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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4.영화배우 황영일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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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2-12 10:0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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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4.영화배우 황영일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4.영화배우 황영일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 1919년 5월 20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출생.

∙ 1939년 중국 할빈과 서울의 여러 극단 연극배우로 활동.

∙ 1945년 8. 15이후 서울예술극장 연극배우로 활동.

∙ 1950년 조선인민군에 입대.

∙ 1953년 국립연극극장(당시) 연극배우로 활동.

∙ 1955년 교통성예술극장(당시) 단장으로 사업.

∙ 1966년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 영화배우로 활동.

∙ 1989년 3월 6일 사망.

∙ 인민배우.

 

영화배우 황영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혁명연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각색한 예술영화《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나오는 조선침략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하여 갖은 위협과 협잡, 회유기만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한 이등박문의 가증스러운 몰골을 보면서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한다.

배우의 연기가 진실할수록 관객들은 영화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며 그 과정에 나름대로 작중인물을 사랑하거나 혹은 증오하기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어른들도 간혹 길가에서 황영일을 만나면 마치 그가 진짜 이등박문인듯이 랭대하군 하였다.

그때마다 황영일은 그들의 분노가 당연한듯 고개를 수굿하고 걸어가군 하였다.

인민배우 황영일!

사람들은 그가 연기를 진실하고 특색있게 한다고 감탄하였지만 50이 넘은 나이에 참다운 연기형상창조의 첫걸음을 떼였으며 인생말년에 창조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때 영화계를 떠나려고 하였던 황영일을 자랑스러운 영화예술인대오에 세워주시고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키워주신 위대한 사랑의 전설을 세상에 전하려고 한다.

 


 

노력과 열매

 

황영일은 팔짱을 끼고 과일나무에서 무르익은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였다.

풍요로운 가을날 느슨한 웃음을 지은채 봄내 여름내 땀을 철철 흘리며 가꾼 나무에서 빨갛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는 성실한 인간이였다.

《열매란 제손으로 가꾸고 따야 더 달고 맛있는 법이다.》

이것은 수십년동안의 영화배우생활을 해온 그의 좌우명이다.

관객들은 그가 창조한 진실하고 개성적인 연기를 안받침하는 세련된 화술과 역인물형상에 대한 풍부한 체험, 깊은 탐구와 피타는 노력의 대가라는것을 다는 알지 못한다.

1970년대말의 어느 여름날이였다.

그날 저녁 황영일은 갑자기 안해를 찾았다.

《여보, 좀 오우.》

《왜 그러시우?》

맏며느리와 함께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고있던 그의 안해 차천명은 남편이 침실겸 연기훈련실로 쓰고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아, 빨리 오라는데.》

원래 성미가 느긋하고 침착한 남편이 재촉하는것을 보면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였다.

영문을 몰라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안해는 깜짝 놀랐다.

그처럼 인정많던 남편이 무섭게 노려보고있었던것이다.

안해는 자신도 영화배우이니만치 웬간한 연기훈련에 습관되였지만 오늘은 여느때와 달랐다.

흡사 병아리를 덮치는 독수리같은 표정을 보니 지금껏 동거동락해온 부부간의 정이 싹 떨어지는것 같았다.

안해는 저도 모르게 뒤걸음쳤다.

다음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납던 남편의 표정이 스르르 무너지더니 교활한 인상으로 바뀌는것이 아닌가.

도대체 영문을 알수 없었다.

《내 지금 이등박문놈이 <을사5조약>을 날조하는 장면을 련습하는중이요.》

남편의 말에 안해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연기가 중하다고 해도 너무한것 같았다.

하기야 오직 영화밖에 모르는 남편이였다.

며칠전 남편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경대를 세개나 사왔다.

안해는 집살림에 전혀 낯을 돌리지 않던 남편이 오랜만에 며느리를 생각해서 거울을 사왔다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거울들을 모두 제 방으로 들여가더니 세벽을 따라 주런이 세워놓는것이였다.

무엇때문에 그러는가고 묻자 남편의 대답이 걸작이였다.

