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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5. 작가 한상운 - 그가 남긴 생의 자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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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2-21 17: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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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5. 작가 한상운 - 그가 남긴 생의 자욱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5. 작가 한상운 -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 1921년 6월 24일 개성시 북안동(당시)에서 출생.

∙ 1943년 한성일보사 기자로 활동.

∙ 1946년 민주조선사 편집국 부국장으로 사업.

∙ 1947년 《로동자신문》(당시) 부주필로 사업.

∙ 1952년 국립영화촬영소(당시) 작가로 활동.

∙ 1956년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

∙ 1992년 7월 24일 사망.

 

세월은 인정많은 나그네가 아니다.

그 무정한 시간은 서사이래 인류가 남긴 모든 흔적을 망각이라는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버리며 흘러왔고 또 흘러갈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무소불위한 《신》도 한가지만은 지워버릴수 없으니 그것은 인민의 심장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 갈피에는 조국의 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유명무명의 참된 인간들이 남긴 삶의 발자국들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영화문학작가 한상운이 열심히, 진지하게 찍어간 생의 자욱도 그중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 (1)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한여름의 소나기를 비웃듯 제법 소리치며 내리는 마가을 어느날이였다.

한때 동방의 강대한 통일국가로 명성높았던 고려의 옛 도읍지였던 개성의 중심에서 때아닌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녀석, 다시 말해봐라. 뭐 내가 착취자라구?》

《우리 집 재산은 머슴과 소작인들의 피와 땀으로 축적한것이니 아버진 착취자란 말입니다.》

《좋다. 난 이제라도 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줄수 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중학교에 다니겠느냐?》

《…》

《어디 그뿐이냐. 네 어머니와 열씩이나 되는 형제들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

《…》

《그것봐라. 세상일이란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어쨌든 아버진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고있단 말입니다.》

《닥치지 못해? 넌 그래 내가 언제 한번 호강하는걸 봤느냐? 그리고 네 어머니가 종일 부엌데기들과 같이 동자질하는걸 못 보느냐 말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아버지는 갈데 없는 착취계급입니다. 난 차라리 굶고 헐벗어도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았으면 합니다.》

대청마루가 쾅- 하고 울렸다.

《에끼, 이 후레자식같으니… 썩 나가!》

불빛이 환한 고대광실의 솟을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중학생복차림의 청년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이즈음 자주 벌어지는 부자간의 다툼질에 어지간히 습관된 소작인들은 언감생심 방문을 열지 못하고 걱정만 하였다.

《순실이 아버지, 요즘 왜 자꾸 저럴가요?》

《이런 맹추라구야. 그게 바로 거 뭐라드라… 오, 계급투쟁이라는거야. 》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아들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춘부장한테…》

《그래서 식자우환이라는거지.》

그사이에 청년은 갈수록 세차지는 비발속을 뚫고 씨엉씨엉 걸어갔다.

별안간 먹물을 뿌린듯 캄캄한 중천에서 몇마리의 《황룡》이 구불거리며 지나갔다.

그 창백한 섬광에 청년의 얼굴-이글이글 불타는 두눈과 날이 선 코, 꾹 다물린 입술이 드러났다.

그가 바로 한상운이다.

아버지와 다투고 결김에 집을 뛰쳐나오긴 하였지만 야밤삼경에 자기가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있는 그였다.

명백한것은 백리주변의 앙상한 초가들을 위압하듯 불빛이 휘황찬란한 그 집 처마밑으로 다시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는 무춤 멈춰섰다.

부지불식간 분노와 결단으로 충만된 오늘을 넘어 어쩔수없이 맞이해야 하는 암담한 래일이 생각난것이였다.

(반년만 있으면 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와 의절한다면 공부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문득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귀전을 울렸다.

《세상일이란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한상운은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내그었다.

쇠집게로 조이는것처럼 아파나는 머리속에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읽던 맑스주의의 신비한 세계와 피할수 없는 현재의 처지가 세차게 충돌하고있었다.

입안으로 흘러든 비릿한 비물을 퉤- 하고 내뱉은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맑스의 《자본론》을 구해다 준 중학교동창생의 집쪽으로 향하였다. …

한상운은 이 땅우에 망국의 비운이 한층 짙어가고있던 1921년 6월 개성시 북안동(당시)의 부유한 상인가정에서 10남매중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개성지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부호였다.

한상운의 조부는 선량하고 순박한 선조들이 물려준 구슬픈 유산-가난을 그대로 감수할수 없을만큼 피끓는 남아로서 갖은 노력끝에 행상군으로 되였고 나중에는 대도매상으로 솟구쳐오른 사람이였다.

한편 그는 누리는 향락보다 자신의 피와 땀으로 마련한 돈을 차근차근 세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 좋아하였는데 그 만족감을 비단옷처럼 걸치고 강낭밥에 된장찌개를 달게 먹다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섭섭치 않게 닫은 인간이기도 하였다.

조부로부터 근검절약을 재부축적의 비방으로 넘겨받은 한상운의 아버지 한종수는 선대처럼 수수하게 입고 먹으면서도 요대와 면사 등을 비롯한 의류잡화들과 주단, 포목으로 더 큰 밑천을 잡은 다음 서울과 평양, 부산을 제 집처럼 나들면서 기업을 넓힌 상업계의 거물이였다.

당시 개성에 있던 덩지 큰 백화점과 주요 인삼포전들, 주단포목점, 수십만평의 토지가 그의 소유였다고 볼 때 그 재산의 규모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었다.

금상첨화라고 한종수는 돈과 재산을 불쿠는 재간외에도 미구에 열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보금자리가 될 고래등같은 기와집의 설계와 시공을 직접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강도적인 《한일합병조약》이 날조되자 기울어진 국운을 통탄하며 3년동안 상복을 벗지 않은 우국지사였다. …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마련이다.

아버지를 더하지도 덜지도 않게 닮은 한상운은 대나무처럼 성정이 바르고 물들이지 않은 무명천처럼 마음이 깨끗한 청년이였다.

