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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5. 작가 한상운 - 그가 남긴 생의 자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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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2-26 18:1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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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5. 작가 한상운 - 그가 남긴 생의 자욱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5. 작가 한상운 -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 1921년 6월 24일 개성시 북안동(당시)에서 출생.

∙ 1943년 한성일보사 기자로 활동.

∙ 1946년 민주조선사 편집국 부국장으로 사업.

∙ 1947년 《로동자신문》(당시) 부주필로 사업.

∙ 1952년 국립영화촬영소(당시) 작가로 활동.

∙ 1956년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

∙ 1992년 7월 24일 사망.

 

세월은 인정많은 나그네가 아니다.

그 무정한 시간은 서사이래 인류가 남긴 모든 흔적을 망각이라는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버리며 흘러왔고 또 흘러갈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무소불위한 《신》도 한가지만은 지워버릴수 없으니 그것은 인민의 심장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 갈피에는 조국의 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유명무명의 참된 인간들이 남긴 삶의 발자국들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영화문학작가 한상운이 열심히, 진지하게 찍어간 생의 자욱도 그중의 하나이다.

 


 

생의 메아리

 

 한상운의 색바랜 창작수첩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믿음에는 보답이 따라야 한다. 순간의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보답이… 열백번 쓰러진대도 다시 일어나 그 믿음에 보답하리.》

그의 경우 보답이라는 말은 평범한 인간들사이에 서로 신세를 지고 갚는것과 같은 범상한 세계가 아니였다.

인생의 불모지인 남조선에서 언론활동은 고사하고 생명까지도 위협당하던 자기를 한품에 안아주시고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관록있는 작가로 키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하늘같은 사랑, 평범한 작가의 번민을 두고 그처럼 안타까와하시며 힘이 모자라면 자신께서 힘을 주겠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영원토록 심장에 새기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있는 힘과 열정을 다 바치려는 한 인간의 깨끗한 량심의 발현이였다. 하기에 우리는 그가 생전에 남긴 수많은 명작들을 무심히 대할수 없다.

그가운데서도 영화문학 《초행길》(전, 후편)은 작가 한상운의 문학세계, 창작생활의 총화라고 할수 있다.

한상운은 해방직후 어느 한 지방에 파견되여 온갖 원쑤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 준동하는 혼탁된 정세하에서도 수령님의 당창건방침을 철저히 옹호관철하는 한 항일혁명투사를 형상한 영화문학 《첫 파견원》(1976년)을 창작한데 이어 《초행길》창작에 달라붙었다.

작품은 항일혁명투사 김책을 원형으로 하여 해방직후 새 민주조선을 일떠세우기 위해 기울이신 수령님의 불멸의 로고와 주인공의 숭고한 사상정신적풍모를 감명깊게 보여준 대작이였다.

특히 한상운은 수령님께서 맡겨주신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정력과 지혜를 다 바쳐가는 주인공 김철준의 형상을 통하여 항일혁명투사들이 지닌 티없이 맑고 깨끗한 충정과 강의한 신념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영화는 립철제강법을 완성하고 자체의 힘으로 병기공장을 꾸려나가는 사건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였지만 그 형상의 폭은 매우 넓다.

작품에는 해방직후의 우리 나라 사회경제적환경이 잘 반영되여있을뿐아니라 일군들의 사업방법과 작풍문제 등이 진실하게 반영되여있다.

우리는 이미 여러 지면들에 실린 예술영화 《초행길》의사상예술적성과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강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영화문학을 창작하기 위하여 기울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노력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한상운은 창작에 필요한 기름진 생활소재를 찾기 위하여 남포, 청진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 김책과 인연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미 소개된 혁명전통자료를 거의다 읽으며 자료를 뽑았다.

아래에 그가 쓴 일기의 한토막을 소개한다.

 

1977년 9월 9일 금요일

 

새벽렬차를 타고 기양뜨락또르공장(당시)을 찾아갔다.

그런데 김책의 둘째아들은 남포로 가고 없었다.