《연기를 립체적으로 비쳐보자는거요.》

필경 오늘 자기를 놀래웠던 이등박문의 연기도 그 보배거울의 덕일것이다. …

남편이 또다시 찾았다.

《차꽃분동무!》

본시 얌전하고 마음착한 안해는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차꽃분》이로 통하고있었다.

《…》

《뭘 그러오, 차꽃분동무!》

안해는 한숨을 조용히 내그었다.

아무래도 난 속대가 약한 녀자다. 방금전까지 앵돌아졌댔는데 그 한마디 부름말에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다니…

남편은 애원하다싶이 부탁하였다.

《한번만 더 봐주오. 래일 촬영을 해야 하오.》

촬영!

그 말은 거짓말처럼 신비한 효력을 나타냈다.

얼굴이 밝아진 차꽃분은 구석에 놓인 걸상을 끄당겨놓고 앉았다.

《그럼 어디 해보시라구요.》

그리하여 부부간에 이등박문의 연기형상을 두고 훈련이 벌어졌다.

저녁식사가 늦어져 걱정하던 맏며느리 원숙은 연기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버린 그들을 보자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웃었다.

그날 황영일의 집창가에서는 동녘하늘이 훤히 밝을 때까지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

그로부터 며칠후 황영일의 개화장이 갑자기 없어졌다.

그 개화장은 그가 이등박문의 걸음새를 형상하기 위해 일부러 구해온것이였다.

황영일은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개화장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동료들은 이때라고 여겼는지 개화장없이 이등박문의 걸음새를 연기해보라고 하였다.

황영일은 안된다고 뻗치였으나 그냥 성화를 먹이자 마지못해 응하였다.

그런데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 그러는지 이등박문의 거드름스럽던 걸음새는 사라지고 촌늙은이의 걸음새가 나타났다.

황영일은 제법 한탄조로 토설하였다.

《개화장이 없으니 안되겠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개화장이 불쑥 나타났다.

황영일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씩 웃으며 개화장을 받아들었다.

비로소 그에게 속았다는것을 안 동료들은 이번에는 진짜 연기를 해보라고 성화먹였다.

그러자 황영일은 보란듯이 개화장에 몸을 싣고 거드름스럽게 걷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걸음새에 조선사람들을 깔보는 이등박문의 오만하고 포악한 기질이 방불하게 재현되였던것이다.

그야말로 작중인물의 성격을 잘 살린 연기였다.

그의 피타는 노력에 대하여 인민배우 신명욱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촬영할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짬만 있으면 황영일동지가 거울앞에 마주 앉아 여러가지 표정을 바꾸어가면서 련습하는것을 자주 보군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인물에 맞는 독특한 화술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의 고유한 우렁우렁한 남성적인 목소리를 거센 목소리로 바꾸어가면서 훈련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황영일동지, 그만하면 연기형상이 완성된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지 않습니까.> 하고 만류하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군님께서 자기의 미숙한 분장형상까지 완성시켜주시면서 력사인물창조에서는 자그마한 세부형상까지도 그 시대의 전모가 비낄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는데 그 뜻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밤낮이 따로없는 련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렇듯 황영일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탁월한 지도와 그이께서 보내주신 력사자료, 사진자료에 기초하여 과학적인 형상방도를 세우고 포악한 기질과 위협공갈, 사기협잡과 회유기만으로 꽉 차있는 교활한 이등박문의 량면적인 성격을 잘 살릴수 있었습니다.》

황영일이 이등박문의 연기형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기울인 노력을 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중에서 오늘도 전해지고있는 한가지 일화만은 소개하려고 한다.

하루는 황영일의 집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가장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것이였다.

안해와 자식들이 떨쳐나섰으나 종적을 찾을길 없었다.

그 시각 황영일은 중앙동물원정문에 서있었다.

《이보시우, 오늘이 휴식일이라구 몇번이나 말해야 알겠소?》

돋보기를 낀 늙수그레한 경비원은 자기앞에 서있는 남자가 영화배우인줄은 모르고있었다.

이런 때 다른 영화배우 같으면 어떻게 처신했을가?

모름지기 《전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에서 구장역을 한 배우입니다.》하고 점잖게 튕겨주었을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황영일은 자기가 영화배우라는것을 나타내기 싫어하였다.