비록 부자간에 모순이 격화되여 가끔 승부없는 말싸움이 일어나군 하였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아버지가 셋째아들에게 장차 자기의 대를 이어 행운을 지닌 상인이 되라고 이름을 상운이라고 지은것을 보면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한상운은 개성지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의 아들로 태여났지만 사치와 랑비의 세계와는 담을 쌓은채 순진한 유년시절을 꿈처럼 흘러보냈다.

어린 소년은 글을 깨우치자마자 손에 아버지의 때묻은 주산이 아니라 보풀이 허옇게 인 력사책들을 들고 정신없이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애국명장들의 무훈담은 작은 가슴속에 하나, 둘 의문을 남겨두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은 신묘한 지략으로 수백만의 외적을 물리쳤다는데 왜 지금은 그런 장군이 없는가, 그랬더라면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것이 아닌가, 또 리순신장군은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데 어째서 우리것은 없고 왜놈들의 큰 배들만 뚜- 하고 달리는가…

그 의문점들은 점차 무서운 향학열로 바뀌여졌다.

원체 머리가 좋고 아는것이 많은 한상운은 개성제1공립보통학교시절 학업순위에서 언제나 첫자리를 차지하군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서 고중에 입학하였다.

그 시기로 말하면 학생들속에서 맑스의 명제들을 줄줄 외워야 똑똑한 청년이라는 인식이 류행처럼 떠돌던 때였다.

승벽심이 강하고 감수력이 뛰여난 한상운은 맑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리념서적들을 열심히 탐독하면서 선진사상에 공감하였고 당대 사회의 불합리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의식변화는 그가 주동이 되여 진행한 비밀독서회조직과 일제의 황국신민화교육정책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로 이어졌다.

한상운의 주위에는 각사탕에 달라붙은 개미들처럼 숱한 동료들이 묻어다니였다. 따라서 총명하고 재력까지 겸비한 이 호남아는 군계일학과도 같은 존재일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텅텅 비여버린 중학교에 왜놈경찰이 나타났다.

후각이 발달한 왜놈들은 동맹휴학의 주동인물이 바로 개성에서 소문이 뜨르르한 부자집의 셋째 도련님이라는것을 인차 밝혀냈다.

한상운의 아버지는 범 무서운줄 모르고 날뛰는 하루강아지같은 자식의 발목에 소름끼치는 족쇄가 채워질가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그무렵 번창하던 가세도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아버지는 한상운에게 이렇게 토설하였다.

《셋째 너까지만 돈을 대주겠다. 그아래는 더 공부시키지 못하겠다.》

그러면서 상업이 아니라 의학공부를 꼭 하라고 오금을 박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상업대신 의학을 전공하라고 이른것은 자못 놀라운 일이지만 알고보면 그 말에는 늙은이다운 타산이 들어있었다. 그는 뜻밖의 방향전환으로 자식의 가슴속에 웅크리고있는 위험한 《좌익소아병》을 능히 고칠수 있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 훈시는 한상운에게 있어서 울고싶은데 뺨치는 격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아버지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다.

의학은 환자들의 병든 육체는 고칠수 있지만 식민지노예의 운명은 고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한상운은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들어갔다.

그에게 문학이라는 고상한 세계는 가물끝에 찾아든 단비와도 같았다.

망국노의 굴욕을 쓰겁게 감수하며 성장한 열혈청년은 실력으로 사무라이후손들을 짓눌러버릴 결심을 품고 문학의 신비한 세계속으로 뛰여들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옆에는 세계적인 영화들을 상영하는 이름난 영화관이 있었는데 한상운은 약차한 금액을 요구하는 관람이였지만 하루가 멀다하게 외국영화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조선영화가 나아갈 앞길을 모색하였다.

오전에는 강의, 오후에는 영화관람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속에서도 그는 밤이면 《공산당선언》, 《자본론》과 같은 도서들을 파고들었다.

한상운은 정세추이에도 민감한 청년이였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국면이 저들에게 불리하게 되자 전쟁의 부담을 덜기 위한 저축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목터지게 부르짖으며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전쟁대포밥으로 내몰려고 발악하였다.

원래 일제는 1938년 2월 《륙군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수 있도록 하였다.

거듭되는 참패로 병력자원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일제는 1940년대에 이르러 급기야 야만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렇게 떠들고있었다.

《우리 정예황군이 남방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있는 대동아전쟁하에서 반도청년들에게 대동아건설의 성업에 용약 참가할 길을 열어주는 조선청년체력검사는 작 1일부터 전조선 272개소의 검사장에서 일시에 개시…》

어느 한 중학교의 일본인교장은 이렇게 지껄이였다.

《에또,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내지의 동포로서, 내지의 반려로서 내지와 더불어 공존공영, 영욕부침을 함께 할 민족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애초에 따로 있었던것이 아니다. 에또, 강역이 린접해있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동조동근 한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민족인것이다. 그러므로 현하 조선인으로서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옥쇄하는것은 최대의 영광이고 무상의 행복이 아닐수 없다. …》

식민지조선에서 징병제가 독을 쓰고있을 때 일본에서는 전쟁열기가 최대로 폭발하고있었다.

전쟁의 세례를 겪어보지 못한데다 본토를 사수하겠다고 악악거리는 부녀자들의 모습에서 강한 충동을 받은 일본청년들은 《아까가미》(붉은색징집령장)를 받으면 두말없이 전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화살에 멱을 꿰인 일본이라는 여우가 숨통이 끊어질 날은 바야흐로 다가오고있었다.

그러한 때에 조선청년으로서 왜놈들을 위해 열대의 쟝글에서 딩굴다가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총알에 맞아 죽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한상운은 대학졸업식을 하루 앞둔채 귀국하고말았다.

고향인 개성이 아니라 서울에 간 그는 한성일보사 기자로 취직하였다.