노여웠다. 두차례나 평양에서 기양까지 찾아간 사람을 이렇게 대할수 있는가.

하긴 취재대상자가 간부라고 하여 덮어놓고 믿고 명절날에까지 찾아오라고 한 이상 틀림없겠지 하고 달려온 내 잘못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

그렇다고 이 난관앞에 물러설수 있는가. 아니다! 절대로 물러설수 없다. 다시 련계를 가지고 찾아오겠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문학을 창작하기 위하여 발바닥이 닳도록 뛰여다닌 한상운의 생생한 자취를 엿볼수 있다.

그 나날 그가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은 수십여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가운데는 김책의 부인도 들어있었다.

한상운은 그 녀성을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한가정을 이루게 되였는가 하는것을 알게 되였다.

… 해방직후 어느날 김책은 룡강의 이름난 양주업자를 찾아갔다.

김책은 그에게 장군님댁에 귀한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좋은 술이 없어 되병을 들고 장마당출입을 하고있다고, 장군님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도 좋은 술이 있어야 한다고 절절히 말하였다.

양주업자와 그의 딸은 깜짝 놀랐다.

(나라가 해방된지 언제인데 아직 장군님진지상에 놓아드릴 술이 없단 말인가. 악착한 왜놈들을 쳐부시고 나라를 찾아주신 그이께 좋은 술도 드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백성의 도리겠는가.)

김책의 이야기에 감동된 양주업자는 함께 술을 뽑아온 딸에게 나라에 양주기술자가 필요하다니 네가 따라가서 좋은 술을 뽑아 장군님께 드리라고 등을 떠밀었다.

평양으로 올라온 강정숙(양주업자의 딸)은 김책의 숙소에서 밥을 해주고 한편으로는 양주장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후 강정숙은 솜씨를 발휘하여 첫 술을 뽑았다.

김책은 술을 병에 넣어가지고 장군님을 찾아갔다.

후날 김책은 장군님께서 술맛이 좋다고, 룡강술이 최고라고 하던 항간의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였다고 하면서 무척 기뻐하였다.

그때부터 강정숙이 뽑은 룡강술은 국가연회용술로 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여 그는 김책의 부인으로 되였다. …

그 녀성은 김책이 어버이수령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따랐는가에 대하여서도 이야기해주었다.

… 김책은 수령님의 전화를 받을 때면 옆에 사람이 있건없건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단추를 채운 다음에야 송수화기를 정중히 들군 하였다. 심하게 앓다가도 수령님께서 걸어오신 전화는 자리에서 꼭 일어나 받군 하였다.

김책은 늘 장군님께서 안 계시면 자기도 없다고 말하군 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도 그는 수령님께 최고사령부의 위치를 옮겨달라고 건의하였고 수령님께서 후퇴하라고 말씀하시였을 때에도 결사전을 각오하고 최고사령부에 당원증만 보내였다.

또한 김책은 가식과 위선을 몰랐다.

해방직후 만주에서 방랑생활을 하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그가 장군님앞에 나서기 부끄러워하자 《짚신바람이라고 부끄러워할것은 없다. 네가 장군님이 어떤분이시라는걸 잘 몰라서 그러는것 같은데 걱정말고 어서 들어가자. 지금까지 내처 발을 벗고 살아오다가 갑자기 부자집자식들 흉내를 낼수 없지 않느냐. 장군님께서는 네가 짚신에 이렇게 입고 온것을 더 좋아하신다. 네가 만약 좋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찾아왔다면 좋아하지 않으실것이다.》라고 하면서 수령님의 집무실로 아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

한상운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버이수령님의 가장 친근한 혁명전우였던 김책의 높은 정신세계와 인간적인 풍모를 잘 알게 되였다.

하루는 김책의 부인을 찾아갔다가 류다른 장면을 보게 되였다.

그 집앞에는 큰 화단이 있었는데 한창 꽃들이 피여나는 철인데도 고추가 심어져있었다.

