김상훈의 이름을 모르고있었던 모양이였다.
그때까지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였음을 모르고있던 김상훈은 사복쟁이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이상한것을 감촉하며 마뜩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말끝을 맺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네놈이나 말버릇이 꽤 고약하다.》
이렇게 되여 김상훈은 경찰에 체포되여 경기도 경찰부에서 한달동안 고문과 심문을 받으며 심한 고초를 당하다가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으로 수감되였다.
그때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의 핵심성원들을 비롯하여 거의 백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감옥에 미결수로 갇히게 되였다.
김상훈은 비통한 마음으로 동가슴을 두드렸다. 집안에 덤벼든 파렴치한 날강도에게 매도 안겨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놈들의 사슬에 얽매였으니 이 나라 사나이로서 어찌 하늘을 쳐다볼수 있으랴.
주먹으로 감방바닥을 내리치고 감방이 떠나갈듯 울분을 토한들 이 나라 하늘에 해빛이 비쳐들소냐, 가슴을 긁어내리는 한밤중의 소쩍새 울음소리는 도탄에 빠진 민족의 신음소리요, 교형리들의 저 채찍소리는 고향사람들의 등가죽 벗기는 소리였다.
아서라! 감방벽을 긁으며 하늘을 향해 빌지 말어라, 빈다한들 드리운 먹구름 가셔내고 태양이 이 땅에 비쳐들랴.
가슴속에 갈마드는 이런 생각에 잠겨 김상훈은 절망과 한탄으로 옥중의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태양은 마침내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며 떠올랐다. 어둠을 가셔내고 두터운 얼음벽을 녹이며 이 나라의 하늘가에 찬연히 솟아올랐다.
그 태양은 반만년의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그 빛발은 산간벽지에도, 번화한 도회지에도, 차디찬 감방안에도 흘러들어 예속의 철쇄를 녹여버리였다.
그 휘황한 해발은 삼천리강토우에 마침내 조국해방이라는 크나큰 격정과 환희의 새 세계를 펼쳐놓은것이였다.
해방! 수십년세월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갈망하던 날인가. 꿈속에서도 그려보고 가난의 쪽박으로 피눈물을 떠마시면서도 바라고 기원한 이날이여서 더없이 귀중하고 더없이 소중한 8월 15일이였다.
통일을 위하여
…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조국을 사랑하는 한가지 길밖에
인민을 위한 인민의 나라를 세우는것밖에
나는 이래서 시를 쓴다 그리고 가장 자랑스럽다
(김상훈의 시 《나의 길》중에서)
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온 김상훈은 이듬해초 어느날 서울 남산밑에 있는 어느 한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서병곤군!》
서병곤은 예고도 없이 뛰여든 그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아니… 아, 이게 상훈군이 아닌가?!》
두 친구는 서로 손을 부여잡고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 시인이 갑자기 무슨 일로 나타났나?》
서병곤은 더운물을 부어주며 물었다.
김상훈은 흥분을 늦추지 못하며 품속에서 《서울신문》을 꺼내놓았다.
《나도 봤네. 우리 민족의 령수, 절세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에 대해 쓴 자네의 이 기사를 읽었단 말이네.》
그제서야 서병곤은 친구의 얼굴이 왜 이처럼 상기되였는가를 짐작했다.
《병곤군! 지금 임자네들이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해방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영상을 모시고 쓴 기사 <우리의 영웅 김일성장군>의 열풍으로 온 서울장안이 환희로 들끓고있네. 우리 전체 조선민족이 오매에도 그리고 흠모하던 위대한 태양의 존귀하신 모습을 처음으로 뵈옵게 된 우리들이 아닌가 말일세.》
그러면서 그는 가슴속에 넘쳐나는 감격과 희열을 억누르며 서병곤의 두어깨를 부여잡았다.
《병곤군, 정말 부럽네. 임자는 우리 남쪽에서 제일먼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는 영광을 지니고 그이에 대한 기사를 처음으로 쓴 행운아일세.》
서병곤은 정색한 기색을 지으며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과찬하지 말라구. 솔직히 말해서 난 그 기사를 쓰고 자신을 얼마나 질책했는지 모르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해방의 은인, 조선민족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청년장군의 위인상을 너무도 짧은 기사로 썼으니…》
《병곤군, 나에게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던 일을 이야기해줄수 없겠나?》
김상훈의 절절한 눈빛에서 그의 심정을 읽으며 서병곤은 감격스러운 날들을 돌이켜보았다.