일반적으로 기자는 정의와 량심의 대변자라고 하지만 식민지조선에서는 총독부의 관제라는 끈에 든든히 매여있는 가련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신문사에 키가 늘씬하고 단아하게 생긴 처녀가 나타났다.

그 처녀는 주필을 만나러 왔었는데 한상운은 상대를 보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후두둑 떨리는것을 느꼈다.

알고보니 처녀는 리화녀고를 졸업한 민행녀였다.

총각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아니면 처녀쪽에서 먼저 그랬는지 알수 없지만 그후 두사람은 자주 만났고 인생의 반려로 이어지는 사랑의 오솔길을 어깨나란히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관계가 무르익어갈무렵 민행녀는 총각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처녀는 편지라는 서신거래가 얼마나 편리한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며 밤새워 고른 동서고금의 금언들에 애정을 담아 또박또박 적어보냈다.

며칠후 한상운한테서 회답편지가 날아들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속지를 펼치던 민행녀는《아!-》 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처녀의 손에서 방바닥에 떨어진 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있었다.

《조선글로 쓰시오.》

유명한 리화녀고졸업생이라고 해도 역시 처녀는 처녀였다.

지엄한 삼강오륜이 두눈을 부릅뜨고있던 세월에 아무리 신식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처녀쪽에서 먼저 애정의 편지를 쓴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그래도 용기를 내여 편지를 보냈는데 단마디로 면박을 받았으니 그 창피감이란 사품치는 강물속에 뛰여들어 죽고싶을 정도였다.

분해서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있느라니 어느결인가 그 감정은 사라지고 한상운의 름름한 모습이 안겨오는것이였다.

《조선글로 쓰시오.》

그때로 말하면 서신거래는 물론 일상 대화에서도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물고 따귀까지 맞아야 하는 험악한 세월이였다.

그런데 한상운은 버젓이 조선글로 쓰라고 요구한것이였다.

그속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 자기 민족이 창조한 아름다운 문화에 대한 높은 자긍심이 넘치고있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을수록 한상운이라는 청년이 돋보이고 나중에는 대단한 혁명가처럼 생각되였다.

며칠후 그들은 다시 만났다.

대범한 한상운은 처녀의 잘못을 더 꺼들지 않았다.

민행녀도 총각의 관후한 인품앞에 고개가 숙어졌다.

두 청춘은 의미심장한 눈길들로 서로 화해하였고 사이좋게 거리를 거닐었다.

그날의 화제는 민행녀의 질문으로 시작되였다.

《상운씨, 왜놈들이 과연 망할가요?》

한상운은 자신에 넘친 목소리로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것을 구체적인 자료를 들어가며 분석하였다.

민행녀의 가슴속에는 사랑의 불길이 점점 더 세차게 타올랐다.

순간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자기 이름의 《행》자와 한상운의 《운》자가 합쳐지며 부각된 《행운》이라는 두 글자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듯이 여겨지면서 아직은 처녀의 가슴속에 소중히 묻어둔 꿈이지만 필경 현실로 될 자기들의 미래를 그려보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몇달 지나 한상운과 민행녀는 자기들의 소중한 모든것을 기꺼이 합쳤다.

력사적인 8월 15일의 아침은 례사롭게 밝아왔다.

그날 오전까지도 서울은 여느때처럼 흘러가고있었다.

신문사에 나갔던 한상운은 점심을 먹으려 집에 왔다가 습관적으로 라지오를 켰다. 당시 정세가 뒤숭숭하였던것이다.

그는 인차 긴장해졌다.

라지오에서 왜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잡음이 섞여서 잘 알아들을수 없었지만 그는 대뜸 그것이 항복선언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벌떡 몸을 일으킨 한상운은 옆에 있던 안해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여보, 왜놈들이 망했소!》

안해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듯 되물었다.

《왜놈들이 망했다구요?》

한상운은 흥분하여 더 크게 소리쳤다.

《나라가 해방되였단 말이요.》

그제야 그것이 사실임을 안 안해는 물기젖은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쩜… 당신의 말이 꼭 맞았군요.》

그때 밖에서 《조선해방 만세!》의 함성이 터졌다.

거리로 뛰쳐나간 한상운부부는 파도처럼 흐르는 대렬속에 끼여들어 《조선해방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그날 밤 한상운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여난 셋째아들, 력사책에 넋을 묻어버렸던 소년시절, 일본에서의 류학, 징병을 피하여 단행한 귀국…

(그 행로우에 나는 무수한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나 망국의 세월은 큼직한 비자루로 쓸어버리듯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다. 있다면 굴욕과 비탄속에서 찍은 희미한 자욱뿐이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그렇다. 래일부터 새삶의 자욱을 힘차게 찍어갈것이다!)

다음날 신문사로 나간 한상운은 동료들과 마주앉았다.

인차 신문사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였고 발기자인 한상운은 그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우선 우리 글자로 된 신문을 발행해야겠소.》

자치위원회 위원장의 첫 요구였다.

온 신문사가 떨쳐나섰다.

한상운과 동료들은 낮에 밤을 이어 작업하였다.

드디여 구성이 다양하고 조형성이 풍부한 조선글자로 찍은 첫 《인민일보》가 세상에 나왔다.

신문을 본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이것 보게. 우리 신문이구만.》

《우리 조선글자가 간사한 왜놈글자보다 얼마나 더 보기 좋은가.》

그러던 어느날 일본군고급장교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자치위원회 위원장 한상운은 그들에게 신문사밖으로 나갈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칙쇼!》

일본장교는 서슬푸른 군도를 뽑아들고 베여버릴것처럼 다가들었다.

한상운은 끄떡않고 서서 그자를 노려보았다.

수많은 조선사람들의 피가 묻은 군도를 틀어쥔 일본장교였지만 해방된 조선의 청년-당당한 지식인의 기개앞에서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일본은 패망했소. 그러니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한상운의 추상같은 호령이였다.