처음은 무심히 지나쳤지만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 화단이 생각났다. 점차 그 화단은 넓은 고추밭으로 바뀌고 그앞에 서있는 김책의 모습이 떠올랐다.

(옳지!)

한상운은 제꺽 취재수첩을 꺼내들고 머리속에 번개처럼 떠오른 형상을 적어나갔다.

 

…밭에 고추를 잔뜩 심어놓은 녀인.

승용차에서 내리자마자 투덜거리는 젊은 부관.

그 사연을 알자 부끄러워하는 녀인에게 아주머니, 된장에 고추를 넣은 뚝배기를 부글부글 끓여먹자구요 하는 김철준.

부관이 아주머니가 때벗이가 되지 않았다고 하자 바로 때벗이가 되지 않아서 좋은거라고 질책하는 김철준…

 

이렇게 되여 김책의 가식없고 인정미넘치는 성격을 보여주는 명장면이 생겨났다.

그뿐이 아니다.

주인공 김철준이 수령님의 교시를 받고 자책하는 형상을 창작할 때였다.

초기에는 이 장면이 설정되여있지 않았다.

정서를 마친 원고를 책상우에 놓고 작품의 전반을 더듬어보던 한상운은 어쩐지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보다 높은 경지에서 보여주지 못한것만 같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만일 수령님께 충정을 다하여 온 김철준자신도 해방직후 긴장한 강철문제를 푸는것이 고주파제강소의 원철로를 복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다가 로동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원철로를 폭파해버릴데 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자신을 자책하는 장면을 설정한다면… 그렇다! 그렇게 되면 그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한계단 더 감동적으로 펼쳐보일것이다.)

흥분한 그는 급히 원고를 뒤졌다.

《아니, 또 고치려고 합니까? 내 생각에는 그만하면 다 된것 같습니다.》

함께 있던 젊은 작가의 말이였다.

한상운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직 멀었소. 자꾸 새로운 장면들이 떠오르는것을 보면…》

원고지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청사를 내려오면서 하는 김철준의 내면독백이 적혀지고있었다.

《장군님을 따라서 수십만리 걸어왔지만 난 아직 장군님의 뜻을 다는 받들지 못하고있었구나. … 원철로에서 쇠덩이를 뽑아낼 생각은 하면서도 그속에서 일하는 로동자들의 처지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으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먼저 생각할줄 알아야 한다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항상 받아오면서도…》

이렇듯 관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킨 이 장면은 순간도 탐구를 멈추지 않은 작가의 피타는 노력에 의하여 태여났다.

한상운은 영화문학을 쓸 때 매번 장면표를 작성하군 하였다.

그는 장면표를 작성하지 않으면 열정이 앞서고 속도는 나지만 작품의 대가 바로서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뽑으면 허물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면표를 쓰고 창작에 들어가면 정교하게 쌓은 《집》에서 《벽돌》 한장을 뽑아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한상운은 《초행길》(전, 후편)을 창작할 때에도 장면표를 작성하였다.

그는 매 장면들을 음미하고 그려보면서 창작적환상을 가지고 펜을 열심히 달리군 하였다.

그 나날 기침을 심하게 하자 영화문학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할것 같아 그처럼 좋아하던 담배까지 끊었다.

이처럼 시대의 명작으로, 성과작으로 인민들속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한상운의 작품들은 열백번 쓰러진대도 다시 일어나 위대한 수령님들의 은덕에 끝까지 보답하려는 그의 불같은 열정과 탐구심이 낳은 결과물이였다.

조선영화사상 처음으로 김책동지를 원형으로 한 영화문학 《초행길》은 한상운의 한생에 큼직한 흔적을 남기였다.

1980년 2월 예술영화 《초행길》을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만들기 힘든 작품인데 깊이있게 잘 만들었다고, 영화가 대작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그날 저녁 평양대극장에서 영화예술인들의 무대공연을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새로 나온 예술영화 《초행길》이 괜찮은것 같다고, 이 영화문학을 쓴 작가는 오래간만에 좋은 영화문학을 내놓았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한상운은 한때 부진상태에 빠져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있을 때 누구보다 안타까와하시며 힘과 믿음을 주신 자신의 로고는 생각지 않으시고 모든 성과를 작가에게 돌려주시는 장군님의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작가가 창작한 예술영화 《전선길》, 《시련을 뚫고》, 《하루를 앞두고》에 대해서도 분에 넘치는 치하를 주시였다.