《난, 천출명장 김일성장군님을 무한히 흠모하며 그이께로 달리는 우리 남녘의 인민들에게 그이의 위인적인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는것이 기자로서의 직분을 다하는것이라고 생각하고 북행길을 단행하였네.》
이렇게 말꼭지를 뗀 서병곤은 자기들이 1945년 12월 28일 새벽녘에 38°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서던 때부터 시작하여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소감에 대하여 터놓기 시작하였다.
평양행 기차의 앞머리에 정중히 모셔진 김일성장군님의 초상화에 대하여, 새 조국건설의 열정으로 들끓는 북의 전야들에 대하여, 민주건설의 노래를 부르며 씩씩하게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과 사람들의 얼굴들마다에 넘쳐나는 행복과 희망으로 밝은 웃음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정말 꿈같은 세상이였네. 이 땅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현실이였지. 공장담벽과 큰 건물들에 붙어있는 <조선민족의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 만세!>, <우리의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라!>는 구호들을 보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금시 맑아지는것만 같았네.
사실 정치적식견이 너무도 어린 우리였지만 하루동안에 목격한 북의 현실을 통해서 우린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베푸시는 현명한 정사에 대해서 알수 있었으며 우리 조선인민이 나아갈 길이 어느 길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수 있었지.》
《그래, 그이께서는 우리 조선이 나아갈 앞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였나?》
김상훈은 여직껏 자기가 묻고싶었던것을 물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해방된 우리 인민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기 위하여서는 민주주의적인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을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광범한 애국적민주력량을 묶어세워 민주주의적인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네.》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
너무도 현명하고 심오한 가르치심에 김상훈은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짐을 어쩔수 없었다.
바로 이 길이였구나!
김상훈은 암흑속에서 헤매다가 밝은 해빛을 본듯 앞이 환히 트이고 그이의 현명한 령도를 따른다면 무슨 일이든지 거침없이 해낼것만 같았다.
뜨거운 격정과 환희속에 흥분을 금치 못해하는 김상훈에게 서병곤은 정히 포개인 털외투를 들고 다가섰다.
《상훈군, 이 외투는 바로 그이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네!》
김상훈은 감동을 금치 못해하며 털외투와 서병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가 떠나는 날 그이께서는 이 털외투와 털신을 보내주시였네. 추운 이 겨울에 외투도 변변히 입지 못한 우리들이 걱정되시여…》
그는 뜨거운것이 목에 꽉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언제면 나도 자애로운 그 품에 안길수 있을가. 아, 못견디게 그리운 김일성장군님의 품!)
김상훈은 보물을 받아안듯 그 외투를 정히 받아 자기의 품에 꼭 껴안았다.
절세의 위인의 뜨거운 체온이 자기의 온몸으로 흘러드는것만 같았다.
심장은 높뛰였고 가슴은 격정의 파도로 설레여 시적흥분과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저도 모르게 즉흥시가 흘러나왔다.
비탄의 피울음 울며
절망의 거리를 헤매던 우리
장군님 밝혀준 민족의 진로따라
어깨겯고 나아가자 힘차게 앞으로!
이것은 결코 김상훈 혼자만이 아닌 남녘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였다.
이날 그들은 두손을 꼭 부여잡고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밝혀주신 통일애국의 길에서 문필가로서의 본분을 다해나갈 굳은 결의를 다졌다.
이것은 김상훈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운명의 선택이였다.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 바로 여기에 민족의 운명은 물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길이 있다는것을 그는 확신한것이였다.
압제의 사슬이 거미줄처럼 칭칭 감겨도는 남조선사회에서 자기의 신념을 고수하고 지켜싸운다는것은 피와 목숨을 요구하는 혈전의 나날들이였다.
1946년 1월 학도병동맹사건이 일어났다.
학도병동맹은 일제의 《학도병제》실시로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청년학생들이 조직한 진보적인 단체였다.
여기에 망라된 성원들의 대다수가 애국적경향을 가진 젊은 지식인들이고 그들의 정치적영향력이 강한것으로 하여 동맹은 당시 주요정치세력의 하나로 지목되였다.
김상훈도 이 조직에 가입하여 서울 삼청동에 있는 본부와 문화회관에 자주 다니면서 이들과 마주앉아 시국을 론의하고 앞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 《전위시인집》을 공동으로 발간하여 전위시인으로 이름떨친 유진오, 김상훈, 박산운 등은 원래 학도병출신들이 아니였다.
다만 조선과 일본의 전문학교, 대학들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일본침략군대의 총알받이로 끌려나갔던 학도병출신 학우들과 동창생들의 연줄로 학도병동맹에 발을 들여놓았던것이다.
학도병동맹안에서 진보적인 청년학생들과의 접촉은 전위시인들의 창작활동에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특히 일본군대의 삼엄한 철조망안에 갇혀있던 자기들에게 재생의 서광을 안겨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며 반일결사전을 각오해나섰던 반일학도병무장대 성원들이 전위시인들에게 준 영향은 컸다.