일본장교는 자기가 패전국의 일개 장교라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는지 맥없이 경례하고 돌아가버렸다.

그 장면을 지켜본 동료들은 모두 통쾌해하였다.

《제놈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별수없지.》

《아무렴, 이제야 해방이 됐는데 뭘 무서울게 있나?》

그러나 그들은 해방조선의 푸른 하늘가로 서서히 밀려드는 민족분렬의 검은구름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 조선인민혁명군과 쏘련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앞에 일본군이 급속히 무너지자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당황해났다. 미국은 1946년에 가서야 도꾜를 점령할것을 계획하고있었던것이다.

교활한 미국은 극동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조선을 타고앉자면 저들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타산하였다.

하여 군사적으로 아무런 의의가 없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미증유의 핵버섯구름이 피여올랐다.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선포하자 트루맨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오끼나와의 미24군단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현지에 도착하여 남조선을 견지할데 대한 지시를 주었다.

맥아더는 8월 19일 비행기로 전시첩보부 요원들을 서울에 파견하고 그들을 통하여 8월 20일 총독부에 틀고앉아있던 조선총독 아베에게 《현지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할것이며 만일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에는 엄격히 추궁》할것이라는 《특별명령》을 전하였다.

한편 미24군사령관 하지는 관하부대들에 승선명령을 내리고 비행기로 남조선에 《포고문》을 살포하도록 하였다.

《포고문》에서 그는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게 된다는것을 선포하고 《주민의 경솔,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없이 인명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도 황페화될것》이니 《장래의 남조선을 위해서는 동란을 발생시킬 행위가 있어서는 절대 안되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9월초 미24군의 선견대가 패전국의 국민답게 허리를 갑삭갑삭하는 일본인들의 물길안내를 받으며 인천에 상륙하였다.

카빈총을 멘 양키병사들이 나타나자 해방의 열기로 들끓던 서울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인민들의 창의로 수립되였던 서울시인민위원회가 강제로 해산되였고 새 조선건설을 지향하는 민주인사들과 애국적인민들은 해방전에 자기들을 괴롭혔던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로 또다시 끌려갔다.

그 와중속에 미군정청은 적산이라는 구실로 앞잡이들을 내몰아 신문사를 점거하였다.

24살의 한상운은 신문사 2층 사무실창문을 까고 뛰여내렸다.

처가에 은신한 그는 억이 막혀 방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해방자》라고 믿었던 미국이 침략자라는것을, 조선사람들의 머리우에 다시금 망국의 비운이 드리워졌다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위험은 시시각각 다가들었다. 미군정청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위기일발의 순간 한상운은 북녘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없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주고 왜놈들이 가지고있던 공장, 기업소들을 인민의 소유로 만든 인민의 세상, 참다운 언론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그 별천지는 학생시절부터 그려본 꿈같은 세상이였다.

가자, 북으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사를 펴시는 그곳으로!

한상운은 애국적이며 량심적인 지식인들을 불러주신 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서울에 온 일군(그는 장인의 옛 친구였다.)을 따라 38°선을 넘었다.

임신한 안해도 남편을 따라섰다.

바늘따라 실간다는 범속한 례절때문만이 아니였다.

베벨 아우구스트(도이췰란드사회민주로동당의 창건자)가 감옥에서 쓴 《녀성과 사회주의》를 한장한장 번지며 남편 못지 않게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그는 온 겨레가 추앙하는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면 참된 인민의 세상을 보게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던것이다.

한상운이 안해를 부축하며 자유롭고 행복한 민주조선의 대지에 재생의 첫 자욱을 찍은것은 1946년 7월이였다.

 

 

분 수 령

 

두해째 계속되고있는 전쟁의 불길은 국립영화촬영소(당시)가 자리잡고있는 크지 않은 마을도 무자비하게 삼켜버렸다.

굶주린 까마귀떼마냥 달려들어 마구 폭탄을 퍼붓던 적기들이 퍼그나 가벼워진 기체를 남쪽으로 돌리기 바쁘게 뒤산의 방공호에서 30대의 남자가 제일먼저 뛰여나왔다.

그길로 한 농가의 웃방에 들어박힌 그는 공습때문에 밑진 봉창을 하려는듯 원고지우에 정신없이 펜을 달리였다.

그가 바로 국립영화촬영소 전속작가 한상운이였다.

뒤늦게 방공호에서 돌아온 동료들이 이번 폭격에 누구누구네 집이 불타고 또 아무개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떠들썩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

그 원고는 영화문학 《정찰병》이였다.

얼마전 한상운은 작가, 예술인들이 인민들속에서 나온 수많은 우리 영웅들을 형상할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았다.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저 남쪽에서 한몸조차 건사할길 없어하던 나에게 민주조선사 부국장, 《로동자신문》 부주필의 중임을 맡겨주신 김일성장군님!

이 준엄한 시기에 공화국에서 처음 진행된 전국영화문학현상응모에 특등으로 당선되였던 나의 재능을 귀중히 여겨 영화문학 작가대오에 세워주신 장군님!

그 하늘같은 은덕에 보답하자면 좋은 작품을 많이 써야 한다. 그렇다! 우리 영웅들의 투쟁을 형상한 영화문학을 쓰자.)

한상운은 불타는 열정을 안고 창작에 달라붙었다.

불비쏟아지는 포연속을 헤치며 작품의 주인공-영웅정찰병을 찾아 하루에도 수십, 수백리길을 걸었고 그 과정에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귀중한 이 땅과 이 행복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가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영웅전사들에 대하여 깊이 알게 되였다.

창작의 제일가는 방해군은 가증스러운 미군비행기였다.

적기들은 군사요충지도 아닌 이곳에 때없이 달려들어 줄폭탄을 퍼붓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방공호에 뛰여들어 펜을 달리다가 공습경보해제신호가 울리면 다시 농가로 돌아와 원고를 쓰군 하였다.

하지만 한상운은 주저앉지 않았다.