길거리를 갈 때에는 고개를 수굿하고 걸었고 뻐스에 오르면 창밖을 덤덤히 내다보군 하였다.

그 고지식한 성미때문에 그는 한시간째 중앙동물원앞에 서있는것이였다.

끝내 경비원이 손을 들고말았다.

《손님, 대체 뭘 보려고 그러우?》

그제야 빗장을 지른것 같던 황영일의 두툼한 입술이 벙싯 열렸다.

《거부기를 보자고 그럽니다.》

《거부기라구요?》

경비원은 어이없어하였다.

한시간나마 기다린 손님의 관심대상이 고작 거부기라고 하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처녀가 옆으로 지나가고있었다.

《성애야, 글쎄 이 손님이 널 찾아왔다누나.》

희고 갸름한 얼굴의 처녀가 의문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절 찾아오셨나요?》

경비원이 얼른 시정했다.

《아니, 실은 네 거부기를 보려고 왔단다.》

《어쩌나!》

처녀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전 어디 급히 가는 길인데요.》

여기까지 말하던 처녀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졌다.

《아이,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에서 구장역을 한…》

그제서야 황영일을 알아본 경비원은 몹시 미안해하였다.

《어이구, 내가 눈이 어두워 영화배우도 몰라봤군요.》

황영일은 오히려 제편에서 사과하였다.

《아닙니다. 제 사정만 생각하면서… 미안합니다.》

얼마후 적괴수의 성격탐구를 위해 찾아왔다는것을 안 사양공처녀는 영화배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시자요. … 걱정마세요. 거긴 다른 동무를 보내겠어요.》

이렇게 되여 황영일은 중앙동물원 거부기사에 들어갔다.

그는 처녀의 설명을 들으며 거부기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처녀동무, 저놈이 혹시 죽은게 아니요?》

처녀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참, 죽다니요.》

처녀는 거부기등을 손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래도 그놈은 움쩍하지 않았다.

《어마나, 이 엉큼한 놈 봐.》

처녀는 먹이통에 담겨있던 달팽이를 거부기앞에 살그머니 놓아주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듯이 잠잠하던 거부기란 놈은 갑속에 틀어박았던 목을 길게 뽑더니 어느 틈에 먹이감을 덮쳤던것이다.

처녀는 다른 달팽이를 일부러 거부기와 떨어진 구석에 놓아주었다.

거부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먹이감으로 다가갔다.

위험을 깨달은 달팽이는 조가비속에 만문한 살을 깊숙이 파묻었다.

거부기는 긴 대가리로 먹이감을 슬슬 뒤집다가 약한 곳을 발견하자 여유있는 동작으로 닁큼 삼켜버렸다.

정말 흉칙한 놈이였다.

《처녀동무, 가만!》

좀해서 덤비지 않는 황영일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다시 보기요.》

처녀는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먹이감을 주었다.

역시 거부기는 한번 마음먹으면 수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먹이감을 삼키는 《흉물스럽고 포악한》 동물이였다.

황영일의 입가에 만족한 웃음발이 어리였다.

드디여 적장의 음흉하고 포악한 성격을 찾은것이다.

집에 돌아온 황영일은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앞을 지나 곧추 《연기련습실》로 들어가더니 보배거울앞에서 연기훈련을 시작하였다. …

황영일은 자기가 가꾸는 과일나무가운데 혹시 작은 열매가 달려있다고 해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키우는 성실한 인간이였다.

1971년 2월에 평양대극장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밑에 주체적문예사상연구모임이 진행되였다.

그날 황영일은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창조경험을 두고 토론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단역을 홀시하지 말데 대하여 주장하였다.

장군님께서는 배우동무가 단역을 홀시하지 말데 대한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고, 앞으로 창작가, 예술인들이 단역을 홀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현상에 대해서는 제때에 강한 투쟁을 벌려야 하겠다고 하시며 그의 의견을 적극 지지해주시였다.

장군님의 말씀에서 큰 힘을 얻은 황영일은 설사 단역이라고 해도 책임적으로 형상하였고 사소한 세부나 대사도 놓치지 않았다.