비록 몸은 남녘땅에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어버이수령님의 품을 그리며 열정의 시, 투쟁의 노래를 구가한 전위시인들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그러나 악독한 일제식민지통치기반에서 해방된 기쁨을 안고 새 조국건설에 자신들의 지혜와 열정을 남김없이 바치리라던 김상훈을 비롯한 학도병동맹 성원들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남조선의 진보적인 단체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도병동맹사건을 조작하였던것이다.
1946년 1월 18일 미제의 사촉을 받은 반탁전국학생련맹의 폭력배들은 인민당과 서울시인민위원회청사 등을 습격하여 학도병동맹 성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렸으며 이 과정에 량측에서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은 학도병동맹이 총기류를 소지하고 먼저 불집을 일으켰다는 무근거한 사실을 날조하여 19일 새벽 삼청동에 있는 학도병동맹본부를 습격하였으며 동맹성원 3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로 하여 온 서울시내는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에 의하여 해방된 조국땅에서 무참히 살해된 3명의 렬사들과 영결하는 장례식장은 야수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와 울분으로 끓어번졌다.
이날 그들의 령전앞에서 김상훈은 피눈물을 삼키며 추모시 《눈물로 쓰는 시》를 랑송하였다.
…
함께 이 땅의 일군이 되자고
손과 손 맞잡고 맹세하드니만
머리 부서지고 가슴과 배가 찢어지고
의좋은 삼형제처럼 비좁게 맞대고 누웠느냐
누구의 고운 맘인지 가느다란 초불만 파달거린다
우리는 천백번 옳아도 죽고 끌려가고
바른말을 극성으로 보답하는자
의기충천하야 나라를 다스린다
아아, 앞서간 세 동무야 서러울건 없다
또 하나의 쇠사슬이 끊어질 때까지
네 이름을 부르며 따라가는
무수한 동무가 있다
동지들의 영웅적희생은 김상훈의 투쟁열의를 더욱 돋구어주었다.
그들의 령전앞에 부끄럽지 않게 싸워 그들이 바라던 념원을 기어이 이룩할 일념을 안고 그는 학도병동맹 성원들과 함께 미제와 반동경찰들의 만행을 반대하여 시위투쟁을 벌렸으며 항의성명도 발표하였다.
그러나 파쑈적인 폭거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미제의 마수에 의해 백주에 애국인사들이 거리에 피흘리며 쓰러졌고 수많은 무고한 인민들이 감옥으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민족을 또다시 피의 참화속에 몰아넣는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에 대한 항거로 김상훈은 전위시인들과 함께 1946년에 출판한 《전위시인집》에 시 5편(《말》, 《전원애화》, 《장렬》, 《기폭》, 《바람》)을 실었다.
…
황량하다 천한 촌백성이 사는 이 마을엔
어미가 자식을 헐벗겨 떨리고
삽살개 사람을 물어 흔들고
금전과 바뀌여진 딸자식을 잊으랴 애썼다
…
(시 《전원애화》중에서)
김상훈은 해방후 외세에 의하여 갈라진 민족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자기의 견해와 의지를 밝힌 시들을 창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전위시인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일하던 현대일보사가 미제의 탄압으로 또다시 페간되자 시인으로서 창작사업에 힘을 기울이면서 조선문화단체총련합회(문련) 서기국에서 사업하였다.
문련서기국은 남조선의 문학예술에 대한 창작지도, 련락, 문건작성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미제와 리승만역적은 진보적경향이 강한 문련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다가 마침내 1949년 11월에는 문련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상훈은 놈들에게 체포되여 룡산경찰서에 구금되게 되였다.
교형리들은 갖은 고문을 들이대면서 그의 통일의지를 꺾고 애국자들에 대한 단서를 뽑아내려고 미쳐날뛰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몇달동안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던 그는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되였다.
양아버지 김채환이 뒤공작을 한 대가였던것이다.
그날 감옥문을 나서면서 김상훈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허, 반공분자가 련공분자를 구원해주었군! …》
그것은 어제날의 친일주구로부터 친미주구로 전락된 김채환에 대한 개탄이였다.
김상훈은 감옥문을 나서면서 자기의 심정을 시 《옥문》에 담았다.