전쟁이 아닌가. 해빛밝은 창가에서 편안하게 글을 쓴다면 그게 무슨 싸우는 조선의 작가란 말인가.

그는 매일과 같이 반복되는 적기의 공습속에서도 분투하여 작품의 초고를 끝냈고 10여차례나 수정했다.

마침내 적후에서 싸우는 용감한 인민군정찰병들의 투쟁모습을 형상한 영화문학 《정찰병》이 탈고되였다.

한상운은 영화문학을 쓴데만 그치지 않고 촬영집단과 함께 야외촬영이 진행되는 의주지방에 따라가 촬영기를 메고 다녔으며 영화에 동원된 군인들과 한데 어울려 영화제작에 전심하였다.

예술영화 《정찰병》필림이 드디여 나왔다.

그보다 앞서 영화로 실현된 첫 작품은 《비행기사냥군조》였다.

《비행기사냥군조》(1953년)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비행기사냥군조운동을 활발히 벌린 인민군군인들의 투쟁을 반영한 작품이다.

1953년 5월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영화 《비행기사냥군조》를 몸소 보아주시고 영화가 좋다고 하시면서 비행기사냥군조원들의 용감성과 대담성을 잘 보여주었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6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새로 나온 예술영화 《정찰병》을 보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영화가 좋다고, 인민군정찰병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었다고 못내 대견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에 좋은 장면들이 많다고 하시며 마을로인이 적들의 추격을 받는 인민군정찰병을 구원하는 물방아간장면, 주인공이 적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늪에 오래동안 들어가있는 장면 등이 좋다고 하시였고 주인공을 적들의 사단중심에까지 들어가게 한것도 잘하였으며 정찰병들의 대담성을 잘 보여주었다고 치하하시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정찰병들이 적후에서 활동하는 지역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기때문에 자막을 주어 알리게 하여야겠다고 일러주신 다음 영화가 괜찮게 되였으니 빨리 전선과 후방에 보내여 돌리도록 하라고 가르치시였다.

그후 수령님께서는 최고사령부에 문화선전상(당시)을 부르시여 예술영화 《정찰병》을 다량 복사할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또한 영화촬영에서 애로되는것이 없는가를 알아보시고 자동차들이 폭격에 마사지고 화물자동차 1대로 영화를 찍고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고 하시며 즉석에서 해당 부문에 전화를 걸어주시였다.

다음날 2대의 화물차가 수령님께서 보아주신 《정찰병》의 첫 필림을 싣고 필림복사작업이 진행될 후방으로 떠나갔다.

은정어린 자동차들을 바라보는 한상운의 가슴은 세차게 들먹이였다.

(《정찰병》은 몇몇 창작가들과 배우들이 만든 영화가 아니다. 장군님께서 아니시였다면 어떻게 가렬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수 있었겠는가. … 앞으로 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여 그이께 기쁨을 드리리라.)

얼마후 예술영화 《정찰병》은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대절찬속에 상영되였다.

영화에 대한 반향은 폭풍같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창조된 6편의 예술영화들가운데서 제일 많은 관람자들을 기록하였다는것, 영화를 본 수많은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인민군정찰병이 될것을 탄원하여나선 사실이 말해주고있다.

예술영화 《정찰병》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전사들이 발휘한 대중적영웅주의를 생동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조선영화발전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평화시기도 아닌 전쟁시기에 내놓은 두개의 작품으로 한상운은 영화문학이라는 거대한 은막우에 자기의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이 조선인민의 승리로 끝나고 전후복구건설이 시작되였다.

조선은 백년이 가도 일어서지 못한다고 한 미제의 궤변을 함마와 곡괭이로 짓부시며 날마다 기적과 혁신을 창조하던 그 시대는 조선인민의 영웅적인 투쟁모습을 담은 영화를 요구하고있었다.

이 시기 한상운은 예술영화 《어떻게 떨어져 살수 있으랴》(1957년 양재춘과 합작), 《그가 가는 길》(1958년), 《북두칠성은 보이건만》(1959년 류기홍과 합작), 《새로운 나날》(1959년) 등의 영화문학을 창작하여 조선영화의 화원을 풍만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어떻게 떨어져 살수 있으랴》를 비롯한 여러편의 작품은 조국통일주제의 작품들이였다.

해방후 남쪽에 있을 때부터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분렬을 강요한 미제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을 금치 못하였던 한상운이였다.

하기에 그는 그 작품들에서 끊어진 혈맥을 잇지 못하고 신음하는 겨레의 아픔과 고통을 피타게 절규하였으며 전체 조선민족이 한사람같이 떨쳐나 조국통일을 앞당겨오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갈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그는 관록있는 작가로서 련속 성과작들을 내놓았으며 특히 천리마시대정신을 구현한 현실주제작품창작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때 우리 인민들은 어버이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따라 사회주의의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달리고있었다. 가는 곳마다에서 소극과 보수가 극복되고 세인을 놀래우는 기적이 일어나고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례외없이 시대가 낳은 영웅들-천리마기수들이 서있었다.

이로부터 한상운은 천리마시대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구가하는것을 기본형상과제로 내세우고 여기에 주되는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무렵 어버이수령님께서 강원도 수산부문당열성자회의에서 하신 간곡한 교시가 작가들에게 전달되였다.

(수령님께서 우리 청년들을 바다로 부르신다. 하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 바다를 정복하고 개척하는 청년들의 보람찬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문학을 쓰자.)

그는 곧 동해안의 어느 한 수산사업소를 찾아갈 준비를 다그쳤다.

동료들은 저마다 걱정하였다.

《처음 가는 길인데 사전료해를 해보고 떠나는게 좋지 않겠소?》

《건강치도 못한데 천천히 가라구.》

한상운은 마음의 탕개를 조이듯 취재가방을 추슬렀다.

《난 한시가 새롭소.》

평소에는 성품이 온화하였지만 일단 결심하면 앞에 산이 있든 강이 있든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그였다.