그에 대하여 공훈배우 김찬민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제가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를 촬영할 때 체험한 사실입니다.

그때 황영일동지는 구장역을 맡아하였습니다.

영화에는 구장이 주인공 광진이가 유격대공작원이라는것을 알고 놀라서 일제경찰에 신고하려다가 귀뺨맞는 장면이 있습니다.

원래 영화문학에는 이 대목에서 <유격대원을 숨겨두었다가 온 마을이 참상을 당하게 할수 없지 않는가?> 하고 제 심정을 토로하며 두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것으로 되여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영일동지는 오히려 주먹을 높이 들었다가 맥없이 가슴을 두드리는것으로 형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제딴에는 마을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원쑤 일제와 맞서싸울 대신 오히려 예속과 굴종의 울타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인물의 성격이 실감있게 살아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린 촬영이 끝난 후 그에게 어떻게 그처럼 기발한 형상을 창조할수 있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황영일동지는 단역이라도 주역처럼 생각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면 진실한 연기가 나올수 있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영화문학작가를 찾아갔다.

황영일은 밤깊도록 연구한 연출대본을 펼쳐보이며 여기에서는 대사가 이렇게 되여야 역인물의 성격을 살릴수 있다고 제기하였다.

작가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대본대로 하라는 요구였다.

다른 배우 같으면 중뿔나게 나섰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을것이다.

그러나 황영일은 물러서지 않고 작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밤깊도록 작가와 론쟁하였는데 상대방을 설복한것은 물론이고 그집 안주인이 성의껏 차려준 저녁식사까지 대접받고 기분이 좋아서 돌아왔다.

다음날 그 대사를 들은 창작가들은 정말 잘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평하였다.

 

 

소원과 계승

 

관록있는 인민배우로 자라난 황영일이였지만 가슴속에 늘 한가지 걱정을 안고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어 영화배우로 될 자식이 없는것이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버지처럼 좋은 목청과 영화배우적인 소질을 타고나지 못하였던것이다.

황영일은 맏아들 황승룡한테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가 기록영화촬영소 조명사로 방향전환을 하는 바람에 고배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적지 않은 로배우들은 자기의 대를 잇는다면서 자식들을 무작정 대학에 보내려고 하였었다.

황영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인 재능이 없으면 배우가 될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니만치 배우적소질이 없는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것은 작게는 자신을 속이고 크게는 나라와 인민을 속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랬으나 가슴속에 앙금처럼 자리잡고있는 욕망은 털어버릴수 없었다.

어느 일요일 화목한 분위기가 흐르던 그의 가정에서 때아닌 우뢰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재단사라구? … 안된다!》

사연인즉 맏아들이 재단사처녀와 선을 보았는데 황영일은 배우가 아닌 며느리는 못들어온다고 으름장을 놓았던것이다.

사실 황영일은 며느리감에게 마지막기대를 걸고있었다.

그동안 맏아들은 녀배우들과 여러번 선을 보았지만 가장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문에 은근히 속을 쓰는 판에 생뚱같은 재단사말이 나오자 화가 난것이였다.

그후 맏아들이 끝내 재단사처녀와 결혼하게 되였다는 사실을 안 황영일은 며칠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며느리 원숙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하였다.

어느 겨울날 황영일은 저녁늦게까지 콩나물콩을 고르고있는 며느리를 보았다.

처음은 그런가부다 했는데 밤늦게까지 연기훈련을 하다가 전실에 나와보니 나무받침대를 건너댄 큰 물그릇우에 콩나물시루가 얌전히 올라앉아있었다.

뒤에서 안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며늘애가 당신의 당뇨병치료에 콩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정집에 가서 얻어왔다지 않아요.》

황영일은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

며느리는 콩나물기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먼저 손을 깨끗이 씻고 콩나물에 물을 주었고 한겨울에 온도를 보장하기 위해 시집올 때 가져온 새 담요를 콩나물시루우에 덮어놓았다.

황영일은 안해에게 며느리가 콩나물에 물을 줄 때 왜 매번 손을 씻는가고 물었다.