한상운은 영화문학뿐만아니라 도서 《영화문학강좌》와 소론문들인 《작가와 연출가의 창작적련계를 강화할데 대하여》, 《영화문학에서의 구성문제》, 《원형과 성격》 등 여러건의 학술적인 글들도 발표하였다.

특히 《영화문학강좌》(1957년)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집필된 영화문학에 관한 리론도서로서 당대의 창작실천과 이후의 창작리론확립에 귀중한 디딤돌로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 한상운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1991년 6월 그에게 은정어린 생일70돐상을 보내주시였다.

생일상을 받아안은 로작가는 장군님께 올리는 편지에 자신의 격동된 심정을 이렇게 아뢰였다.

《…

자산계급출신의 지식인인 저의 한생을 돌이켜볼 때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보다 걱정을 끼쳐드린 실패와 과오로 엮어진 시련의 로정이였으며 침체와 번민의 나날이였습니다.

그때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저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기울여주시였습니다.

그러시다가도 어쩌다 성과작이 나오면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며 치하의 말씀을 주시고 온갖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안겨주시는 극진한 보살피심이 없었던들 제가 어떻게 영예로운 작가대오에 설수 있었겠습니까. …》

이 글을 보면 마치도 친어버이앞에 서있는 자식의 솔직한 마음을 느낄수 있다.

그렇듯 한상운은 위대한 장군님을 운명의 보호자로, 인생의 태양으로 모시고 받들었다.

생의 말년에 한상운은 영화문학 《분계선도시》(1, 2부)의 창작에 전념하였다.

작품에 대하여 그는 맏딸 한심양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유구한 력사의 도시인 개성의 연혁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참된 어버이에 대하여 칭송하려고 하였다.

원래 개성은 <열 개>자에 <성 성>자를 써서 성을 열었다 즉 나라의 서울을 세웠다는 뜻의 말이다.

그러나 역신 리성계의 반란이후 개성은 통치배들의 가혹한 탄압으로부터 성을 연것이 아니라 대대로 성을 닫아왔다.

하여 개성에서는 자고로 인삼을 재배하며 살아왔다.

조선봉건왕조때와 일제때에도, 리승만통치하에서도 그랬다.

그러한 개성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이후 수령님의 품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해방직후 서울에서 너를 임신한 어머니를 데리고 개성의 송악산을 넘어 북으로 들어오며 곧 태여날 네 이름을 심양이라고 지었다. 송악산마루에서 개성시내를 굽어보면서 말이다.

마음속의 해빛, 위인을 그리는 마음-이러한 뜻이다. 즉 내 마음속에 수령님의 따사로운 해빛이 흘러들듯이 개성에도 이제 그 해빛이 흘러들라고 말이다.

이 작품은 나의 일대기인 동시에 우리 가문의 력사이기도 하다.》

1992년 7월 작가 한상운은 채 쓰지 못한 유고작을 아들에게 맡기고 70평생 찍어온 인생의 발자국을 멈추었다.

인간은 한생에 나름대로의 자욱을 남기기마련이다.

누구는 깊고 무게있는 발자국을 찍는가 하면 또 누구는 한줄기의 바람결에도 가뭇없이 지워지는 희미한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상운은 인생의 불모지에서 시들어가던 자기를 안아주고 키워준 위대한 수령님들의 대해같은 품속에 안겨 인생의 큰 자욱을 성큼성큼 찍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였다.

그가 우리곁을 떠난지도 어언 수십년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고 활기넘치던 한상운의 발자국소리는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가는 우리 인민들의 힘찬 진군과 더불어 영원히 메아리치고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2-26 18:18:36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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