다음날 현지에 도착한 한상운은 청년들로 무어진 배인 《청년》호에 올랐다.

흔히 취재라고 하면 수첩부터 꺼내드는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그는 가방속에 넣은 취재수첩은 꺼낼념을 않고 후렁후렁한 어로공옷을 빌려입은채 청년어로공들속에 끼웠다.

배를 처음 타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도 배멀미때문에 혼났다.

처음 얼마동안은 작가라는 체면때문에 애써 참았는데 배가 세차게 흔들리자 속이 메슥메슥하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더 참을수 없어 급기야 선체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바람에 작가선생을 환영하여 풍성하게 차린 점심식사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아깝게도 물고기먹이로 되고말았다.

미리 준비하였던 흙주머니도 루미날과 같은 진정제도 소용없었다.

바다는 그의 의지를 시험하듯 오래동안 들볶았다.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는 그가 어찌나 불쌍했던지 선장은 마침 포구로 돌아가는 다른 배에 옮겨타라고 권고하였다.

한상운은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고통을 겪고서야 그는 밉살스러운 멀미를 겨우 떨구어버릴수 있었다.

《우리 배에도 기자들이 몇번 왔댔는데 견디여내지 못하고 도중에 가버렸습니다. 헌데 작가선생은 다르군요.》

선장의 투박하고 솔직한 이야기였다.

그의 등뒤에는 여러명의 청년들이 서서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한상운은 자기가 그들한테서 합격증을 받았다는것을 알았다.

거칠고 무뚝뚝하던 배사람들은 그가 영화문학을 쓰기 위하여 온 작가가 아니라 같은 선원이기라도 한듯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한상운은 어로공들과 꼭같이 아침일과에 참가하여 인민보건체조를 하고 갑판청소도 하였으며 바쁠 때면 그물도 당기군 하였다. 때로는 배사람들과 어울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술도 들이키군 하였다.

미끄러운 갑판우에서 그물가득 물고기를 끌어올릴 때의 장쾌한 기분, 만선기를 휘날리며 황금노을이 불타는 포구로 돌아오는 흐뭇한 저녁, 경쾌한 손풍금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씩씩한 노래가락…

참으로 바다는 용감하고 진취적인 청년들의 더없는 활무대였다.

작가의 눈앞에는 작품에 그려질 청년들의 모습이 생동한 화폭으로 안겨왔다.

드디여 원고지우로 펜이 날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선체가 한옆으로 기울어지건 말건 식사종이 울리건 말건 남들이 잠들건 말건 한상운은 모든 심혈을 원고에 쏟아부었다.

어로공들은 난생처음 보는 작가의 창작모습이 신기해서 그저 《야, 야!》 하고 감탄사만 련발하였다.

불꽃튀는 창작전투는 선실에서도, 어항에서도 계속되였다.

몇달후 불룩한 취재가방을 메고 창작사로 돌아온 한상운은 자신만만해서 초고를 내놓았다.

그러나 합평회에서는 작품에 그려진것처럼 바다생활이 그렇게 힘들면 도대체 누가 바다로 진출하겠는가라는 심각한 의견이 제기되였다.

한상운은 한동안 원고를 밀어놓았다가 랭정한 눈으로 다시 보았다.

그러고보니 확실히 그런 의견이 나올만 하였다. 영화문학을 본 사람들은 제쳐놓고 우선 자기부터도 그처럼 힘든 바다생활에 뛰여들 의욕이 나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해야 작품이 살아나겠는가?)

불현듯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영화문학 《정찰병》을 창작하는 과정에 만났던 인민군정찰병들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상운은 정찰병이라고 하면 날래고 힘이 세지만 대신 거칠고 무자비한 사람들로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정작 대상해보니 그들처럼 정서가 깊고 락천적인 사람들도 없었다.

한 정찰병은 틈이 나면 흥얼거리며 오선지우에 곡상을 옮겨놓군 하였고 또 다른 정찰병은 폭탄에 파헤쳐진 고지에서 수집한 광석을 내보이면서 앞으로 학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취미와 희망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말끝마다 《우리가 승리하면》 혹은 《승리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말을 자주 외우군 하였다.

그처럼 승리에 대한 확신과 락관이 있었기에 그들은 적들의 총구가 도사리고있는 위험한 적진으로 두렴없이 용약 뛰여들수 있었고 한건의 정찰자료를 위해 귀중한 목숨을 서슴없이 바칠수 있었다.

어찌 정찰병들뿐인가.

한차례 전투가 끝나면 누런 탄피가 수북이 쌓인 전호바닥에 모여앉아 흥에 겨워 화선악기를 타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인민군용사들과 고지우로 탄약과 식량을 나르며 《밭갈이노래》를 부르던 후방인민들도 승리의 신심에 넘쳐 락천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바로 그런 랑만이, 그런 양상이 부족하였다. 작품이 살자면 청년들의 락천적이고 시적인 바다생활을 그려야 한다. 그러자면… 바다로 또 가자!

다음날 한상운은 몇달전에 현지체험을 하였던 수산사업소로 떠나갔다.

《청년》호 선장과 선원들은 마치 그가 어디 잠간 갔다오기라도 한듯 스스럼없이, 그러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번에도 한상운은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어로공옷을 입고 청년들속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과정에 그는 청년어로공들의 성격과 생활이 자기가 일전에 본것보다 더 명랑하고 밝다는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한상운은 무릎을 툭 쳤다.

(그렇지. 극에서는 손해를 좀 보더라도 이들의 락천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데 형상의 초점을 집중하자.)

결국 수정된 원고에는 바다생활의 랑만과 청년들의 환희, 사랑과 투쟁의 세계가 재치있는 극작술과 밝은 양상으로 생동하게 형상되였다.

몇달후 바다를 정복하고 개척하는 미남, 미녀들의 모습을 형상한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이 세상에 나왔다.