안해는 웃으면서 콩나물에 기름기가 들어가 썩을가봐 그런다고 알려주는것이였다.

황영일은 며느리를 대하기가 좀 거북해졌다.

하루는 한밤중에 아들, 며느리가 자는 방에서 따르릉-하는 탁상시계종소리가 났다.

이윽고 전실에서 나직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해서 슬며시 문을 열어보니 며느리가 콩나물시루에 정성껏 물을 주고있었다.

저도 모르게 코마루가 시큰해왔다.

자기가 그렇게 푸대접을 했지만 며느리는 시아버지병을 고쳐주겠다고 저렇듯 극성이 아닌가.

(내가 너무했어.)

그날부터 황영일의 태도는 느긋해졌다.

몇달후 그는 보기에도 시큼한 살구를 한줌이나 따가지고 왔다.

안해는 무뚝뚝하던 령감이 이제야 로친 귀한줄 안다고 하면서 살구 한알을 깨물었다.

그때 남편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그게 뭐 당신 먹으라고 가져온건줄 알아?》

《아니 그럼? …》

《며느리가 입쓰리하는것 같애서 가져왔단 말이요.》

안해는 질투가 나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해서 두눈을 크게 떴다.

《여보, 어떻게 된 일이요?》

황영일은 시치미를 뚝 따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며늘애가 총각애든 처녀애든 뭘 낳겠지?》

《그야 그렇지요.》

《난 말이요. 그애를 잘 키워서 배우로 만들 생각이요.》

안해는 혀를 찼다.

《그러니 당신 아직두 그 꿈을 버리지 않았구려.》

《아무렴, 내 그래서 미리 지원을 하는거요. 허허허.》

그때 마침 며느리가 퇴근해오자 황영일은 《으험!》 하고 헛기침을 깇고는 제 방으로 건너갔다.

그후 며느리는 귀여운 옥동녀를 낳았다.

손녀를 품에 안은 황영일은 자기의 뒤를 이을 예쁜 녀배우가 태여났다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럴수록 그는 며느리를 더 귀해하고 아껴주었다. …

아마 황영일만큼 배우직업을 사랑한 사람도 흔치 않을것이다.

언제인가 의사가 황영일에게 담배를 끊지 않으면 목청이 변할수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때 그의 화술은 류창하고 세련되기로 소문났었다.

그 좋은 목청이 변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정말 담배를 끊을수 있수?》

담배질군인 남편을 잘 알고있는 안해의 걱정이였다.

황영일은 담배를 끊기 아쉬운듯 한동안 있다가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끊겠소.》

실지 그는 담배를 끊었는데 그 방법이 아주 독특하였다.

황영일은 안해에게 부탁하여 코트의 한쪽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른쪽 주머니에는 닦은 콩 한줌을 넣었다.

혼자서 있을 때는 그럭저럭 참을수 있었는데 곁에서 담배를 피우면 참기가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한쪽주머니속의 담배가치를 만지다가 손에 배인 담배냄새를 한참동안 맡고는 또 다른쪽 주머니의 닦은 콩을 꺼내 입에 넣군 하였다.

저녁에 안해가 남편의 코트주머니를 뒤지면 닦은 콩은 없고 얼마나 만졌는지 범벅투성이가 된 담배가 나타나군 하였다.

안해는 콩을 먹으니 당뇨병치료를 해서 좋고 또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목청이 변하지 않아 좋다고, 그야말로 일거량득이라면서 좋아하였다.

후날 맏아들이 어떻게 담배를 끊었는가고 묻자 황영일은 이렇게 말하였다.

《담배를 피우면 목청이 상한다. 아무리 담배가 좋다고 해도 영화하구야 못 바꾸지. 으험!》

어떤 사람들은 황영일이 오직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알고보면 그는 인정도 많은 사람이였다.

그것은 그가 자기처럼 공화국으로 들어온 예술인들의 생활을 성의껏 도와준 사실이 말해주고있다.

1950년대 중구역 경림동에 있는 황영일의 집에서 영화배우 유경애가족과 남궁련가족이 여러해동안 동거살림을 한적이 있었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이여서 부득이 취한 조치였는데 그들을 대하는 황영일의 태도가 재미났다.