옥문을 나섰으나 기쁘지 않소이다
아이는 울먹울먹 나를 반기지만
옥에서 다른 옥으로 전옥온듯 하오이다
…
양놈에게 매여사는 칼부림만 흔한 세상
나무 한그루도 마음놓고 못 서있는
이 땅 그 어디가 감옥이 아니리까
문이라고 생긴 문은 안팎이 있다지만
이 땅의 옥문들은 안팎이 없소이다
얽매인 이 발자욱을 그 어디로 옮기리까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과 그에 기생하는 역적무리들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김상훈은 예술의 무기를 틀어쥐고 불합리한 남조선의 현실을 비판하고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섰다.
전위시인의 한사람이며 전후복구건설시기 가사 《복구건설의 노래》를 창작하여 우리 인민들과 친숙해진 시인 류종대는 1947년 3월 《남조선민주투사들에게 드리는 시집》이라는 부제아래 발간된 김상훈의 시집 《대렬》의 후기에 이렇게 썼다.
《… 아직 창백하고 병약했지만 약을 먹기보다, 부모에게 달려가기보다 상훈은 새 조선의 요구앞에 예술을 들고 거리로 뛰여나갔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조선청년이면 다 그러하듯이 위대한 력사적현실앞에 새로운 각오가 불타올랐다. …》
약을 먹기보다 예술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간 사람! …
미제가 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김상훈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진 흥분으로 가슴을 들먹이던 김상훈은 지체없이 손에 총을 틀어잡고 의용군에 입대하였다.
김상훈은 자기의 군복입은 모습을 력사라는 거울앞에 비쳐보았다.
동족의 피로 물든 군복을 입고 손에 파쑈의 총칼을 든자들과 지금껏 맨손으로 싸워온 그에게 있어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해방전에는 누런 군복을 입고 총칼로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죽여 이 땅을 하나의 피바다에 잠그었던 일제에게 항거하여 학도병을 거부했고 해방후에는 《해방자》의 탈을 쓰고 총을 휘두르며 남조선의 수많은 애국자들과 인민들을 살륙한 미제, 그자들의 앞잡이가 되여 오늘날에는 동족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에 나선 역적무리들을 반대하여 펜을 휘두르고 항거의 주먹을 내흔들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 그가 입은 군복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였다.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동족의 머리우에 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온 미제와 리승만역적을 반대하고 이 땅우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인민의 새세상, 조선민족의 영원한 삶의 터전을 수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군복, 민족의 운명을 걸머진 군복이였다.
《아빠, 우리도 같이 가면 안되나?》
《아버지,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나요?》
올망졸망한 다섯 자식들이 그의 품에 와락 매달렸다.
김상훈은 아들과 딸들의 이름을 차례로 하나하나 불렀다.
《애들아, 아버지가 미국놈들을 모조리 족치면 우리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까지…》
목구멍이 꽉 메여와 그는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기약할수 없는 길이였다. 하지만 자식들을 위해서, 이 나라의 수천만의 생명들을 위해서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김상훈이였다.
의용군에 입대한 그는 싸우는 전선으로 포탄과 탄약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이 나날 그는 피를 흘리며 귀중한 조국의 촌토를 목숨으로 사수하는 전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어이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할 결사의 의지를 굳혀갔다.
…
정의는 반드시 이기는 법
장군님 이끄시는 승리의 길에
간악한 원쑤놈들 무찌른 날에
영광의 전승가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밤과 낮이 없이
아둔한 목청을 가다듬고있다
나의 총구는 오직 원쑤를 향하여
나의 노래도 오직 원쑤를 향하여
불같은 증오로 달려나간다
아, 타오르는 불길이 되여!
(김상훈의 시 《나의 노래여 불길이 되라》중에서)
포연탄우를 헤치며 전시수송을 보장하던 김상훈은 1950년 가을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에 입원하였다.
침상에 누워 매일 매 시각 싸우는 전선의 전우들을 그리는 그의 가슴은 터질것만 같았다. 총탄이 없으면 보병삽을 틀어잡고 육박전으로 조국의 고지를 사수하고 수류탄이 떨어지면 가슴으로 적의 화점을 막아 부대의 진격로를 열어나가던 귀중한 전우들이 그리워졌다.
그러한 그였기에 그는 채 완쾌되지 않은 몸이지만 우리 조국이 가장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후방병원으로가 아니라 빨찌산부대에 소속되여 원쑤격멸의 성전으로 달려나갔다.
빨찌산부대의 정찰분대에서 싸우던 김상훈은 곧 정치부에 소환되여 문화과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전투소보로 대원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으며 그들의 영웅적위훈을 널리 소개선전하였다.
김상훈은 이 나날 《배낭의 노래》, 《봄비》, 《나의 노래여 불길이 되라》, 《소녀빨찌산》, 《습격조의 노래》, 《훈장》 등 수많은 시를 써서 원쑤와의 판가리싸움에 떨쳐나선 용사들과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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