1961년 2월 28일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을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좋은 영화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1961년 3월 16일호 신문 《민주조선》은 《랑만에 찬 바다의 화폭》이라는 제목밑에 이 영화는 천리마의 기세로 내닫는 바다의 주인공들인 젊은 어로공들의 현실생활을 폭넓게 그리고 진실하게 묘사한 훌륭한 작품이라는데 대하여 크게 소개하였다.

영화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폭발적이였는가 하는것은 당시 《갈매기호청년들》을 본 수많은 청년들이 작가에게 《바다가 정말 그렇게 랑만적인 곳입니까?》라는 질문을 담은 편지를 수백통이나 보내온데서 알수 있다.

언제인가 TV에 출연한 대형고기배 영웅선장은 《나는 그때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에 넋이 빠져 바다로 진출하였습니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한상운은 더욱 박차를 가하여 천리마현실을 진실하게 보여준 예술영화들인 《용해공들》(1961년), 《처녀중대장》(1964년)을 련이어 내놓았다.

한상운은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생의 발자국을 성큼성큼 찍어나갔다.

치렬한 계급투쟁속에서 혁명의 전취물을 끝까지 지키고 사회주의제도를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위훈을 세운 은파산의 한 영웅일가의 투쟁모습을 보여준 영화문학《은파산의 일가》(제1부)창작에 달라붙었던것이다.

동시에 조선인민의 마음의 고향인 유서깊은 만경대를 기록영화로 만들데 대한 과업을 받고 그 대본창작에도 착수하였다.

한상운은 젖빛안개 흐르는 수려한 만경봉에 올라 찬란히 떠오르는 해돋이에 매혹되여 일사천리로 대본을 써나갔다.

그 기간은 원고지우에 펜을 달리는 작가로서만 아니라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위대한 수령을 알고 영웅적인민을 아는 인간,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할줄 아는 참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였다.

그러한 나날들이 흘러가던 1968년 1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은파산의 일가》(제1부)를 보아주시고 영화가 잘되였다고, 처음부터 잘 끌고 간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한상운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사랑과 믿음에 가슴들먹이면서 뿜어오르는 기백과 열정을 터쳐 영화문학 《은파산의 일가》(제2부)를 창작하였다.

그해 9월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은파산의 일가》(제2부)를 보시고 아주 잘되였다고, 혁명의 초소를 대를 이어 지키자는 사상이 잘 반영되였다고 평가해주시였다.

그처럼 좋은 작품들을 련이어 써내던 한상운은 몇해동안 이렇다 할 성과작을 내놓지 못하고 침체기에 빠져들어갔다.

일부 일군들은 그의 창작이 한물 지났다고 생각하였던지 그에게 신인들의 작품이나 지도하게 하였다.

한상운은 작가라면 한번쯤 빠지게 되는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손맥을 놓고있었다.

그러던 1971년 9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예술영화 《공중무대》의 두개 필림을 보아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상운의 창작적고충에 대하여 보고받으시고 작가들을 도와줄 방도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작가가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받은것은 우산장에서였다.

밤길을 달려온 일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밤 2시였다.

장군님의 은정깊은 교시를 전달하는 일군도, 전달받은 한상운도 서로 손을 맞잡고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적시였다.

한상운은 자기를 두고 마음쓰시는 장군님의 영상을 그려보느라니 그저 죄스러운 심정이였다.

하지만 새 영화문학을 기다리고계실 장군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가다듬고 창작을 시작하였으나 끝내 꼬나내지 못하고 또 한해를 넘기고말았다.

1972년 8월 어느날 영화문학작가들의 협의회를 지도하시기 위하여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르던 한상운은 그만 의자등받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러는 그를 굽어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작년에 작품을 내놓겠다고 결의하고는 왜 아직도 내놓지 못했습니까? 힘이 모자라면 내가 힘을 주겠습니다.》

한상운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안겨왔다.

(아, 장군님! 대체 제가 뭐라고 이렇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신단 말입니까!)

그의 귀전에는 장군님의 말씀이 운명의 계시처럼 계속 쟁쟁히 들려왔다.

《힘이 모자라면 내가 힘을 주겠습니다.》

한상운은 허리를 쭉 폈다.

답보와 침체, 로쇠로 기운이 진해가던 몸에서 새 힘이 용솟음치고있었다.

그것은 육체적힘의 분출이 아니였다. 지난날 조국과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꽝꽝 써내던 공로있는 작가를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주시려는 위대한 어버이의 사랑이 안아온 정신적힘의 분출이였다.

그는 자기앞에 펼쳐진 래일의 밝은 앞길을 보고있었다. 그리고 이미전에 찍혀진 발자국과 더불어 새 출발의 발자국들이 힘있게, 깊숙이 찍혀지는것도 보고있었다.

그렇다. 작가 한상운은 인생의 분수령을 넘어서고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2)

 

1960년대 중엽 어느날이였다.

하루는 예술영화 《대지의 아들》의 영화문학을 쓴 주동인이 《상운이, 너 왜 딸만 다섯이나 봤는지 알아?》라고 시까슬렀다.

한상운은 싱긋 웃기만 하였다.

《내 아들낳는 <비방>을 대주지.》

주동인은 한상운에게 퇴근하면 안해에게 여사여사한 말을 걸어서 꼭 한대 때리라고 일렀다.

한상운은 또 웃었다.

주동인은 정색해서 이야기하였다.

《허튼소리가 아니야. 정말 아들을 볼 생각이라면 해보라니까.》

한상운은 안해 민행녀와 가정을 이룬 후 손찌검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물론 가정생활이 꿀처럼 달기만 한것은 아니다. 드문 일이지만 한상운의 가정에서도 간혹 불협화음이 울리군 하였었다.

그때마다 그는 남편다운 아량으로 가정불화라는 불심지를 느슨하게 꺼버리군 하였었다.

그런데 안해를, 그것도 날이 갈수록 사랑스럽고 믿음가는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차라리 제 얼굴을 갈기는편이 더 편안할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애처가에게 《비방》을 알려준 주동인의 처사는 분명 지나친것이였다.