자식들을 셋이나 키우면서도 언제 한번 쌀걱정을 해본적없는 그가 웃방에 있는 유경애가족의 쌀걱정을 했고 겨울이 오자 안해가 꾸민 새 이불을 한번도 덮지 않고 그대로 가져다주었던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커만 가는 행복속에서도 황영일은 남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연극을 하고싶어도 마음대로 할수 없었고 오히려 감옥에 끌려가 지긋지긋한 고문을 당하던 지난날에 대하여 이야기하군 하였다.

《래일이라도 조국이 통일되면 얼마나 좋겠니? 내 그럼 서울에 나가서 <다들 보시오. 이 황영일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장군님의 품속에서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랐소!>하고 큰소리를 칠테다.》

그러면서 그는 남조선에서 미처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채 원쑤들에게 학살당한 두 자식이 지금 살아있다면 자기의 뒤를 이어 훌륭한 영화배우가 되였을것이라고 아쉬워하였다.

그렇게 인생말년을 보람차고 행복하게 보내던 황영일은 온 나라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준비로 들끓고있던무렵 불치의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였다.

마지막순간이 닥쳐왔다는것을 안 황영일은 손시늉으로 일으켜달라고 하였다.

안해와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난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를 하염없이 우러렀다.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운명이란 무정하구나.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덕에 보답하자고 했는데…)

눈앞으로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자습으로 중학교과정을 독파하던 일, 한진섭을 비롯한 연극인들과 함께 극단을 설립하던 일, 해방후 남조선에서 새 조선의 연극을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이 해방되자 안해와 함께 인민군대군복을 입고 연극활동을 벌려가던 나날들…

그가운데서도 제일 잊혀지지 않는것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영화예술인대오에서 떨어져나갈번 하였던 자기를 품에 안아주시고 온 나라가 다 아는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키워주시던 감격의 나날이였다.

자신이 걸어온 70평생이 결코 짧다고는 생각지 않은 그였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생이 살같이 흘러간것처럼 여겨졌다.

분했다. 그리고 죄스러웠다.

최후의 힘을 모은 황영일은 《위대한 장군님!》라고 목메여 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위인의 손길아래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나 인민의 사랑을 받던 인민배우 황영일은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못내 애석해하시며 장례를 기관장으로 하고 신문들에 부고를 내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생전에는 걸음걸음 손잡아주시고 사망한 후에는 영생하는 삶을 누리도록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의리의 세계앞에 유가족과 친지들은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

행복한 땅에서는 훌륭한 계승이 이어지기마련이다.

고인이 그처럼 소원하던 배우가정의 대를 이은것은 그의 맏손녀 황련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한 그가 연극예술인대오에 설수 있도록 하여주시였던것이다.

뿐만아니라 2010년 4월 26일과 5월 8일 국립연극단에서 창조한 경희극 《산울림》을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덕실역을 맡아한 동무가 그전에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 배우였던 황영일동무의 손녀라는데 연기를 생동하게 잘한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그는 어떻게 할아버지의 대를 잇게 되였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 어릴때부터 할아버지한테서 배우이야기를 옛말처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크면 꼭 배우가 되여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제가 할아버지의 대를 이을수 있도록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하여주시였고 졸업후에는 국립연극단에서 마음껏 재능을 꽃피우도록 해주시였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어제날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드린 인민배우 황영일의 손녀답게 제가 훌륭한 연극배우로 성장하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시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신 은인은 위대한 장군님과 경애하는 원수님이십니다.》

오늘도 그는 위대한 장군님을 높은 연기실력으로 받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애하는 원수님을 연극예술로 받들 일념을 안고 불타는 창조의 낮과 밤을 보내고있다.

인민배우 황영일!

그는 위대한 스승의 슬하에서 창조의 최전성기를 빛내인 행복한 영화예술인이였다.

조국과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인민배우 황영일의 한생은 우리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예술영화들에 새겨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36호의 보고》, 《보이지 않는 요새》, 《검사는 말한다》 등에서의 인상깊은 장면들과 더불어 영화예술의 화폭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2-12 10:09:1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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