한상운은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간 그의 행동은 이상하였다.

만일 누가 그의 방문을 열어보았다면 뭔가 결심했다가 이내 도리머리를 젓고 또 눈을 부릅떴다가 어색하게 웃고마는 그를 보았을것이다.

드디여 한상운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딸들의 옷을 다림질하고있는 안해에게 몇마디 말을 건네더니 돌연 별치않은 문제를 가지고 어성을 높였다. 나중에는 주먹을 쳐들었다.

안해는 깜짝 놀라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는 《이 사람이 정말 내 남편이 옳긴 옳은가?》라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한쌍의 맑은 눈동자앞에 멋적어진 한상운은 허허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상한 기미를 차린 안해가 야무지게 따졌지만 그는 빗장을 지른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랬든저랬든 아들낳는 《비방》을 대준 동료를 욕보일수 없었던것이다.

다음날 그 이야기를 들은 주동인은 배를 그러안고 웃다가 《역시 한상운이는 갈데 없는 한상운이야.》라고 하였다.

후날 그 사연을 알고 남편의 소원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 안해의 노력때문인지 한상운은 어느 한 영화문학을 탈고하던무렵 그처럼 고대하던 아들을 보았다.

그러고보면 화는 쌍으로 오고 복은 홀로 온다는 이야기도 다 옳은것은 아닌것 같다.

한것은 그가 새 출발을 한 기쁨우에 아들출생이라는 경사가 겹쳤기때문이다.

갓 마흔에 버선이라고 한상운은 나이들어 본 아들을 금지옥엽처럼 키웠다.

그에게는 다섯딸이 있었는데 늘씬한 키에 성미가 시원시원한 그들이 귀여운 막내동생을 그냥 둘리 만무하였다.

누이들은 저마다 남동생을 독차지하려고 야단법석이였다.

조용한것을 좋아하는 한상운은 집안이 떠들썩하는것이 질색이였다.

그래서 딸들은 그가 사색하거나 원고를 쓸 때에는 숨을 죽이군 하였다.

그러나 아들만은 그 불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아들 한일민은 아버지가 창작하고있는 방을 눈짓하며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는 누이들의 신호따위는 아랑곳 않고 방안을 종횡무진하다가 제풀에 넘어지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만일 딸들중 누가 그랬다면 엄한 눈총을 받기 일쑤인데 이 가정의 귀동자에게는 처벌은커녕 아버지의 념려어린 손길이 제때에 와닿는것이였다.

한상운은 아들이 평양연극영화대학 학생이 되자 더는 혜택을 베풀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학습정형을 자주 료해하고 결함이 나타나면 엄하게 추궁하였으며 밤을 패며 쓴 원고를 가지고 오면 외과의사마냥 사정없이 칼질하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강한 요구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어느날 그가 아버지를 만나려 영화문학창작사에 갔는데 한 젊은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창작사에서 한상운의 초고는 신진작가들의 최대관심사다.

작가들은 승벽을 부리며 그의 원고를 빌려다 읽었다.

한상운은 엊그제 들어온 작가라고 해도 작품의견을 귀담아들었고 허심하게 수정하였다.

그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요구성이 대단히 높았다.

영화문학창작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아닌 노래가 나돌았다.

《좋다좋다 김승구, 아니아니 한상운…》

예술영화 《내 고향》의 영화문학을 쓴 김승구는 병아리를 끼고 도는 어미닭과 같은 작가였다. 그는 신인들의 원고를 넘길 때마다 그들이 실망해할가봐 《좋구만. …좋아.》라고 하면서 듣기 좋게 의견을 주었다.

반면에 한상운은 엄한 교원과도 같았다.

그는 원고를 깐깐히 번지면서 《아닌데, 아닌데…》라고 도리머리를 젓군 하였다. 그리고는 작품의 결함에 대하여 가차없이 지적하였다.

만일 상대방이 자기의 눈빛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면 더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문학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작가가 못된다는것이였다.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 원고는 틀림없이 성공작으로 되군 하였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속에서 《한상운선생의 방에 들어가면 명작이 나온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

아들은 집에서나 밖에서나 문학앞에서 그렇듯 성실하고 가식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하여 존경심을 품게 되였다.

어느 일요일이였다.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어느 한 TV련속소설을 론의하였다.

아들은 소설이 아주 잘되였다고 말하였다.

《어째서?》

아버지의 물음이였다.

아들은 특히 마지막장면에서 탐사대 중대장이 자기가 아니라 인민들의 건강을 위해 파악없는 물을 그냥 마셨다는 내용이 무척 감동적이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뒤집기수법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한상운의 눈살이 찌프려졌다.

《일민이, 너 그 수준이야?》

아들도 지지 않았다.

《왜 그럽니까? 난 뒤집기수법이 좋다고 봅니다.》

그때 한상운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알수 없다. 혹시 수십여년전 개성의 고대광실에서 자주 벌어지군 하던 부자간의 말다툼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물론 그때의 말다툼과 지금의 의견대립은 성격이 전혀 다른것이였다.

그는 엄한 어조로 못박았다.

《넌 공부를 더해야겠다.》

그런 다음 TV소설을 다시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깔끔한 녀의사는 지성이 높은 처녀이다. 그런 처녀가 탐사대 중대장을 사랑할리 만무하다. 차라리 청년이 처음부터 물을 마시는 목적을 털어놓았더라면 녀의사는 오해하지 않고 오히려 총각을 힘껏 도와주었을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의 론리이고 성격의 론리이다. 그런데 소설은 이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꾸몄다. 문학은 우선 진실해야 한다. …

한일민은 그날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날 난 어째서 아버지가 쓴 작품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잘 알게 되였습니다. <갈매기호청년들>, <초행길>, <전선길>이 그러합니다.

그때 난 꼭 아버지 같은 훌륭한 작가가 되여 삶의 참된 자욱을 찍어가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2-21 17:33:22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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